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도사 뒷산 영축산 미세먼지도 걷히고 하늘이 맑아 손에 잡힐듯 가까이보인다
줌인해보았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 해인사, 송광사와 함께 삼보사찰의 하나이다. 646년 자장율사가 중국 당나라에서 가져온 부처의
사리·가사·대장경 등을 금강계단에 봉안하고 창건했다. 규모가 작았으나 고려 선종대에 확장되어 금강계단 상부의 석종형
부도와 극락전 앞의 3층석탑·배례석·봉발탑·국장생석표 등이 건립되었다.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타버리고 1603년 송운대사가 재건, 1641년 우운대사가 다시 중건하여 대가람이 되었다. 중요문화재로는 대웅전(보물 제144호)
·국장생석표(보물 제74호)·은입사동제향로(보물 제334호)·봉발탑(보물 제471호) 등이 있다.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통도사로에
있다. 2018년 6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 절의 창건과 관련하여 자장율사가 이곳 연못에 사는 9마리 용을 항복시키고 대가람을 이루었는데 1마리 용만 머물게
하여 절을 수호했다고 하는 설화가 있으며 지금도 금강계단 옆에는 구룡지(九龍池)가 상징적으로 남아 있다. 처음에는
금강계단을 중심으로 한 규모가 작은 절이었으나 고려 선종대에 크게 확장되어 금강계단 상부의 석종형(石鐘形) 부도를
비롯하여 극락전 앞의 3층석탑 및 배례석(拜禮石), 봉발탑(奉鉢塔), 국장생석표(國長生石標) 등이 건립되었다.
그후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타버리고 1603년(선조 36) 송운대사(松雲大師)에 의해
재건된 뒤, 1641년(인조 19) 우운대사(友雲大師)가 다시 중건하여 대가람이 되었다.
무풍한솔길 100년도 넘은 소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고 마치 가로수를 연상하게 한다
용피바위
성경이나 불경이나 선인들의 말씀은 진리에 가깝다 다만 지키기에 역부족이다
솔밭길. 무풍한송로(舞風寒松路)란 명찰을 달고 있다.1km 정도 걸을 수 있는 힐링길이다
바람은 춤 추고 소나무에서 시원한 향기가 나는 길이라고 한다
계곡은 겨우 적실만한 물만 흐르고 있어 여름의 아름답던 운치는 볼 수 가 없다
사람들은 자기를 알리기를 이렇게나 좋아 할까 주위 바위에는 모두다 이렇게 이름들이 세겨저 있다
부도원은 역대 스님의 사리를 모신 탑과 비를 세워놓은 곳이다
여기에 모셔진 부도와 비석은 원래 주변에 흩어져 있던 것을 월하 방장 스님의 교시로
1933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놓았다 임진왜란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통도사를 위해 활약한
역대 뛰어난 수행자들과 큰스님의 부도 60여 기와 비석 50여 기가 안치되어 통도사의
정통성과 사격을 상징하고 있다
오늘은 봄날처럼 따뜻하고 또한 주말이라서 많은 인파가 모여들어 계곡 홍교앞에서 조용히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도 정겹게 보인다
마을의 수호신 벅수
삼성반월교
언제나 그자리에 변함이 없이 버티고 있는 홍교 봄.여름.가을.겨울 주위의 풍경만 다를 뿐
성보박물관은 그냥 패스한다
첫일주문 영축산문 둘째 일주문 영축총림 세째 일주문 영축산 통도사 세개의 문을 거친다
예전에는 이 일주문 영축산 통도사 하나 뿐이었는데
성보 박물관 앞의 능수매화
범종각
범종각은 2층 누각형태의 건물이다 건축의 초창은 1686년 (숙종12년)수오대사에 의해 이루어 젔으나
현재의 범종각은 그후 여러차례 증수된 것으로 보인다 내부 상하층에는 범종 법고 목어 운판등 사물을
배치했다 불전 사물은 조석 에불의식에 사용되는 불구로 모두 소리를 내는 도구이다 범종을 치는 것은
지옥중생을 위하여 법고는 축생의 무리를 위하여 목어는 수중의 중생을 위하여 그리고 운판은 허공의
날짐승을 위하여 사용된다
가람각은 통도사를 수호하는 가람신을 모신 전각이다
가람신은 토지를 관장하는 신이라고 함
영산전.견보 탑품도.합시청중도.증명설주도.불구석중도 시계방향
영산전(靈山殿) 벽화(壁畵)는 벽체와 포벽은 물론 내목도리 윗벽과 대량ㆍ창방 등 내ㆍ외부 전체에 고루 그려져 있으며,
그 내용 또한 매우 다양하게 구성되어 조선후기 사찰벽화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외벽에는 총 17점의 벽화가 남아 있으나
현재 훼손이 심한 편해 윤곽이 뚜렷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내부는 총 52면의 벽면에 벽화가 조성된 것을 알 수 있다
1792년에 영산전(靈山殿)의 단청을 중수한 기록이 남아있으나 내부 벽화들에서는 개채나 보수 흔적을 살필 수 없고,
훼손 시 떨어져 나온 벽화 층을 살펴봐도 동일한 1개의 안료층을 보이기 때문에 1714년부터 1716년까지 3년간 새로
영산전(靈山殿) 건물을 중창할 당시에 조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내벽에서 가장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총 48면으로 이루어진 『석씨원류응화사적(釋氏源流應化事蹟)』 벽화이다.
