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개마을은 조선 세종 때 성산 이씨인 이우가 처음 입향해 개척한 집성 마을이다. 이우는 세종 때 진주 목사와
경기좌도수군첨절제사 등을 지낸 인물이다. 성산 이씨가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한 시기는 이우의 6대손이며 퇴계의
직계 제자인 월봉 이정현이 과거에 급제한 이후다.
월봉은 홍문관정자에 임명됐으나 안타깝게도 그해에 26세 나이로 요절한다. 월봉에게는 외아들 수성이 있었는데,
그가 아들을 넷 두었고 이들이 모두 마을에 정착해 성산 이씨 각 파의 시조가 됐다.
이들 후손이 씨족 마을을 형성한 한개마을은 17세기 중엽인 이수성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후 한개마을에서 대과 급제자 9명과 소과 급제자 24명을 배출해 조선의 양반 마을로서 위상을 갖춘다.
한개마을은 하회마을, 양동마을과 더불어 3대 전통 마을로 꼽힌다. 한창 번창했을 때는 가구가 100호를 넘었으나 현재는
약 70여 호 정도로 줄었고, 이 중 약 20호는 빈집이다. 사람이 사는 50여 호 중에서 성산 이씨가 90퍼센트 정도다.
이처럼 씨족 마을의 전통을 계속 이어왔기 때문에 문화재도 많다.
현재 10점의 지방 지정 문화재가 있는데, 교리댁(지방 민속 문화재 제43호), 북비고택(지방 민속 문화재 제44호),
한주종택(지방 민속 문화재 제45호), 월곡댁(지방 민속 문화재 제46호), 진사댁(지방 민속 문화재 제124호),
도동댁(지방 민속 문화재 제132호), 하회댁(문화재 자료 제388호), 극와고택(문화재 자료 제354호),
첨경재(문화재 자료 제461호), 삼봉서당(문화재 자료 제463호) 등이다.
전통적으로 집에는 '택호'라는 이름을 붙인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안주인의 출신 마을이나 마을이 속한 면의 이름을 딴다.
그러므로 택호는 안주인의 호칭도 된다. 그러나 집안에서 벼슬을 한 사람이 있으면 마을 이름 대신 벼슬을 택호로 삼는다.
장관댁, 장군댁, 교장댁 등이 이런 예다.
그런데 한개마을의 택호는 매우 특이하다. 수십 명의 과거 급제자가 나왔지만 벼슬 이름을 택호로 삼은 건 교리댁뿐이다.
진사댁이 있으나 진사는 초시에 합격한 이를 부르는 칭호이므로 엄밀하게 말하면 벼슬이 아니다.
북비고택에서 태어난 응와 이원조는 19세기 중엽 한성부윤과 공조판서라는 높은 벼슬을 지냈다.
그럼에도 그의 집은 판서댁이라고 부르지 않고 응와의 증조부 이석문의 호를 따서 북비고택이라 부른다.
다른 집도 주인의 호를 따서 한주종택이나 극와고택 등으로 부르고, 안주인의 출신지를 따서 하회댁이나 월곡댁이라고
하기도 한다. 주인의 호를 택호로 정한 집이 한개마을처럼 많은 곳은 거의 없다. 여기서 한개마을 사람들이 벼슬보다 이름,
즉 명예를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삼일유가(三日遊街)란, 조선시대 과거에 급제한 선비에게 허락된 삼일 간의 유가(遊街), 즉 일종의 거리행진을 이르는 말이다.
왕으로부터 받은 어사화(御史花)를 꽂은 급제자들이 악사와 광대, 재인을 앞세워 3일간 거리를 행진하며 시험관과 선배 급제자
그리고 친척을 방문하며 큰 마을 잔치를 벌인다.
주요 프로그램으로 .남사당 줄타기 공연 .삼일유가 음악회 .만석중 놀이 .마당극 <광대걸> 공연 .별자리 체험 .한개마을
과거시험 등이 열려 한개민속마을을 찾은 관광객과 주민들에게 다채로운 행사와 수준 높은 공연을 선보였다.
여동서당(餘洞書堂)
담와(澹窩) 이운상(李雲相)의 강학지소에 사림이 수계하여
세운 서당으로 귀락정(歸落亭)현판이 있다.
