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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구

봉화 춘양면 삼층석탑과 고택들




한국산림 과학고등학교내에 삼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보물 제52호. 2기. 높이 동탑 3.85m, 서탑 3.94m. 1963년 1월 21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한국산림과학고

안에 13.5m 거리를 두고 동·서로 마주 서 있는 2기의 석탑이다.


이곳은 신라의 사찰인 남화사 터로 알려져 있는데, 675년(문무왕 16)에 원효대사가 이곳에서 서북쪽으로 6㎞ 정도

 떨어진 곳에 각화사를 창건하면서 절이 폐사되었다. 두 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다.

받침돌과 아랫기단 중석을 각 면 1장씩, 모두 4장의 돌로 구성하고, 아래·위층 기단 모두 4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1장의 돌로 이루어졌는데, 위층으로 갈수록 크기가 줄어드는

형태를 보인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네 귀퉁이가 살짝 치켜올라간 모습을 하고 있다. 머리장식으로는 서쪽 탑에만

노반이 남아 있다. 1962년 10월 탑을 해체·복원할 때 서탑에서는 사리공이 발견되었고, 동탑에서는 사리병과 99개의 작은

 토탑이 발견되었다. 조형미와 아름다운 비례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소재지는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서동리 91이다.


석탑 주위에 옛날의 좌상 부처가 있는데 여기저기 자주 옮겨 다닌듯 색깔로봐서

몸통과 머리부분이 다른데 어느시대인가 머리부분을 만들어 올린듯



춘양 권진사댁


054-672-6118

봉화군 춘양면 낙천당길 39  

봉화군 춘양면 의양리 235번지에 있으며,1987년 5월 13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190호로 지정되었다.

의양리권진사댁(宜陽里權進士宅)은 성암 권철연(省菴 權喆淵)(1874∼1951)이 살던 집으로 현(現) 위치(位置)의 건너마을 운곡(雲谷)에

살던 그의 부친(父親)이 1880년경 이 곳으로 이주(移住) 건립(建立)하였다 한다.

권철연선생(先生)은 고종(高宗) 25년(1880) 사마시(司馬試)에 합격(合格)하여 생원(生員)이 되고 가산(家産)이 여유(餘裕)해지자

찾아오는 빈객(賓客)이나 걸인(乞人)들을 후히 접대(接待)하였으며 문인명사(文人名士)와 우국지사(憂國之士)들의 내왕(來往)이 잦았다.

의양리권진사댁(宜陽里權進士宅) 건물(建物)은 만석봉(萬石峯)을 배산(背山)하고 동향(東向)하고 있으며, 구간일자형(九間一字形)

 행랑(行廊)채의 중앙(中央)에 있는 솟을 대문(大門)을 들어서면 넓은 사랑마당이 있고 좌측(左側)에 삼간서당(三間書堂)이 있으며

행랑(行廊)채와 대향(對向)으로 □자형(字形) 정침(正寢)이 동좌(東坐)하여 있다.

정침(正寢)의 양측(兩側) 허리부분(部分)에 토담을 좌우(左右)로 뻗어 내외(內外)마당으로 공간구분(空間區分)을 하고 있다.

□자형 정침(正寢)은 정면(正面) 7칸, 측면(側面) 8칸으로 구성(構成)되어 있다.

권철연선생의 의 장자는 권상경(權相經, 1890~1955)이다. 권상경은 자가 정부(正夫), 호가 석당(石堂)이다. 권상경의 장자는

1910년생인 권영환(權英煥)이고, 손자는 1943년생인 현 종손 권탄웅(權坦雄)선생이다.

권탄웅선생에 의하면 권철연은 면우(?宇) 곽종석(郭鍾錫)에게 배웠고, 곽종석의 사후 문집의 출간을 위해 거금을 출연하였다.

당시 곽종석의 제자인 김창숙(金昌淑) 등은 유림계열의 독립운동을 주도하고 있던 중이었으므로, 그 돈은 문집을 발간하는

대신 독립자금으로 전용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영향을 받은 탓인지 권철연의 자제인 권상경은 어린 나이에 독립운동 진영에 참여해서 활동하였고, 그 공으로 2005년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었다고 한다.

