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운마을(山雲마을)
소재지 : 경북 의성군 금성면 산운1리
산운마을은 의성에서 대감마을로 불리는 전통반촌으로, 자연경관이 수려한 영천이씨(永川李氏) 집성촌이다.
마을은 수많은 전설을 간직한 금성산(金城山)을 뒤에, 비봉산(飛鳳山)을 옆에 두고 나지막한 구릉과 평지에 자리잡고 있다.
마을이름은 신라시대 불교가 융성할 적에 수정계곡(水淨溪谷) 아래 구름이 감도는 것이 보여 『산운(山雲)』이라 하였다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마을의 역사는 조선 명종 연간에 영천이씨(永川李氏)가 처음 입향하였다고 전하며,
그 입향조는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학동(鶴洞) 이광준(李光俊 : 1531~1609)이라 한다.
이후 이 마을에서는 이민성(李民宬 : 1570~1629)참의, 이희발(李羲發 : 1768~1850)판서, 한일합방시
애국지사로 건국 공훈을 세운 이태직(李泰稙 : 1878~1913) 등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문화재로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42호로 지정된 학록정사(鶴麓精舍)가 조선 영조 26년 건축되었고,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74호로 지정된 운곡당(雲谷堂)과 제375호로 지정된 점우당(漸于堂),
그리고 중요민속자료 제237호로 지정된 소우당(素于堂)등이 있으며, 이를 포함한 약 40여동의 전통 고가옥이
유존하고, 금성산과 비봉산이 만나는 절경 계곡에는 의상조사가 창건한 유서 깊은 고찰 수정사가 있다
운곡선생 신도비
정조와 자암의 5세손인 운곡과의 일화 한가지.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직접 목격하였기에 노론, 소론 당쟁에 휘말리지 않으려 노력했고, 그 결과 영남인들에게
인재등용도 점점 유리하게 될 수 있었다.
운곡 이희발이 규장각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발탁되어 기획을 맡고 있던 어느 날, 정조가 경연(經筵)을 하는데 초계문신들을
골탕 먹이려고 시운을 어려우면서도 조금 이해되지 않은 운자를 내어 시를 지으라 한 것이다.
그 자리에 있던 초계문신들은 모두 운자에 맞추고자 애를 쓰는 모습이 역역했지만 운곡은 하얀 백지만 낸 것이다.
당연히 정조가 이유를 물었던바, “전하께서 내신 운자의 뜻을 모르는데 어찌 시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이 말을 들은 정조가 “논어에서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진정 아는 것이라.’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하였는데 운곡은 진정 배움을 아는 자로서 자신을 속이지 않고 왕을 속이지 않는 그 심성은
곧고 바르니 가히 영남인의 정신이 살아 있는 사람이다.” 고 하면서 ‘三中’이란 친필을 써 주었다.
정조는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용이 가장 어렵다는 것을 운곡에게 알려주면서 앞으로도 중용을 잘 지켜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정치하기를 바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문화 포커스에서
정조
자암(紫巖) 이민환(李民寏) 1573∼1649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이장(而壯), 호는 자암(紫巖). 세헌(世憲)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여해(汝諧)이고,
아버지는 관찰사 광준(光俊)이며, 어머니는 평산신씨(平山申氏)로 선무랑 권(權)의 딸이다.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으로, 1600년(선조 3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검열ㆍ정언ㆍ
병조좌랑을 거쳐, 1603년 암행어사로 평안도에 가서 수령의 비행과 민정을 살폈으며, 1608년
영천군수로 나갔다. 1618년(광해군 10) 명나라에서 군원을 요청하자, 원수 강홍립(姜弘立)의
막하로 출전하여 부차(富車)싸움에서 패하여 청군의 포로가 되었다.
17개월 동안 청나라의 항복 권유를 물리치고, 1620년에 석방되어 의주에 이르렀을 때 사원을
가진 박엽(朴燁)의무고를 받아 4년간 평안도에서 은거생활을 하다가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서울로 올라왔다. 이괄(李适)의 난 때와 정묘호란 때 왕을 호종하였고,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영남호소사(嶺南號召使) 장현광의 종사관이 되어 출전하였다.
난이 끝난 뒤 군자감정으로 통정계(通政階)에 올랐고, 이어 동래부사가 되어 번거로운 폐단을
근절하였다. 그 뒤 판결사ㆍ호조참의ㆍ형조참판에 임명되었다가, 1645년에
경주부윤으로 나갔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잘 정비된 돌담길이 인상적인 동네길 어느 동네보다 길이 넓어 차량통행도 원활히 할 수가 있다
운곡(雲谷) 이희발(李羲發) , 1768년 ~ 1849년
본관은 영천(永川)이며, 자는 우문(又文), 호는 운곡(雲谷)으로 시호는 희정(僖靖)이다.
