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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구

한개 민속마을 2

 

 

 

한주종택 대문

지체 높은 양반집에서 볼 수 있는 솟을대문이 아니고 평대문이라 오히려 이채롭다.

원래는 문간채에 초가지붕을 이어서 더 소박했었다고 한다. 겉치레 보다는 내면과
실용을 중요하게 생각한 기품있고 겸손한 양반가의 대문이 아닐 수 없다.

안채에문은 굳게 닫혀있는데 몇년전에 화재로 소실된 안채는 복원을 했는지 모르겠다

 

한개마을 한주종택(寒洲宗宅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45호)

 

한개마을의 가장 위쪽 산기슭에 위치한 한주종택은 영조 43년(1767)에 이민검이 처음 지었고, 고종 3년(1866)에 성리학자인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이 고쳐지었다고 한다. 이 집은 문방동에 있던 경상감사를 지낸 권감사의 집을 해체하여 옮겨지었다고 한다.

 한주종택은 바로 옆에 한주정사라는 별서를 가지고 있어 한개마을에서 가장 격식을 갖춘 집이라 할 수 있다.

한개마을에서 별서를 가진 곳은 한주종택이 유일하다. 그러나 하회댁 사랑채 담장 아래에 연못과 함께 정원의 흔적이 있는데,

이곳이 하회댁 또는 교리댁의 별서로 이용하였을 가능성이 있어 한개마을에는 한주종택 말고도 한 곳 더 별서를 가진 집이

있었던 듯하다.

 

한주종택의 대문으로 들어서면 사랑마당이 나오고 안채의 행랑채와 사랑채가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다. 사랑마당은 안채 쪽으로

 점점 높아지고 있어 안채 마당 높이에 맞춰지은 사랑채 기단은 매우 높아 권위를 한껏 들어내고 있다. 사랑채는 전면 4칸 반,

 측면은 두 칸 반 규모인데 방은 원래 깊이가 한 칸이고 뒤에 반 칸의 고방이 있고 그 밖에 다시 툇마루가 있었던 것인데 최근

툇마루까지 늘여 방을 두 칸 깊이로 만들었다. 안채 쪽 반 칸에는 안채로 통하는 통로가 설치되어 있어 사랑채에서 바로 안채로

연결되게 하였다


한주종택사랑채

 

사랑채 측면은 다른 곳과 다른 모습으로 되어 있다. 사랑채 측면하부는 대부분 흙벽으로 마감하거나 방화장으로

처리하는데 이곳에는 담장처럼 쌓았다. 이런 모습은 북비고택 안채에서도 볼 수 있다. 이런 모습에 대해서

 한필원은 사랑채 옆 마당이 사당과 같은 공간임을 암시하려고 벽체대신 담으로 쌓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해석은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런 상징적인 해석보다는 전후퇴집으로 깊이가 깊어지면서

 맞배지붕으로는 비가 들이치는 것을 막는 것에 한계가 있어 하부를 아예 기와를 얹은 벽체형식으로

만든 것이 아닌가 한다.

 

안채는 튼 ㅁ자형이다. 앞에 7칸의 안행랑채를 앞에 두고 안채 좌우에 찬광채와 아래채가 마당을 ㄷ자형으로

 감싸면서 ㅁ자형태를 만들었다. 안채는 정면 5칸 반 규모인 전후퇴집이다. 전퇴는 툇마루로 각방을

연결하고 있고 후퇴는 고방이나 툇마루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최근 반 칸을 더 늘여 방 크기를 키웠다.

안채는 3량집인데 기둥에 첨차를 설치한 것으로 보아 꽤 오래된 집임을 알 수 있다.

 이 집이 다른 집을 옮겨와 지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자료가 아닐까 한다.