1991년 안채의 견치석 기단을 철거하고 자연석으로 다시 쌓았으며, 부식된 목부재와 파손된 기와를 교체하였다.
<성암고택>으로도 알려진 이곳은 2009년부터 고택향연(古宅饗宴) 음악회를 매년개최하고 있으며?고택체험도 하고 있다. 

그러나 ‘오랜 역사’와 ‘가문의 자긍심’ 외에 권진사댁은 조선시대 ‘유교문화’를 담은 건축으로도 가치

큰 공간이다. 권진사댁이 지어질 당시인 조선 후기는 유교의 이념이 정치뿐 아니라 사회생활 전반에 강하게

스며들었던 때이다. 그래서 권진사댁 역시 유교 사상의 이해를 바탕으로 살펴본다면 가옥의 구조를 더 쉽게

 공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권진사댁 곳곳에 살아 숨쉬는 유교사상은 어떤 형태로 자리하고 있는 걸까?


그 이해의 첫걸음은 ‘솟을대문’을 넘으면서부터다. 문을 넘어가면 너른 여백이 시원한 사랑마당이 가장 먼저 보인다.

 그리고 정면에 7칸 측면 8칸의 ‘ㅁ’ 자 형 안채가 웅장하게 들어서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권진사댁의

 대문채는 정면 9칸, 측면 1칸 규모이다. 대문채는 성곽처럼 웅장하고 중앙의 1칸이 솟을대문이다. 대문을

 비롯한 좌우의 행랑채 역시 보통 다른 한옥보다 높게 지어져 웅장함을 더한다. 행랑채의 양 끝은 바깥 담장으로

 이어져 집을 감싼다.

서당 감개헌(鑑開軒)

 

바로 권씨 문중에서는 유명한 가양주 이야기. 하루는 밀양에서 시집온 권철연 선생의 부인이 가양주를 빚어 올렸다.

 가양주는 집에서 빚은 술을 말하며 지역별로 맛과 향이 다르다. 다량의 곡물과 정성으로 빚어낸 가양주는 그 맛이

 훌륭했고, 권철연 선생은 그 가양주를 맛있게 마시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는 그 가양주를 더는 만들지

말라고 했다. 이 가양주에는 소중한 식량인 찹쌀, 밀가루 등 곡식이 많이 들어갔고, 근검절약을 삶의 신조로

실천해 온 선생과는 맞지 않는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선생의 이런 검소한 생활 습관은 그의 아들, 손자 같은

가족은 물론 바깥사람에게도 본보기가 되었다.




그리고 기억할만한 문중 이야기, 권철연 선생의 아들 이야기다.

모범적이자 실천적인 아버지 권철연 선생의 가르침을 받아 반듯하게 장성한 아들이 있었는데,

장자인 권상경(權相經), 1890~1955이다. 권상경은 독립자금을 지원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그 공을 인정받아 2005년에 독립유공자로 추서되기에 이른다.

이렇게 권진사댁은 청렴한 선비 아버지와 독립유공자 아들을 배출한 고택이라는 점에서 권씨 가문 사람이

아니더라도 뜨거운 자부심을 느끼게 해준다.

대문채의 위엄 있는 솟을대문은 권진사댁이 중·상류 계층이었음을 말하는 것으로 당시 사회적 계급 또는

지위를 알려준다. 권진사댁에서의 ‘진사’는 보통 조선시대 진사시에 합격한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대과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이지만, 반드시 진사가 벼슬을 해야 했던 것은 아니다. 그래서 ‘진사’라고

 하면 관직에 나가지는 않았으나 학문을 연구하고 덕을 닦는 선비라 보면 되겠다. 비록 진사계층은 벼슬을

하지는 않았으나, 어려운 춘궁기에 동네 사람과 같은 음식을 먹었다는 권철연 선생의 일화에서 보듯 중·상류

계층의 위엄과 재력을 갖추고 향촌사회 리더로서 모범인 듯하다.


 눈 여겨 볼만한 유교적 건축물은 ‘사랑채’와 ‘안채’다. 권진사댁의 사랑채는 정면 7칸 규모로 오른편과 왼편 끝으로

 각각 1칸 규모의 방이 있다. 전체적으로 사랑채는 사랑방, 침방, 누마루로 구성돼 있다. 이 곳은 집주인

즉 가부장의 일상 거처로서 장자를 위한 작은 사랑방과 가부장을 위한 큰 사랑방 옆에 있다.


