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사 연혁
고운사는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본사로 신라 신문왕 원년(서기 681년)에 해동 화엄종의 시조이신
의상대사께서 창건하신 사찰이다.
부용반개형상(연꽃이 반쯤 핀 형국)의 천하명당에 위치한 이 사찰은 원래 고운사(高雲寺)였다.
신라말 불교와 유교ㆍ도교에 모두 통달하여 신선이 되었다는 최치원이 여지ㆍ여사 양대사와 함께 가운루
(경북 유형문화재 제151호)와 우화루를 건축한 이후 그의 호인 고운(孤雲)을 빌어서 고운사(孤雲寺)로
바뀌게 되었다.
고려 태조 왕건의 스승이자 풍수지리사상의 시조로 받들어지는 도선국사가 가람을 크게 일으켜 세웠으며
그 당시 사찰의 규모가 五法堂十房舍(5동의 법당과 10개의 요사채)였다고 한다. 현존하는 약사전의
부처님(보물 제246호)과 나한전 앞의 삼층석탑(경북 문화재자료 제28호)은 도선국사께서 조성하신
것들이다.
특히 고운사는 해동제일지장도량이라 불리는 지장보살영험성지이다.
옛부터 죽어서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고운사에 다녀왔느냐고 물었다고 하는데 지장보살님의
원만자비하신 풍모는 물론이거니와 명부십대왕의 상호와 복장도 다른 사찰에서는 보기 힘든 위엄과
정교함을 자랑한다.
일제시대에는 조선불교 31총본산의 하나였고 지금은 조계종 제16교구의 본사로 의성, 안동, 영주,
봉화, 영양에 산재한 60여 대소사찰들을 관장하고 있다. 사세가 번창했을 당시에는 366간의 건물에
200여 대중이 상주했던 대도량이 해방이후 쇄락하여 많은 사찰재산이 망실되고 지금은 이십여명
대중이 상주하는 교구본사로는 작은 규모의 사찰로 전락하였다.
이 정도 규모 이상의 고찰로서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입장료를 받지 않는 고운사는 민가로부터 3km
정도 떨어져 오염되지 않은 순수함을 자랑하며 일주문에 이르는 솔밭 사이 비포장길은 부처님께
진실된 마음으로 다소곳이 다가서는 불자들의 마음처럼 포근하고 정감넘치는 모양을 하고 있다.
노스님 두분이 걸어 내려오시는데 너무 평화로워 보인다
고운사 일주문
일주문은 사찰의 입구로 세간과 출세간의 경계이다.
가장 아름답고 한국적인 일부문을 꼽으라면 고운사의 일주문을 추천하는 이들이 많다.
고운사 사천왕문
불상높이56cm 무릎폭47cm 고려시대 불상으로 추측 비문화재다
고운사 고불전
고운사 고불전은 오래된 석불을 봉안해놓은 아주 작은 전각으로 그 요철 모양의 구조가 특이하다.
옆칸에는 불망비가 있는데 철비(鐵碑)이다.
당나라에서 돌아온 신라 정치가 최치원은 크게 상심하였다. 혼자 힘으로 난세를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옛 조문국 땅
고운사에 은둔해 도를 닦았다. 개울을 가로질러 정자를 짓고 가허루(駕虛樓)라 명하고 그 옆에 또 집을 지어
우화루(羽化樓)라 명했다. '텅 빔을 멍에 삼고, 신선이 되리라'는 뜻이다. 훗날 가허루는 가운루(駕雲樓)로 개명됐다.
고운사 가는 숲길은 참으로 아름답다. 특히나 안개 낀 이 봄날 아침에는.
그 우화루 정면에는 고운사 현판이 붙어 있다. 가로로 '孤雲寺'라 쓰고 왼쪽에 세로로 壬寅仲夏李銖澈十歲書라 적었다.
1902년 임인년 여름 이수철이 열 살 때 썼다는 뜻이다.
열 살! 우두산인(牛頭山人)이라 불렸던 서예 신동 이수철(1893~1909)은 열일곱에 요절해 우두산에 묻혔다.
이종해(李鍾海)라고도 한다. 고운사 모선암 현판도 그 작품이다. 그런데 허망타, 요절한 천재 소년은 흔적도 유택도
남아 있지 않다
고운사 가운루(駕雲樓)
고운사 가운루는 통일신라 최치원이 지었다고 하는 누각이며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건축물
중의 하나로 꼽힌다. 계곡위로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다시 나무기둥을 세워 건물을 지었다.
고운사 우화루(雨花樓)
고운사 우화루는 가운루와 마찬가지로 최치원이 세운 누각이다.
고운사 우화루는 극락전 아래에서 법당의 보조적인 역할을 하였다. 고운사 우화루에는
고운사(孤雲寺)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고운사 종각
고운사 종각은 법고ㆍ범종ㆍ목어ㆍ운판 등 불교 사물(四物)이 설치되어 있다. 조석예불에 그 소리를 낸다.
고운사 극락전
고운사 극락전은 아미타부처님과 관세음ㆍ대세지 두 보살을 모시고 있는 법당이다.
현재의 대웅보전이 신축되기 전까지 고운사의 큰법당 역할을 하던 유서깊은 건물로
소박하면서 절제되고 한 엄중한 기상을 엿볼 수 있다.
고운사 만덕당(萬德堂)
고운사 만덕당은 스님들의 공양장소이며 간혹 회의장소로도 쓰인다.
공양을 짓는 식당과 연결되어 있다.