안채는 얼마 전 화재가 나서 현재 방문객의 관람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주리세가와함께 한주.대계.삼주.이름이적힌 편액 삼대의 이름은 대대로 유학을 숭배한

                  집안이라는 것을 세상에 알리려는것. 주리세가는 주희와퇴계의 이학(理學)을 계승 한다는의미

대계 이승희(1847~1916)

              을사능약이 체결되자 제자 김창숙과 함께 을사 오적을 처단하고 조약을 파기할 것을 주장하였고

              1908년 환갑이 넘은 나이로  블라디보스크에 건너가 독립운동 기지인 한흥동을 구축하고 한민 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을 실시한 인물 대계의 두아들 삼주 이기원(1885~1982) 백계 이기인(1894~1981) 또한

              아버지 곁에서 독립운동을 하여 삼부자가 함께 독립운동을한 보기드문 기록을 남겼다

삼색 병꽃나무

종택의 옆에는 별서인 한주정사가 있다. 한주정사는 별도로 드나드는 문이 있지만 사랑채 쪽에서도 일각문으로 통하게 하였다.

한주정사 동쪽에는 산에서 흐르는 개울물을 이용하여 연못을 파 놓았다.

연못은 직사각형으로 위아래 둘로 나뉘었는데 두 연못이 凹자 형태로 연결되어있다.

 

연결부위에는 돌로 된 다리를 놓아 위와 아래를 구분하고 있다. 위 연못이 크고 아래 연못이 작은데 위에 있는 연못에는 작은 섬이 있다.

연못은 두 번에 나뉘어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위의 연못이 먼저 만들어지고 아래 연못이 나중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한주정사는 연못을 잘 바라 볼 수 있는 쪽에 2칸 규모의 방과 앞에 칸 반 규모의 누마루를 배치했고, 연이어 두 칸 대청과 방이 하나를

배치하여 전체적으로 T자형평면을 하고 있다. 따라서 큰방의 문을 열면 바로 연못을 포함한 정원의 경관을 잘 볼 수 있으며 앞에 있는

누마루는 방보다 한자 높게 만들어 바깥의 경치를 앉아서도 잘 조망할 수 있도록 계획하였다.

 

한주정사에는 <조운헌도제祖雲憲陶齊>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祖雲의 뜻은 호가 운곡雲谷인 주자를 조종으로 모신다는 뜻이고,

憲陶는 호가 陶翁 또는 퇴계인 이황의 학문을 받든다는 뜻이다. 한주 이진상의 학문세계를 한마디로 압축한 표현이 아닌가 한다.  

 

 

한주정사(寒洲精舍)는 조운헌도재(祖雲憲陶齋)라는 현판이 건물 입구에 걸려 있는 정(丁)자형 건물로, 가운데 두 칸 대청을 두고

서쪽에 한 칸 방(玩藥室)과 동쪽에

측면 두 칸 방을 마련한 뒤 동쪽 방에 잇대어 남쪽으로 한 칸의 누마루가 내어져 있습니다.

헌도제:주자와 이황의 학문을 사숙하는 곳이라는 뜻이라함.홍와 이두운선생이 쓰셨다

                       만직당:만가지 모든 것을 바로 세우는 것을 뜻한다

'한주학단'의 학자들과 호남의 노사 기정진의 문하인 '노사학파'와의 연결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 되었다. 한주학파와는 다르게 호남에 기반을 둔 노사학파는

 그 제자들이 호남에만 국한되지 않고 영남 우도인 경남지역에도 많은 학자들이

 노사문하를 출입했다.

 

 월고 조성가(趙性家), 계남 최숙민(溪南 崔淑民), 노백헌

 정재규(老栢軒 鄭載圭:1843~1911) 등이 대표적인 영남의 노사학파이다. 그중에서도

노백헌 정재규가 노사문하의 고족(高足)인데, 그는 한주의 제자 후산 허유와 가까운

 벗으로 일생 동안 학문논쟁과 토론을 그치지 않아 노사학문과 한주학문이 결합되는

 높은 수준의 성리학이 이룩되었다

,공교롭개도 옆지기가 노사집안의 기씨다

만직당 현판-만직당은 만가지 모든것을 바로 세우는 것을 뜻한다.

지숙료는 중국 주희가 경영한 서당의 응접실 같은 사랑채 이름이라고 한다.

