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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대전

대전 우암 송시열 사적지

우암송시열

조선 후기의 정통 성리학자로 본관은 은진, 자는 영보, 호는 우암. 주자의 학설을 전적으로 신봉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평생의 업을 삼았으며, 17세기 중엽 이후 붕당정치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서인노론의 영수이자 사상적 지주로서 활동했다.

 보수적인 서인, 특히 노론의 입장을 대변했으며, 명을 존중하고 청을 경계하는 것이 국가정책의 기조가 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강상윤리를 강조하고 이를 통해서 국가·사회 기강을 철저히 확립하고자 했다. (7/1)

아버지는 사옹원봉사 갑조이고, 어머니는 선산곽씨(善山郭氏)이다.

효종의 즉위와 더불어 대거 정계에 진출해 산당(山黨)이라는 세력을 형성했던 송준길(宋浚吉)·이유태(李惟泰)·유계(兪棨)·

김경여(金景餘)·윤선거(尹宣擧)·윤문거(尹文擧)·김익희(金益熙) 등과 함께 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 부자에게서 배웠다.

26세 때까지 외가인 충청도 옥천군 구룡촌에서 살다가 회덕(懷德)으로 옮겼다. 1633년(인조 11) 생원시에 장원급제하고

최명길(崔鳴吉)의 천거로 경릉참봉이 되면서 관직생활에 발을 내디뎠다.

1635년 봉림대군(鳳林大君 : 뒤의 효종)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이듬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갔으나, 1637년 화의가 성립되어 왕이 항복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가게 되자 낙향하여 10여 년 간을 초야에 묻혀 학문에 몰두했다.


1649년 효종이 왕위에 올라 척화파와 산림(山林)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그도 장령에 등용되어 세자시강원진선을 거쳐

집의가 되었다. 이때 존주대의(尊周大義)와 복수설치(復讐雪恥)를 역설하는 글을 왕에게 올려 효종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청서파(淸西派 : 인조반정에 간여하지 않았던 서인세력)였던 그는 공서파(功西派 :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공을

세운 서인세력)인 김자점(金自點)이 영의정에 임명되자 사직했다. 이듬해 김자점이 파직된 뒤 진선에 재임명되었다가

다시 물러났다. 그뒤 충주목사·사헌부집의·동부승지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향리에 은거하면서 후진양성에만

 전념했다.

1658년(효종 9) 다시 관직에 복귀하여 찬선을 거쳐 이조판서에 올라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을 추진했다.

이듬해 효종이 급서한 후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 문제를 둘러싸고 제1차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송시열은 기년복

(朞年服 : 만 1년 동안 상복을 입는 것)을 주장하면서 3년복(만 2년 동안 상복을 입는 것)을 주장했던 남인윤휴(尹鑴)와

 대립했다.


예송은 〈대명률 大明律〉·〈경국대전〉의 국제기년설(國制朞年說)에 따라 결국 1년복으로 결정되었지만 이 일은 예론을

둘러싼 학문적 논쟁이 정권을 둘러싼 당쟁으로 파급되는 계기가 되었다. 예송을 통해 남인을 제압한 송시열은 효종에 이어

현종이 즉위한 뒤에도 숭록대부에 특진되고 이조판서에 판의금부사를 겸임한 데 이어 좌참찬에 임명되어 효종의 능지(陵誌)를

 짓는 등 현종의 신임을 받으면서 서인의 지도자로서 자리를 굳혀 나갔다.

그러나 이때 효종의 장지(葬地)를 잘못 옮겼다는 탄핵이 있자 벼슬을 버리고 회덕으로 돌아갔다.

그뒤 여러 차례 조정의 부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향리에 묻혀 지냈으나, 사림의 여론을 주도하면서 막후에서 커다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1668년(현종 9) 우의정에 올랐으나 좌의정 허적(許積)과의 불화로 곧 사직했다가 1671년

다시 우의정이 되었고 이어 허적의 후임으로 좌의정에 올랐다.


1674년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다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제기되어 제2차 예송이 일어났을 때 대공설(

大功說 : 9개월 동안 상복을 입는 것)을 주장했으나 기년설을 내세운 남인에게 패배, 실각당했다.


이듬해 앞서의 1차 예송 때 예를 그르쳤다 하여 덕원으로 유배되었고, 이어 웅천·장기·거제·청풍 등지로 옮겨다니며

귀양살이를 했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남인들이 실각하고 서인들이 재집권하자 유배에서 풀려나 그해 10월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로 다시 등용되었다.


