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암공은 슬하에 네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 둘째가 죽헌공(竹軒公) 균(筠)이다.
그는 선친의 유훈에 따라 수양과 후학양성에만 힘 쏟았다. 군위 현감을 지낸 장인의 권유로 봉화 거촌에
터를 닦고 자리 잡았으니, 그가 거촌리에 거주하는 광산김씨 동성촌락의 입향조인 셈이다.
국가민속문화재 제170호. 집에 걸려 있는 「쌍벽당중수기」에 의하면 가정병인(嘉靖丙寅, 1566년)에 안채가 지어졌다고 하는데
가전(家傳)하는 바로는 입향시조인 김균(金筠)이 풍산(豐山)의 구담(九潭)으로부터 이주하면서 지은 것이라고 한다.
그 뒤 1864년(고종 1)에 남익삼간(南翼三間)을 고쳤으며, 1892년(고종 29)에도 대대적인 중수를 가하고 외당인 별당채를 따로 지었다고 한다.
높지 않은 뒷산을 배산(背山)으로 하여 10여 호의 집들이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있는데, 이 집은 제일 깊은 자리 바로 산기슭에 위치하여 있다.
남향한 양지바른 터전에 경사진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고 있어서 솟을대문 있는 행랑채가 가장 낮은 자리에 있고 차츰 높아가다가
안채의 정침(正寢: 몸채)은 월등히 높게 지어져 있다.
봉화·영주·안동 지방의 □자나 {{#029}}형의 날개집에서 볼 수 있는 경사진 터전을 이용하는 살림집의 예에 속하는데, 정침이 유난히
과장되어 있는 점이 특색이다.
솟을대문이 있는 바깥행랑채는 단간통(單間通)의 7칸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안채에 달린 사랑방이 마주 보인다.
정면 3칸, 측면 한 칸 반인데 남익삼간(南翼三間)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이 집은 중문채보다는 월등히 높게 지었고
지붕도 팔작기와지붕으로 독립시켰다.
외당인 쌍벽당이 건축되기 이전까지는 여기가 남자들의 거처였다. 중문채와 사랑채가 맞닿은 부분에 중문이 있는데 들어서면 담벼락이
막아선다. 이것은 내외벽으로 연통되어서 들어와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지면 왼쪽으로 비껴서서 다음 칸 터진 곳을 통해서 안마당에
들어선다.
안마당 북쪽 끝에 정침이 남향하였고 마당의 좌우로는 동서 변의 날개가 있어 마당을 감싸고 있다. 정침의 중심부는 육간대청
(六間大廳: 넓은 면적의 대청을 일컫는 표현도 됨)이다. 기둥 간살이는 열려 있어 분합문의 설치 등이 없다.
단지 뒷벽에만은 머름을 드리고 바라지창을 달아서 겨울철 북풍한설을 막아내도록 의도하였다. 대청의 좌우로는 안방과 건넌방이 있다.
안방 쪽은 방 남쪽에 부엌이 있고 건넌방 남쪽 칸에도 함실아궁이의 시설이 있으나 이 한 칸은 별당으로 통하는 협문으로 열렸다. 협문의
남쪽으로는 사랑채에 달린 골방이 있다. 정침에서의 특징은 육간대청을 구조하였다는 점이다.
별당인 쌍벽당은 안채의 동쪽, 사랑채보다 뒤로 물러선 자리에 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8칸 넓이인데 그 중의 2칸만 방이고
나머지는 마루를 깐 대청이다.
대청의 뒤쪽 벽과 동쪽 측벽에는 머름을 드리고 문얼굴을 세워 바라지창을 달았고, 문벽선과 기둥 사이에는 판벽을 하였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지붕은 기와를 이은 팔작지붕이다. 별당 뒤로는 사당채가 형성되어 있다.
이 고택은 다른 고택과 다른 것들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바로 대문 앞에 높게
올라와 있는 사랑마당이다. 이 집의 사랑마당은 다른 집과 달리 세벌대로 쌓은 기단 위에 높이 만들어져 있다.
보통의 경우라면 마당은 낮추고 사랑채는 축대를 높이 올려 사랑채를 우러러 보듯 짓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쌍벽당의 사랑채는 이와는 반대로 사랑마당은 높이고 사랑채는 낮춰 지었다.