장자는 수유기가 끝날 때까지는 안채에서 모친과 함께 지내지만 이 기간이 끝나면 바로 사랑채로 거처를 옮겨

생활하면서 가부장이 전수하는 수업을 받게 된다. 이렇듯 사랑은 가문 계승을 위한 가부장과 장자 중심의

생활공간이면서 동시에 배움터였다.

 




종손 권탄웅선생 부인은 서울 토박이인데 권선생과 결혼해 서울에살다가 10여년 전에 낙향

고택을 지키고 민박도 하신다 한다

안채. 사랑채에서 중문을 통과하면 안채가 나온다. 안채는 안방과 건너방, 안대청과 부엌, 곳간으로 구성돼 있다.

안방은 안방마님의 일상 거처고 종부, 큰 며느리, 작은 며느리를 위한 공간이다. 딸도 살림살이와 예절 수양을

위해 안채에서 함께 지냈다.

 

사랑채와 달리 안채는 여주인의 일상 거처이자 침실이었다. 이 안채에서 최고의 권한을 가진 사람은 안방을

차지한 시어머니다. 그 권한의 징표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열쇠꾸러미였다. 곳간 열쇠와 뒤주 열쇠를 묶은

이 열쇠꾸러미는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물려준다.


그 시점은 며느리가 살림에 능숙하고, 대를 이을 자녀를 낳고 기르는 등 가풍을 잘 익혔을 때이다.

그래서 일정한 시기가 지나면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안방을 내어주고 뒷방으로 물러났다.

어르신들이 우스갯소리로 내뱉는 ‘뒷방 늙은이’라는 말은 여기서 나왔다.

 

사랑채와 안채는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과 내외법을 철저히 지키기 위해 채와 채를 나눠 남녀를

구분한 대표적인 유교 건축물이다.

 

이렇게 사랑채, 안채 들여다보고 다시 사랑마당으로 돌아왔다. 솟을대문을 넘기 전에 다시 바라본 권진사댁 전경.

 기둥, 보, 서까래 등 각 부위의 나무를 작게 잘라 날렵하게 만든 고택이라 그런지 처마 올림이 날렵하고,

현수곡선이 경쾌하다. 튼튼하지만 우람하지는 않은 그런 느낌이다. 이 단아함 속에 숨어 있는 또 하나의

기분 좋은 느낌, 위풍당당함. 그 위풍당당함은 아마도 지식인이지만 민초와 섞여 함께 어울리고자 했던 권 진사의

 삶의 태도와 유교적 철학이 고택 곳곳에 배어 있기 때문은 아닐까.박사님글에서

안채대문

안채에서 바라본 세월을 말해주는 와송

권진사댁을나와 만산고택으로 향한다

낙천당. 안동 김씨 정자다.

수북 김람(1601~1677)은 가선대부()에 이르렀으나 병자호란으로 남한산성까지 국왕을 호종()하였다.

 그 후 노부모를 모시고 태백산(: 1,567m) 아래 이곳에 입산하여 정자를 세웠다. 1644년(인조 22) 명()나라가

망하자 명나라를 섬기던 신하가 어찌 청나라를 섬길 수 있느냐 하는 대명절의()를 지키고자 벼슬을 버리고

 태백산 속에 숨은 홍우정()ㆍ강흡()ㆍ심장세()ㆍ정양()ㆍ홍석()의 다섯 사람들을

세상 사람들은 태백오현()이라 부르며 추앙하였는데, 이들과 함께 절의를 지키며 교유하던 곳이다.

어려운 가운데도 평안하고 즐겁게 지냈다고 하여 낙천당이라 불렀다고 한다.

태고정

낙천당마을의 태고정. 을사늑약 후 귀향한 만산이 지은 정자다.

만산 강용이 을사조약이후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이곳에 정자를세우고 망국의 한을

학문으로 달래며 후배들을 길러 내는데 힘썼다고 한다

 태고정 북쪽으로는 낙천당이 있다. 이 부분은 낙천당고을이라 불린다.

