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왕산 관룡사
대웅전에는 통상 석가모니 불상을 모셔놓는데 관룡사 대웅전에는 약사여래, 석가모니, 아미타여래 세 부처님을 모시고 있다.
대웅전은 1401년(조선 태종 1)에 건축했는데,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방화하여 소실되었다.
1617년(광해군 9)에 중수공사를 시작하여 1618년에 완공했다. 왜란 당시 사찰 전체가 불에 타 폐허가 되었으나 약사전만은
화재를 모면했다.
사찰 안내서에는 583년(신라 진평왕 5)에 중법국사가 초창했다는 설과 신라에 불교가 공인되기 전인 349년(신라 흥해왕 40)에
약사전이 건립되었다는 설이 있다고 적고 있다.
관룡사 뒤에는 구룡산의 바위산이 떡 버티고 있다
주차장에서 관룡사로 오르는길
남장승
여장승
관룡사 오르는길은 소나무 숲이 울창하게 연결되어있다
구룡산
관룡사와 원효대사
화왕산과 구룡산을 배경으로 전개된 창녕 화왕산 관룡사는 1500여 년 전, 신라 진평왕 때 583년
증법국사가 초창하였다 한다. 관룡사의 절 명칭은 원효대사와 관련이 있다. 관룡사는 신라 8대
사찰중의 하나, 원효대사가 제자 승려 1천명을 데리고 화엄경을 설한 도량이다.
원효대사가 100일 기도 중에 화왕산 정상 월영3지에서 9마리 용이 승천하는 것을 보았다고
관룡사觀龍寺라고 이름을 지었다. 관룡사 뒷산을 9룡산이라고 부른다.
[관룡사 입구 석문(일주문)...]
관룡사로 오르는 돌담길에는 축성시기를 알 수 없는 석문이 하나 있다. 사실상 관룡사의 일주문으로 불리는
이 문은 자연석 축대를 쌓아 올려 상부를 평평하게 다듬은 다음 화강석을 올려서 지붕을 올린 아담한
석문이다. 폭 118㎝, 높이 210㎝에 한사람 정도 지나갈 수 있는 조그마한 문으로, 좌우로 관룡사 가람을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조성시기는 17세기 명부전과 칠성각이 조성될 때 지은 것으로 추정되며,
관룡산의 진산인 화왕산 산성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
화왕산 관룡사라고 쓰인 문
관룡사 석문을 지나 사찰 초입에 있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건물로 1712년(숙종 38)에 대웅전과 함께
건립된 것을 1978년 지금의 모습으로 신축하였다. 건물은 어칸 중앙의 양 측면에 기둥을 세워 대문을 달고,
어칸을 통해 출입문을 만든 모습으로, 내부에는 사천왕탱을 모신 감실형의 벽체가 남아 있다.
벽체는 현재 비어 있으나 사적기의 내용을 통해 1713년 천왕문을 단청하면서 사천왕회상(四天王會像)을
봉안하였음을 알 수 있다. 건물의 양식은 3량가구에 외1출목을 둔 익공양식으로 살미첨차와 보머리는
수서형태로 장식하였으며, 주심도리에는 초각된 운공을 올렸다. 현재 절의 출입문으로 사용되며,
정면 어칸에는 ‘화왕산관룡사(火王山觀龍寺)’라는 편액 1기가 걸려 있다.
관룡사 종각
관룡사 사천왕문 좌측에 있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건물로 원음각과 함께 남향하고 있다.
1987년 대웅전 서쪽 요사와 함께 지은 것으로, 2층 누각의 모습으로 하고 있다. 건물의 외부는 1층을
경사지에 석조를 세워 배치하고 그 위로 원주를 세워 팔작지붕을 올린 모습으로, 2층 누상 주변에는
계자난간을 설치하고 마루는 우물마루를 깔았다. 공포는 2익공 양식으로 초익공과 이익공 모두 수서로
장식하고 내부는 초각하여 운궁을 이루었으며, 내부 가구는 5량으로 마감하였다. 건물 내부에는
1995년에 노천월하(老天月下)스님이 증명하고, 주지 지묵항조(至?恒照) 화상이 조성한
'반야대범종(般若大梵鐘)'이 봉안되어 있다.
대웅전
보물 제212호.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앞면과 옆면이 모두 3칸인 다포 계통의 건물로 정면 중앙칸이 넓어서
좌우로 안정된 구조를 보여준다. 내부의 중앙 뒷줄에 세운 2개의 고주에 의지해 불단을 설치하고
그 위에 닫집을 가설했다. 내외이출목으로 출목 바로 위에 있는 살미첨차의 끝이 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쇠서[牛舌]의 곡선은 짧고 견실하며 내부에서는 대들보를 받은 공포의 제일 앞부분만 보아지의 형태로 변해 있다.
이와 같은 것은 조선 중기 이전의 공포에서 보이는 특징들이다. 1965년 해체복원공사 때 중앙칸 마루도리에서
상량문이 발견되어 1401년(태종 1) 창건되었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17년(광해군 9) 재건했으며,
1749년(영조 25)에 다시 중창했음을 알 수 있다
관룡사 칠성각
대웅전 동쪽에 위치한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건물이다.『명부전칠성각상량문(冥府殿七星閣上梁文)』에
의하면, 1652년 건립되어 1912년까지 4중창된 건물로 일제강점기에 소실되었다가 근래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명부전ㆍ대웅전ㆍ칠성각과 나란히 배치되어 있으며, 견치석으로 쌓은 높은 기단 위에 자리하고 있다.
