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주째 연속 옆지기와의 나들이 오늘은 운문사의 처진소나무를 보러 아침일찍 집에서 나선다
역시나 빨리 서두르는게 유리한듯 고속도로도 밀리지 않고 시원스럽게 잘도 빠진다
〈사적기 寺蹟記〉에 따르면 고려시대인 937년(태조 20) 중국 당(唐)나라에서 법을 전수받고 돌아온 보양국사(寶壤國師)가
까치떼의 도움으로 이 절을 짓고 작갑사(鵲岬寺)라 했으나, 943년 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이 보양국사가 절을 세웠다는 말을
듣고 많은 전답과 함께 '운문선사'(雲門禪寺)라고 사액한 뒤부터 운문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1105년(숙종 10)에 원진국사(圓眞國師)가 중창한 이후로 많은 고승들이 배출되었으며, 조선시대인 1690년(숙종 16)
설송(雪松)이임진왜란 때 폐허화된 절을 다시 중건하여 어느 정도 옛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현재 이 절에는 조계종 운문승가대학이 설치되어 많은 비구니들의 교육과 연구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경내에는 우리나라 사찰 중 가장 규모가 큰 만세루(萬歲樓)를 비롯하여 대웅보전(보물 제835호)·미륵전·작압전(鵲鴨殿)·
금당·강당·관음전·명부전·오백나한전 등 조선시대의 많은 건물들이 남아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금당앞석등(보물 제193호)·동호(보물 제208호)·원응국사비(보물 제316호)·석조여래좌상(보물 제317호)·
사천왕석주(보물 제318호)·3층석탑(보물 제678호) 등이 있다.다음백과
운문사는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호거산에 있는 사찰로 대한 불교 조계종 제 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청도군에 속해 있으나 교통 편의상 대구와 생활권이 밀접해 있다. 서기 560년 (신라 진흥왕 21년)에 한 신승(神僧)에 의해 창건되어
원광국사, 보양국사, 원응국사 등에 의한 제8차 중창과 비구니 대학장인 명성스님의 제9차 중창불사에 의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경내에는 천연기념물 180호인 처진 소나무와 금당 앞 석등을 비롯한 보물 7점을 소장하고 있는 유서 깊은 고찰로서,
사찰 주위에는 사리암, 내원암, 북대암, 청신암, 문수선원의 5개의 암자와 울창한 소나무, 전나무 숲이 이곳의 경관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특히, 이곳은 신라 삼국통일의 원동력인 세속오계를 전한 원광국사와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 선사가 오랫동안 머물렀던 도량이다.
지금은 260여 명의 학승들이 4년간 경학을 공부하는 우리나라 최대의 비구니 교육기관이 자리한 사찰이다.
(운문산=호거산) 높이 1,188m 로 태백산맥의 가장 남쪽에 있는 운문산은 동으로 가지산·남으로 재약산, 영축산 등과 이어져 있어
산악인 사이에 영남의 알프스라 불리고 있다. 운문산은 산세가 웅장하며 나무들이 울창하여 등산객이 많이 찾는 산이다.
이곳에는 운문사를 비롯한 크고 작은 절과 암자가 있고, 주변 경관은 매우 아름답다.
청도 운문사 처진 소나무의 수령은 약 500년 정도 되었다. 나무의 높이는 6m, 가슴 높이 둘레는 2.9m,
밑동의 둘레는 3.45m이다. 가지의 길이는 동쪽이 8.4m, 서쪽이 9.2m, 남쪽이 10.3m, 북쪽이 10m이다.
나무는 굵은 줄기가 위로 솟구쳐 2미터쯤에서 여러 갈래로 갈라져 수평 방향으로 고루 가지가 뻗쳐 있다. 길게 뻗은 가지가
늘어지면서 가지의 전체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여러 개의 지지대를 세워서 보호하고 있다. 생육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가지가 축 처진 소나무로 수종은 소나무의 한 품종이다. 운문사의 처진 소나무는 낮게 옆으로 퍼지는 모습 때문에 한때
반송(盤松)[키가 작고 밑동부터 가지가 옆으로 퍼지는 소나무]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나, 2m 정도의 높이에서 가지가 사방으로
퍼지면서 밑으로 처지기 때문에 처진 소나무로 본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청도 운문사 처진 소나무를 언제 심었는지 그 유래는 명확하지 않지만 삽목 전설이 전하고 있다. 이 전설에 의하면
옛날 호거산(虎踞山) 운문사 뜰 평탄한 곳에 한 대사가 지팡이를 꽂아 소나무가 자랐다고 한다.