응접실겸 숙박을 하던 곳의 이름이다

완락실은 유흥유희 오락실 같은 곳

이진상의 아들 한계 이승희(韓溪 李承熙)는 훗날 아버지 못지 않은 성리학자로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로써
 항일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일제의 조선 침략 야욕이 점차 노골화 되자 1907년 국채보상운동을 펼치는 한편
만국평화회의에 일제의 만행과 조선의 억울함을 글로써 호소하기도 하였다.

측근을 통해서는 조선내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는 한편, 만주 한인 이주민들의 정착지를 물색하고 황무지를 매입・
개척하여 그들의 생활을 안정 시켰다. 이뿐만 아니라 한민학교를 세우고 민족교육을 실시하였으며, 독립군의 병제를
제시하는 등 독립군 양성의 기반을 닦았다.


 

1910년 경술국치 소식을 듣고는 "국사(國事)가 끝났으니 내가 떠돌아 다니다가 타국에서 죽어 독수리의 밥이 되겠구나!"
 탄식하면서 한없이 통곡했다고 한다. 선생은 결국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1916년 2월 27일, 중국 펑톈(현 선양)에서
70세를 일기로 망국의 한을 품은채 세상을 떠났다. 생전에 “나는 나라가 광복이 되어야 돌아갈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이 나의 시신을 모셔갈 수는 있겠지만 나의 혼(魂)은 돌아가지 않겠다.”라고 하셨다 전한다. 선생의 시신은
 같은해 3월 28일 고국으로 돌아와 4월 28일 유림장(儒林葬)으로 치러졌다. 이때 애도를 표한 이가 만여 명이었고
 만사(輓詞)가 1,087통(通), 제문(祭文)이 167통이나 되었다고하니 그의 학문과 정신을 흠모하고 애도한 이들이
그만큼 많았음을 알 수 있다.뉴스풀에서

정처 없이 떠도는 나의 발걸음이여(西登東蹈我今行)
고향 산 돌아가 묻히는 것 쉽지 않으리(歸骨鄕山詎易望)
빠진 이빨 머리털 함께 싸서 보내노니 (爲將落髮偕封去)
선영 옆에 묻어주는 것이 무방하리라 (埋近先阡自不妨)

- 한계 이승희作-

정자의 누마루에서 안채와 사랑채의 경치가 아늑히 보이며, 넓은 마을 앞 들판은 발아래로, 마을 안산은 대청마루와

 같은 높이로 보여 하늘 위에 떠 있는 신선 같은 느낌에 빠지게 한다. 또 자연과 어울리는 아름다움을 위해 정자 동편으로

 방형의 연못을 파고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연못을 거쳐 나가도록 만들었고, 연못 위에는 인공 섬을 만들어 우주를

안으려는 주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했다. 담 너머 노송과 주위의 기암괴석, 수백 년 된 소나무들도 분위기를 한층 높인다.

제1 연못과 제2 연못 물길이 막혔는지 예나지금이나 연못에 물이 없다

엄청 높은 버드나무

한주정사의 통용문은 굳게 닫혀있고

한주정사 사당

세월을 말해주는 노송 한그루

인걸은 간곳 없고 돌보는이 없어 잡풀만 무성한 정원과 연못. 역시 독립운동을 하면

                     거지로 산다는 말이 실감나는 현장이다. 삼부자(대계.삼주.백계)가 독립운동을 한

                     집안의 몰골이 이러하니 아~~ 왜 독립운동을 했을까 편안히 세도를 부리며 사시다

                     가시지

도동댁

성주 대산리 도동댁은 조선 철종조에 공조판서를 역임한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의 둘째 아들인 민와(敏窩)

이기상(李驥相)이 살림집으로 건립(1850년으로 추정)한 것이다.

우측으로 난 입구를 들어서면 넓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사랑채가 남향하여 자리 잡고 있으며, 사랑채의 좌측에는

안채가 배치되어 있다. 안채 전면에 세워진 중문채를 들어서면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안채가 남향하여 자리 잡고

 있는데 안마당의 좌측에는 고방채를 두어, 전체적으로 튼‘ㅁ’자형의 배치형태를 이루게 하였다.

