인천에 사시는 블친님 부부께서 부산에 오신다기에 내가 안내해 드린다니 좋다하시며 아침7시반에
노포동 전철역으로 오시겠다 하여 아침일찍 집에서 출발 전철역에서 조우 경주로 향한다
경주는 중학교 수학여행 하고는 지금까지 못 가셨다기에 먼저 석굴암부터 안내를 한다
석굴암 내부는 사진 촬영이 금지돼 석굴암 주변의 짙게 물들은 단풍이 화려해서 한컷 담고
동해바다를 바라보며 담았으나 멀어서인지 바다는 보이지를 않는다
사도요한님과 기념사진도 한장 남기고
석굴암에 대한 기초적 이해
경주의 토함산 동쪽 정상에 자리하고 있는 석굴암은 불국사와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될 만큼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스러운 우리 문화의 보고이다. 불교건축과 조형미의 극치를 보여주는 석굴암은 불교와 관련된 사상, 예술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적 측면에서 훨씬 더 종합적으로 검토되어야 할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석굴암의 조성은 단순히 불교적인 측면에서만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도 없고, 한 개인이 효성이나 발원에
의하여 이루진 것으로 보기도 어려운 점이 있기 때문이다. 석굴암이 종교적인 측면이나 개인적인 측면 보다 더 광범위한
폭과 넓이를 가지고 만들어진 것이라면 여기에는 조성 당시 우리 민족이 갖고 있었던 사회.문화적, 정치.경제적 상황
등과 기타의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녹아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석굴암에 대한 지금까지의 일반적 견해는 다음의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석굴암의 조성자와 조성동기 등에 대해서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상세한 것으로 보이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그대로 적용하여
김대성이 효성에 의해서 발원하여 조성한 것으로 보았고, 사회적 측면에서는 동쪽을 방어하며 나라를 지키려는 호국의
차원에서 그 의미를 찾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였다.
그리고 정치.문화적 측면에서는 석굴암 조성 시대가 사회.문화적 상황으로 볼 때 신라문화의 전성기였던 경덕왕 대였기
때문에 석굴암이나 불국사 같은 최고 수준의 예술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다는 쪽으로 초점을 맞추어서 이해하고 있다.
또한 종교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이 불교조형예술과 불교미술 등의 입장에서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하며, 불국토 건설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석굴암을 이해하는 지금까지의 견해들을 종합해보면 한결같이 작게는 김대성이라는 인물의 개인적인 발원과 효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고, 크게는 국가적 차원의 호국과 불교라는 측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개인적인 발원과 효도는 효자설화의 증거물로서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리고 국가적 차원이라는 사회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 석굴암은 호국이라는 거대한 상징이라는 의미를 가지게 됨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석굴암은 2대에 걸쳐서 부모를 봉양한 김대성이란 인물의 개인적인 효심과 나라를 안전하게
보호하겠다는 호국정신을 담고 있는 문화예술로서 창조한 셈이 된다. 그러므로 석굴암은 효심과 호국이 하나로 되어
많은 사람들의 예술적 감동을 자아내었던 문화유적으로 보아 틀림이 없다.
최봉현님 글에서
석굴암을 돌아보고 불국사로 향한다
관음송
나이는 93세(2011년 현재)
반송으로 한국이 원산이며 처음은 현 위치에서 서남쪽 500m 아래쪽에 심어졌던 것을
1987년 봄에 이곳으로 이식 많은 관광객으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는 불국사의 중요 조경수임
불국사 앞에 있는 작은 호수
경주 토함산에 자리하고 있는 불국사는 신라인의 불교신앙과 호국정신, 건축이념이 총망라되어 있는 신라불교문화의
결정체다. 신라 법흥왕 22년(535)에 창건되었으나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경덕왕 때 재상 김대성이 대규모 중창을 한
이후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불국사 창건시기에 대해서는 문헌마다 서로 다르게 기록돼 있어 정확한 연대를 알기 어렵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경덕왕 10년(751) 김대성이 불국사를 창건하였다고 나와있으며, '불국사고금창기'에 의하면 법흥황
15년(528)에 지어졌고 문무왕 10년(670)에 지은 무설전에서 의상의 제자인 표훈이 머물렀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다만 총 2천여칸에 이르는 60여동의 크고 작은 건물들로 이루어졌다는 기록을 통해 신라 최대의 가람인 불국사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불국사는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전부 소실되어 일부 석조물과 동불만이 남아 있었으나,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국보 7점을 간직한 대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불국사는 1969년 발굴조사 뒤 없어졌던 무설전,
관음전, 비로전, 경루, 회랑 등이 1973년의 대대적인 보수공사로 복원되었다. 현재 경내는 크게 세 영역으로 나뉘는데,
불교적 해석에 따르면 각 영역이 하나의 이상적인 피안세계인 불국을 형상화하고 있다. 석가모니불의 세계를 의미하는
대웅전, 아미타불의 서방 극락정토를 의미하는 극락전, 비로자나불의 세계를 의미하는 비로전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불국사에서 산등성이를 타고 약 3km(포장도로 석굴로는 9km) 올라가면 신라불교예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석굴암이 자리하고
있다. 불국사와 석굴암은 1995. 12. 6 해인사 팔만대장경 판고, 종묘와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공식지정되어 우리나라
문화유산의 우수성과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찬란한 신라문화의 근간이자 민족예술의 정화(精華)라고
하는 불국사(佛國寺)는 토함산 중턱에 위치하며, 535년(신라 법흥왕 22)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여 창건되었다고 한다.
