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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구

봉화 닭실마을과 황전마을

5월22~23 느티울 봄 가을 1박2일 정기 트레킹날이다 4월과 5월 원없이 여행을다녀 심신이 피로하고

전에 다녀온 곳이라 불참 통보를 하였으나 대장님께서 어찌나 성화던지 어쩔 수 없이 참가를 했다

내성천의 상류, 봉화의 석천계곡은 비경이다. 울창한 숲 사이로 난 협곡은 아주 좁게 파여 S자형으로 큰 굽이를 이루고 있다.

 마치 태극의 문양처럼 휘돌아 흐르는 사행천이다. 아름다운 석천계곡을 따라 난 옛길을 거슬러 오르다가 한 굽이 왼쪽으로

돌면, 곧바로 고졸하고 청량하기 그지없는 풍광을 만나게 된다. 여울 건너로 길게 자리한 석축 위의 정자가 창송으로 감싸여

 있는 모습은 한 폭의 풍경화나 다름없다. 정자 앞의 계곡은 커다란 너럭바위, 깨끗한 강자갈과 모래, 그리고 수정같이 맑은

 계류가 옛날의 순수한 경치를 그대로 간직하며 흐르고 있다.

이 계곡을 지나야만 천상의 새라는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천하의 명당을 만날 수 있다. 석천계곡은 바로 이러한 이상향의 세계,

 신선이 사는 선계로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장소다. 이 계곡은 통과의례가 이루어지는 마을의 문으로 닭실마을의

대문과도 같은 곳이다. 정자 앞의 개울을 건너 다시 한 번 오른쪽으로 굽이진 협곡을 돌아서면 닫혔던 시야가 눈앞에 펼쳐지면서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인 ‘금계포란지국(金鷄抱卵之局)’의 명당을 만나게 된다.

닭실마을은 오늘날 유곡리(酉谷里)에 해당한다. 유곡이란 ‘닭실’을 한자로 그대로 옮긴 말로 ‘금계포란’의 풍수형국에서

유래한 마을 이름이다. 닭실마을의 동쪽에 있는 옥적봉은 수탉, 서쪽의 백운령은 암탉을 닮았다고 한다. 현재 닭실마을은

 봉화읍에서 울진 방향으로 난 신작로인 36번 국도에서 마을로 들어가지만, 예전에는 석천계곡을 지나는 길이 주된 진입로였다.

 내성천의 지류를 따라 올라가는 길로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봉화읍에서 영동선 철길 아래로 흐르는 내성천을 따라

북쪽으로 200m 정도 거슬러 올라가면, 물길이 두 갈래로 갈라진다. 여기서 우측의 개울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더 가야 석천계곡으로 향할 수 있다.

이렇게 써놓으면 유식한 사람외에 누가 알겠는가 설명이 없다면 나역시도 까막눈이다


전에 왔을 때는 이렇게 맑은 물이었는데 며칠전 비가내린후로는 물이 흐리다

예전에 갔을 때 계곡의 모

봉화 닭실마을의 청암정(靑巖亭)과 석천계곡은 함께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석천계곡은 문수산을 분수령으로 남서류하는 창평천과 닭실마을 뒤에서 흘러내리는 동막천이 합류하는 곳에 위치한다.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석천계곡에는 석천정사가 있는데, 이 주변은 닭실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한다.

 이처럼 청암동천이라 불리는 수려한 석천계곡의 경치는 길지로 평가되는 닭실마을과 함께 신선의 세계로도 승화된다.

석천정사는 계곡의 암반 위에 석축을 쌓은 뒤 지어진 팔작지붕의 한옥이다.

정자 아래로는 맑은 계류가 흐르고 뒤로는 창송으로 우거진 능선이 배경이 되어 인공의 정자와 원생의 자연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준다. 석천정사의 난간에 기대면 계곡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석천계곡의

 모습 또한 빼어난 절경이 아닐 수 없다.

