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의성이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마늘일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단어가 '의성'이라는 이름이다.
'의로운 성'이라 이름 할 만큼 의로운 선비가 많았고, 반촌 마을이 많은 곳이 바로 의성이다.
남부의 반촌이라 불리는 의성 산운마을이 있는가 하면, 북부의 반촌으로 알려진
안동 김씨, 안동 권씨, 풍산 류씨의 집성촌인 '사촌 마을'이 있는곳이 의성이다.
사촌 마을의 이름은 중국의 사진리을 본 따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송은 김광수, 서애 류성룡 등이
이곳에서 태어 났으며, 이곳 사촌마을에서 태어나 대과에 급제한 사람이 18명,
소과에 급제한 사람이 31명이었다고 한다.
마을에 내려오는 전설에는 이 마을에 3명의 정승이 태어 난다고 하며, 신라시대 한 명, 조선시대 류성룡
그리고 한사람이 더 태어날 것이어서 마을 어른들은 출가한 여인들이 친정으로 돌아와 애를 낳는
것을 원치 않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5/16)
김광수의 증손인 삼형제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활동으로 큰 활약을 하였다. 만취당 김사원은 의병을 모집하여
전과를 올렸고, 많은 사재(私財)로 난민을 구휼하였다. 독수헌(獨秀軒) 김사형(金士亨)과 후송재(後松齋) 김사정(金士貞)은
곽재우를 따라 창녕 화왕산성에서 전과를 거두어 공적이「창의록」에 남아 있다.
이 삼형제로부터 사촌리에는 만취당파와 후송재파 후손들이 대를 이어오고 있다.
사촌의 안동김씨 중에 문명으로 이름을 드러낸 자는 천사(川沙) 김종덕(金宗德)이다. 김종덕은 대산 이상정선생에게
사사하여 퇴계학의 정통을 계승하고, 이름난 문장가를 많이 배출하였다. 사후에 부조위(不祧位)로 모셔지고 있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의성에서도 의병을 일으켰다. 사촌리 문중에서는 의병대장에 운산(云山) 김상종(金象鍾)과
소모장 김수욱(金壽旭) 등 여러 명이 가담하여 향리 의병들과 함께 격렬히 싸우다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만취당은 서애 류성룡(1542∼1607)의 외종질인 김사원의 호를 따서 지은 당이다. 창건 이후 줄곧 안동김씨 종가의 대청 겸
문중 집회소로 이용하다가 1727년(영조 3) 거실로 사용하기 위해 건물 뒤편 서쪽에 1칸, 동쪽에 2칸의 방을 연결하여 지었다.
가장 오래된 사가(私家)의 목조건물로 꼽히기도 한다.
평면형태는 정면 4간, 측면 2간의 누각(樓閣) 건물에 복재(復齋)와 서소익실(西小翼室)이 누각 우측면 측간 동․서편에 붙어 있다.
전체적으로 T자형을 이루며, 자연산 주춧돌 위에 대들보를 세웠고, 사방을 터서 시선을 넓게 확대시킨다.
누는 5량(梁) 가구(架構)에 팔작집으로 우물마루 바닥 연등천정이며, 기둥머리에는 초익공(初翼工)으로 짜여 있다.
양익사(兩翼舍)는 3량(梁) 가구(架構)에 맞배집으로 온돌방과 고미반자로 되어 있다.
사촌에 입향한 안동 김씨 중에 가장 크게 이름을 낸 사람은 송은(松隱) 김광수(金光粹)이다. 김광수는 성균진사에 입격하였으나
연산군의 정변이 있을 것을 예감하고 사촌으로 내려왔다. 이때 집 앞에 심은 한 그루의 만년송[사촌리 향나무, 경상북도기념물 제107호]을
벗 삼고 시부(詩賦)로 세월을 보냈다. 만년송은 뒷날 많은 묵객들에게 시상의 대상이 되었다. 만취당 마루에 걸려있는
편액[萬年松亭韻 二首]에서도 당시의 심사를 느낄 수 있다.
만취당 건물은 지금 보수공사가 한창이고
안동김씨 종가를 들여다본다
사촌의 안동 김씨는 만취당파와 후송재공파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고 있으며, 문과 11명, 무과 1명, 40여명의 생원?진사가 배출되었다.
이곳은 영남지방의 와해(瓦海)라고 불릴 정도로 기와집들이 즐비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을미의병활약에 대한 보복으로 의병대장마을이라고 하여 집집마다 불을 질러 옛 집과 많은 서책
및 유물들이 불타버렸다.
사촌에서는 이 일이 1896년에 일어났기에 병신난(丙申亂)이라고 말한다. 또한 한국전쟁 당시 지당(池塘) 부근에
잠복 중이던 인민군이 미국 대위를 사살하여, 미군들이 보복으로 마을에 불을 질러 백여 호가 소실되었다.