또 어느 스님이 절에 잠깐 머물면서 시든 소나무 가지를 땅에
꽂아 두고 생명을 불어 넣는 주문을 외워 살려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임진왜란과 6·25 전쟁 때에도 수차례 방화로 많은 건물들이 소실되는 피해를 입었으나 이 처진 소나무만은
재앙을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나무에 칡덩굴이 감겨 있어서 불길의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삽목 전설은 이곳 이외에도 용문사 은행나무,송광사의 쌍향수 등에 전해진다.
한편 운문사는 1,400년 전에 지어졌다고 하고, 임진왜란 때 청도 운문사 처진 소나무는 상당히 컸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운문사 비구니 스님들이 매년 봄·가을에 뿌리 둘레에 막걸리를 물에 타서 뿌려 주는 등 정성을 다해 가꾸고 있다.
청도 운문사 처진 소나무는 운문사 앞뜰에서 자라고 있다. 운문사 처진 소나무는 자연적으로 가지가 처지는 나무지만 이 나무처럼
아름답게 다듬어진 경우는 매우 드물고, 크기도 우리나라 처진 소나무 중에서 가장 크다. 나무의 모습이 우아하고, 줄기가 섬세하며,
짧은 솔잎은 갓 머리 감고 나온 소녀의 머릿결 같이 부드럽고 향기롭게 느껴진다. 비구니 사찰인 운문사의 분위기와도 잘 어울린다.
여름철이면 수십 명의 비구니들이 운문사 처진 소나무 아래에 둘러앉아 큰 스님의 강론을 듣는 모습이 장관이다.
1966년 8월 25일 천연기념물 제180호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나무 아래에는 천연기념물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있고, 보호를 위한
편책(編柵)도 설치되어 있다. 매년 봄이 되면 나무의 건강을 위해서 물과 막걸리를 약 216ℓ[12말]씩 타서 뿌리에 부어 주는
행사를 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이번에는 삼각대도 가지고와서 둘이서 같이 사진을 찍을 기회도 생겼다
북대암과 복호산 지룡산 능선과 암봉
대웅보전(大雄寶殿)
대웅보전은 석가모니 부처를 주존불로 모신 법당이며,
비로전은 비로나자불을 주존불로 모신 법당을 말한다.
그리고 각 절마다 중심 법당인 대웅보전은 단 하나 뿐이다.
하지만 운문사는 다른 사찰과 달리 대웅보전 현판이 걸린 건물이
두 채 있다. 조선 숙종때 지어져 보물로 지정된 대웅보전과
1994년에 새로 지은 대웅보전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보물로 지정된 대웅보전은 비로나자불을 주존불로 모신 전각으로
원래는 비로전이다. 하지만 만세루 뒤에 있던 진짜 대웅보전 건물이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비로전을 대웅보전으로 고쳐 최근까지 사용해온 것이다.
1994년에 들어서야 비로소 원래의 자리에 대웅보전이 새로 지어져
현판을 걸고, 옛 비로전에도 제 이름을 되찾아 주려고 하였다.
하지만 문화재청과 합의를 하지 못해, 결국 운문사는
사찰 형식에 맞지 않게 대웅보전이란 이름의 법당을
두 채나 갖게 되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자리에 1994년 새로 지은 대웅보전
신라시대에 세운 운문사는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쳤는데 지금의 절은 조선 숙종 44년(1718)에 있었던 네 번째 보수 때의 것이다.
대웅보전도 이때 세운 것으로 추정한다.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이며 기둥 사이의 간격을 넓게 잡아서 같은 규모의 건물보다 크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조선 후기의 일반적인 다포계
건물들과는 달리 장식으로 치우치지 않았다. 앞면에는 꽃무늬를 넣은 문을 달았는데, 특히 가운데 칸은 넓어 5짝 여닫이문을 달았다.