가옥을 처음 건립한 이기상(1829~1903)은 자를 치천(穉千), 호를 민와(敏窩)라 하였는데, 종형인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을 쫓아 학문을 익혔으며, 생원시에 장원급제 후 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를 역임하였다.

 덕기(德器)가 온화하고 인정이 두터워 사람을 대함에 겸손하였고, 검약을 가법으로 삼아 유명하였다.

도동댁은 한개마을의 전체적인 배치로 볼 때 매우 중요한 곳에 위치해 있으며, 배치형태가 튼‘口’자형으로서

지역적인 특징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문간채는 무너지기 직전 수리를 좀 해야겠다

안채는 보수를 했는지 비교적 겉으로보기는 깨끗해보인다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사랑채가 나타난다

사랑채와 안채를 구분하는 담장이 ㄱ자로 둘러처져 있다

사랑채와 안채로 통하는 문을 만들어 생활의 편리함을 추구하고 있다

고방채는 초가로 복원한듯 안채는 살림집이라 문도 닫겨있고 들어갈 수가 없고

2년전에 갔을 때에 본 안채

사랑채

 

이렇게 사랑채만 둘러보고 나온다

 

극와고택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에 있다. 1852년에 지은 것으로 공조판서 겸 판의금부사 이원조의 손자인 홍문관 교리 이귀상의 차자

이주희(1846∼1946)의 집이다.

진주목사와 수군첨절제사를 지낸 그는 우리 나라가 일제에 강점되자 망국의 한을 품고 백의포에 지관을 쓰고 거실의 장판을

걷어내고 거적을 깔고 지내면서 칩거하여 두문불출로 왜정에 항거한

애국지사인데 그가 은둔생활로 일생을 마친 유서깊은 곳이다.

이주희는 문충공 연재 송병선의 문인으로, 모친상을 당함에 삼년시묘를 실천한 학행이 높은 효자이기도 하다.

1852년(철종 3년)에 살림집으로 지어진 이 집은 한개마을 안길 끝부분의 오른쪽에 서남향하여 자리잡고 있다.

현재는 도로 모서리 부분의 담장을 틔워서 여기로 출입을 하고 있으나 원래는 사랑채의 오른쪽에 출입구가 있었다고 하며

사랑채 앞에는 차면담도 있었다 한다. 원래의 배치형태는 안마당의 동쪽에 광채가 있어 튼 ㅁ자형을 이루고 있었으나

현재는 일자형의 사랑채와 정침 만이 남아 이자형의 배치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두 건물의 사이가

 넓어 매우 개방적인 형태이다.

한개마을 극와고택. 초가지붕을 하고 있는 사랑채와 양반가옥 형태를 하고 있는 안채가 앞뒤로 배치되어 있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우진각집이다. 원래는 초옥이었으나 현재는 슬레이트지붕이다. 다소 경사진 대지에

자리잡아 앞쪽의 기단은 조금 높은 편이다. 막돌쌓기한 기단 위에 자연석 주초를 놓고 기둥을 세웠다.

어칸 2칸에 앞쪽에 퇴간을 둔 통칸의 온돌방을 두었으며, 오른쪽에는 온돌방과 함실아궁이가 앞뒤로 배치되어 있으며

함실아궁이의 위쪽에는 다락을 설치하였다.

사랑채 뒤로보이는 안채

안채는 정면 6칸 반, 측면 1칸 반 규모의 맞배집이다. 막돌허튼층쌓기한 기단 위에 큼지막한 자연석 주초를 놓고 기둥을 세웠는데

모두 방주를 사용하였다. 왼쪽으로부터 부엌, 안방, 대청, 아랫방이 연결되어 있는데 온돌방의 앞쪽에는

반 칸 규모의 퇴간을 두었으며 부엌의 위쪽에는 다락을 설치하였다.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것 같다 풀만 무성하다

문간방이 있는 대문채를 별도로 두지 않고 기와지붕을 얹은 대문이 있다

다음은 하회댁으로가보자

하회댁 사랑채

 

정원을 아름답고 단정하게 꾸민 데서 집 주인들의 정성 어린 손길이 느껴진다.

