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朴堧, 1378년 음력 8월 20일 ~ 1458년 3월 23일)은 조선 초기의 문신, 도학자, 경세가, 문장가, 천문학자, 음악가이다.
초명은 연(然), 자는 탄보(坦父), 아호는 난계(蘭溪), 당호는 송설당(松雪堂)이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며,
밀양 박씨 좌복야공파후 난계파조이다. (6/30)
박연은 1378년(고려 우왕 4년) 지금의 충청북도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 308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주 총명하고 학문이 탁월하였으며, 효심이 지극하여 여(시)묘를 6년 하여 1402년(조선 태종 2년)에
조정에서 효자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1405년(태종 5년)에 생원시에 급제하고 1411년 문과에
제1위(장원)로 등과하였다. 세종이 대군 시절 세자시강원 문학으로 세종을 가르쳤다.
집현전 교리(敎理)를 거쳐 지평(持平)·문학(文學)대제학을 역임하였다.
세종이 즉위한 뒤 악학별좌(樂學別坐)에 임명되어 음악에 관한 일을 맡아 보았다.
당시 불완전한 악기의 조율(調律)의 정리와 악보 찬집(撰集)의 필요성을 상소하여 허락을 얻고, 1427년(세종 9) 편경 12매를
제작, 자작한 12율관(律管)에 의거한 정확한 음률로 연주케 했고 3년 후 다시 미비한 율관을 수정했다.
또한 조정의 조회 때 사용하던 향악을 폐하고 아악의 사용을 건의하여 실행케 했다. 세종실록 9년 5월 15일조 기사를 보면
악학별좌(樂學別坐) 봉상 판관(奉常判官)으로 1틀에 12개 달린 석경(石磬)을 새로 만들어 올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세종실록 1428년 2월 20일 조 기사에는 세종으로부터 세상일에 통달한 학자라는 평을 얻었다. 1431년 남급(南汲)·
정양(鄭穰)과 회례(會禮)에도 아악을 채택케 하고, 조회와 회례에서 종전까지 기생이 추던 춤을 무동(舞童)으로 대치하여
문무이무(文武二舞)의 작변지절(作變之節)과 속부남악지기(俗部男樂之伎)를 추게 하여 궁정 음악과 예법을 전반적으로 개혁했다.
1433년 유언비어를 유포했다는 죄로 파직되었다가 용서되어 아악에 종사하였으며, 공조 참의·첨지중추원사를 지냈다.
1445년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인수 부윤(仁壽府尹)·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를 역임하였다가 예문관 대제학에 올랐다.
1453년10월10일(단종 1) 계유정난 때 집현전 한림학사이었던 셋째 아들 박계우가 교형되었으나 악학도제조인 수양대군이
악학제조인 박연이 4조(三朝)에 걸친 원로임을 인정하여 3족을 멸하는 죽음을 면하였으나 자손들의 안위를 위하여 1458년
2월 2일까지 고산에 자원 안치되었다가 풀려나 49일만인 1458년 3월 23일 죽었다. 가훈 17장을 지으니
도암(陶庵) 이재(李縡, 1680 ~ 1746)가 서문을 찬(撰)하였다.
1767년 영조 43년 문헌공의 시호가 내려졌다.1972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영동에 난계사를 세우고 1973년부터
매년 연례 행사로 난계예술제를 지내고 있으며 서울에 난계로와 난계공원이 있다.
특히 적(笛)의 명 연주가였으며 조선 초 미비한 궁정 음악을 정비하여 고구려의 왕산악(王山岳),
신라의 우륵(于勒)과 함께 3대 악성(樂聖)으로 불린다.
난계사는 박연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건립과 유실을 거듭하다가 1972년 12월에 현재의 위치인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 515에 재건되었다. 1976년 12월 30일 충청북도의 기념물 제8호로 지정되었다.
사당이 위치한 밀양박씨 복야공파 문중의 선산(先山) 일대에는 박연을 비롯한 6인의 위패를 봉안한 세덕사,
그의 사촌형인 국당, 박흥생의 묘비, 박연의 묘소, 쌍효각 등이 있다
조선 전기 문신이자 악성(樂聖)인 난계 박연(1378∼1458)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세종을 도와 음악을 정비하는데 많은 공을 세운 박연은 악률에 정통하여 세종 7년(1425) 아악의 율조와 악기의 그림,
악보를 같이 실은 『악서』를 편찬하였고, 1427년에는 편경 12매를 만들어 자작한 12율관을 따라 직접 연주하기도 하였다.