집터에 이어 사랑채마저도 일반적이지 않다. 왜일까? 그 이유는 아마도 높이 솟은 사랑채처럼
기고만장하지 말고 낮은 자세로 처신을 삼가라는 뜻에서 그리 한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사랑채를 중심으로 좌측은 안채, 우측에는 쌍벽당이 있다.
사랑채는 전면 세 칸, 측면 두 칸 규모의 집으로, 막돌 바른층쌓기 세벌대 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
하루(霞褸)와 송죽헌(松竹軒) 편액이 붙어 있는 사랑채는 다른 집의 사랑채와 달리 과하지 않으면서도
단아한 것이 송죽(松竹)이라고 불리셨던 김언구 선생의 생전 카랑카랑한 선비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는 건물이다
쌍벽당은 김용석 어른의 둘째인 죽헌공(竹軒公) 균(筠)이 봉화 거촌에 터를 잡고 지은 집이다.
쌍벽당이란 당호는 죽헌공의 맏아들인 언구(彦求)의 호인 쌍벽당(雙壁堂)에서 따 왔다고 한다.
그런데 이 쌍벽당이 터를 잡은 거촌이 좀 묘한 곳이다.
보통의 고택은 배산임수에 좌청룡, 우백호와 같은 좋은 터에 자리를 잡아 집을 짓고,
자손의 번성과 입신양명을 바라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쌍벽당이 있는 터는
다른 집터와는 사뭇 다르다.
풍수지리를 아는 분의 말에 의하면, 쌍벽당이 있는 집터는 집의 양 옆과 뒤가 산으로 막혀 있고 앞은 틔어 있는
명형국지(名形局地-외풍을 막아주고 낙엽 등이 모여 잘 산다는 길지)의 길지(吉地)이지만,
그 근처에 물이 없어 후손들의 관운이 좋지 못한 터라고 한다. 그야말로 입신양명을 꿈꾸는
사람에게는 최악의 집터요, 대과에 합격해 관직에 오르는 것이 최고의 효도이자 성공으로
쳤던 조선시대에 그 누구도 환영 받지 못할 터인 것이다.
그러나 진사 이후 관직에 오르지 말라는 유훈을 지켜야 했던 광산 김씨 후손들에게 이 터만큼 좋은 곳이
어디 또 있었을까?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죽헌공이 이 거촌의 터로 들어올 때만해도 거촌은 인적도 없고
오직 수백 년 된 춘양목들만이 산을 뒤덮고 있던 오지였다고 한다. 그래서 쌍벽당을 지을 때도 집 지을
목재를 먼 곳에서 가져온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집터에서 나무를 잘라 집을 다 지었다고 하니 쌍벽당이
들어서기 전 주변 상황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쌍벽당의 사랑채나 안채에 쓰인 목재는 이를
증명하듯 하나같이 크고 웅장하다.
쌍벽당 건물의 배치는 전저후고(煎低後高-앞은 낮고 뒤가 높은 지형)의 지형에 따라 솟을대문이 있는 대문채를
앞으로 그 뒤로 안채, 사랑채가 자리 잡고 있으며, 쌍벽당은 사랑채의 동쪽에 별당으로 붙어있다.
이렇게 내부를 둘러보고 있는데 김두순 주인장께서 오시더니 집안내력을 설명하신다
우리 선조이신 담암공潭庵公 김용석金用石어른은 성종 때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진사시까지 합격하셨는데,
연산군이 왕이 되고 사화士禍의 조짐이 보이자, 벼슬의 뜻을 접고 여기서 가까운 안동 풍천면 구담이란 곳으로
낙향 하셨고. 그리고는 학문과 후학 양성에만 힘을 쏟으셨다 한다. 그리고 자손들에게도 ‘성균관진사만은
아니할 수 없으나, 대과에는 참여치 마라’라고 유언을 남기셨다고 한다. 이말은 괜히 출사해 혼탁한 정치판에서
몸을 더럽히지 말고, 오직 수신과 학문에만 힘쓰라는 말이셨던 거지요. 그런데 그 유훈이 어찌나 엄했던지
그 분의 셋째 아드님이 무관으로 성주목사가 됐는데, 문관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관직을 얻었다
해서 족보에 그 이름을 빼버리기까지 했다한다.”