1795년 식년문과 병과 급제하여 예조좌랑(禮曺佐郞), 병조정랑(兵曹正郞),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 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쳤으며, 외직으로 영해부사(寧海府使),
영월부사(寧越府使)를 지냈다.
의성 운곡당의 내력을 밝히는 것은 원사료의 소략함과 더불어 근래 편찬된 자료들 간의 내용 차이 때문에 어려움이 있다.
『희정공 운곡 선생 연보(僖靖公雲谷先生年譜)』에 따르면 36세 되던 해 정침(正寢)을 세우고 상량문(上樑文)을
지었다고 하니, 이 건물이 처음 세워진 시기는 1803년(순조 3)으로 볼 수 있다. 61세가 되던 해 ‘거실에 정재(定齋)라는
편액을 걸었다’고 하니 적어도 1828년(순조 28)에는 건물이 완성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문화 유적 분포 지도』 등 대부분의 자료에서는 이희발이 영월 부사로 재직할 당시 의성 운곡당을 건립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건립 시기는 적어도 1826년(순조 26) 이후가 된다. 이상의 기록들을 정리해 보면
의성 운곡당은 빠르면 1803년, 늦어도 1828년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의성 운곡당은 북쪽에 솟은 금성산을 뒤로 하고 남동쪽을 향해 있다. 전면의 토석 담장 사이에 세운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ㅁ자 형 정침이 배치되어 있다. 정침의 양측 칸은 앞으로 익사(翼舍)가 돌출되어 대문채와 함께
‘일(日)’자 형의 배치를 이룬다. 정침의 왼쪽 뒤편에는 사당이 별도의 영역을 이룬다.
안채의 평면은 ㄷ자 형태로 그 앞 왼쪽으로 ㄱ자형의 사랑채, 우측의 ㄱ자형의 고방채는 중문칸을 통해 연접되어 ㄷ자형을
이루어 안채와 상하 병렬로 연결되어 있다. 중문칸 앞에는 안채로 들어가는 시선을 차단할 수 있게 길이 3m, 높이 2m의
ㄴ자형 차면(遮面)담을 설치하였다. 전통 가옥을 보면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쌓아 놓은 차면담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이는 남녀유별, 부부유별과 같은 유교 이념이 건축에 반영된 것이다. 안채의 마루를 높게 만들어 사랑채 손님으로
누가 오는지를 볼 수 있도록 해 놓은 점이 특이하다.
의성 운곡당은 영천 이씨 후손인 이병직이 소유·관리하고 있다. 의성 운곡당은 1999년 12월 30일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374호로 지정되어 관리되다가 2013년 4월 8일 경상북도 민속 자료 제165호로 승격되었다.
1920년대에 일부 개축되었으나 의성의 대표 양반 마을인 산운 마을에서도 손에 꼽히는 고택(古宅)으로, 조선 후기
양반 저택의 형태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운곡댁은 거주자가 있어 정리정돈이 잘된 집인데 항상 문이 잠겨있어 들어가 보지를 못한다
전에 왔을 때도 안채는 보지를 못했다
이집은 각종 꽃을 잘 가꾸어 놓아 정겹게 느껴진다
만첩 빈도리 같기도하고
붓꽃 같은데 색상이 특이해 처음보는 꽃이다
학하 고택을 나와 소우당으로
소우당은 공사 중이라서 문이 활짝 열려있고 조금 있으니 거주하시는분이 들어와
간단히 설명을 해주신다
전면에 세운 6칸 규모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사랑 마당을 사이에 두고 ‘ᄂ’자형의 사랑채와 ‘ᄀ’자형의 안채가 튼 ‘☐’자형의
배치형태를 이루고 있다. 남쪽으로는 ‘一’자형의 문간채가 있고 그 서쪽에는 외측간이, 안채의 북서쪽에는 내측간이 있다.
안채의 서쪽에는 별도의 담장을 돌려 공간을 형성하고 그 안에 안사랑채 또는 별당으로 불리는 건물을 배치하였다.
주위에는 연못과 각종 나무를 심어 정원으로 꾸몄으며, 안채와 사랑채에서 각각 출입할 수 있도록 문을 두었다.
소우당 주인장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5칸 반 규모의 ㄱ자형 건물인데, 평면은 좌로부터 부엌, 안방, 대청, 건넌방이 연접되어 있고,
건넌방의 전면으로는 축이 꺾이어 중간방, 대청, 갓방이 연결되어 있다. 사랑채는 중문간의 좌측에 자리 잡고 있는데
좌로부터 2통칸의 사랑마루, 2통칸의 사랑방, 부엌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 반 규모인데,
평면은 부엌, 안방, 대청, 건넌방이 연접되어 있으며,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퇴간을 두었다.