청암정과 석천계곡은 본래 사적이었으나 고정원이 명승으로 편입되면서 2009년 명승이 되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고정원을 발굴해 명승으로 지정하려는 노력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아직은 매우 미흡한 상태다. 경주의 포석정을 비롯해

 서출지, 안압지, 부여의 궁남지 등은 아직도 사적으로 분류되어 있다. 이러한 고정원을 명승으로 다시 재분류하는 작업과 함께

 다수의 고정원을 발굴하여 명승으로 지정하는 일이 향후 지속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명승기행에서

1526년 최초로 건립된 이 정사는 달실마을에서 오솔길을 돌아가면 볼 수 있다.

                본 정사는 주변 환경과 잘 어울려 고아한 분위기를 내며 연중 방문객이 끊이질 않는

                명소로도 유명하다. 난간이 있는 넓은 마루는 대략 100여명이 앉을 수 있을 정도로 커서,

               과거에는 여름철 학문이나 모임에 사용되었던 곳이라고 전해져 온다.
               청암정과 더불어 주변환경과 조화를 잘 이룬 빼어난 전통 건축물로 인정받고 있다.

               마을의 종가에서 도보로 약 10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석천정사

석천계곡에는 권벌의 맏아들인 권동보(權東輔, 1517~1591)가 지었다는 석천정사(石泉精舍)도 자리하고 있다.

그는 양재역벽서 사건으로 아버지 권벌이 삭주로 귀양을 가 1년 만에 사망하자 관직을 버리고 20년간 두문불출한

올곧은 선비였다. 선조 때 아버지의 무죄가 밝혀지자 복관되어 군수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전원으로

 돌아가 이 계곡 위에 석천정사를 지었다. 그는 이곳에서 산수를 즐기며 여생을 보냈다.


유곡마을은 1380년에 권벌의 선조가 처음 개척한 곳이다.

 마을 모양이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지세라고 하여 닭실마을로도 불린다.

이중환이 쓴 『택리지(擇里志)』에는 이 지역을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경승지로 기록하였다.

마을 이름이 닭실인 것은 동쪽의 옥적봉이 수탉을 닮고, 서쪽의 백운령이 암탉을 닮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줌인해본 청암정사

닭실마을은 전통한옥으로 구성되어 있어 영남 지방의 기품 있는 반촌의 전형을 잘 보여준다.

이곳은 조선 중기 지리학자 이중환(李重煥, 1690~1752)이 《택리지(擇里志)》에서 4대 길지 중 하나라고 칭송한 명당이다.


또한 닭실마을은 안동권씨 세거지로 가문에서도 닭실권씨라는 독립적인 세력을 이루었고 종가인

 충재 권벌(權撥, 1478~1548)의 고택을 중심으로 다수의 한옥이 마을 전체를 구성하고 있다. 중종조의 문신으로 강직한

 성품을 지녔던 권벌은 기묘사화로 파직을 당하자 이곳에 집을 지어 닭실마을의 터를 닦았다.

나지막한 산과 전형적인 배산임수형의 지형인 이곳은, 나라를 위한 충(忠)사상이 지배하던

                     곳이다. 평소에는 농사를 근본으로 하여 학문에 힘쓰다가, 나라가 위태해질 때면 목숨을

                     다해 나라를 지키던 사람들이 살아온 곳이다. 


                     특히, 대한제국말기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의 주권침탈기에는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힘을

                     아끼지 않아 ‘충절의 마을’이라는 별칭까지 얻기도 했던 곳 중의 한 곳이 바로 이곳 ‘유곡1리

                     달실마을’이다.
                     현재는 마을의 구성원들 대부분이 농사를 주로 하며 생활하고 있다.



이곳이 바로 조선 중종 때 예조판서를 지낸 충재 권벌(1478~1548)의
종갓집입니다. 내성 유곡 권충재 관계유적은 현재 사적 및 명승 제3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는데. 종택 뒷쪽으로 작은 동산이 있어 더욱
고아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

여기는 사당인듯


청암정은 권벌이 닭실마을에 종가를 지으면서 조성한 정자로 1526년(중종 21) 거북 모양의 너럭바위 위에 세워졌다.

 그리고 주변에 못을 판 후 냇물을 끌어들여 물을 채워놓고, 장대석으로 좁고 긴 돌다리를 축조해 청암정에 다다를 수 있도록 만들었다.