안채는 사랑채와 붙어 있는 중문으로 들어가 왼쪽으로 돌아 들어가면 만날 수 있다.
중문은 문 좌측으로 판벽과 위로는 살창이 나 있는 중문칸으로 되어 있다.
이는 중문칸이 안채로 들어가는 통로의 역할과 사랑방의 난방을 하는 부엌의 역할을 같이 하고
있기 때문에 이리 지은 것이다. 중문칸에 살창을 낸 것은 난방을 위해 불을 땔 때 연기가 밖으로
빠져나가 안채로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있고 공기의 순환과 채광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안채는 ‘ㅁ’자 형태의 전형적인 경북 북부 지역의 가옥 구조를 보이고 있다.
대청을 바라보고 좌우측으로 안방과 건너방이 있고 건너방 끝의 부엌 칸은 별당인 쌍벽당으로 통하는 통로가 있다.
안채의 대청은 일반 민간가옥에서는 보기 힘든 둥근기둥이 전면에 4개 후면에 4개 총 8개가 세워져 있다.
보통 네모난 기둥인 방주(方柱-방형기둥)는 민간가옥에서, 둥근기둥인 원주(圓柱-두리기둥)는 궁궐과
사찰, 관아의 주요 건물과 같이 권위를 보여줄 필요가 있는 건물에 주로 사용했다.
이는 우주에 대한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기본 이념인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 낳다)을
지키기 때문이다. 즉 집을 지을 때 상대적으로 낮은 민간에서는 하늘을 상징하는 원주 대신 땅을 상징하는
방주를 사용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쌍벽당의 대청은 과감하게 원주를 세워 집의 격조를 높였고, 동일 두께로 원주를 깎을 경우 기둥
중간이 가늘어 보이는 착시현상을 막기 위해, 기둥 중간의 두께를 늘리고 위아래로 갈수록 가늘어지는
흘림법을 사용한 배흘림기둥으로 만들었다. 이 배흘림기둥은 안채가 만들어진 이후 지금까지 다른 목재로
교체하지 않고 원래 있던 그 기둥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고 하니 일반 사찰에서도 보기 힘든 500년 넘은
기둥을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쌍벽당(雙碧堂)은 연산군 때의 성리학자인 쌍벽당(雙碧堂) 김언구(金彦球)를 기리기 위해 1566년에 건립한
정자이며, 안채는 김언구(金彦球)의 부친인 죽헌(竹軒) 김균(金筠)이 1450년에 건립하였다 한다.
안채가1450년에 처음 지었으니 정확하게 562년이 지났다.
봉화에 와보니 유난히 조선시대의 사화와 정쟁을 피해 은거한 양반들이 많고 그 후손들이 조상들이 지은 고택을
지금까지 잘 보존해서 실제로 살고있는 고택들도 많이 있다.
쌍벽당의 종손이자 현재 고택을 관리하시는 경추 김두순옹이 친절하게 집안 구석구석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셨다.
원래 꽃잔디를 깔았으나 그게 한옥 고택과 어룰리지 않는다는 조언을 받고 전부걷어내고 마사토를 깔아 다짐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다짐을 하다가 팔을 다치셨고 한옥을 관리하는게 쉬운일이 아이라고 강조하신다.
이날 종손이신 경추 김두순옹께 많은 말씀을 들었는데 이분의 일생은 이 고택을 관리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살아온신것 같다.
45년간 교육자로 생활 하시다가 은퇴하셨는데 고택을 관리하기 위해 봉화땅을 떠나신 적이 없다고 하신다.
지금도 자손들은 전부 외지에서 사시고 부인과 함게 두분이 이 넓은 저택을 쓸고닦고 계신다.
그런데 이고택이 지은지 562년이 지난 전국적으로도 손꼽히는 고택이라고 자부심이 대단 하셨다.
객지에 나가있는 자재분이 이날은 오셔서 같이 다니며 설명을 해주시는데 승차시간은 다가오고 난감하기도 했다
뒤에는 사당이 있다
2014년7월 9일에 천둥과 번개가 몰아치는 밤에 도둑이 들어 사당에 보관 중이던 감실(監室·사당 안에 신주를 모셔 두는 장)
2점과 제상(祭床) 1점을 훔쳐갔다.지난 2000년과 2003년에도 도둑이 들어 보관 중이던 《갈암집》, 《충재집》,
《퇴계선생언행록》 등 고서 400여 점을 도난당했는데 아직까지찾지 못하고 있다.