안에서본 문간채
의성 소우당 고택의 공간 분할을 보면, 장인(匠人)인 목수에게만 맡겨서 지은 집이 아니라 화가나 풍수가의 참여가
있었다고 보인다. 금성산 영기를 받아들이는 지세를 살리고 개울에 못을 조성하고 외딴 산길의 오솔길을 내고,
깊고 한적한 터에 유연함을 더하는 별당을 짓고 심산의 원림을 조성하였다. 살림집 공간은 사랑마당, 안마당,
뒷마당을 밝게 트이게 하여 햇볕을 받아들이게 하여 서쪽 별원과 대조적인 경관을 조서하였다.
소우당은 별당채가 볼거리다. 안채와 사랑채에서 연결되는 곳에 원림을 조성해놓았다.
원림 중앙부에 별당이 있고 그 아래로 연못과 수림이 있는 정원으로 꾸몄다. 별당채 연못은 우리나라 지도 모양인데,
의도적으로 그리 한 것인지 만들고 보니 맞아떨어졌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시집가지 않은 딸을 위하는 마음으로
아버지가 만들었다는 이야기만 전해내려올 뿐이다. “별당채는 당시 영천 이씨의 권력이 만만치 않음을 말해준다
정침의 좌측에 위치한 안사랑채 또는 별당으로 불리우는 건물을 중심으로 각종 수림, 연못, 보도 등이
조성된 정원이 꾸며져 있어 조선 시대 별서 건축(別墅建築)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인정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특히 담과 문으로 가옥의 다른 공간과 분리되어 있는 별채에는 연못과 넓은 정원이 딸려 있는데
그 아름다움 덕분에 ‘영남 제일의 정원’이라 칭송 받는다고 한다
부자지만 겸손한집 집밖으로 연기가 나가지 않게 배려한 낮은 굴뚝
사랑 마당은 314.7㎡[95.2평]인데, 안채 뒷마당은 사랑마당 면적 2배가 되는 622.2㎡[188.2평]이며,
별원공간은 3,177㎡[961.1평]으로살림집 공간 면적 1,595㎡[482.5평]의 2배가 되도록
마당과 별원을 분할하였다. 이것은 상지(相地)와 입기(入基)의 전문가들이
참여하여 정이합의(精而合宜)를 이룬 경지를 보는 것 같다.
안채 뒤뜰
그시절 사용했던 우물
뒤에서본 영모재
영모제 울타리도 없이 덜렁 건물 한채만 서 있다
마늘의 고장답게 논이고 밭이고 마늘 농장이 가는 곳마다 벼농사를 연상 할 만끔 넓게 자리하고 있다
지은지 얼마 안되는 한옥들 한옥스테이로 사용하는 것인지?
학록정사 대문
동협실 居仁, 서협실 由義,
강당을 立敎堂, 서재를 觀善軒, 대문을 蘇始門, 사당을 光德祠라고 하였다.
학록정사 강당의 대청 위에 왼쪽에는 거인(居仁), 오른쪽에는 유의(由義)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이 단어 두 개가 삼부자로부터 이어진 산운마을 영천이씨들의 좌우명과 같은 것이다.
居仁, 由義 말 속에는 인간다움을 잃지 않고 사람으로서의 바른길을 항상 생각하며,
불의에 맞서 항상 행동으로 실천하는 정의로운 길을 가라고 가르치는 영천이씨
가문의 전통이 함축되어 있다
광덕사 사당
학동(鶴洞 이광준(李光俊) 1531년 ~ 1609년
본관은 영천(永川)으로 자는 준계(俊季)이며 호는 학동(鶴洞)이다.
1562년 별시 병과 급제하여 내관직으로 성균관 학유(成均館學諭),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 형조 참의(刑曹參議)를 지냈으며 외직으로 청송부사(靑松府使),
강릉부사(江陵府使), 중화부사(中和府使), 충주목사(忠州牧使),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지넸다..
증직으로 가선대부 예조참판겸 동지의금부 춘추관 성균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
嘉善大夫 禮曹參判兼 同知義禁府 春秋館 成均館事 五衛都摠府 副摠管)이다.
아직도 이런 초가 지붕을 유지 하는 곳도 있다
이팝나무 꽃도 흐트러지게 피어있다
다시 산운 생태공원 주차장으로 왔다
붓꽃을 마지막으로 담고 이제 부산으로 출발한다고 한다 아직 4시인데 너무 이른게 아닌가 생각이든다
하루동안 많이도 걸었다 오늘 걸음수 14.000 보
마리짜강변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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