건물은 자연석을 허튼층쌓기한 낮은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두고 그 위로 원주를 세운 모습으로,
전면에 2분합의 띠살을 설치하고 삼면을 벽체로 마감한 구조이다.
관룡사 응진전
대웅전 좌측 언덕에 있는 건물로 『관룡사사적기(觀龍寺事蹟記)』에 의하면 1714년(숙종 40)에 16 중수되었다고
하며 전후의 연혁은 알 수 없다. 현재의 응진전은 1983년에 주지 신허스님과 화산스님이 나한전으로 건립한 것을
2000년대 보수한 것이다. 응진전은 견치석으로 쌓은 4벌대의 높은 기단 위에 원형초석을 놓고 그 위로 원주를
세워 맞배지붕을 받친 모습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이다. 외부는 삼면을 벽체로 형성하고 전면에 2분합의
띠살문을 단장한 모습으로, 정면 어칸에는 편액 1기와 주련 4기가 걸려 있다
불상은 근래 조성된 석조 아미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음과 대세지보살을 봉안하였으며,
그 주위로 높이 26~31㎝의 소형 나한상 16구를 배치하였다. 불화로는 삼존상 뒤로 1990년 월하스님이 증명하고
금어 김룡환(金龍煥)이 조성한 영산회상탱을 봉안하였다
산영각
산영각
산신령께 예를 올리는곳
함월당은 요사채인듯
관룡사 원음각
원음각은 인조 12년(1634년)에 처음건립, 영조 39년(1763년)에 중건했다고 상량문에 적혀있다.
바닥은 우물마루로 되어있고, 높이가 대웅전 앞마당과 같게 하였으며 이곳에는 불구(佛具)를
보관하거나 스님들의 설법장소로 쓰이고 있다 한다. 예전에는 중앙칸으로 출입을 하였었는데
지금은 가운데를 막고 스님들의 공부방으로 쓴단다.
관룡사 명부전
대웅전 서편에 있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건물이다. 『명부전칠성각상량문(冥府殿七星閣上梁文)』에
의하면 1652년 초창하여 1682년에 중창하였으며, 1753과 1912년에 각 3중창과 4중창을 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명부전은 2000년 주지 정안 스님이 보수한 것으로, 건물은 화강암을 치석하여 장방형으로 만든 낮은
가구식 기단 위에 자리하고 있다. 가구식 기단 위는 삼화토로 다져 평지를 만들고, 그 위로 막돌초석을 얹어
원주를 세운 모습이며 삼면은 벽체로 마감하고 정면은 2ㆍ4분합 띠살문으로 단장하였다. 공포는 익공계
양식으로 정면은 2익공이고, 배면은 초익공으로 구성하였다. 익공형태는 초익공은 앙서형에 연꽃과 연봉을
초각하고, 이익공은 수서형으로 연봉을 초각하였다. 건물 내부는 우물마루를 깔고 불단을 만들어 불상을
봉안하였는데, 가구는 3량이고, 내부 천장은 우물반자를 설치하였다
요사채인듯
묘하게 비틀어진 명품 소나무
관룡사 뒤편 가파른 산 능선을 오르면 집채만 한 큰 바위가 눈앞에 나타난다.
그 바위가 용선대 인데, 펑퍼짐한 자리에 석조불상이 연화대좌위에 앉아 있다.
해발 700여미터나 되는 높은 곳이고, 불상이 향해 있는 동쪽을 보면 여러 개의 산봉이
평풍처럼 둘러있는데, 그 기암절벽의 산형이 마치 용이 꿈틀거리는 것처럼
울퉁불퉁한 것이 역동적이다. 불상높이가 약 3미터로 둥근 육계와 나발,
사각형 얼굴에 '항마촉지인'을 하고 미소를 머금은 인자한 얼굴이다.
불상 뒤쪽 한 십오미터 떨어진 능선에 올라 보면 아름다운 주변경관과 함께 그 멋진 위상을 한 눈에 볼수 있다. 원래는 남서쪽 아래 옥천리 동네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자기 나라가 있는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는 바람에 불두가 깨져 시멘트로 이어 놓았다 하는게 안타깝다.
그가 번뇌 가득찬 중생을 태우고 물건너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반야용선'의 선장처럼
보이고, 보는 이 또한 그를 따라 극락으로 가는양 황홀하고 편안하다.
불상대좌 부문에서 확인된 명문(2009,7)에 의거 730년대 제작된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이라고 한다.
건너 옥천리는 고려 공민왕 때 개혁정치를 주도하다 실패한 신돈스님이 태어난 '일미사지'가
있는 곳이며, 그가 처음 출가한 '옥천사지'도 이 아래에 있다
용선대는 갓바위 만큼이나 영험하기로 소문나 있어 정성을 다해 기도하면 한가지 소원은
들어준다고 전해와 매해 신년초가 되면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고 한다.
화왕산의 억새능선과 산성을 줌인해본다
뒷 쪽에 병풍처럼 둘러 솟아있는 수개의 산 봉우리는 기암절벽으로 이어져 있다.
마치 용이 승천하는 모습처럼 보인다하여 뒷산을 '관룡산' 또는 '구룡산'이라 하며,
산세가 빼어나고 경관이 아름다워 '창녕의 소금강'이라고 한다.
5시도 안 됐는데 벌써 해는 서산에 넘어가고 있다
이렇게 우포늪의 따오기 복원센타와 우포늪 일부를 돌아보고 관룡사도 살펴보고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