안채에서 오른쪽으로 빠져 나오면 쌍벽당이 보인다.
쌍벽당은 좌측으로부터 방 한 칸 대청 세 칸 구조로 되어 있으며 전면과 좌측면에는 쪽마루마루 끝에
기둥이 없는 마루가 놓여져 있다. 그리고 쪽마루에는 마루 끝에서 난간이 밖으로 조금 나와 있는
계자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쌍벽당의 상부 구조를 보면 이 속에 들어간 목재의 굵기가 다른 집에 비해 더 굵고 큰 것을 볼 수 있다.
두꺼운 목재를 쓰면 상부 구조물이 묵직해져 둔한 느낌이 나는데, 쌍벽당의 이런 묵직함은 춘양목의
아름다운 나이테 무늬와 조화롭게 섞이면서 독특한 멋을 보여주고 있다.
싸이언스올에서
구양서원
구양서원은 시간에 쫓기어 보지 못하고 자료를 수집해 올려본다
(孝行學德)을 기리기 위하여 1914년에 세덕사(世德祠)를 건립 제향하여 오다가 1924년에 유림에서 구양이사(龜陽里社)로
승격시켰다.
그 후 1984년에 후손 변교우(邊敎雨) 등의 제의에 따라 평북 태천(平北泰川)의 송곡서원(松谷書院)에 배향(配享)된
원주 변씨 시조인 대은 변안열(大隱 邊安烈 : 1334~1390)의 위패(位牌)를 모시기 위해 이곳에 전통한옥 9동 45칸을
건립하고 서원(書院)으로 승격받았다. 현재 대은 변안열, 백산 변경회, 봉은 변극태 3인을 배향하여 오고 있다.
- 文化遺蹟總覽(2000, 奉化郡)을 참고로 연대수정 또는 삽입한 것임.
이와 같이 거촌에는 교육에 힘쓰고 효행을 기리는 건축적 흔적이 부각되고 있다. 특히 구양서원의 건축물의 배치와 공간의
구성은 학문적 공간에서 조형미가 뛰어나고 수직적이고 사선적 동선으로 사당으로 오르는 계단참에서 펼쳐지는 정원에
조형물(불굴가 : 시비)의 상징성은 이 댁의 정신성을 엿볼 수 있는 교육적 공간이다.
불굴가(不屈歌) 주인공인 이 댁 시조 변안열(1334~1390)은 고려공신(심양출신)으로 1351년 무과에 장원(18세)하여 등과한
후 병란으로 심양에 가 있던 공민왕을 따라 고려에 들어와 본관을 원주로 하사 받았다. 공민왕 10년(1361) 안우를 따라
홍건적을 토벌하여 2등공신으로 판소부감사가 되었고 또 안우와 함께 개성을 수복하여 1등공신이 되었으며 예의판서가
되어 추성보조공신의 호를 받았다.
큰사랑채
부원수가 되어 최영과 함께 제주를 평정한 뒤 지하문부사, 문하평리가 되었으며 우왕(32대 : 1374~1388)
추충양절선위익찬보조공신(高麗國推忠亮節宣威翊贊補祚功臣壁上三韓三重六匡)의 호를 받았고, 양광, 전라도
도지휘사 겸조전원수로 있을 때 나세, 조사민, 유실과 함께 부령에서 왜구를 크게 물리쳐 문하찬성사로 승진되었다.
당시 고려 우왕2년(1376) 10월 왜선 50여척이 웅연(熊淵)에 내박하여 적현을 넘어 부령(扶寧)에 침입,
동진교를 부수어 조운이 중단되었으나, 상원수 나세와 변안열 등이 적병 1천여명을 행안산에서 격파하였다는
기록이 있다(부안문화유산자료집, 2004, 부안군, P.467). 이곳에서 원주 변씨들은 광산 김씨의 집성촌과
이웃하면서후손들에게 효행과 학덕을 이어주고 있다.
특히 변씨들은 근·현대사를 겪으면서 거촌지역에 전통적 한옥문화를 심는다.