낙천당은 태고정과 나란히 서 있는 정자이다. 이곳에는 김해김씨가 임진왜란 이전부터 정착하여

마을을 개척하였다. 이곳에 김장군·강장군·곽장군 셋이 난을 피해 살다가 난리가 끝나 한양으로

 돌아갈 때 즐겁게 지냈다고 하여 정자를 짓고 낙천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마을도 이 정자의 이름으로 불렸다.



경북 봉화군 춘양면 서동길 21-19

문화재청은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의양리에 있는 ‘봉화 만산고택(奉化 晩山古宅)’을 국가지정문화재인

중요민속문화재 제279호로 지정했다고 밝혔다.


‘봉화 만산고택’은 조선 말기 문신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와 중추원 의관(中樞院 議官)을 지냈으며 만년에

도산서원장을 역임한 만산 강용(晩山 姜鎔:1846~1934) 선생이 1878년 건립했다.


‘ㅁ’자형의 본채와 좌측에 서실, 우측에 별도의 담장을 두르고 별채를 배치, 사대부 집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특히 안채로의 출입을 사랑채 우측 감실(龕室:신주는 모셔 둔 방) 뒤로 난 중문으로 하게 한 측면출입형

(側面出入形)은 19세기 봉화를 비롯한 경상북도 북동부 전통 반가(班家)에서 자주 나타나는 건축적 특징이다.

진주강씨 충렬공파의 봉화 입향과 만산고택의 성립

봉화군 춘양면 의양리의 만산고택은 靖窩 姜鎔의 만년의 호를 따서 칭한 것이다.
의양리의 진주강씨는 고려말의 인물인 通溪 姜淮仲의 후손으로 봉화로 落南한 것은 병자호란 때 순절한 姜渭聘의
 증손자 再輔(1673~1745)대이다. 姜再輔는 陶隱 姜恪(1620~1657)의 손자로 법전면 尺谷里의 도은파에서 입후하였다.

 이러한 연고로 도은파와 충렬공파는 서로 양자를 주고받는 관계로 발전하여 姜鎔의 친삼촌인 강진규가 다시 法田里의
 陶庵 陶隱 姜恪의 同生兄 姜恰(1602~1671).닫기파로 입후하는 등 많은 교류가 있었다.

의양리의 진주강씨(별제공파)와 법전리·척곡리의 진주강씨(참판공파)는 진주강씨 9세 利行(증판서)의 아들 세대에서
 별제공(淵)파와 참판공(澂)파로 갈라졌으나, 참판공파 출신인 16세 再輔가 별제공파의 天與(1647~1665)의
후사로 입후함으로써 별제공파의 일파가 봉화로 낙남하게 되고, 봉화에서 세거하게 되었다.

축 배경

진주강씨 만산고택은 만산(晩山) 강용(姜鎔, 1846~1934)이 법전에서 춘양으로 옮겨 살면서 만대를 내다보며 지은 집이다.

『정감록』에도 예언된 ‘3재불입지(三災不入地)’의 명당에 자리를 잡은 것이라 한다.

물론 이것은 진주강씨 만산고택의 집터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풍수가 아니라 진주강씨 만산고택이

자리 잡은 주변 일대의 풍수를 두고 하는 말이다.

소백산의 발치에 자리 잡은 춘양은 그 기슭 안에 폭 쌓여있는 형국이다.

그런 지리적 이점을 택하여 조선왕조에서는 태백산사고를 이 지역에 만든 것이라고 하겠다.

 안전하게 실록을 보관할 수 있는 것으로 나라에서도 선택한 지형이니,

이곳이 인간이 일으키는 재해가 침범하기 어려운 지역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만산 역시 그런 지리적 이점을 염두에 두고 여기 집을 세웠을 것이다.


서실과 사랑채



건축 구성

진주강씨 만산고택은 대문채·별채·정자 건물·본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당히 넓은 공간 위에 자리 잡고 있으며, 바깥마당이 아주 넓다.

본채와 대문채는 동향을 하고 있고, 정자 건물은 남향, 별채는 북향을 하고 있다.

대문채는 전체 11칸에 이른다. 중앙에 솟을대문을 따로 두고, 좌·우에 각 5칸씩의 행랑건물을 붙였다.