그는 피리의 일종인 적(笛)과 거문고, 비파의 연주에 뛰어났으며 조정의 조회 때 아악을 연주하도록 하는 등 국악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972년 다시 세운 이 건물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난계영정
난계박물관
우리나라 3대 악성(樂聖)중 한 사람인 난계박연의 음악적 업적과 예술적 혼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설립되었다.
박연 관련 사료와 전통국악기를 수집, 보관, 전시, 연구함으로써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고 군민의 정서함양
및 사회교육에 기여하고자 한다. 2000년 9월 23일 개관하였고 2006년에는 난계국악체험전수관을 개관하여
아울러 운영하고 있다.
난계국악박물관은 부지 710평, 건면적 230평의 2층 건물에 난계실, 영상실, 국악실, 체험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난계실에는 난계박물관 모형, 박연의 흉상, 국악의 역사, 박연의 삶, 악기제작과정, 박연의 업적, 세종과 난계 박연,
난계와 관련한 설화, 난계와 영동, 한국음악, 명인, 명창, 국악 의상, 국악기의 이해, 박연 부부 영정, 박연 왕지 등에
대해 관람할 수 있다.
영상실에서는 박물관 관람에 앞서 박연의 삶과 업적, 국악에 관한 영상물을 시청할 수 있으며
국악실에는 현악기, 관악기, 타악기, 국악의상 등이 전시되어 있다. 체험실에는 가야금, 거문고, 해금, 단소, 장고,
북을 비롯한 90개의 국악기를 갖춰 놓았으며 프로젝트 TV를 통해 난계 국악단원들의 연주 모습을 보면서
국악기를 체험할 수 있다.
박연은 조선초기의 문신이자 음악가로 충북 영동에서 태어나 타계했다.
“국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박연은 세종때 율관(동양에서 악률의 표준을 정하기 위해 만든 12개로 된 관)을 만들어
편경을 제작하는 등 조선초기 음악 정비에 지대한 공헌을 했으며 고구려의 왕산악, 신라의 우륵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악성으로 추앙받고 있다. 난계박연선생의 음악적 업적과 전통 국악을 계승 발전시켜 나가고 지역 문화예술
활동의 대중화, 국악의 교육장으로서의 활용을 통해 국악의 예술적 가치를 전수하고 국악의 본고장으로서의
면모를 갖추는데 노력하고 있다.
난계박물관에서 난계생가를 가기위해서 길을 나서는데 바로 앞에 버섯칼국수집이 있어 마음이 솔깃
들어가보았다 메스컴에 소개됐다니 얼마나 맛이 있을까 기대가된다
쫄깃쫄깃 참 맛이 있고 김치도 맛이 좋았는데 양이 너무 많아 맛있는 국물은 하나도 못먹었다
난계 생가는 사당에서 2km 정도 가까운곳에 있는데 조금 초라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벼슬도 했으면 좀 호화스럽게 고처지었을 텐데 본디 성품이 어질고 검소하여
이런곳에서 만년을 보내신 것 같다
난계 박연 선생은 고려우왕 4년인 1378년 8월 20일 이곳에서 출생 태종5년(1405년)인 28세에 생원이 되었고,
34세(1411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교리, 관습도관제조, 악학별좌, 대제학 등을 역임후 세조 2년(1456년)에
삼남 계우가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되어 화를 당할뻔 하였으나, 세 임금에 봉직한 공으로 화를 면하고 관직에서
물러나 이곳으로 돌아와 살다가 세조 4년(1458년) 3월 23일 81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00년 5월 안채(39m²), 사랑채(21.81m²)를 학술용역을 근거로 복원하였다.
생가의 평면은 정면3칸 측면은 전후퇴가 있는 겹집에 전면퇴에는 우물마루를 설치하고 한켠에는 부엌과 곡식창고를
부설한 고미반자에 우진각의 기와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부속채는 1동으로 외양간, 광과 방1칸인 초가지붕으로
되어있다.대한민국 구석구석에서
어디로 갈꺼나(김영동 작곡) / 김덕은 대금연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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