청암정은 바위를 평평하게 다듬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살리면서 주춧돌과 기둥 길이를 조정하여 지은 집으로 주추의 높이가

 각각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자연을 활용하여 정자를 세운 옛사람들의 지혜와 자연암반을 이용하여 청암정을 짓고 주위에

연못을 만든 매우 탁월한 조경기법을 볼 수 있다.

청암정은 '동이'라는 드라마의 촬영지로도 유명해저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청암정을 찾아 오는 것 같다


청암정이 놓여 있는 너럭바위는 물속에 든 거북으로 비유된다. 물속에 거북이가 자리하고 있고, 그 위에 정자가 놓인 형상이라는

 것이다. 정자 한쪽에 마련된 방에는 마루가 깔려 있다. 처음에는 온돌방으로 꾸며졌고, 바위 둘레에 연못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집을 짓고 난 후 온돌방에 불을 지폈는데, 바위가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괴이하게 여기던

 차에 한 스님이 이곳을 지나다가 이 바위를 가리켜 거북바위라고 말했다. 정자의 방에 불을 지피는 것은 거북이 등에다


불을 놓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하여 아궁이를 막은 다음 주변의 흙을 파내고 물을 담았다고 한다. 이렇게 물을 줌으로써

 청암정을 등에 지고 있는 거북이가 살기 좋은 지세를 만들 수 있었다. 거북바위에 지어진 청암정은 날아갈 듯 날렵한 모습으로

 바위 위에 가볍게 올라앉아 있으며, 정자 내에는 ‘청암정’이라는 당호와 함께 미수 허목이 전서체로 쓴 ‘청암수석(靑巖水石)’

 편액이 걸려 있다.

자렇게 좁은 다리로 나이든 분들이 어떻게 다녔을까

청암정사는 개방을 아니한다 아마 보존을 위해서 이겠지


청암정사를 돌아보고 충재 박물관에 들어가 유품과 작품들을 살펴보았다













유형문화재는 마을전체가 지정된 사적 및 명승 1개소, 보물로 등록된 국가지정문화재 5건

          482점과 일반동산문화재 2,979점이 있다.


         보물류는 마을의 형성과 함께 자연스레 축적되어 종가에 전해오던 것으로 현재 마을내의

         박물관에서 보관중이다. 일반동산문화재 또한 대부분이 종가에 전해오던 것으로 이 또한

         대부분 마을내의 박물관에서 보관중이다.


박물관을 돌아보고 나가면서 청암정의 뒷쪽 풍경을 담아본다

점식시간이 예약이 돼서 시간약속 때문에 대장님은 빨리 오라고 성화다



3년전에도 들렸던 인하원 오늘도 이식당을 이용한다

연못도정원도 운치가 있고 시골이라 무엇보다 공간이 넓어 마음부터가 풍요로워진다


돌솥밥 구수하고 나물이 풍부해 비빔밥으로 맛있게 먹었다 조금 짠편 오후에 물을 달고 살았다


정원도 좋지만 가까운 곳에 출렁다리도 있어 운치를 더해준다

점심식사를하고 봉화읍 황전 마을로왔다


황전(黃田)마을,

누런 들판이 가득한 마을이다. 이름 그대로 해석한다면 누런 들판, 즉 곡식이 가득한 풍요로운 마을이란 뜻일진데,

그또한 그러한 연유가 아니다. 오래전, 마을의 앞산에는 황학이 떼를 지어 살았다 한다. 그 황학들이 마을로

내려와 앉으면 온 들판이 누렇게 장관을 이뤘는데, 그 모습을 보고 황전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어찌 됐건, 황학이 떼를 지어 내려왔다는 것은 그만큼 낱알이 많다는 것이고, 낱알을 남길만큼의 여유가 있었다면

 들판의 오곡이 풍성하다는 뜻이 되겠으니 이래저래 풍요로운 마을이었음을 알수 있게 된다.

황전마을은 350년간 이어온 의성김씨의 터전이다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거촌2리 황전마을 앞의 도암정으로 황파 김종걸이 효종 1년에 건립한 곳으로

분홍빛 연꽃과 함께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다.

정자와 연못가운데 작은섬, 그리고 큰 소나무 한그루가 지키고 있더라구요. 도암정 같이 마을의 입구에 정자가 서있는

 것은 흔하지 않는 모습인데요. 송산공 김흥선생이 마을에 들어와 살때 마을에 해마다 재앙이 생겼다.