이들 48점은 내부 운룡도(雲龍圖)를 제외한 동벽과 남ㆍ북 벽의 포벽 및 내목도리 윗벽, 견보탑품도(見寶塔品圖)와
협시청중도(脇侍聽衆圖) 2점을 제외한 서벽의 일부에 묘사되었다.
극락보전
극락보전은 극락세게에 머물며 중생을 위해 자비를 배푸는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시는 전각이다
좌에는 대세지보살 오른쪽은 관음보살을 협시로 모신다
반야용선도
건물 뒷쪽 벽에는 험한 바다를 건너 극락세계로 향하는 모습의 반야용선도가
그려져 있어 극락전의 건축 세게를 잘보여준다
만세루는 법회나 법요식등 사찰의 주요행사 때 사용하던 누각이다
영조 22년에 숙영대사가 지은 것으로 전해지며 그후 여러 차례 보수 지금에 이르고 있다
처음에는 누각형식으로 지어 졌다가 지금같은 형태로 고처 지어 누로남아 있다
삼층석탑
이석탑은 받침돌 위에 2층의 기단을 세우고 그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신라시대 후기의 삼층석탑이다
1987년 해체 수리당시 원래의 위치에서 동북쪽으로 1.5m 정도 옮겨져 극락전과 약사전의 중심축에
맞추어 복원하였다 당시 상층 기단 안쪽에서는 조선시대 백자가 발견되었고 하층기단의 다진 흙속에서
소형의 금동불상 2구와 청동 숫가락등이 발견되었는데 현재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탑 앞에 있던 배려석(1085년조성)과 함께 통일신라후기의 석조문화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약사전
약사전은 중생의 질병을 고치고 목숨을 연장시키는 약사여래를 모신 법당이다
건물 내부에는 독존으로 석조약사 여래불을 봉안하였으나 현재는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후불 탱화는 약사여래와 함께 일광보살,월광보살을 비롯하여 여러대보살,신장상 등을 나타낸 1775년의 작품이다
통도사 불이문
불이문은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문으로 해탈문이라고도 한다. 다른 사찰의 불이문과 비교해서 보더라도 통도사
불이문은 짜임새와 형태가 완벽한 불이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통도사 불이문은 고려 충렬왕 31년(1305)에
처음 지었다고 하나 언제 중건되었는지는 확실하게 전해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건축기술로 보아 조선 중기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식 팔작집으로 문마다
판문을 달아 놓았다. 코끼리와 호랑이 조각이 이마로 대들보를 떠받치고 있으며, 대들보 위에 삼각형의
합장재로 장혀를 걸치고 중도리, 하중도리, 종도리를 얹어 서까래를 받치도록 하였다.
'불이문' 편액은 송나라 사람 미불의 글씨라고 하며, 현수막 때문에 보이지 않으나 현수막에
가려진 '원종제일대가람'은 원래 일주문에 걸려 있던 것이라고 한다.
산수유 한그루 얼었다 녹았다 하며 황태처럼 쭈그리가 되어 말라가고 있다
영각
고승의 초상을 모신 전각이다 앞에는 수령 300년으로 추정되는 이 매화나무는 지금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불교 전문 강원
관세음보살 상을 모셨으며 원통보전이라고도한다
건물 내부에는 관세음보살상을 안치하였으며 내부 벽화에는 바타락가산에 계신 관음의
모습과 남순 동자의 형상,32응신을 상징하는 여러 형태의 관음상을 표현한 벽화들이 있다.