종가 안채
안동김씨 종가와 사랑채
만취당과 안동김씨 종가 그리고 우물.병신난 100주년에 세운비
만취당에는 만년송이라는 오래된 향나무가 한그루 서 있다. '만년송'이라는 소나무 이름을 붙였지만 소나무가
아닌 향나무다. 수령 500년으로 추정을 하지만, 김사원의 증조부이자, 류성룡의 외조부인 김광수의 '송은'이라는
호가 이 만년송에서 나왔다는 고사를 미루어 볼때 이미 송은 김광수때에도 이 만년송은 노송의 모습이었을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뒤로는 김면옥가옥.김진옥가옥.김성수 가옥이 있으나 모두 문이 잠겨있어
통과하고 자여정으로 들어간다
자여당
자주 달개비
사촌마을의 또 다른 별명은 항일의병 마을이다. 구한말 일제 침략 시기에 이곳에서 의병을 일으켜 많은 전과를
올리고 순국한 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의병 활동 과정에서 일제의 보복성 방화로 만취당을 제외한 수백 채의
건물이 불타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아픈 역사를 간직한 마을이다
사촌마을의 한가운데에는 마을의 유래와 볼거리, 특징, 전해오는 유물들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사촌마을자료관이 있다
사촌마을 자료 전시관을 둘러보고 동네 이곳 저곳을 찾아 나서지만 집집마다 문이 잠겨 있어서
겉으로만 보고 다니다 내가 꼭 들려보고 싶은 류신하 선생님댁을 찾는데 문패도 안내문도 보이지를
않아서 만취당에 가서 마을주민 보고 말씀을 들였더니 한참 생각을 하다 바로 앞집을 가르처주신다
위에서 바라본 유한식님 가옥
유한식님은 고 유신하 선생님 자제분인 것 같다
바로 이댁이 고 유신하 선생님 댁이다
문이 잠겨있어 밖에서 몇장의 사진을 찍는다
이 건물은 사랑채 정면3칸 1칸은 마루 2칸은 방이다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조그마한 협물이 있는데 안채로 들어가는 하인들의 출입문인가 보다
사랑채 끝나는 지점에 문이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안채로 들어거는 큰 문인데 ....
밖에서 바라본 사랑채와 안채 앞에는 탱자나무 뒤에는 감나무가 서있다
문이 잠겨 있고 안에 밭쪽에 두분이 계셔서 큰소리로 문좀 열어 달라니까
여자분과 남자분이 계시는데 한사코 문열기를 사양하신다
지금 수리하는 중이고 지저분해서 보여줄 수 없다기에 대구에 계시는 유선생님을
들먹이니 문은 열어주시는데 내부에는 들어갈 수가 없다고 하신다
고명하신 류신하 선생님 말씀도 드렸더니 아버님이시라고 말문은 조금 트시는데
안채를 보는것은 씨도 안먹힌다
할수 없지 주인장께서 허락을 안하시니 밖에서 보는 것으로 만족을 한다
대들보에 저 흠집은 6.25 때에 총탄 자국이라고 한다
선친들께서 집앞에 버리고간 아이들도 살뜰히 키워주시는 미덕을 배푸시고
마을에서도 많이 배푸는 삶을 사셔서 인심을 잃지 않으셨다고 한다
전쟁통에 모든걸 놔두고 피난을 다녀왔는데 소와 가축들을 다 잡아서 먹고
집안 곳곳에 있는 곡식은 죄다 가저가고 했어도 집에 불을 지르지 않아 온전하게
보존 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위에서도 열거 했지만 미군들이 보복으로 마을에 불을 질렀다고 한다
동네가 임진왜란 때 불타고 일제 강점기에 의병활동으로 불타고 6.25 때 불타고
많은 수난을 걱은 동네인데 이집은 만취당과 함께 전쟁통에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니
다행한 일이다
이렇게 잔디밭도 채전도 깔끔하게 관리를 하실 정도면 안채도 잘 관리를 하셨을 텐데
못보고 나온게 아쉽기만하다
양진당
만취당 김사원의 손자 김상린이(1616~1675) 1659년에 건축하여 수양하며 지내던 곳이다
두칸의 방과 한칸의 마루로 지어진 작은 건물이지만 검소함을 느낄 수 있는 건물이다
최근에 지은 듯한 건물
밖에서본 양진당
뒤로는 류근하 가옥.류기식 가옥.류인성 가옥이 있으나 모두 문이 닫겨있어 지나가며
외관만 담으며 전진을 한다
사촌리 류기식 가옥은 一자형의 남향한 안채와 一자형의 동향한 아래채가 마당을 향하여 ㄱ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가옥의 주위에는 방형의 토석 담장을 둘렀으며 우측 담장 사이에는 1칸 규모의 초가 대문채를 세웠다.