예를 들면 시조를 모신 사당정원과 와룡헌(臥龍軒)을 제일 위에 정하고 형제들의 저택들이 대규모인 건축물로
근대와 현대를 잘 조화하면서 한국전통살림을 담은 공간을 지혜롭게 소화하고 있다.
특히 변교우는 마을바꾸기 운동(약 40년)을 주도하면서 애향심(무료약방 운영, 가로수 식재…)이 남다르다.
부분적으로 공간적 비례와 조경 그리고 유지관리에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비교적 한국의 격동기적 면모를
느낄 수 있는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지역의 건축재료와 현대화된 건축재료가 이용되면서
우리의 과거와 현대를 이중적 언어로 설명해주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시조의 무적(武的)인 북부의 용맹성이 영남의 학술적 심성과 만나면서 문(文)과 무(武)를 연계시키는
이중적 기질이 근대화에 밑거름이 되지 않았나 생각케 한다.
안채공간
즉 그것은 구양서원의 상징적 조형물인 불굴가비(不屈歌碑)와 대문채 밖에 식재된 한그루의 회화나무에서
교훈적 메시지(Message)를 전달하고 있다. 즉 회화나무의 염원은 후대에 변우혁(고려대 교수 : 임학)과
같은 학자를 탄생케 한다.
따라서 거촌에 심어진 원주 변씨의 씨족문화는 불굴가의 무술정신(武術精神)과 회화나무의 선비적 학술정신(學術精神)을
후손들에게 암시하는 듯하다. 여기에 유어예(游於藝)의 예술정신(藝術精神)이 가미된다면 금상첨화가 되지 않을까?
다시 말하면 무술과 학술 그리고 예술이 접목되면서 이곳 거촌이라는 과거의 영광을 누리면서 살기 좋은 풍수생태적으로
시범마을이 될 것이다
난간의 구조미 난간 모퉁이를 구조적으로 보완하고 있다 안채 대문에서 바라본 안채의 모습이 문중의 핵심적 공간이다.
좌.기단 석공사가 현대화 돠여 새로운 조형감을 준다 우.와룡헌(臥龍軒)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위치한 별채로서 조형감이
뛰여 나다.
중심공간 대문에서 본 큰 사랑의 모습이다. 대문채 누마루에서 바라본 대문채의 일부가 보인다.
조형물 불굴가가 국한문으로 기록되여 시조의 충성심을 표현하고 있다.
학문적 공간미 구양서원의 위풍이 당당하다
마당 공간의 막힘이 가변적이다. - 진덕문이 대문채 중앙에 자리하고 있다.
쌍벽당을 거처 여기 백두대간 수목원으로 왔다
운영일: 화요일~일요일
- 하절기(3월~10월) 관람시간:9:00~18:00(17시까지 입장 가능)
- 동절기(11월~2월) 관람시간:9:00~17:00(16시까지 입장 가능)
국립백두대간수목원에 종자저장시설, 연구시설, 기후변화지표식물원, 전시공간 등 시설이 설치된다.
수목원 전체 부지는 크게 생태탐방지구(4,973ha)와 중점조성지구(206ha)로 구분하여 조성된다.
걸어서 한바퀴 돌기는 너무 멀고 우리는 처음에 트램을 타고 중간에 내려서
걸으며 숲을 감상하고 호랑이 숲까지 간다
생태탐방지구는 금강소나무를 대표 수종으로 하는 자연 생태를 그대로 보존하여 자연환경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생태탐방지구에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550년 된 철쭉군락지와 꼬리진달래군락지가 있다.
중점조성지구는 진입 및 커뮤니티지구, 주제정원 전시 및 교육지구, 산림생물자원 연구지구, 산림보존 및
복원지구로 구분되어 있어 연구, 교육, 체험이 함께 조화롭게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조성된다. 측백나무를
이용한 미로원, 교과서원, 모험의 숲 등으로 아이들의 식물에 대한 흥미를 유도하고 세계문화자원식물원
등으로 세계의 민속생활문화를 익힐 수 있으며, 오색정원, 꽃나무원 등의 전시원에서는 식물의 아름다운
조화를 느낄수 있도록 조성된다
씨드 볼트(Seed Vault)
백두대간수목원은 단순히 힐링을 위한 장소성의 개념을 벗어나 세계 산림생태환경보전 연구의 성지를 지향하고 있다.