관음전 앞 석등
석등의 용도는 절 안의 어둠을 밝히는 것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자비광명을 온 누리에 비추어 중생을
깨우쳐 선한 길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등불은 수미산과 같고, 등을 밝히는 기름은 넓은 바다를
상징한다고 한다. 이는 등에서 나간 불빛이 고루 퍼져나가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통도사 관음전 앞에 자리하고 있는 석등은, 그 조형 양식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석등은 둥근 형태의 연꽃받침인 연화대 두 개를 아래위로 놓고, 그 가운데를 팔각의 간주석을 세웠다.
그 윗부분에는 불을 밝히는 화사석과 지붕돌을 올려놓은 형태이다. 석등의 구성형태는 거의가
이런 형태로 꾸며진다.
정료대
오층석탑
통도사 개산조당
유교식 건축물이다...황실의 기도처였던만큼 조정의 신위를 모셨던 곳으로
유생들이 함부로 못하였던 곳이다.. 그리고 우측은 37조도품 도품석당이며
좌측은 전경불사 석등이다
통도사 해장보각
통도사의 해장보각은 통도사를 창건한 자장스님의 영정을 모신 전각입니다.
해장보각은 정면 3칸, 측면 한 칸 반의 작은 건물이지만 건물의 규모에 비해 짜임새가 있고 형식이
제대로 갖추어진 전각입니다. 해장보각 앞에 검게 나타난 건물의 지붕이 해장보각의 정문 역할을
하는 개산조당입니다.네요.
당시 해인사 팔만대장경 인경불사를 4질을 인출하였다.그 모든 비용을 민비께서 후원을하시어 불사가 원만히 끝났다
그 인출된 책들을 각각 3보사찰 해인사 송광사 통도사에 모셨고..그 나머지 1질은 전국 본사에 조금씩 나눠어 모시게
되었다.그 모든 도감을 통도사에 주석하시던 용악혜견선사께서 도감을 맡아 진행하시었고..그 경전 1질을 통도사에
모시고 와서 바로 여기 해장보각에 모시게 되었다..그런 까닭에 해장보각 법당에 들어가면 책장이 놓여져 있다
바로 여기에 경장을 모신 까닭이다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석등을 세우고 시주하신 분들의 이름을 새겨서 "전경불사"를
했던 것을 기념하고 축원하는 의미해서 법등이 널리 전하여지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아 이 앞에 세우게 된 까닭이다...
결국 민비는 시해 당하여 이 불사가 끝난지 1주년이 다가오던 해(1899년)에 시해 당하셨다
용악스님의 시주자 민비의 왕생극락을 비는 마음에서 화장찰해도라는 탱화를 조성하여 이 해장보각에 모시고 기도하였다
그래서 민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법당이기도 하다....
용화전
1369년(공민왕 18)에 초창되었으나 현재의 건물은 1725년(영조 원년)에 청성대사에 의해 중건되었다고 한다.
건물 안에는 약 2미터 정도의 미륵불 좌상을 봉안하였다. 이 불당의 특징은 건물 측면 중앙칸에 문짝을 단 것이며
공포의 구성도 다른 건물에서 흔히 볼 수 없는 특이한 형식을 갖추고 잇다. 곧 안쪽 공포를 5출목 형식으로
천장 높이까지 공포가 짜여져 11포의 화려한 공포 구성을 이루고 있다.이 용화전 앞에는 높이 약 2.5미터의
석조 봉발이 있다. 이 석조물은 지대석 위애 하대석을 놓고 그 위에 부등형 8각간석을 세우고 간석 위에
상대석을 놓았으며 그 위에 뚜껑을 갖춘 발을 올려놓았다.
봉발탑
봉발이란 스님이 밥을 얻으러 다닐 때 들고 다니는 그릇이란 뜻입니다. 이는 발우(鉢盂 : 부처 또는 비구가 소지하는 밥그릇을 말함)를
모셨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출가 하고서 평생 동안 가지고 다닌것이 헌옷 한 벌과 밥그릇 하나뿐이었고 평생을 무소유로
살았으니 입적하실때 수제자에게 물려줄 것 또한 밥그릇 밖에 없었으니 부처님이 입적을 하기 전 제자인 가섭존자에게 "발우를 보관하고
있다가 미륵불이 출현하면 물려주라"는 유언을 하며 발우를 맡기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미륵불이 출연하면 물려주라는 부처님의 유언에 따라 석조발우가 미륵부처님을 모시고 있는 용화전 앞에 설치된 것입니다.