안쪽은 큰 기둥을 하나만 세워 넓고 탁 트인 공간을 꾸미고 있다. 천장의 가운데는 우물 정(井)자 모양의 천장으로 꾸미고
화려하게 채색해 놓았다. 건물의 짜임이 조선 중기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어 건축사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악착보살(또는 악착동자)은 피안의 세계로 가는 반야용선을 놓치지 않기 위해 그야말로 악착같이 매달려 있는 보살로
경전에 나와 있지는 않다. 반야용선에 오르지 못했지만 줄이라도 매달고 가고 싶어 하는 애처로운 중생의 모습이다.
이 보살의 이야기는 구전되어오는 설화에 따르면 ‘어느 옛날 청정하고 신앙심 깊은 이들을 서방의 극락정토로 인도해
가는 반야용선이 도착 했을 때 이 용선을 타야 할 어떤 보살이 마지막 작별인사로 그만 너무 늦게 도착하여 이미 용선이
떠나가고 있었기에 배에서 던져준 밧줄에 악착같이 매달려서 서방극락정토로 갔다고 한다.’ 하여 악착보살이라 불려진다.
응진전은 석가모니불과 16나한상을 봉안하였다. 16나한은 부처님의 제자들로 아라한과를 성취한 성인들이다.
본래 응진전은 현재 서점으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이었다.
이후 1995년 명성 주지스님이 지금의 위치에 응진전과 조영당을 신축하였다.조영당에는 원래는 수십 위의
영정을 모셨는데 일부 불에 타고 파손되어, 지금은 원광국사를 비롯한 11명의 고승과 운문사 수호에 공이
있는 손긍훈 대장군 , 김식희 대장군 영정이 봉안 되어 있다. 영정들의 제작 연대는 미상이나
1868년에 개채 중수하였다
청도 운문사(雲門寺) 만세루(萬歲樓)는 운문사(雲門寺) 경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규모가 정면7칸, 측면 4칸의
“一자형” 겹처마 팔작지붕으로서 상당히 큰 규모의 건물이다. 만세루(萬歲樓)는 1,105년(고려 숙종 10년)
원응국사(圓應國師)가 중창하였다고 전하며, 건립 시기는 최근 대웅전 해체수리 시 발견된 기와 명문과
상량문을 분석한 결과 적어도 17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증된다. 만세루(萬歲樓)는 건축적·역사적 내용이
풍부한 건물이며, 17세기를 전후한 시대적 건축 표현을 담고 있는 점, 그리고 이익공형식 무고주 7량가구의
독특한 가구수법 등을 높이 평가된다.
만세루의 용도는 옛날 북편에 있었던 대웅전을 향하여 법회나 설법시에 사용하던 건물로 면적은 200여 평이다.
범종루를 짓기 전에는 종각을 겸하여 사용하였다. 현재는 매년 열리는 어린이 여름불교학교, 졸업식 등 대외적인
행사 때만사용하고 있다. 조선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만세루의 범종은, 범종 위 용뉴 부분이 떨어져
나갔고,몸통 부분에는 보살상 2구가 새겨져 있다. 또한 상단 부분에 다라니가 범어로 새겨져 있다.
현재 이 범종은 사용하고 있지 않다.
전향각
영빈관으로 사용하는 건물
꽤나 오래된듯 한 모과나무
비로전
비로자나불
비로자나삼신불회도
운문사 보광명전에 봉안되어 있는 삼신불회도는 1755년 처일(處一)의 주도로 총 19명의 화승이 모여 제작한 불화이다.
18세기의 삼신불화는 비로자나와 석가, 노사나를 세 폭으로 나누어 그리는 3폭 형식이 유행하였지만, 이 불화는 거대한
화폭에 비로자나불과 석가모니불, 노사나불 등 삼신불을 중심으로 여러 권속들을 함께 그린 1폭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구성은 물론 1650년에 제작된 갑산 삼신불괘불탱에서 확인되지만 19세기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유행한 형식이다.
특히 보살형의 노사나불은 특유의 설법인을 취하지 않고 연꽃을 들고 있는데, 이러한 연꽃을 든 노사불의 수인은 수도사
노사나괘불탱(1704년)과 통도사 노사나괘불탱(1792년) 등 괘불화에서 확인될 뿐 후불도에서 표현된 예로는 유일하다.