스님이 지나면서 마을의 안산인 학가산이 화산인지라, 수(水), 목(木)이 없어 생기는 일인지라 마을 안팍으로 연못을 파고

아랫연못에 수련을 심고 가운데 인공섬을 만들어 소나무와 느티나무를 심은 후 매년 5월 15일 풋굿을 열어 재앙은

사라지고 자손이 번창하는 등의 안정을 취하게 되었다고 한다.



도암정 편액과 언비어약이라는 편액이 적혀있습니다. 분명 솔개연자인데 읽을 때는 언으로 읽나보다

시경에 나온구절로 “솔개는 하늘에서 날고 물속에는 고기가 뛰논다” 며 성인의 덕이 하늘과 땅에 드러남을 의미합니다.

이 도암정은 난간을 두른 툇마루를 달아내어 앞에는 펼쳐진 연못들이 아름다움을 자랑합니다.



이렇게 도암정 뒤로는 황전마을이 시작된다. 황전마을은 효 시범마을 이며 뒤로는 의성김씨의
종택, 경암헌 고택이 자리하고있다.



김동대 선생의 고택이라고 한다 어느학교 교장을 하셨다고 하는데 자세히는 모르겠다

동대님 고택을나와 경암 고택으로 간다

경북 봉화군 봉화읍 거촌2리 황전마을은 예로부터 효도를 마을 정신 문화의 근간으로 삼았던 곳이다.

이 마을을 대표하는 선조 가운데, 조선 효종 때의 문신 황파(黃坡) 김종걸(宗傑·1628~1708)이 있다.

300 여 년 전에 이 마을 살던 그는 평범치 않은 효행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황파는 부모님이 원했던 등제는 못했지만 학문이 뛰어나고 효심이 지극하기로 팔도에 소문난 선비였다.

 부모님이 병이 들었을 때 하룻밤 백리 길도 마다하지 않았고 단을 쌓아 금식하며 기도를 했다.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자 세상에 나아갈 뜻을 접고 향촌에 눌러앉아 벗과 시영(詩詠)하고 세상을 논하며

 마음을 즐겁게 하였다.

그의 효성에 호랑이도 감동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병든 부모를 낫게 해 달라고 산에 들어가 금식기도를

 올리던 중에 호랑이가 그를 인도하여 약초를 구하게 했다는 이야기다. 그의 후손이 살고 있는 황전마을이

 경상북도 지정 효 시범마을이 된 건 우연이 아니다


        

                   경암고택 사랑채 경암헌 누은재 경암이라는 현판이 보인다

안과 밖에는 장작이 곳곳에 쌓여있다

경암헌고택 1600년대에 지어진 집이다. 사랑채 가운데 두 개의 기둥을 좁게 하여 ‘누은재’ 편액을 단 것이 독특하다

'누은'의 뜻이 누추하고 숨어 살기 좋은 집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누은재.경암.경암헌의 현판

안채에는 많은 화분이 주인의 부지런 함을 엿볼 수가 있다


경암헌 고택
도암정은 별서 터에 있고 집은 마을 안에 따로 있다. 경암헌고택이다.

어느 날 김흠이 시종을 데리고 이 마을에 있는 구봉산에 올라 매를 날리며 꿩사냥을 하게 되었는데 산에서

 가만히 바라보니 매에게 쫓긴 꿩이 황전의 생원 남구수의 집으로 날아들어 갔는데, 그의 딸이 꿩을 감추어

 두었다가 매가 가고 난 뒤에 그 꿩을 살려 보내는 광경을 보고 아주 후덕한 규수라 여기고 청혼을 했고,

마침내 이 남씨 가문에 장가를 들어 황전에 와서 처가살이를 하게 되었는데, 그 때부터 남씨가 한 집 두 집

 이곳을 떠나 20년이 채 못 가서 남씨는 한 집도 남지 않고 의성 김씨 마을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황전에서는 지금도 외손이 들어오면 본손이 망한다고 해서 외손은 물론 타성도 큰마에 살지

 못하도록 한다고 전해온다.


담장에는 찔레꽃이 탐스럽게 피어 있다

               

      

                                                                  이수인의 파랑새의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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