 밖에서 보았을 때 대문채 좌·우의 행랑채 외벽은 일관된 방식으로 처리되어 있지 않다.

대문 쪽 1칸은 왼쪽 5칸과 같은 방식으로 처리되어 있다.

정자 건물은 전체 건물 영역의 왼편 끝으로 나가 있다.

이 부분은 담장에 의해 본채, 또는 본채의 바깥마당과도 구분된다.

정면 4칸, 측면 2칸 반의 규모로 오른편 측면 끝으로 반 칸 규모의 처마가 덧대어져 있고,

벽으로 처리되어 있어 눈으로 보기에는 정면 4칸 반의 규모라고 할 수도 있다.

별채는 바깥마당의 오른편 끝에서 왼편을 바라보는 자세로 자리 잡은 모습이다.

사방을 쪽마루가 돌아가고 있는 작고 아담한 건물이다.

 이 건물에는 ‘서실(書室)’이라는 현판이 안채 쪽 벽면에,

그 옆 칸에는 ‘한묵청연(翰墨淸緣)’이라는 글씨가 걸려 있다.

본채는 口자 건물이다. 앞 선으로 나와 있는 것은 정면 5칸의 사랑채 건물이다.

그런데 이 건물은 제 1선으로 나와 있는 각재기둥은 5칸이지만, 제 2선을 이루는

 각재기둥은 5칸 반으로 차이를 보여준다. 이 부분은 측면 2칸 뒤쪽에서는 또 반 칸이

 더 옆으로 밀고 나오기도 한다. 전자의 경우는 옆으로 반 칸의 쪽마루가

가설된 탓이고, 후자의 경우는 그 뒤편으로 오른쪽 연결채 건물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안에서 바라본 문간채

만산과 정와 편액 둘다 만산강호의 아호다 만산은 대원군이 직접 쓴 글씨라고 한다

한묵청연

고종의 둘째아들 영친왕이 8세때 슨 글씨로 한묵은 문필을 뜻하고 청연은 맑고 깨끗한

인연을 의미한다

안주인께서 직접만든 도자기라고한다

존양

타고난 심성을 온전하게 지켜서 훌륭한 심성을 기르는곳. 오세창선생 글이라 한다






칠류헌

별당이자 고택 민박으로 이용하는 칠류헌은 만산고택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평가하는 건물이다.

 대청마루에 내리는 볕이 따스하고, 거실로 쓰는 넓은 마루에는 8개 창호로 비치는 조명이 은은하다.

일곱 그루의 버드나무가 있는 집이라는 의미의 칠류헌(七柳軒)은 중국 송대의 시인 도연명을 흠모해 쓴 현판으로,

 독립운동가이자 서화가 오세창(1864~1953)이 썼다. 현재 만산고택에는 만산의 4대손 강백기씨가 부인과 함께 살고 있다.


진주강씨 만산고택 현판은 대부분 강백기가 두터운 종이에 싸인펜으로 그린 것들이다.

남의 집에 걸린 현판까지도 가져다 팔아먹는 우리의 타락한 자본주의 세태가 만들어낸 진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비단 진주강씨 만산고택에서만 아니라, 현판의 문제는 오늘날 거의 모든 고택이나 정자에서 부딪히게 되는

 일반적인 것이 되어 버려서 입맛이 쓰게 한다.


봉성의 한 정자에서는 현판을 잃고 서울 인사동을 뒤져서 찾아냈는데 주인이 전람회에서 구입한 것이라며 엄청난

 고가를 요구하여 사정하고 달래고 한 후에야 겨우 많이 깎아서 재구입을 하였다고 한다.


자기 것을 상당한 돈을 주고 다시 사와야 하는 것이 오늘날 문화재를 중심에 두고 벌어지는 웃기지도 않는 세태이다.
어떤 집에서는 신주를 가져가서 역시 상당한 돈을 주고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사왔다는 말도 들린다.

진주강씨 만산고택에서 보는 종이 현판들도 이러한 세태의 반영이라 할 것이다.

거대한 호도나무

불두화

교유 인물
이하응(李昰應),영친왕(英親王)
- 진주강씨 만산고택과 연관을 맺은 사람들

강용(姜鎔, 1846~1934)은 진주강씨이며, 자는 계명(季明), 호는 정와(靖窩), 또는 만산이다.