이 불화는 18세기 작품 중 삼신불을 한 화면에 배치하는 드문 형식의 삼신불회도로서 안정된 화면 구성과 균형 잡힌
인물표현, 적색과 녹색이 대비를 이루는 차분한 색감 등에서 18세기 불화의 높은 격조를 잘 보여준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주불로 모시고 좌보처 미륵보살과 우보처 제화가라(과거세 석가모니 전생시에 석존에게
미래에 반드시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주심. 정광불 혹은 연등불이라 함)보살님과 둘레에는 오백나한님을
봉안하였다. 건물은 원광국사가 창건 보량국사가 2중창, 원응국사가 1105년(고려 숙종 10년) 3중창을 하고
지금의 건물은 박경호 스님이 후원 쪽에서 이전 개축하였다. 그 후 비구니 금광스님이 보수와 개체불사를 하였으며,
오백나한상 조성연대는 미상이다. 주련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我作佛事淵乎妙哉 내가 불사를 함에 깊고도 묘한지라.
空山無人水流花開 빈산에 사람 없으나 물은 흐르고 꽃은 핌이라.
前聖後聖相喩以言 전성과 후성이 모두 말로써 가르치니
口如布穀而意莫傳 말은 포곡새(뻐꾹새)와 같으나 뜻은 전하지 못함이로다.
盆華浮紅篆烟繞靑 분화는 붉음을 띄우고 향로의 연기 푸르름 스밈이라.
無問無答如意自橫 물음도 없고 답함도 없으나 뜻과 같이 자재함이라.
我以道眼爲傳法宗 나는 도안으로써 법을 전하는 宗이 되고
爾以願力爲護法龍 너는 원력으로써 법을 두호하는 용이 됨이라.
또한 오백미 공양이 있게되면 오백 개의 작은 불기에 나한님 한 분씩마다 공양미를 정성껏 올리게 된다.
공양미를 받으시는 모습이 제각기 다르다. 깨친 그 순간을 나타낸 것이라고 하는데 찬찬히 살펴보면
사뭇 재미있기까지 하다. 허공에 시선을 꽂고 있거나 빙긋이 웃거나 나이가 지긋하든 젊든 간에
모든 나한님들은 삭발하시고 가사를 수하시고 계시는데, 뒷산 절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상호도 있지만 저 멀리 서역에서 오신 듯한 나한님도 계신다. 오백전 외벽에는 선을 닦아
나아가는 우리의 본래면목을 소에 비유하고 소를 찾고 얻는 순서 등을 표시한 십우도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오백전
이 건물은 앞면 4칸 옆면 3칸의 팔장지붕 건물입니다. 오백전은 원광국사(圓光國師)가 창건
하고 보양국사(寶壤國師)가 중창 할 때부터 있었던 전각이라 합니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숙
종 10년(1105) 원응국사가 중창한 건물이 지금의 취사장 옆에 있었는데, 언제인가 허물어져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여 중건했다고 합니다.
근대에는 비구니 금광 스님이 오백전을 보수하였고, 오백나한상의 개체 불사를 하였습니다.
안에는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을 협시로 봉안하고
있으며 불단 좌우로 오백 아라한상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금당앞 석등
보물 제193호. 높이 2.58m.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8각형 석등이다. 지표에 방형 지대석(地臺石)에 붙여서
꽃잎 속에 화형이 장식된 단판8엽의 복련석(覆蓮石)이 놓이고, 위에는 뚜렷한 2단의 간석(竿石)받침이 조각되었다.
간석은 8각석주(八角石柱)로서 신라 석등의 공통된 형식이다.
상대석(上臺石)은 작아서 화사석[火舍石 : 석등의 점등하는 부분]과의 조화가 좋지 않으나 밑에는 하대석(下臺石)
복련과 같은 화형(花形)이 장식된 단판8엽의 앙련(仰蓮)이 있으며, 위에는 2단의 굄이 있다.
연판(蓮瓣)의 조각수법은 하대석의 복련보다 훨씬 우수하다. 화사석은 손상이 있지만 8각 1석이고 4개의
장방형 화창(火窓)을 개설하였다.
옥개석(屋蓋石)도 8각이며, 이면 중심에는 굄이 있고, 처마 밑은 수평이나 추녀 위에는 경미한 반전(反轉)이 있다
. 옥개석 정상에는 8엽복련이 조각되었고 그 위에 연판이 조각된 보주(寶珠) 얹혀 있다.