경내 대웅전 앞의 쌍탑(雙塔) 중 동쪽의 다보탑(多寶塔)은 높이 10.4 m의 석탑으로, 석조(石造)이면서도 마치 목조인 듯
자유자재의 기법을 한껏 발휘한, 완벽한 아름다움을 지닌 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서쪽에 마주 서 있는 3층석탑이
석가탑(釋迦塔)으로 높이 8.2 m이며, 기단과 탑신(塔身)에 아무런 조각도 없으나, 전체의 조화가 아름답고 안정감이 있어 신라
중기의 걸작으로 꼽힌다. 역시, 불국사 경내에 있는 청운교(靑雲橋) ·백운교(白雲橋) ·연화교(蓮華橋) ·칠보교(七寶橋) 등도
각각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불국사는 부처님이 화임장엄세계인 불국토를 현세의 사바세계에 화현시킨 완성체이다
사도요한 님 부부
다보탑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석탑으로 전형적인 신라 석탑 양식과는 매우 다른 이형 석탑이다. 불국사 대웅전과 자하문
사이의 뜰 동서쪽에 2개 탑이 마주 보고 서 있는데, 그 중 동쪽 탑이다. 기단부·탑신부·상륜부로 이루어져 있다.
하층기단의 4면에는 계단이 있고 양쪽에 난간의 석주로 보이는 유구가 서 있다. 상층기단에는 4개의 우주와 중앙에
탱주가 서 있으며, 우주 위에는 2단의 두공이 십자모양으로 놓여 있고 그 위에 갑석을 올려놓았다. 갑석 위에는 8각형의
신부가 3단 있는데 하단은 4각형의 난간 속에 별석을 돌렸고, 중단은 8각 난간 속에 죽절형의 기둥을 세우고,
상단은 8각 앙련 위에 꽃술형 기둥 8개가 8각의 신부를 돌려싸고 있다 다음백과에서
대웅전
정면 5칸, 측면 5칸의 다포계(多包系)의 겹처마 팔작지붕건물. 통일신라시대에 쌓은 기단은 지대석(地臺石)·면석(面石)·갑석(甲石) 등을
고루 갖춘 것으로 4면의 중앙에 계단 1개씩을 두고 다듬은 주춧돌을 놓았다.
내부는 안두리기둥[內陣柱]과 바깥두리기둥[外陣柱]을 세웠으며, 안두리기둥은 모두 고주(高柱)로 하고 뒷면 고주 사이에
후불벽(後佛壁)을 설치하였으며, 이 앞에 불단(佛壇)을 마련하고 불상을 모셔놓았다.
기둥은 단면을 원형으로 만들고 민흘림으로 처리하였으며, 바깥두리기둥의 윗몸에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두르고 바깥쪽은
3출목(三出目) 7포작(七包作), 안쪽은 4출목 9포작의 다포계 공포(栱包)를 짜올렸다. 중앙 어간(御間 : 중앙간) 기둥머리에는 용머리를
돌출시켜놓았다.
또 첨차의 쇠서[牛舌] 위는 연꽃봉오리와 봉황머리를 조각하여 화려한 장식으로 꾸미고 있는데, 이는 조선 후기 불전건축에서
일반화되어 있는 특징이다. 건물 내부는 바닥에 마루를 깔고, 천장은 우물반자로 마감하였으며, 금모루단청을 칠하였다.
한편, 이 건물은 1765년(영조 41)에 중창(重創)된 것인데, 중문(中門)인 자하문과 함께 당시 불국사의 건축을 대표하고 있다.
이 건물의 앞에는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다보탑과 석가탑이 좌우로 놓여 있고, 둘레에는 1973년에 복원된 회랑(回廊)이 둘러져
있어서부처를 모신 영역을 분명하게 구분해 놓고 있다.
2011년 12월 30일 보물 제1744호로 지정되었다. 다음백과에서
석가탑
이 탑은 신라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을 대표하는 가장 우수한 예이며,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과 상륜부가 있는데
각 부분의 체감비율이 적당하며 간결하다. 상·하 기단의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가 각각 2개씩 새겨져 있고 다른 조각은 없다.