고운사 연수전 (延壽殿)
고운사 연수전은 최초에 조산 영조가 내린 어첩(御帖)을 봉안하던 건물로 현재의 건물은
조선 고종이 새로이 지었다. 고운사 연수전 만세문이라는 현판에서 의미를 알수 있듯이
임금의 장수를 기원하던 곳으로 우리나라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건축형태와 벽화를 볼 수 있다.
고운사 연지암
고운사 연지암은 원래있던 연지암을 헐고 1997년에 확장하여 지은 건물로
그앞에 작은 연못이 있었다. 소임을 보는 스님들의 숙소와 차실이 있다.
고운사 약사전
고운사 약사전에는 약사여래부처님을 주불로 모신다.
도선국사께서 조성하신 석불(보물 제246호)은 균형잡힌 몸매와 인자한 상호, 비교적 완벽한
보존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고운사의 모든 불상 가운데 가장 오래 되었다
고운사 명부전(우)
고운사 명부전은 약 300년 전에 세워진 법당이다.
명부전은 사후 인간이 심판받는 장소를 형상화 한 곳으로 지장보살을 모시고 있으며
염라대왕을 비롯 십대왕과 그 권속들이 조성되어 있다. 죽어서 저승가면 염라대왕이 고운사에
다녀왔느냐고 물었다 한다.
고운사 삼성각(좌)
고운사 삼성각은 원래 없던 것을 1998년도에 새로 지었다. 삼성각에는 민간신앙인 산신ㆍ
칠성과 나반존자(독성대왕)를 탱화로 조성하여 모신 전각이다.
고운사 적묵당(寂默堂 좌측 건물)과 아거각(我渠閣 우측 겅물)
고운사 적묵당은 1990년에 세워진 건물로 객실이다.
고운사 아거각은 원래 서산대사의 진영을 모시던 영각이었으나
현재는 스님의 숙소로 쓰인다.
고운사 대웅보전
고운사 대웅보전은 석가모니불과 문수보살ㆍ보현보살을 모시고 있는 고운사의 큰법당이며
1992년도에 완공된 50평 규모의 전각이다. 대중의 조석예불과 사시불공 등 모든 의식과
법화가 이루어지는 고운사 신앙의 중심지이다. 법당안에는 신중단과 조사진영을
모신조사단, 선망조상의 위패를 모시는 영단이 있다.
대웅전과 대웅보전 大雄殿 大雄寶殿
우리나라 사찰에는 여러채의 크고작은 불전있고 그 불전들에는 각각의 이름이 붙어있다.
이와 같은 이름들은 아무렇게나 붙여진 것이 아니라 그 건물에 모셔진
불 · 보살들에 따른 것이다. 그러므로 불전의 이름을 보면 그 불전에 어떤 불 · 보살이
모셔저있는지 알수 있다. 그 중에서 대웅전은 석가모니부처님을 모신 불전이며,
대웅보전이란 대웅전의 격을 높여서 부르는 말이며,이러한 대웅전이나 대웅보전은
가장중요한 불전이며 사찰경내의 중심에 위치한다.
대웅이란 석가모니불에 대한 수많은 존칭가운데 하나이다
대웅전
가운데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시고 그 좌우에 문수보살, 보현보살을
협시脇侍보살로 모시는 경우가 많다.
협시脇侍보살
사찰의 각 불전에 중심이되는 본존불을 모시고 그 좌우에는
협시보살脇侍菩薩을 모신다. 협시보살은 여러 부처님들의 곁에서 중생구제를
보좌하면서 시중을 드는 보살이라는 뜻이다.협시보살의 특징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화려한 장식을 두르는등 인간적인면모를 띄고있다.-
부처님은 머리에 모자를 쓰는 경우가 없음
대웅보전
주불로 가운데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좌우에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불을
협시불로 모신다. 이때 각 부처님 좌우에 다시 협시보살을 모실수도 있다.
부처님 좌우에 협시로 보살을 배치하는 것보다는 부처를 협시로 모시는 것은 훨씬 격
이 높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은 시대에 따라 조금다르게 적용되는 경우도 종종있다.
구름을 타고 오른다는 등운산에 위치한 절 고운사는 산이름과 어울리게 절의 이름의 의미도
높이뜬구름이라는 뜻을 지닌 고운사이다. 신라시대에 의상이 창건한 고운사는 깊은산중에 있는
절이라 공부하기에 좋은 곳이니만큼 공부하러 스님들이 많이 찾는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고운사에
와서 글아는체 하지말라'라는 속설이 전해내려온다고 한다.
이 탑은 고려시대 3층 석탑으로 높이는 3.33m[10尺]이다. 현재 고운사 경내 동쪽 산기
슭에 서 있다.
이중 기단 위에 3층 석탑을 올린 형식으로 기단부 석재 일부가 결실되었으며, 아래 기단에
는 각 면마다 모서리 기둥 2개와 안기둥 1개 씩을 모각(模刻)했고, 덮개돌은 부연과 괴임
두 단을 각출했다. 탑의 몸돌은 모두 모서리 기둥만을 본떠 새겼고, 지붕돌은 제4지붕돌
에서 4단 받침 제2, 제3지붕돌에서는 3단 받침을 각출하여 위로 올라가면서 간소화 시키고
있다. 제3지붕돌 위에서는 네모난 형의 노반(露盤)을 보존하고 있으며, 아래 기단면석에
창모양의 안상(眼象. 靈氣窓)을 새겼을 뿐 단조로운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제 철쭉도 낙화에 이르니 다음은 무슨 꽃이 필까?
이곳도 계곡에 물이 없네 사촌마을처럼 모래 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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