운문사동호
보물 제208호. 높이 55cm, 입지름 19.5cm, 몸지름 31cm. 몸체의 어깨부분에 새겨진 명문인
"咸雍三年六月日改造童海重參拾斤都監大德成念"에 따르면 1067년(문종 21)에 개조되었고 무게는 30근이었다고 한다.
그 용도는 확실하지 않으나 감로준이라는 이름이 전해지고 있어 절에서 사용했던 불구의 하나로 추측된다.
몸체는 원통형으로 뚜껑과 높은 굽이 달려 있으며 표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몸체의 좌우에는 여의두무늬 모양의
손잡이 고리가 붙어 있고 뚜껑은 중앙에 둥근 마디가 있는 기둥 위에 연판과 십자형의 화염무늬가 장식되어 있는
특이한 형태의 꼭지가 달려 있다.지나치고 못보았기에 빌려온사진임
운문사삼층석탑
보물 제678호. 높이 540cm. 원래 기단부분이 많이 손상되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일부 보수되었으며 특히 상층기단의 팔부중상에
새로운 석재가 첨가된 흔적이 남아 있다. 2기의 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이 놓여진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형식으로, 크기나 양식 면에서 거의 동일한 특징을 보여준다.
하대석은 지대석과 붙어 있는데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가 2개씩 새겨져 있고 그 위를 넓고 편평한 갑석이 덮고 있다.
상층기단에는 각 면에 우주와 1개의 탱주를 세우고 그 사이에 팔부중상을 1구씩 조각했다. 팔부중상은 손과 발을 가지런히
모은 채 앉아 있는 모습으로 그 좌우에는 천의가 날리고 있으며, 뒤에 부분적으로 보수되어 다소 어색한 느낌을 주는 상도 있다.
탑신부는 옥개석과 옥신석이 각각 1개의 돌로 되어 있는데 전체 비례로 보아 1층 옥신이 조금 높은 편이다.
옥신석에는 각 층마다 우주가 표현되어 있고,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5단이며 처마 끝이 수평으로 되어 있다. 상륜부는 두 탑
모두 사각형의 받침대 위에 노반·복발·앙화가 놓여 있다.
수도도량 출입금지
부처와 중생은 둘이될 수 없고 하나라는 불이
자비무적과
화랑동산
석정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있씀
작압전
불교 정화 이후 25년 동안 보수하고 다듬어진 운문의 도량에 옛과 현재를 이어주는 조그마한 조가비 같은 모습의
작압전은 천년의 숨결을 지니고 있다. 벼리(綱)를 듦에 그물(網)코가 모두 들려오듯 이 작압전은 1400여 년을
내려오고 있는 운문사 내력을 작압이라는 단어에 일축시켜 후인에게 말없는 증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서기 600년에 원광국사가 제1중창을 한지 303년 뒤 신라 경순왕 4년 서기 930년에 보량국사가
제2중창을 하게 된데서 오늘의 작압전이 있게 되었다.
운문사는 창건 당시는 작갑사(鵲岬寺)였다. 제2중창을 했던 보량국사가 서역과 중국에서 유학을 하고 귀국하던 중
서해에서 용왕의 청으로 경을 설하여 주고 돌아오려 하는데 용왕이 작갑사의 옛터를 찾아 절을 지으면 반드시
불법을 보호하고 삼국을 통일할 어진 임금이 나올 것입니다. 하는 말을 듣고 돌아와 작갑사의 옛터를 찾았다.
그러나 흔적이 없어 북쪽 고개에 올라가 내려와 보니 황금탑이 보이므로 내려와 살폈으나 흔적을 찾지 못해 다시
현 북대암에 올라가 살펴보니 찬란한 빛을 발한 황금탑 주의에 까치떼가 모여들며 땅을 쪼아대는 것을 보고 내려와
땅을 파보니 오래된 벽돌이 무수히 나와 작갑사의 옛터임을 확인하고 그 벽돌로 탑을 조성하니 남은 게 없었다 한다.