최근 들어 심각한 기후변화로 자연 생태계의 파괴가 지속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로 인해 세계 곳곳에서 녹지가 줄어들면서 생태계 파괴를 막기위한 방안이 마련되고 있다.
백두대간수목원은 이러한 세기적 파멸을 막기 위한 방책으로 씨드 볼트(Seed Vault), 즉 씨드 뱅크(Seed Bank)가 아닌 Backup Copy
기능을 할 수 있는 산림종자영구저장시설을 갖췄다.
기후변화는 인류는 물론 식물들에게 큰 위협이 되고 있다. 이로 인해 이미 멸종했거나 멸종위기에 처한 식물종이 지구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많아지고 있다. 이에 세계 각국은 생물자원을 지키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어 우리나라도 유전자원의 확보와
보존은 불가피한 상황이자 반드시 지켜야할 부분이다.
씨드 볼트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지하 터널형 종자 영구보존시설로 멸종위기를 대비한 중복저장과 세계 유전자원보전에
이바지할 뿐만 아니라 야생식물종자 200만 점 이상을 저장할 수 있다. 저장터널의 폭은 약 7m에 이르고, 깊이만 34m에 이른다.
씨드 볼트는 지하 40m 깊이로 영하 20도, 습도 40%를 유지하며, 연중 항온, 항습 냉난방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국립 백두대간 수목원
경북 봉화군 춘양면 문수산과 옥석산 일대에 조성된 국립 백두대간 수목원은
기후변화에 취약한 산림생물자원을 보전하고 한반도 산림생태계의 핵심축인
백두대간을 보호, 관리하기 위해 조성됐다.
부지 5179㏊에 건축면적 1만6000㎡,
총면적 2만7600㎡에 달한다.
여의도 면적의 17.8배로 아시아에서 최대,
전세계 2번째 규모를 자랑한다.
(1위 남아프리카공화국 국립한탐식물원)
세계최초로 지하터널형 야생식물종자 영구저장시설을 갖추고 있고,
206ha에 달하는 중점조성지역에는 어린이정원, 암석원, 만병초원, 거울 정원,
총 27곳의 주재 전시원, 저장시설 등 20개 건물이 설립돼 있으며
2002종 385만본의 식물이 식재돼 있다.
또 교육 체험프로그램을 받을 수 있는 ‘교육연수동’, 산림생물자원 연구의 중추시설인
‘산림환경연구동’ 등 다양한 시설을 보유하고 있다.
숲속의 정자
중간중간에 트램 승차장이 있는데 정자나 쉼터처럼 쉴 수 있게 만들어놨다
네군도 단풍나무 길
만병초
진달랫과에 속하는 상록 활엽 관목. 원산지는 대한민국과 일본이다. 반 그늘진 곳 또는 그늘진 곳, 특히 공기 중에
습기가 많은 곳에서 잘 자란다. 키는 4m 정도 자라며 줄기는 갈색이다. 잎은 어긋나며, 나무껍질은 잿빛이 섞인 흰색이다.
꽃은 7월에 피고 열매는 삭과로 9월에 익는다. 추위에 잘 견디지만 생장속도가 느리고 공해에 약하다. 잎은 약재로 쓰인다.
일본 잎갈나무
소나무과에 속하는 낙엽교목. 낙엽송이라고도 한다. 일본이 원산지로, 깊은 산속에 분포한다.
키는 30m까지 자라며, 가지는 위쪽을 향해 나란히 난다. 5월에 암꽃송이와 수꽃송이가 가지 끝에 피며,
수꽃은 노란색, 암꽃은 담홍색이다. 우리나라에는 1914~27년 사이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되며,
1960~70년대에 특히 많이 심어졌다. 나무는 토목재·침목재·갱목으로 널리 쓰이고 있다.
암석원
암석과 어울리는 고산식물을 자연스럽게 배치한 대표주제원
이렇게 조성은 했지만 아직 주위의 수목이 제대로 자리를 잡지 않아
앞으로 5~10년은 더 있어야 수목원으로서의 가치가 이루어 질 것 같다
자작나무 숲
국립 백두대간 수목원의 자랑거리는 뭐니뭐니해도 ‘백두산 호랑이’이다.