그뒤 서인 내부에서 남인의 숙청문제를 둘러싸고 대립이 생겼을 때, 강경하게 남인을 제거할 것을 주장한 김석주

(金錫胄)·김익훈(金益勳) 등을 지지했다. 이로써 서인은 1683년 윤증(尹拯) 등소장파를 중심으로 한 소론과,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장파의 노론으로 분열되기에 이르렀다.


1689년 숙의장씨가 낳은 아들(뒤의 경종)의 세자책봉이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숙종의 미움을 사

 모든 관작을 삭탈당하고 제주로 유배되었다. 그해 6월 국문(鞠問)을 받기 위해 서울로 압송되던 길에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다음백과에서

장판각의 목판들


              우암문집은 숙종 43년에 교서관에서 금속활자로 처음 간행되었다.

              목판본이 정조 11년 (1787)에 평안 감영에서 발간되었는데 그중

              첫 권과 연보는 서울의 교정소에서 별도로 간행하였다.



사당으로 들어가는 홍살문

명정문


외삼문인 명정문이다

1991년부터 1997년까지 우암사적공원을 조성하면서 '운평집'에 수록된 내용을

            토대로 사학자의 고증과 자문을 받아 건립한 것이라 한다.

           이 문을 지나게 되면 이직당, 명숙각, 인함각 등 서원건물 5개동과 사당 남간사가 나온다.

유물관 위에는 서원의 형태를 재현해 놓은 이직당(以直堂)이 자리잡고 있다.

우암 송시열은 평생 곧을 직(直)자를 그의 학문 세계의 화두로 삼았다.

 

 모든일을 명확하게 하고 마음을 맑게 하라는 뜻을 담은 명숙각(明淑閣) 선비들의 공부방이다


모든 괴로움을 참고 또 참아야 한다는 뜻으로 인함각이라했다 선비들의 공부방


심결재

매사를 심사숙고하여 결정하라는 뜻으로 선비들의 공부방

견뢰재

우암선생의 마지막 교훈을 받들고 선현의 가르침을 굳게 지키라는 뜻으로 선비들의 공부방

사당으로가는 내삼문인 현도문

남간사 (南澗祠)

남간정사 후면에 있는 사우로 1677년(숙종23) 회덕(懷德)의 유생(儒生)들이 이 사우를 짓고 주자(朱子),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 석곡 송상민( 石谷 宋尙敏), 수암 권상하(遂菴 權尙夏)를 배향하였다

종손이 관리하며 살고 있는 집이아닌가 생각된다


덕포루

덕포루는 우암선생이 후학들에게 덕을 베풀고 교육하던 장소,

덕포루뒤 후문으로 가는 길에는 살구나무에서 살구가 많이도 떨어져 있네

살구나무들


자료실은 문이 굳게 닫혀 있고




덕포루앞 연못에는 수련이 피기시작 조금 있으면 많은 수련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우암서적공원 안에는 우암 송시열을 소개하는 유물관이 있다. 유물관 안에는 우암 송시열의 유품과 그의 일대기표,

그가 집필한 각종 문헌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10여분 정도 우암 송시열에 관한 영상을 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유물관 관람을 통해서 평소 우암 송시열에 대한 잘못된 지식을 바로 잡을 수 있었다. 첫째는, 우암 송시열은 부유한 가문의

 자손이 아닌 가난한 학자 집안 출신의 자손이었다.


 두 번째로는, 우암 송시열은 남인과 그 어떤 교류를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젊은 날에는 당시 남인을 대표했던 여헌 장현광과도 교류를 했다.


세 번째로는, 우암 송시열은 청나라를 물리치고자하는북벌론을 주장하면서 구제적인 방안을 제시했다. 대표적으로 1657년

 우암 송시열이 효종에 올린 상소문인 기축봉사이다.

 기축봉사의 내용 중에는 조선이 부강해질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였다. 대표적인 예로는 올바른 인재를 등용해야하며,

국가의 재정을 튼튼히 해야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우암의 연보

우암이 과거에 합격할 때의 시험문제- "한번 음이었다 한번 양이었다 하는 것을 도라 한다." 대해 논하라

 당시 송시열이 작성한 답안지는 일반적인 시권의 방식에 맞지 않아서 모든 시관들이 탈락시키려고 하였으나

이때 최명길이 송시열의 시권을 보고 큰 선비가 될 것을 예견하며 최고로 평가하여 송시열이 작성한 답안은 장원이 되었다.