까치떼들의 도움으로 작갑사를 중창하게 된 보량국사는 까치떼를 기념하기 위해 까지작자(鵲)에 오리압자(鴨)를
써서 작압전을 지으니 때에 사람들이 작압사라 불렀으며 고려 태조가 운문선사(雲門禪寺)라는 사액을 내려서(937년)
이때부터 운문사라 불리웠으며 호거산을 운문산이라 하게 되었던 것이다. 작압전은 일제 때 지금의 종무소 자리에서
지금의 위치인 관음전 옆으로 옮겼으며 안에는 신라시대에 조성한 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317호)과
사천왕 석주(보물318호)가 봉안되어 있다.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운문사에 모셔져 있는 높이 0.63m의 고려시대 석조여래좌상이다. 광배(光背)와
대좌(臺座)를 모두 갖추고 있는 완전한 형태의 불상이지만, 호분이 두껍게 칠해져 세부표현이 잘 나타나지 않는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그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분명하다. 신체 비례에
비해 얼굴이 큰 편인데, 가는 눈썹·작은 눈·오똑한 코·작은 입 등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평판적인 모습이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 입고 있으며 그 안에 비스듬히 표현된 속옷이 보인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이 아래로
향하고 있고 왼손은 배꼽 부분에 놓여져 있는데, 손이 작고 표현이 섬세하지 못해 투박한 모습이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는 투박한 모양이며 가장자리에 형식적인 불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는 크게 3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매우 특이한 양식으로 주목된다. 맨 윗부분은 평면
타원형으로 14개의 연꽃잎이 새겨져 있고, 가운데는 6각형이며, 아랫부분은 긴 6각형에 18개의 연꽃잎이
표현되어 있다. 이 불상은 겉옷 안에 표현된 속옷, 전반적으로 투박해진 표현기법 등에서 9세기 불상을 계승한
10세기 초의 불상으로 보인다
좌우 사천왕 석주
사천왕석주는 운문사 작압전(鵲鴨殿)안에 모셔진 석조여래좌상(보물 제317호)의 좌우에 각각 2기씩 모두 4개가
돌기둥처럼 배치되어 있다. 원래의 위치는 아니고, 이곳에 세워진 벽돌탑의 1층 탑신 몸돌 4면에 모셔져 있던 것으로
보인다. 모두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으며, 머리 뒷쪽으로 둥근 광채를 띤 채 악귀를 발로 밟고 있다.
사천왕은 부처를 모시는 단의 사방을 지키기 위해 두는 방위신의 성격을 띠는데, 동쪽이 지국천왕, 서쪽이 광목천왕,
남쪽이 증장천왕, 북쪽이 다문천왕이다.
이 4개의 사천왕상 돌기둥은 신체가 큰 반면, 돋을새김을 뚜렷하게 하지 않아 양감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또한 체구도 약해보이고 얼굴 생김새도 부드러운 것으로 보아 시대가 내려가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880년에 만들어진 보조선사탑 사천왕상이나 철감선사탑 사천왕상과 비슷하지만, 보다 크고 띠주름도 굵어지는 등
형식화된 면이 있어서 8세기 석굴암의 사천왕상과 비교하여 시대적인 차이를 느낄 수 있다. 통일신라 후기 또는
후삼국시대인 900년경을 전후해 만들어진 작품으로 짐작된다.
관음전:관세음보살을 모신전각 기도하는 신도들이 있어서 내부는 사진을 못 찍었씀
명부전:지장보살을 모신 전각
명부전에는 중앙의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십대명왕상이 봉안되어 있다. 지장보살은 석가모니가 입멸한 뒤부터
미륵불이 이 세상에 올 때까지 부처없는 세계에 머물면서 육도의 중생들을 남김없이 제도할 때까지 결코 지옥을
떠나지 않겠다고 서원하신 보살님이다. 명부전은 원광국사가 건립하였고, 보양국사가 중창하였다. 건물은 1105년에
원응국사가 3중창할 때의 것이라고 하나, 조선 중엽 때의 건물 양식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리들에게 친근한 대자대비의 상징인 관세음보살을 모신 곳으로 관음보살은 일체 중생들의 소리를 관하여 고통을
건져 주고 즐거움을 주는 보살이다. 관음전은 원광국사가 초창하였으며, 보양국사가
중창하였다. 건물은 1105년 원응국사가 3중창한 것이라고 하나 건축양식으로 볼 때 조선초기 건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1979년 명성스님이 중수하였다. 전각 내부에는 관세음보살상과 뒷면의
관세음보살도(비단에 채색. 1868년 조성하여 그후 일제시대에 중수하였다.)와
신중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각기다른 돌로 쌓은 담장 오래된 담장은 아닌듯한데 정교하게 잘도 쌓았다
칠상각:북두칠성으로 상징되는 칠원성군을 모신 전각
운문사에 있는 이 탑비는 고려시대 중기의 승려 원응국사(1051∼1144)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원응국사는 일찍 출가하여 송나라에 가서 화엄의 뜻을 전하고 천태교관(天台敎觀)을 배워 귀국하였다.