삼일 유가놀이 축제 장면
삼일 유가놀이 공연이 있다고하여 급히 여동서당까지 올라갔는데 비가 온다고 의자에 앉자마자
끝내버린다 어찌나 허멍하던지
민속 공예체험장
초가집으로 단장한 깨끗한 민박집
지칭개
꼿꼿하고 강직한 한개마을 선비들의 이야기는 놀랍다. 돈재 이석문은 영조 38년(1762) 나이 50세 때 무겸(무신 겸 선전관)으로
봉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가 갇혀 있는 뒤주에 돌을 올려놓으라고 명령하자 그는 어명을 거절했다.
그리고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를 업고 들어가 영조에게 직언하다가 곤장을 맞고 파직될 정도로 기개를 보였다.
한주종택을 중건한 한주 이진상은 소과에 합격해 성균관 생원이 되었다. 그러나 혼탁한 세상에서 벼슬하기를 포기하고
근세 유학 3대가로 불리는 대학자로 성장한다. 중앙 정부는 그의 명성이 높아지자 유일로 의금부 도사를 내렸다.
그러나 당시 67세이던 그는 이마저도 거절했다.
이 같은 기질이 이어져 일제 강점기 때는 한개마을의 수많은 사람이 독립 운동에 참가했다.
한주의 아들 이승희(건국 훈장 대통령장)는 평생을 독립 운동에 바쳤고, 이기형(건국 포장), 이기정(건국 훈장 애족장),
이기원(건국 훈장 애족장), 이기인(건국 훈장 애족장), 이기윤(대통령 표창) 등이 선비의 기개를 드높였다.
진사댁은 초입에 있는데 공연을 본다고 지나처서 들어가보지를 못해서 예전에 다녀온 사진으로 대신한다
대산리 한개마을은 성산 이씨 집성촌으로, 진사댁은 이국희(1868∼1939)가 지었다.
진사댁이란 이름은 이국희가 조선왕조에서 마지막으로 실시한 소과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지만 벼슬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건물은 안채, 사랑채, 고방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마당으로 들어서면 사랑채가 있고
사랑채 뒤로 안채가 새사랑채와 나란히 자리를 잡고 있다. 사랑채는 3칸 앞쪽에 툇마루를 들였고 뒤편 왼쪽에는 마루 1칸,
오른쪽에는 온돌방 2칸을 배치하였다.
안채는 앞면 7칸 중 5칸에 툇마루를 두었으며, 그 뒤 2칸 안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2칸 온돌방, 오른쪽에 1칸 건넌방 등을 두었다. 건넌방 앞 툇마루 밑에는 아궁이를 설치해 놓았고 안방쪽칸 위에는
다락을 만들었다. 새사랑채는 앞쪽에 난간을 세우고 누마루처럼 꾸민 마루 1칸과 온돌방 1칸, 창고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누마루에서 방으로 들어가는 문은 卍자 장식으로 멋을 내었으며 보기 드물게 섬세하고 아름다운 구성을 보이고 있다.
한개마을 주거 형식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되고 있는 집이다.
사랑채
진사댁에서는 현재 민박도 운영하며 매주도 만들어 파는 것으로 알고 있다
새사랑채
좌측길로 접어들면 교리댁이 나온다
교리댁은 마을 서쪽으로 난 길 중간 오른쪽 언덕에 있다. 언덕배기에 있기 때문에 대문이 높은 곳 위치해있어 상당한
위압감을 느끼게 된다. 대지가 동서방향으로 긴 장방형으로 되어 있어 집도 앞뒤로 배치된 것이 아니라 옆으로
연이어 길게 늘어져 있다. 집을 배치한 순서를 보면 한개마을내 다른 집에는 없는 3칸 규모의 서당이 맨 앞쪽에
대문과 나란히 위치하고 다음에 사랑채, 중문채, ㄱ자형의 안채가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또한 사당은 동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채와 사랑채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이런 배치는 우리나라 일반적인 사당 배치와는
다르다. 일반적으로 사당은 안채 좌측에 있다. 이것은 <주자가례>에 정침 동쪽에 두라는 원칙에 따라 남향하는 집을
기준으로 할 때 동쪽이 좌측이므로 대부분 안채 좌측에 둔다. 이런 사당 배치는 한개마을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북비고택이나 월곡댁에서도 마찬가지다.