보이시죠? 봉발탑 뒤로 미륵부처를 모시고 있는 용화전의 현판이.....참! 미륵보살(彌勒菩薩)을 모르시는 분을 위하여 간단하게 설명하면..
다음 세상에 나타날 부처이며 용화수 아래에서 석가모니가 제도하지 못한 모든 중생을 제도할 부처로 수기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전통은 큰스님이 입적할 때 받는 발우를 제자로서는 큰 영광으로 알았다고합니다.
세존비각.개산조당.해장보각이 한눈에 보인다
대광명전
1725년(영조원년)에 축환 대사가 중수하였다고 하나 실제 건립 연대가 언제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 건물은 정면5칸,측면 3칸의 다포식 팔작집으로 내부에는 뒤쪽에 고주가 세워져 있으며 비로자나불을
안치하고 있다. 비로자나(Vairocana)는 광명 편조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므로 이불전을 대광명전이라 했다.
흔히는 비로자나불을 모셨을 때 비로전이라 편액하기도 한다.
통도사 세존비각
통도사 대웅전은 상로전(上爐殿) 영역에 있는데, 건물 후면에는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金剛戒壇)이
있고 중앙뜰의 좌우에는 명부전, 응진전, 정면에는 일로향각이 마주 서 있다. 통도사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5칸의
겹처마 단층팔작지붕 불전이다. 그런데 이 건물은 다른 전각과는 달리 정면의 너비가 측면보다 좁은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이 전각 내에 부처를 모시지 않고, 건물 후면에 있는 금강계단(金剛戒壇)을 향하여 정면이
위치하면서, 한편 불이문(不二門)을 들어섰을 때 마주 보이는 측면에도 합각(合閣)을 만들어 양쪽을 다 강조한
특이한 구성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건물의 지붕은 앞면을 향해 T자형을 이룬 독특한 평면을 이루고 있다.
대웅전 내부에 불상을 모시지 않은 이유는 금강계단에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일부이긴
하지만 석가모니의 신체를 모셔 놓고 석가모니를 모방한 불상을 따로 마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런 건물을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 한다.
이 건물은 각 면의 현판이 다르다는 특징이 있다. 금강계단을 직접 대하는 북쪽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적멸보궁(寂滅寶宮)’, 남쪽면에는 결코 깨어지지 않는 금강석처럼 계율을 지킨다는 뜻에서
‘금강계단(金剛戒壇)’, 동쪽면에는 석가모니를 모신 불전이라는 뜻에서 ‘대웅전(大雄殿)’, 서쪽면에는 영원한
진리와 우주의 본체를 상징하는 법신불이 상주하는 도량이라는 의미에서 ‘대방광전(大方廣殿)’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대웅전에 걸려있는 쇠북
적멸보궁과 사리탑
석가모니불의 사리를 봉안한 사찰 건물을 말한다. 적멸은 모든 번뇌가 남김없이 소멸되어 고요해진
열반의 상태를 말하고, 보궁은 보배같이 귀한 궁전이라는 뜻이다. 한반도에는 다섯 곳에 적멸보궁(寂滅寶宮)이
있는데, 설악산 봉정암 적멸보궁, 오대산 상원사 적멸보궁, 정선 정암사 적멸보궁, 영월 법흥사 적멸보궁,
양산 통도사 적멸보궁이다. 적멸보궁에는 석가모니불의 사리를 봉안했기 때문에 불상을 모시지 않는다.
응진전
불당 내부에는 중앙에 석가여래와 좌우에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상이 봉안되었고 그 주변에는 16나한상과
범천 및 제석천왕상을 좌우에 모셔 과거,현재,미래의 삼세불과 함께 16제자상을 봉안한 셈이다. 곧 미륵보살은
석가여래의 일생보처(다음 생에 성불하여 부처가 될 보살)이고 제화갈라보살은 과거불이기 때문이다. 응진전은
나한전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나한이 범어의 아라하트(Arahat)를 한자로 음역한 것으로서 그 뜻은 중생의
공양에 응할 만한 수행이 있다는 뜻인 '응공'또는 진리에 응하여 남을 깨우친다는 뜻에서 '응진'이라고도
하기 때문이다.