안채 출입은 사랑채 전면 오른쪽의 협문을 통하도록 되어 있는데, 협문 옆에는 우산처럼 생긴 향나무가 서 있다.

대감들이 행차할 때 쓰던 햇빛가리개 같아 특별히 호위를 받고 들어가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한개마을 반가의 대부분이 ㅁ자형 배치를 보이고 있으나 이곳의 안채는 ㄷ자형 평면의 정침과 중문간채의 一자형 평면을 취한다.

 이는 남부형 가옥 배치와 북부 ㅁ자형 가옥 배치의 중간 형태로 한개마을에서는 흔하지 않은 방식이다. 동쪽 날개채에 2칸의

 건넛방과 2칸의 마루가 있는데 며느리의 공간이며 시어머니의 안방 및 안대청과 대등한 규모다.

 

이를 보면 하회댁은 상당히 독특한 건물임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에 여성이 소외되고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억압받았다고

 하지만 모든 곳에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하회댁의 시아버지는 안대청 옆에 작은방을 별도로 두어 며느리가 낮잠 자는 공간을

 만들어줄 정도로 며느리 사랑이 지극했다. 또한 여성들이 바깥 활동에는 제약을 받아도 집 안에서만은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또한 이 집에서 특이한 것은 고방이다. 지붕을 높게 하고 돌로 두껍게 쌓아 넓게 만든 고방은 과거의 살림살이를 짐작하게 한다.

 벽체가 워낙 두껍다 보니 밖이 아무리 더워도 안은 서늘해 음식물을 보관하는 데 이보다 좋은 장소는 없었을 듯하다.

안채로 들어가는 협문

하회댁

안동 하회마을에 살던 류씨 할머니가 진주 목사를 역임한 이우에게 시집오면서 하회댁이라고 불리는 건물이다. 

남자의 벼슬이나 당호를 이용해 택호를 정하는 것이 기본이라는 상식을 뒤엎는 경우다. 1745년 건설되어 한개마을의

한옥 문화재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으며 건축 연대를 1630년대로 추정하기도 한다.

사랑채는 전면 다섯 칸으로 대청마루 기둥이 같은 간격을 이루고 있으나 두 칸 크기인 대청마루 부분의 한 칸은 기둥 간격을

 작게 했으며, 작은 폭의 기둥 칸 사이에 섬돌을 놓고 올라가도록 했다. 사랑채는 대문 쪽으로 두 칸의 대청과 툇마루, 머름을 가진

 두 칸의 온돌방, 마루 없는 한 칸의 방으로 되어 있다.

 

한개마을의 고택 중 사랑채 앞 정원을 가장 아름답고 단정하게 꾸민 데서 집주인들의 정성 어린 손길이 느껴진다. 경사지를 이용한

집의 특성상 여름에 대청마루의 북쪽 판문을 열면 사랑채 앞 낮은 담장으로 장애물 없이 마을 들판 너머 앞산까지 보여 수려한

 풍광을 마음껏 느낄 수 있다.

 

 

경천애인

하늘을 숭배하고 인간을 사랑하라

안채도 정원이 꽤나 잘 정비돼 응와고택과함께 볼거리를 많이 제공한다

 

나오면서 다시한번 사랑채 마당과 협문 넘어 안채를 담아본다

하회댁 대문

 

이집도 터가 넓은데 가옥은 멸실된듯 빈터만 남아있다

 

빈터 공간에는 여러종류의 장미가 담장넘어까지 활짝피어 있다

 

진사댁 아래 화단

해바라기도 곱게 단장을 하고

광대바위

다른지역에 비해 전통문화유산이 잘 보존된 한개마을의 지명중에서 그 유래가 민속과 깊이

관련된 것으로 광대걸과 광대바위를 들 수가 있다 한개마을에서는 삼일유가의 광대들이 놀았던

마당을 광대걸이라 하였고 그 광대걸에서 광대들이 놀 던 중 줄놀이를 할 때 한쪽은 나무에 한쪽은

바위에 줄을 매고 줄놀이를 하다가 줄이 귾어저 떨어저 죽은 바위를 광대바위라 한다

마을 어른신들이 어릴 적 저녁에 광대바위 옆을 지나가게 되면 광대귀신이 나온다고 하여 무서워

했다고 한다

페츄니아 같기도한데 자세히 보지 않고 지나며 한컷. 알아봤더니 분홍 달맞이 꽃이라고 ..