교리댁 서당
서쪽 집에 위치한 집의 또 다른 특징은 대문이다. 교리댁을 포함한 서쪽에 있는 집들은 대문이 진입로보다는 높은 곳에 있다.
그렇다 보니 같은 한개마을이라고 해도 지형조건이 다른 동쪽에 있는 한주종택이나 하회댁과는 다른 느낌을 갖는다.
한주종택이나 하회댁은 대문은 대문이 바로 길에 면하고 있어 솟을대문이라고 해도 높이에 의한 위압감을 그리 많이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서쪽에 있는 집은 길에서 위에 올라 서 있어 교리댁과 같이 평대문이라고 해도 위압감을 더해주고 있다.
이 집을 드나드는 아랫사람들은 위압감 때문에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을 것이다.
사랑채
이 교리댁도 크고 작은 변화가 있었다. 가장 큰 변화는 앞서 언급한 한국전쟁 때 안채 건물이 소실된 것이지만 작은 변화도 있었다.
원래 사당 주변에는 담장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담장이 무너지면서 보기 흉해지자 일제강점기 말에 완전히 철거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중문과 사랑채사이도 벽이 있어 외부로부터 안채를 완벽하게 차단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담은 6-70년 전쯤 철거하였다고 한다. 철거한 이유는 안채에 있는 광에 쌀을 운반할 때 소달구지가 중문을 넘어가는 것이
불편하여 달구지가 중문채를 돌아 들어가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런 변화는 일제 강점기 때에 들어서면서
서구문명이 들어오면서 점점 남녀관계가 개방되어가다 보니 남녀유별에 대한 개념이 과거와 같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발상이다.
남녀유별이 분명했던 과거에는 힘들어도 쌀을 지어 날랐을 것이다. 이렇게 집도 사회 변화에 따라 변화해 가는 것이다.
안채전경
안채는 앞면 7칸 ·옆면 1칸 규모인 전후퇴집이다. 서쪽에 날개채가 3칸 반 돌출되어 ㄱ자 형태를 만들고 있다.
원래는 안마당 남쪽 담장 쪽으로 5칸 규모의 건물이 있었고 동쪽 담장쪽으로도 한 칸의 찻칸과 3칸 규모의 헛간이 있어
전체적으로 튼 ㅁ자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고 한다. 날개채는 3칸 반인데 중문 쪽 한 칸이 대청인
홑집의 구조이다. 몸채와 연결 부위는 반 칸 규모인데 하부에는 날개채를 위한 아궁이가 설치되었고 상부는 날개채 방에서
사용하는 다락이 설치되었다. 이번에는 안채가 문이 닫혀있어 에전에 갔을 때 사진으로 대신한다
사당
마을 서쪽에 있는 집들의 대지 형상이 교리댁과 비슷하게 장방형으로 길쭉하고 입구도 서쪽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대지 모양과 대문의 위치 때문에 안채가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태에서 <주자가례>대로 안채의 좌측에 사당을 배치할 경우 사랑채에서 너무 먼 곳에 위치하여 지금과는 달리
자주 참배했던 사당을 찾아가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사당을 사랑채와 안채의 중간에 두다보니
마을 내에서도 동쪽에 있는 한주종택과는 다른 사당배치가 된 것이다.
교리댁을 나와 응와고택으로향한다
정면에 보이는 문이 바로 응와고택 솟을대문입니다. 솟을대문은 돈이 있다고 아무나 세울 수 없었고 정2품 이상의 벼슬을
해야 세울 수 있었으며 특징은 말을 타고 드나들 수 있도록 가로지르는 문턱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문이 더 위로
솟아있기도 합니다. 대감댁은 퇴계나 서애처럼 불천위제사를 모시고 있는 집입니다. 불천위제사가 있다는 것 자체가
명실공히 국가가 인정한 명문집안이라는 뜻이기도 하다고 하네요.
돈재의 아들 사미당 이민겸(李敏謙)이 규모를 확장하였고, 사미당의 아들 농서(農棲) 이규진(李奎鎭)이 순조 21년(1821)에 정침을 신축하였으며, 농서의 아들 응와 이원조가 헌종11년(1845)에 사랑채인 사미당을 낙성하여 현재의 규모를 이루었다.
고종 36년(1899)에 솟을 대문을 증축하여 대감댁의 면모를 갖추었고, 순종 4년(1910)에 사당을 증축하였다.