1109년 선사(禪師)가 되었고, 인종 22년(1144) 운문사에서 93세로 입적하였다.
원응국사비(圓應國師碑)
고려 중기의 승려 원응국사(1051~1144)의 업적과 행적을 기록한 비.
비석의 받침돌과 머릿돌은 없어졌으며, 세쪽으로 잘려진 비몸만 복원되었다.
비몸은 높이 2.28m, 너비 1.8m. 고려의 명문장가 금강거사 윤언이(1090~1149)가
비문을 짓고 대감국사 묵암 탄연(1069~1158)이 썼다. 원응국사는 고려 숙종 때의 승려로
11세에 입산하여 희함선사(喜含禪師)에게 학문을 배웠다. 송나라에서
천태교관(天台敎觀)을 배우고 귀국하여, 예종 17년(1122)에 왕사로 책봉되었다.
인종 22년(1144)에 ‘이 몸은 한 조각 구름. 남김없이 흩어지지만 둥구렷한 달 하나 있어
맑은 빛 허공에 넘치리’라는 임종계를 남기고 93세로 입적하였다.
인종은 국사로 책봉하고 원응이라는 시호를 내려 비를 세우게 했다.
수도도량 출입금지라서 들어가지 못했다
봄이 바로 발아래까지 와있다 목련도 꽃망울을 터트릴 기회만 엿보는듯.....
사리암쪽으로 오르면서 바라본 계곡 물이 너무 맑다 이런걸 보고 명경지수라 했던가
명경지수에 비치는 태양도 담아 보고
계곡따라 소나무 숲을 걸어 사리암 주차장까지 2.3km 힐링 트레킹코스 옆지기 무릎 아프다고
걷다가 돌아가자 한다 미련없이 뒤돌아 섰다. 나는 더 걷고 싶은데 ....
지금은 이렇게 썰렁한 기분이지만 3월달에 벗꽃길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주차장에는 많은 차들이 집결했고 나들이객들 등산갣들 줄을 이어 몰려온다
우리는 철수하는 도중 매표소 옆 소나무숲을 두고 가려니 아쉬움이 남아 내려서
인증도하고 원동 순매원으로 갈 것이다
원동에 도착해 민물매운탕 집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전에 돌아보지 못했던 벽화를 몇군데
돌아본다
우리 젊었을 때는 이런 모습이었지 음악다방에서 노래 신청하고 비틀즈의
노래에 흠뻑 빠지기도 하고 지금 젊은이들이 보면 웃음이 나올지도 모르지만
마을뒤에 고목이 다된 매화나무 양지쪽이라서인지 조금 더 피었네 영포마을에는 아직이던데
몇군데 벽화를 담고 원동 순매원으로 향한다
순매원부근에는 주차를 할곳이 없어서 계속직진하다 전망좋은 곳이 있어서 주차를 하고
원동역 쪽을 바라보니 의외로 풍경이 아름답다
오늘은 의외로 날 씨가 따뜻해 겉옷을 벗어도 그리 춥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기차가 지나가기를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기차가 지나가는데 어찌나 빨리 지나가는지
눈깜짝 할사이에 벌써 멀어져간다
주말에는 될 수 있으면 잘 안나오는데 옆지기가 평일에는 시간이 없기에 어쩔 수 없이 나오지만
가는 곳마다 대만원이라 주차가 가장 문제가된다 이런곳에는 기차를타고 찾는게 제일 좋은 방법이다
살다보면/권진원
4일 출발 12일에 돌아오는 터키 여행길에 오릅니다
다녀와서 뵙지요 ,블친님들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