탑신을 받치는 갑석은 4매의 돌로 되어 있는데 아래에는 부연이 있고, 윗면은 경사가 져 있으며 2단의 탑신 굄이 있다.
탑신부의 옥신석과 옥개석은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으며 옥신에는 우주가 새겨져 있을 뿐이다.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5단이며 그 위에는 2단의 옥신받침이 있다. 상륜부는 노반·복발·앙화만 남아 있었는데 1973년
실상사백장암3층석탑의 상륜부를 모방해 결실된 부분을 보충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이 탑의 특이한 점은 탑 주위에
장방석을 돌려서 형성한 탑구에 연꽃무늬를 조각한 팔방금강좌가 있는 것과 탑의 기단부를 자연석이 받치고 있는 것
등은 유례가 드문, 주목할 만한 예이다.다음백과에서
해체수리 때 2층 옥신의 사리공에서 사리함과 여러 개의 장엄구가 발견되었다.
무설전
태국 왕실이 세계 평화를 기원하는 의미로 만든 불상을 대한불교 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 무설전에 봉안했다.
이 불상은 높이 48.26㎝의 석가모니불 좌상으로 태국 왕실이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 탄신 80주년을 기념해 세계 평화를
기원하는 취지로 만든 불상 중의 하나이다. 태국 왕실은 2007년 11월 5일부터 1년여에 걸쳐 불상을 조성해 올해 1월 WFB에
가입한 세계 19개국에 기증했다. 우리나라에 기증한 불상은 주한 태국 대사관을 통해 국내로 들어왔다.
태국에서 기증한 태국 불상과 지장보살
종각 에밀래종은 박물관에 있고 모조품 종만 있다
불국사를 거처 다음은 첨성대로
첨성대 앞의 핑크뮬리
핑크뮬리의 우리 이름은 분홍쥐꼬리새로, ‘꽃 이삭이 쥐꼬리를 닮은 풀’이라는 뜻에서 이름 붙었다.
여러해살이풀로 볏과 식물이다. 안개처럼 뿌옇고 화사한 모습이 포근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국보 제31호 첨성대는 신라 시대에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천문 관측대로, 과학적이면서도 신비함이 가득한 건축물이다.
〈삼국유사〉에 선덕여왕이 첨성대를 쌓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아시아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천문대이기도 하다.
남동쪽으로 난 창을 중심으로 아래쪽은 막돌로 채워져 있고 꼭대기에는 우물 정(井)자 모양의 돌을 짜올렸다. 당시에는 첨성대
꼭대기에 천문 기구를 설치하여 천체를 관측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첨성대 주위에는 핑크뮬리 단지가 조성되어 핑크뮬리와
어우러진 첨성대를 볼 수 있으며, 밤에는 조명으로 밝혀진 야경을 볼 수 있다.
칸나
해국
꿩의비름
첨성대에서 주차난으로 여기서 주령구빵을 사고 잠시 주차를 했다
맛은 단팥빵 같은데 입에서 살살 녹습니다
계림의 감나무
교촌마을의 가족 조각상들
교동법주의 안채 건물들
최준선생댁 사랑채
정료대
정료대庭燎臺는 절이나 서원 등의 마당뜰에, 돌로 된 받침 기둥 위에 네모지거나 둥근 접시 모양으로 깎은 돌을 얹어 만든 설치물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것은 지난날 야간 집회 때에, 그 윗면에 관솔이나 장작을 얹어 놓고 불을 피워, 어둠을 밝히는 데 사용한 일종의
조명 기구다. 보통 한 개나 쌍으로 세운다. 순 우리말로는 불우리라고 한다.
이것을 가리켜 정로석庭爐石, 정로대庭爐臺라고 하는 이도 있으나 잘못이다. 정료대가 정확한 이름이다.
정료庭燎라는 말은 지난날 나라에큰 일이 있을 때에, 밤중에 입궐하는 신하를 위하여 대궐의 뜰에 피우던 화톳불을 말한다.
점심식사후 대릉원 천마총을 돌아본다
제155호 고분이었다가 1973년 무덤 안에서 자작나무껍질에 채색으로 천마를 그린 말다래(국보 제207호)가 발견되어 천마총이
되었다. 무덤의 축조 시기는 6세기경으로 추정된다.