돈재는 무신으로서 사도세자에게 충의를 다하였고, 농서는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은율현감을 지냈다.
응와는 한성판윤, 공조판서, 판의금부사를 지낸 문신이며, 조선 주리학(州理學)의 학통선상에 있는 학자이다.
충절과 학문을 면면히 이어온 이 가옥은 안채, 사랑채, 안사랑채, 사당, 북비채, 대문채등 6채로 구성되어 있고,
북비채에 있었던 장판각과 안대문채, 아랫채 등은 남아 있지 않다.
소실된 안대문채는 중문간채, 방앗간, 고방 등으로 이루어진 6칸으로 안채 맞은편 남쪽에 있었으며,
아랫채는 안채의 동쪽에 지금의 안사랑채와 마주 보며 있었다.
이원조 1792(정조16)-1871(고종8)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주현(周賢), 초명은 영조(永祚),
호는 호우(毫宇), 응와(凝窩), 만귀산인(晩歸山人). 시호는 정헌(定憲)벼슬길 마다하고
10년간 학문 정진… 학자 관료의 전형 보여줘
응와는 증조부인 돈재공(遯齋公, 이석문)의 충의의 정신과 조부인 사미당(四美堂, 이민겸)의 ‘경침(警枕)’의
가르침과 생양가 부친의 문과 후 10년 독서의 훈계를 몸소 실천해 관직으로는 정2품 판서에 이르렀고
학문으로는 입재 정종로 문하의 저명한 학자로 조카인 한주 이진상에게 영남 주리론의 맥은
이은 이로 알려져 있다.
종택 사랑채로 들어서면서 눈에 띄는 것은 ‘독서종자실(讀書種子室)’이라는 특색 있는 현판이다.
독서를 통해 자식들을 기르는 집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현판은 응와 선생이 증조부의 가르침을 되새겨 건 것이라 한다.
증조부의 학은(學恩)에 감사함과 아울러 재삼 독서를 통해 가문의 위상을 높이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강원도 삼척 부근을 지나다 지은 ‘미역 따는 아낙(採藿女)’라는 작품은 그가 얼마나 백성들의
어려움에 눈길을 주고 있었던가를 알게 한다.
“미역 따는 저 아낙이여/
떨어진 옷 팔꿈치도 못 가리고/
짧은 머린 어깨 겨우 덮었네/
한손엔 갈구리 한손엔 대광주리/
아침 내내 따서 한 푼 돈과 바꾸려 하네/
미역은 싸고 쌀은 귀하니 이를 어쩌나/
금년에도 호남의 쌀 실은 배 오지를 않네/
집으로 가 나물 뜯어 아침을 떼우고/
황금같이 귀한 미역 조각 또 말리네/
앞집서 보리 빌고 뒷집서 소금 꾸는데/
바다는 거칠고 논밭은 황폐하니 모두가 가련하구나.”
凝窩 李源祚(1792~1872)선생은 아버지 이형진, 어머니 함양박씨(박닌경 딸)로
정언 이규진에게 입양되었고 1809년(순조9) 별시문과 을과에 급제하였고
1837년(헌종3) 정언으로 士族의 사치가 극심하고 흉년으로 만중들의 艱苦가 많아
쇄신책을 실시를 극간하였고 강릉부사,제주목사,경주부윤,대사헌,공조판서를 역임
하였고 종택에는 1865년(고종2,74세) 2월 용왕위 대호군겸 지의금부춘추관사로
임명되어 耆老社(60이상 임금,70이상 정2품이상의 정경이 참석)에 들어갔을때
창경궁 영수각에서 도화서의 화공들이 그린 초상화가 있었고
문집으로는 응와문집이 있다고 한다.
북비댁과 한주종택과는 매우 인연이 깊다. 두 집안은 양자관계로 얽혀있는 집이다.
이석문의 동생인 석유가 지금 한주종택이라 불리는 곳에 살았는데 동생이 후사가 없자 석문의
둘째아들을 양자로 입적시켰다. 그러나 그 양자마저 후손이 없자 석문의 작은 손자를 양자로
입적시켰다. 그런데 4대째에서는 석문가문에 후손이 없어 석유가문에서 석문가문으로
양자를 입적시켰다고 한다. 따라서 한주종택과 북비댁은 모두 석문의 후손인 것이다.