지난해 서울대공원에서 옮겨온 백두산 호랑이 2마리,
한청이(암컷·13살)와 우리(수컷·7살)가 숲속에서 어슬렁거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자연속에 울타리를 치고 방사한 ‘백두산호랑이 숲’과 ‘시드볼트(Seed Vault)’로
‘백두산호랑이 숲’은 축구장 7개 크기의 면적(4.8ha)에 호랑이 생육에 적합하도록 자연지형과 식생을
최대한 활용해 입체적이고 실감나게 조성됐다.
후진타오 전 중국 주석이 기증한 두만이(수컷·17살)도 적응 훈련을 거쳐 합류할 예정이다.
추후 백두산 호랑이 10여 마리를 추가 입식해 생태연구 및 종(種) 보존에 활용할 계획이다.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하는 만큼 국립 백두대간 수목원에는 트램, 전기 버스 등이 갖춰져 있고,
전기 버스에는 산림치유지도사, 숲해설가, 유아숲 지도사 등 전문해설사가 함께 한다.
호랑이숲
백두대간수목원의 또 하나의 특징인 호랑이숲에는 백두대간의 상징적 동물인 호랑이가 서식하는 숲을 재현하여
시베리아호랑이를 전시하고 있다. 2017년 1월 25일 한중우호협력사업으로 도입된 백두산 호랑이 2마리를 이전하였다.
2018년 5월 4일에 개장하였으며 현재 3마리(두만, 한청, 우리)가 살고 있다. 또한 버드나무, 금강송, 서양측백,
소영도리나무 등을 심었다.
노린제 나무
녹음이 짙어 가는 늦봄의 끝자락인 5월 말이나 6월 초쯤이면 숲속의 큰 나무 밑에서 새하얀 꽃 뭉치를 잔뜩 달고
있는 자그마한 노린재나무를 흔히 만날 수 있다. 다섯 장의 갸름한 꽃잎 위로 노란 꽃밥과 긴 대궁을 가진 수술이
수십 개씩 뻗어 있어서 꽃잎은 묻혀 버리고 작은 솜꽃이 몽실몽실 피어나는 듯하다. 게다가 은은한 향기도 갖고
있어서 등산객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노린재나무란 이름은 황회목(黃灰木)에서 유래되었으며, 특별한 쓰임새가 있다. 자초(紫草)나 치자 등 식물성 물감을
천연섬유에 물들이려면 매염제(媒染劑)가 반드시 필요하다. 노린재나무는 전통 염색의 매염제로 널리 쓰인 황회를
만들던 나무다. 잿물이 약간 누런빛을 띠어서 노린재나무란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에는 숲속의
수많은 이름 없는 자그마한 나무들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불과 백여 년 전만 해도 천에 물감을 들일 때 꼭 필요한
귀중한 자원식물이었다.
으아리(미나리 아재비과)
잎은 마주나기하며 3~7개의 소엽으로 구성된 우상복엽이다. 소엽은 길이 3~10cm, 폭 2~4cm로서 달걀모양, 넓은
달걀모양 또는 피침형이고 둔두 또는 첨두이며 원저 또는 아심장저이고 양면에 털이 없으며 보통 가장자리에
톱니가 없지만 간혹 결각상이다. 엽병은 구부러져서 덩굴과 같은 역할을 한다
꽃은 7-9월에 백색으로 피고 지름 2-3cm로서 백색이며 액생 또는 정생하는 원뿔모양꽃차례 또는 취산꽃차례에
달리고 많은 꽃이 피어 뒤덮으며 향기가 있다. 꽃잎처럼 보이는 것은 꽃받침인데, 꽃받침 잎은 4개로 긴 타원형이며,
길이는 12mm로 겉에 털이 거의 없고, 수술대는 꽃밥보다 길다.
고추나무
잎은 마주나기하며 소엽은 3개로 가운데 소엽 밑부분이 작은잎자루로 흐르고 달걀형이며 양 끝이 좁고 뒷면 맥 위에
털이 있으며, 길이와 폭이 각 (3)4 ~ 10cm × (1)1.8 ~ 3.5(4)cm로, 가장자리에 침상의 잔톱니가 있고 옆 소엽은
작은잎자루가 없다.