구룡지
통도사 구룡지는 통도사 창건 설화가 얽힌 연못이다.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에 따르면 통도사가 창건되기 이전
현 통도사 위치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사는 큰 연못이 있었는데, 자장율사가 이들을 제압하고 통도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제압된 아홉 마리 용들 중 한 마리는 통도사를 수호하게 하고 작은 연못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 연못이 바로 지금의 구룡지라 전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보통 삼성각에는 칠성, 독성, 산신을 모시지만,
통도사 삼성각에는 고려말 조선초의 삼대 화상(절 집안의 위대한 어른)인 지공스님, 나옹스님, 무학스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칠성탱,왼쪽에는 독성탱을 안치시켜 복합적 기능으로 사용하고 있다. 삼성은 지공과 나옹,무학의 3대 화상으로 고려시대 이래 존중받는 고승들이다. 칠성은 북두칠성을 말하는데 이는 주군으로 인간의 복과 명을 맡고 있다. 독성은 나반존자라고도 하는데 12인연의 이치를 홀로 깨달아 성인의 지위에 올라 독성이라 한다. 그러므로 이 건물에는 삼성의 추앙말고도 인간의 수복과 이치의 깨달음을 기원하는 법당의 구실도 한다. |
산영각
건물 내부에는 일반적으로 산신탱을 안치한다. 산신은 옆에 호랑이를 거느리고 있어 [ 삼성각과 산영각 ] 산신과 호랑이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 듯하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1600여 년이 흐르면서 불교는 토속신앙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예가 그거이 바로 사찰 안의 산신각이나 칠성각 등이다. 산신은 산악 숭배 사상에서
나왔고, 칠성은 도교 신앙과 관련이 깊은데 이러한 것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 조선시대라 할 수 있다.
통도사 뒤의 소나무 숲
불교 강원이다
통도사 소나무 숲뒤로 보이는 산이 영축산에서 함박등 죽바우등 시살등 오봉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다
명부전
이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긴 장방형 평면으로 양 측칸 2칸씩이 별도 공간으로 되어 있다.
중앙의 6칸에는 지장보살상을 비롯하여 십대왕을 봉안하였고 시왕의 탱화를 모셨으나 탱화는
경내 성보박물관으로 옮겨 졌다. 명부전의 '명부'라는 말은 저승 곧 지옥 세계를 의미한다.
또한 명부전을 지장전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명부의 주인이 지장 보살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까닭에 명부전의 경우 시왕탱화가 이전각의 성격을 잘 나타내 준다.
미세먼지가 덥치고 간지가 언제였냐는 듯 맑은 하늘에 공기또한 깨끗하니 딴나라온 기분이다
오른쪽이 영축산
영각앞에 370년된 나무의 홍매화
화가한분이 열심히 그린 매화 그림
통도사를 돌아보고 나올 때쯤 바람이 불고 하늘에는 구름이 끼기시작
일기예보대로 저녁에는 비가 내릴 모양이다
통도사 석당간
통도사 석당간은 기단부(基壇部) 전체가 후대에 와서 중수된 것이다. 지주(支柱)는 당간과 함께 조립하였으나,
지상에 노출된 부위만 가공된 상태이고, 표토 부위에서부터 지하 2m 가량 묻힌 부분은 가공되지 않은 원석이다.
기단부는 전반적으로 후대 중수 시에 개수·보완한 것으로 추정된다. 마치 탑의 기단부와 같이 장대석을 놓아
사방의 하대 윤곽을 잡은 다음 다시 간격을 좁혀 조금 짧은 장대석으로 기단을 만들고, 기단석 양쪽(남북)에
지주가 맞물릴 수 있도록 유구(有溝)가 있다.
그리고 지주 상하에는 타원형으로 2개의 간공(竿孔)을 만들고, 동서 방향으로 장대석을 보완한 다음 다시 중앙에
간대(竿臺)를 놓고 당간(幢竿)을 세웠다. 당간 중앙(中央)에는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라는
명문이 음각되어 있다.
통도사의 석당간은 원래의 형태는 아니고, 후대에 보수하면서 다소 변형된 상태라 할 수 있다.
당간이 현존하는 사례는 흔하지 않으며 제작 시기는 기단의 구조나 지주의 규모 등으로 미루어 보아
여말 선초로 추정되므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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