사랑채
사랑채는 1866년 이원조가 중수했다고 한다. 사랑채는 현재 ㄱ자 형태로 되어 있다. 그러나 80년대까지만 해도 돌출된
누마루 뒤쪽으로 반 칸의 뒷간이 설치되어 전체적으로 ㅏ자의 느낌이 있었다. 규모는 몸체가 전면 4칸 측면 두 칸이고
앞으로 날개채가 두 칸 반 돌출되어 있다. 몸체는 동쪽에 대청 한 칸, 큰 사랑채 두 칸, 부엌 한 칸으로 되어 있다.
날개채는 칸 반의 작은 사랑채와 한 칸의 누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사랑채의 큰사랑방은 주인이 사용하는 방이고
작은 사랑방은 서재로 사용하다 손님이 올 경우 숙소로 사용되었다고
안채
안채는 다섯 칸 규모의 전후퇴집인데 동쪽으로부터 부엌 한 칸, 안방 두 칸, 대청 두 칸 건넌방 한 칸으로 이루어졌다.
안채는 1821년 석문의 손자 규진이 지은 것으로 높은 기단 위에 지어져 한주종택이나 교리댁의 안채보다 한층 권위가
있어 보인다. 이렇게 높게 지은 것은 대지에 경사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후대에 지어진 이 집이
앞서 지어진 집보다 우월하게 보이려 한 의도도 있는 것 같다.
방문객 여러분께 당부드립니다 안채에는 기거하는 분들이 있는데 밖에서 소리를 줄였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어느 고택을 가던 마찬가지입니다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시면 좋겠습니다
이날 앞에 버스로 오신 여자분들 얼마나 떠들어 대는지 눈에 거슬려 드리는 말씀입니다
사당
사당은 앞서 말한 것처럼 원래 한 칸이었다. 그런데 이원조 때 3칸으로 늘여지었다.
이 한개마을에는 사당이 있는 집이 한주종택, 교리댁, 월곡댁, 이곳 북비고택 4곳이 있다.
원래 사당이 있는 집은 종택이나 국가에 공을 세워 파종택을 만든 경우이다.
그리고 사당을 여러 칸으로 만드는 것은 불천위가 있을 경우이다.
불천위란 원래는 국가에 공이 있을 때 나라에서 대대로 제사를 지내라고 하여 만든 제도이다.
그러나 후대에 들어 가문에서 높은 직위에 오른 사람을 기리기 위해 스스로 불천위를 만들기도 하면서
그 뜻이 훼손되었다. 어쨌든 이곳 한개마을의 어른 말에 의하면 2품 벼슬을 지낸 분이 있으면 불천위를
모시는 개념으로 세 칸 규모의 사당을 지었다고 한다. 북비댁도 이원조가 정 2품 벼슬에 오르면서
그 세를 드러내 보이기 위해 사당을 세 칸으로 늘린 것이 아닌가 한다.
자혜당
서재 책을 보관하는 곳이다
최근에 복원하면서 놓은 다리인듯
대감댁 안채에 있는 장독대의 모습입니다. 훼밀리가 떴다에서 김원희의 구박을 받으며 이효리가
저 장독대옆 수돗가에서 나물을 씼었고 훼밀리 식구들이 이 집에서 잠을 잤습니다.
왼쪽에 보이는 문이 바로 안채에 붙어있는 부엌문입니다
할아버지 이민겸의 당호현판 "사미당"이동항의 전서
이원조의 아버지 이규진의 친필 현판 "농서"
독서종자실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가 할아버지 이민겸(李敏謙)의 자녀 교육과 가학을 기념하고 자손들의 글 읽는 소리를
기대하며 북비(北扉)고택에 건 편액이다. 소눌(小訥) 조석신(曺錫臣)이 썼다. “아, 사람이 책을 읽지
않을 수 없으니, 아비가 전하고 아들이 계승함이 끊어지지 않는다면 비로소 ‘종자(種子)’라는
이름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뜻을 돈독히 하고 힘써 실천하여 서책에서 옛 도를 찾아
참으로 ‘독서(讀書)’라는 이름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는 것은 또한 각자의 노력에 달린 것이다.
이에 기록하여 후손들을 기다린다.” 라고 이원조(李源祚)는 썼다.