우암의 정절을 표시하는 글씨,  해동 천지에 조선의 큰 뜻을 담은 글씨다.

<기축봉사>는 효종 즉위초에 시무(時務) 및 유학의 정치적 이상을 13개 조항에 걸쳐 개진한 것으로서

마지막 조항인 “정치를 잘하여 오랑캐를 물리치라(修政事以攘夷狄)”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정유봉사 丁酉封事>상소를 올린 해가 정유년이기에 정유봉사라고 한다.

효종이 송시열에게 내린 편지 3통을 베껴 둔 것과  1664년 송시열이 쓴

'해동건곤 존주대의'란 글귀인데 해동은 우리나라를, 건곤은 천자를 의미하고

존주의 중심으로 중화 문화를 이끌 곳이 명나라에서 조선으로 바뀐

조선중화의식이 담겨 있는 글귀라고 한다




1658년 청주에 머무르고 있는 송시열에게 효종이 기다리고 있다는 뜻을 전달한 유지



효종의 승하로 북벌론 등 정치적 이상을 함께 했던 동지를 잃은 송시열의 슬픈 심정을 표현한 영릉지문

우암 영정





1689년 6월, 사약을 받기 5일 전 제주에서 서울로 압송되어 가던 송시열이

정읍에서 쓴 유언과 같은 글


남간정사 현판 탁본

권상하가 편찬한 송시열의 문집인 '우암집'

1787년 평양감사 이명식 주관하여 편찬한 우암 송시열이 남긴 글을 모은 서책으로

 책의 제목은 성현을 부르는 관례에 따라 '송자'로 하여 '송자대전'이라 하였다

우암사적공원은 조선 후기 대유학자로 알려진 우암 송시열 선생이 학문을 닦던 남간정사 일대에 장판각, 전시관, 서원 등

 10여 동의 건물을 복원한 곳이다. 1991년부터 조성을 시작하여, 1998년 사적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남간정사는 우암 선생이

 말년에 전국의 유림과 제자를 모아 후학을 양성하며 학문에 정진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낮은 야산 기슭 골짜기에 자리 잡은 남간정사의 남간은 주자의 시 ‘운곡 난간’에서 따온 이름으로 주자를 사모한다는 뜻이다.

대전시 소제동에 능인암이라는 서재를 짓고 학문을 연마하던 우암은 1683년(숙종 9년) 능인암 아래에 남간정사 건물을 세웠다.

 남간정사의 건축양식은 그 사례가 없을 정도로 독특한데, 계곡의 샘에서 내려오는 물이 대청 밑을 통해 연못으로 흘러가도록

 한 것으로 우리나라 조경사에서 매우 독특하고 중요한 양식이다. 건물 앞에는 잘 가꾸어진 넓은 연못이 있어 운치를 더한다.

봄이 되면 연못으로 벚꽃과 목련꽃이 핀다. 남간정사 오른쪽에는 일제 강점기 때 소제동에서 옮겨 지은 기국정이 있다.

작은 폭포 옆과 연못 한복판의 섬에는 수백 년 묵은 왕버들이 이리저리 몸을 비틀고 아름다운 자연의 소리를 내고 있다.

 메마른 땅을 뚫고 솟아오르는 새싹들과 꽃망울을 터트린 자연의 생명력, 그리고 시간에 순응하며 허리를 굽히는

 고목들의 위엄함이 이상하리만치 잘 어우러지는 곳. 그곳을 바라보고 있으니 마치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가 저만치서

 들려오는 것 같다. 졸졸 흐르는 계곡 물과 생명이 움트는 흙이 만나는 숲속의 별장, 남간정사.

남간정사의 주련

危石下崢嶸(위석하쟁영)-위태로운 돌이 높고 가파른 산에서 굴러 내려온다

高林上蒼翠(고림상창취)-높은 수풀이 청록색을 뛰우고 높이 올라가고

中有橫飛泉(중유횡비천)-가운데는 폭포가 가로 놓여져 있으며

崩奔雜奇麗(붕분잡기려)-바쁘게 무너져 내리면서 여러가지 뛰어나게 아름답다




배롱나무는 우암이 제자들을 강학 할 때에 손수 심었다고 한다

우암 사적지를 나오면서 올려다 본 사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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