거대한 봉토로 덮인 돌무지덧널무덤으로서 바닥지름은 47m, 높이는 12.7m에 달한다. 무덤의 축조방법은 먼저 지면을 고른 뒤
바깥둘레돌을 돌리고 그 안에 점토와 자갈을 다져쌓기해서 올린 후 여기에 덧널을 동서방향으로 설치하고 덧널 주위에 돌무지를
쌓은 뒤 봉토를 씌웠다. 덧널 내부에는 강돌과 잔자갈로 석단을 돌리고 그 위에 유물을 배열했으며 석단 내부에 널을 동서방향으로
안치했다. 석단 바깥쪽에는 널과 직교하여 남북방향으로 껴묻거리 상자를 놓았다. 마구류로 추정되는
금동판·미늘쇠·쇠낫·쇠투겁창을 비롯하여 다수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천마총에서 출토된 유물들
사적 제512호. 경주 대릉원은 본래 사적 제38호 경주노동동고분군, 사적 제39호 경주노서동고분군, 사적 제40호
경주황남동고분군, 사적 제41호 경주황오동고분군, 사적 제42호 경주인왕동고분군으로 분리되어 있었으나,
2011년 7월 28일 문화재청이 유적의 특성과 역사성을 고려하여 경주 평야 한복판에 서로 인접해 있는 신라 시대의
고분군을 통합하고 사적 제512호로 재지정하였다
대릉원이란 명칭은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 ‘미추왕(味鄒王)을 대릉(大陵: 竹長陵)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에서
따온 것이며, 신라시대의 왕, 왕비, 귀족 등의 무덤 23기가 모여 있다. 고분은 모두 평지에 자리 잡고 있는 신라시대의
독특한 무덤군이다. 그 중 서봉황대고분과 금관총은 1921년, 금령총과 식리총은 1924년, 서봉총은 1926년 일제에 의해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광복 이후 1946년호우총에 대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으며, 1953년마총, 1963년쌍상총 발굴이
이루어졌으며 1973년천마총과 황남대총 등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경주 노동동 고분군은 현재 4기(제125∼127호)가 남아 있다. 봉황대는 황남동 제98호분보다 낮으나, 봉토의 지름 82m, 높이 22m의
거대한 고분이다. 그 남쪽 15m 지점에는 1924년에 발굴한 금령총(金鈴塚)이 있고, 그 동쪽에는 같은 해에 발굴한 식리총(飾履塚)이
있으며, 그 서쪽에 노서리 고분군이 자리잡고 있다. 이 고분군은 노서리 고분군과 같이 황남리 고분군보다는 조성연대가 조금 뒤인
6세기경의 고분으로 추정된다. 구조는 모두가 전형적인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다. 돌무지 덧널 무덤은 널의 위치에 따라
지상식과 지하식, 반 지하식이 있는데 대부분 지하식으로 구덩이를 파서 덧널을 넣고 덧널 안에 나무널과 유물을 넣어 수장하였으며,
덧널 위에 돌을 쌓은 후 봉토를 덮은 구조이다. 이러한 형태의 무덤은 추가장과 도굴이 어려워 매장 당시의 유구가 잘 남아 있게 된다.
천마총을 돌아보고 감은사지로 해서 문무대왕의 수중묘 대왕암을거처 양남면 주상절리
답사후 부산으로 갈것이다
동탑과 서탑
문무왕은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고 당나라의 세력을 몰아내어 삼국통일을 완수한 뛰어난 군주(君主)이다.
이와 같이 위대한 업적을 남긴 문무왕이 재위 21년만인 681년에 승하하자, 유언에 따라 동해에 장례를 지냈다.
그의 유언은 불교법식에 따라 화장한 뒤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화장한 유골을 동해의 입구에 있는 큰 바위 위에 장사지냈으므로 이 바위를 대왕암 또는 대왕바위로 부르게 되었다.
이 능은 해변에서 가까운 바다 가운데 있는 그다지 크지 않은 자연바위이다. 남쪽으로 보다 작은 바위가 이어져 있으며,
둘레에는 썰물일 때만 보이는 작은 바위들이 간격을 두고 배치되어 있어 마치 호석처럼 보인다.
하늘은 맑고 멀리보여 수평선만 보인다 매일 이렇게 날씨가 좋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문무대왕릉의 일출(퍼온사진)
양남면 주상절리군
언덕에는 해국이 활짝피어 우리를 반겨주는 듯
마치 장작을 쌓아 놓은 듯
부채모양의 주상절리
울릉도가 보일 듯도 한데 ....
시골 읍에 저렇게 높은 아파트를 지을 필요성이 있을까
양남 읍천면 주상절리를 보고나니 벌써 해가 서쪽에 서둘러 집으로 향한다 두분 오늘 구경은 제대로
했는지 모르겠다 이곳저곳 다니며 틈틈이 담아본 사진으로 포스팅을하니 어쩐지 이가 빠진듯 초라하게 보인다
(석굴암-불국사-첨성대-계림- 교촌마을-대릉원-감은사지-문무대왕릉-읍천 주상절리)
(The House of the Rising Sun-The Animal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