이원조의 친필당호 "응와"
유명한 북비입니다. 옛날부터 북쪽으로는 문을 내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는데 사도세자의 죽음에 휘말려 그의 죽음에
유일하게 대항하다가 영조에게 찍혀서 벼슬을 관두고 내려온 이석문(북비공. 임금이 내리신 칭호라고 들었습니다.)이
임금이 계신 북쪽으로 문을 내어 아침 저녁으로 문안을 드렸다고 하여 유명하며 후일 왕위를 이은 정조대왕께서
북비공의 후손이 벼슬에 오르자 친히 부르시어 '너희집에 아직도 북비가 있느냐'고 물었다고 전해집니다.
북비고택
1866년에 지어진 집의 배치는 지금과는 차이가 있다. 우선 안채로 들어가는 다섯 칸 규모 중문채가
안채와 같은 방향으로 남쪽에 있었고 안채 동쪽에는 세 칸 규모의 광이 있었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튼 ㅁ자 배치를 하고 있었던 것인데 중문채와 광채는 한국전쟁 때 소실되어 지금의 배치가 되었다.
또한 북비 안쪽에도 현재 건물 외에도 동쪽 담장 쪽으로 세 칸 규모의 장판각이 있었는데 3.1운동이
있었던 1919년 즈음에 멸실되었다고 한다. 또한 1866년에 단칸이었던 사당을 현재와 같이 3칸으로
고쳐지었다.
일설에 의하면 앞집에 노론(교리댁)이 살고 있어서 보기 싫어 북으로 대문을 냈다고도한다
북비는 남인 계열이고 교리댁은 노론계열이어서 정치적으로 반목하는 사이이기에
정원이 참 아름답다 전에 왔을 때는 후손이 설명을 해주시던데 오늘은 안보이신다
월곡댁 대문
월곡댁의 사랑채모습이다. 안채에는 사람이 기거합니다만 사랑채는 오래전부터 비어있다.
사랑채와 별채가 담장을 사이에 두고 붙어 있다 사랑채에는 많은 책들이 쌓여 있다
염색공방으로 사용되는 것 같다
공간 뜰에는 염색한 천들이 널려 있다
월곡댁 집안의 모습이다. 마치 골목을 사이에 둔 세 개의 집인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한 집이다.
왼쪽 모습이 사랑채이고 중간이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의 모습이며 오른쪽이 별당이다.
저 별당에는 주로 첩이 기거했다고 알고 있다. 이 집은 만석을 한 집으로 대대손손 막강한 부를 자랑했지만
후손이 벼슬에 오르지는 못했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과 재산을 모두 다 가지기는 어려운 모양.
언덕인 지형을 이용하여 집안에 높은 축대를 쌓은 것이 특색으로 안채도 이중으로된 높은 축대가 쌓여있다.
이 집의 가장 큰 특색은 바로 이 축대다.
안채는 생활하는 분들이 게시는 것 같아서 밖에서 살짝이 들여다봤다
개들이 대문을 굳게 지키고 있었다
전에 갔을 때 찍은 안채
사랑채 뜰에는 꽃 양귀비가 곱게 피어있다
육중한 담장을끼고 뒷길로 걸어가는데 저쪽 끝 한주종택 뒤에서 부부인듯한 두분이 비도 내리는데
앵두를 따먹으면서 우리에게도 먹어보라고 몇알준다
비가내려 카메라 초점을 잘못 맞추어 탐스런 앵두가 제대로 잡히지를 않았다
첨경재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에 있는 묘막으로서 성산이씨 후손들이 조상의 묘소에 묘제를 지낼 때 사용하던 곳이다.
첨경재(瞻敬齋)라는 이름은 한개마을 뒤쪽 영취산(靈鷲山)에 있는 여러 조상의 분묘를 공경하는 마음으로 섬긴다는 뜻이 있다.
건물은 모두 4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흙과 돌로 쌓은 담장 안에는 앞쪽에 앞면 4칸·옆면 1칸 반의 첨경재가 있는데 3량가
맞배지붕을 갖추고 있다. 첨경재의 왼쪽에 있는 고직사는 앞면 4칸·옆면 1칸이며 출입할 때는 일각문을 이용한다.
조선 후기에 건립된 이후 여러 번 다시 고쳐 지었다고 한다. 2004년 3월 11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61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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