안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초가집인데, 평면은 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안방과 부엌을 두고 우측에는
건넌방을 연접시켰다. 아래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초가집으로, 좌측에는 외양간을 두고 우측에는 뒤주와
고방을 연접시켰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류근하 씨 댁에서는 한옥체험도 할 수 있나보다
평화스러웠던 그시절의 동네 풍경 명절 풍경 같다
소개
한옥의 아름다움과 현대의 편안함이 어우러진 전통한옥형 펜션입니다. 한스테이 민산정은 항일의병의 역사와
전통유교문화를 오롯이 간직한 사촌마을에 자리잡고 있으며, 4개동 10개의 객실과 1개의 강당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민산정의 뒷산에는 나지막한 산책로가 있으며 1,500㎡ 크기의 넓은 마당은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 놀 수 있는 공간이고 족구장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민산정에도 한옥체험 민박을 운영한다
이용안내
◯ 객실 이용 예약은 054)841-2433~4 또는 010-8571-6191번으로 전화예약을 부탁드립니다.
◯ 예약접수 후 48시간 이내에 입금 확인이 되지 않을 경우 예약이 자동으로 취소됩니다.
◯ 객실 이용시간 : 15:00(입실) ~ 11:00(퇴실)
◯ 비누, 샴푸, 치약 등은 구비되어 있으며 칫솔, 면도기 등 개인세면용품은 가지고 오셔야합니다.
◯ 안채와 사랑채에는 주방이 마련되어 있어 조리가 가능하며 정해진 공간에서 바비큐도 가능합니다.
◯ 바비큐의 경우 숯과 망 등의 준비는 별도의 비용이 발생하거나 직접 준비하셔야 합니다.
◯ 예약을 취소할 경우 환불규정은 한국소비자원 소비자분쟁해결기준의 숙박업 규정을 적용합니다.
◯ 일몰 후 심한 고성방가는 삼가 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문화체험, 가족, 교육단체, 기업 및 단체워크숍 진행 가능합니다.
한옥스테이로 사용하는 방들
민산정 |
민산정(閩山亭)은 바로 민산(閩山) 류도수(柳道洙)을 기리고자 후손들이 2005년에 세운 정자이다. 본래 민산정은 선생이 지난날 일찍이 귀산(龜山) 아래 터를 잡아 지었는데 후손들이 다시 이곳으로 터를 옮겨 지은 것이다. 자하산(紫霞山) 아래에 자리잡고 있으며, 황학산(黃鶴山)은 동쪽으로 멀리 우뚝하게 솟아있고 남으로 기수(沂水)가 둘러 흐르고, 서로는 고목들이 울창하게 숲을 이루어 푸르고 넓은 평지가 뻗어있는 곳 이곳이 바로 사촌마을인데 이 사촌마을에서도 북쪽의 자하산 아래의 넓찍한 평지에 자리잡고 있는 건물이 눈에 들어오는데, 민산정은 후산정사(後山精舍)의 동편에 위치하고 있다. 민산정은 정면4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건물로써 당이 가운데에 자리잡고 당의 좌우에 방이 있는 중당협실형 건물이다. |
선조들의 생활상이 담겨 있는 벽화
후산정사 |
후산정사(後山精舍)는 만취당 김사원의 위패를 모시고 후손들이 모여 춘추 제향을 올리던 재실이다. 이 건물은 1747년에 완성하여 사림의 공의로 봉안을 하고 백여 년 동안 제향 기능을 담당해 오다가 1868년에 헐렸었다. 그러다가 1991년에 다시 재건한 건물이다. 솟을대문인 관선문(觀善門)을 통과하면 곧장 거대한 회회나무와 향나무가 눈에 들어오는데 그것만으로도 시간의 무게를 가늠할 수 있다. 후산정사는 단아한 모습으로 중앙을 빛내며 서있고, 담장을 사이에 두고 동쪽으로는 후산사(後山祠)가 있다. 이밖에 부속건물 몇 동과 배롱나무를 심은 후원이 공간을 채우고 있다. |
후산정사에 배향된 김사원은 송은(松隱)김광수 선생의 증손(曾孫)이며 어릴 때 까마귀가 울어 그
곳에 가보니 얼어 죽은 사람이 있어 옷을 벗어 덮어주고 어른들에게 알려 장사를 지내도록 한 남
다른 면모를 보여 준 인물이었다. 어른이 되어서는 흉년에 식량을 빌려주고 가난하여 갚지 못하
는 사람들에게는 차용증서를 불태워 없애버려서 "김씨의창(義倉)이라 불리어진 훌륭한 선비였다.
임진왜란때는 직접 참전하여 활약하였으며 전쟁후 아재민을 구하니 주위 백리 밖에서 사람들이 구
름같이 몰려 왔다는 미담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아흔 아홉석지기 부자가 한 석지기 가난뱅이의
한석을 빼앗아 자기의 백석을 채우고자 한다"는 옛말이 있듯이 가진 사람들이 베푸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이다. 오죽하면 서양 속담에 "부자가 천국에 가는 일은 낙타가 바늘 구멍을 빠져 나가는
것과 똑 같다" 했을까? .
5~600년은 된듯한 향나무 두그루
후산사 사당
전사청과 관리동인듯
후산정사 입구 벽화에는 옛 전통 혼례 풍경을 그렸는데 어찌나 현실감있게 그렸는지
한참동안 지켜보다 사촌 가로숲으로 이동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