 

연못에는 수련도 ...

한개마을 북서쪽 주거지에는 일정한 체계로 연결된 큰 집이 밀집해 있다.

입구에서 조금 올라가면 두 갈래의 길이 주거지 양쪽을 감싸고 있다. 그중 서쪽 갈래는 활처럼 휘어 올라간다.

이 길을 따라가며 오른쪽을 보면 집 밖을 두른 담장이 마치 성벽처럼 보이고, 높이 솟아 있는 한옥 지붕은 더없이 웅장해 보인다.

한개마을 담장은 크게 '외곽 담'과 '내곽 담'으로 나뉜다. 외곽 담은 측면 담과 주택 영역을 구획하는 담이다.

 

마을 가옥이 대체로 경사지에 자리 잡아 산지와 주택 쪽 측면 담은 높고, 앞뒤 주택의 영역을 구획하는 담은 낮다.

내곽 담은 주거 건물의 처마보다 낮아 담 양쪽을 시각적으로 차단, 또는 연속시킨다. 담장 대부분은 흙 돌담이며 메쌓기

 하지 않고 하단부터 자연석과 흙을 어우러지게 쌓았다. 돌담이 덩굴과 어우러져 마을의 고풍스러움을 더해준다.

피라 칸사스 꽃도 활짝

 

 

옛날부터 우물과 빨래터로 사용한듯 정비가 돼서 옛날 모습은 아닌 것 같고

민박용으로 새로지은 건물인지 살림집인지는 자세히 모르겠으나 내생각은 민박집 같다

마을 끝에는 이렇게 그네도 메어있고

목장승(천하대장군 천하여장군)과 솟대

마을 뒤안길에 있는 한천서당

 

 

한천서당

월봉정(月峯亭)

월봉 이정현(李廷賢)의 강학 지소로서 19세기 초에 건립되어
한천서당(寒川書堂)이란 편액을 걸어 놓고 있는 정사(亭舍)이다

영월정사 달빛에 비치는 집이라 해야하나?

강학당

 

일관정은 입구부터 대나무 숲이다

일관정(一貫亭)

교재(僑齎) 이만상(李萬相)의 장구지소에 향사들이 공을 추승하여 세웠다.

 

일관정을 뒤로하고 주차장으로 내려오는데 이런 집도 보여 안타까운 생각만든다

옆에 벽돌로지은 깨끗한 집도 비어있으니....

뒤돌아서서 마을 좌우 뒷산을 살펴본다

 좌청룡 우백호가 뚜렸하고 앞에 백천과 안산도 낮으막하게 한눈에 길지임이 이 돌파리에게도

배산임수 길지이고 명당이 뚜렸하게 보인다

한개마을은 마을 앞으로 백천이 흐르고, 마을 뒤로 영취산이 뻗어 있어 영남 제일의 길지라고 불린다.

한개마을은 풍수지리에 따른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입지 원칙을 따르고 있다. 마을 앞으로 낙동강 지류인 백천이

서에서 동으로 흐르고, 마을 뒤로 영취산 줄기가 마을을 감싸듯 뻗어 있다. 때문에 영남 제일의 길지라고 불린다.

마을 중심에서 800미터 떨어진 곳에 높이 약 70미터의 안산이 있는데, 주산에 비교해 너무 크거나 작지도 않다.

영취산 산자락 해발 40~70미터 범위에 서남쪽으로 마을과 집들이 향하며 남에서 북으로 차차 올라가는 전저후고

 모양을 하고 있다.아래사진은 안산의 모습

빗줄기는 점점 굵어지고 다른 곳도 들려보고 싶지만 오늘은 어쩔 수 없이 집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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