원뿔모양꽃차례는 길이 5 ~ 8cm로 가지 끝에 달리며, 꽃은 백색으로 4월 말 ~ 6월 중순에 피고 꽃부분 5수이며
암술대 1개있고, 꽃대 길이는 8 ~ 12cm이다.
높은 곳에는 일본 잎갈나무가 있어 그늘도 있고 걷기 좋은 길이 조성 상쾌한 느낌을 준다
마가목나무
낙엽 작은키나무. 줄기는 높이 6-8m다. 어린 가지와 겨울눈에 털이 없고 겨울눈은 점성이 있다.
잎은 어긋나며 작은 잎 9-13장으로 된 깃꼴겹잎이다. 작은 잎은 긴 타원형 또는 피침형으로 길이 3-6cm,
폭 1-2cm이며 가장자리에 날카로운 톱니가 있다. 꽃은 5-6월에 가지 끝의 겹산방꽃차례에 달리며 흰색이고
지름 8-10mm다. 열매는 이과이며 지름 5-6mm로 둥글고 10월에 붉게 익는다.
여기는 각종 약초를 재배하는 곳인데 아직 이렇다할 약초는 보이지 않는다
아직 여기는 이른봄 같아서일까?
네군도 단풍(켈리스 골드)
네군도단풍(Acer negundo)은 낙엽이 지는 활엽교목으로서, 잎은 깃꼴 겹잎으로, 3-7개의 타원형인 작은잎을 가지고 있다.
암수딴그루로서, 4-5월경에 황록색 꽃이 총상꽃차례를 이루면서 피어난다. 열매는 시과로 10월경에 익는데,
긴 이삭이 되어 늘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북아메리카 동부가 원산지로서, 한국 각지에 분포하고 있다.
추위에 잘 견디므로 정원수나 가로수로도 이용된다. 개화기는 4-5월, 결실기는 9-10월이며, 목재는 장식용구와 가구재로 쓰인다.
샤스타 데이지
국화과의 다년생(여러해살이) 초본 식물이다. 1890년대 미국의 원예가이자 식물학자인 루서 버뱅크(Luther Burbank)가
여러 종의 데이지를 교배해 만들었다. 샤스타데이지란 이름은 미국 캘리포니아 북쪽에 있는 샤스타 산(Mt. Shasta)에서
딴 것이다. 샤스타 산은 만년설이 있는 화산으로 늘 눈이 쌓여있어 흰 산(White Mountain)이란 별명이 있다.
샤스타데이지의 깨끗한 흰색 꽃잎이 눈을 연상시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샤스타데이지는 선명한 노란색과 흰색 꽃잎의 조화가 순수하고 깨끗한 느낌을 준다. 키우기 쉽고 꽃색이 선명해
공원이나 화단에서 관상용으로 재배한다. 꽃을 여러개 뭉치면 더 아름답고 가지도 튼튼해 꽃꽃이용으로도 인기가 많다.
한국에서는 초여름부터 절화(가지째 꺾은 꽃)로 판매되기 시작한다
매발톱
다년생 초본으로 근경이나 종자로 번식한다. 전국적으로 분포하며 산지에서 자란다.
원줄기는 높이 40~80cm 정도이고 윗부분이 다소 갈라진다. 근생엽은 잎자루가 길고 2회 3출엽이며 소엽은 쐐기형으로
2~3개씩 갈라지고 뒷면이 분백색이다. 경생엽은 위로 갈수록 잎자루가 짧다. 6~7월에 개화한다. 꽃은 지름 3cm 정도이며
갈자색이다. 골돌과는 5개이며 털이 있다. ‘하늘매발톱꽃’과 달리 꽃받침조각이 피침형으로 끝이 뾰족하고 꽃이 갈자색으로
‘노랑매발톱’과도 다르다. 잎이 야들야들해서 먹을 수 있을 것 같지만 독이 강해 먹으면 안 된다. 관상용으로도 심는다.
관리동 내부인데 싱가포르에서 본 것 같은 모습이다
싱가포르 가든스베이 수퍼트리 그로브(Supertree Grove) 처럼 멋지게 만들면 어떨까 생각을 해본다
가방을든 여인 - 폴 모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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