 만산은 대원군이 직접 친필로 쓴 현판을 진주강씨 만산고택에 걸었다. 현재는 다른 곳에 보내 보관 중이다.
강용은 통정 대부, 이조 참의, 북청 부사를 지낸 백초 강하규(姜夏奎)의 3남이다.


덕망으로 1900년에 영릉 참봉에 제수되고, 1903년에 통정 대부에 올라 중추원 의관, 도산서원장을 지냈다.
1905년 이후 문을 닫아걸고 들어앉아 조용히 지내며 망국의 한을 학문으로 달래고, 후학양성에 힘썼다.

면우 곽종석과 나라를 걱정하며, 자택 뒷산에 ‘망미대’를 쌓고 조석으로 올라 국운회복의 일념을 담은 시를 읊었다.

『정와집』 10권 5책이 전한다. 위당 정인보가 지은 묘갈명이 봉성에 있다



강용은 벼슬을 할 때 서울 궁정동에 집을 가지고 있었고, 여기서 대원군 이하응과 친분을 맺었다.

만산이라는 호를 그에게 지어 준 것도 대원군이다. 대원군이 여기 춘양에 내려왔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대원군과 강용은 상당히 친밀한 관계였다.


만산 강용은 도산서원장 직을 역임하였고, 대원군과도 친교가 있었으니, 지역사림에서도 많은 이들이

 이 집에 출입하였을 것이다. 현 종손 강백기는 계남집(하계마을, 진성이씨) 종부로도 고모가 들어갔고,

 번남집(의인마을, 진성이씨)에서 어머니가 오셨고, 하회 북촌집(풍산류씨)은 어머님 외가라는

인연을 강조하였다.


그러면서 강백기는 자신들이 소론이었지만 지역 사림에서 통혼하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는 점을 누누이 말하였다. 그러나 만산 강용의 가계가 소론과 연결될 수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만산 시대까지 소론의 당색을 갖고 있었는지는 따져 보아야 할 문제가 아닌가 한다. 특히 도산서원장의 직책과

 연관되어서 이 점은 흥미 있는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진주강씨 만산고택의 오늘의 모습을 특히 매력적이게 하는 것은 이 집을 지키고 있는

현 종손 강백기의 집 가꾸기에 대한 열정이다.

 강백기는 사랑채 뜰에 온갖 종류의 작은 화분들을 늘어놓고, 집을 찾아드는

사람들은 누구라도 집안 이곳저곳을 모시고 다니며 설명을 하는 열정을 보여준다.

이러한 열정은 아무데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이들이 함부로 얼굴을 들이미는 종가나 고택에서는 특히 그러하다.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다 보면, 한 두 번은 정성을 다하다가도 나중에는

지치고 힘들어서 불친절해지기 십상이다. 그러나 강백기의 열정은 아직 지치기에는

 멀었고, 오늘도 그는 여전히 집을 찾는 사람들을 모시고 다니며 설명해

주기를 마다하지 않는다.강명원님 글에서

야외 응접실이다 강백기님께서 차를 즐겨 마시며 많은 분들과 교유를 하시는가 보다


성암재 대문칸

성암재는 많은 나무와 꽃을 가꾸고 있었다


성암재

안채



성암재 대문밖 풍경


성암재는 조선 후기 문신인 만산 강용(1846~1934) 선생이 1918년에 지은 집으로

 1905년 을사조약에 반대하시다 고향으로 내려와 후진 양성에 힘을 쓰셨는데

강용 선생이 손자인 성암 강승원에게 물려주셨다. 

성암재는 강용 선생의 외아들인 의재 강필(독립유공자) 선생께서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전달한 곳이며 성암 강승원의 손자인 현재 주인인 강춘기님이

작년 3월에 외국에서 귀국하여 40년간 관리인이 관리하던 성암재를 보수하고

작년(2012) 10월에 문을 열었다.

집의 형태는 ㅁ형을 하고 있으며 만산고택의 작은 채로 만산고택의 주인인 강백기님

 하고는 육촌지간이다.


백당나무

산딸나무

백합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