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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구

경주 문화 엑스포 공원2



경주세계문화엑스포는 지난 1998년부터 2015년 '실크로드 경주 2015'까지 총 8회의 엑스포를 개최하며 누적관람객이

1,620만명에 달하는 대한민국 국보급 문화박람회이다. 특히 지난 2015년 8월21일부터 59일간 열린 '실크로드 경주 2015'는

 전통문화와 ICT첨단기술의 절묘한 접목, 한국문화와 세계문화의 융합, 풍성한 창작콘텐츠, 다양한 한류콘텐츠를 선보이며

 '실크로드'라는 특별한 테마를 살려 세계 최초 문화엑스포의 저력을 제대로 선보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6년네는

경주엑스포 상시개장을 통해 다양한 전시, 공연, 영상, 체험 콘텐츠를 선보이며 관람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작렬하는 태양아래 배롱나무 꽃도 곱게 피어 있네

비단길 황금길 Golden Road 21 이라는 이름으로 과거 계림에서 시작된 실크로드의 여정과
경주가 새롭게 준비하는 문화로드 新실크로드를 표현한 전시로 작년 실크로드 행사의 의미와 취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장소다.

들어가자 마자 보이는 화려한 금관 신라시대 화려한 황금문화가 온몸으로 느껴지는 공간

 실크로드 선상에 있는 우호관계를 맺은 나라들의 간략한 소개와신라에서 이어지는 3개의 실크로드  초원길, 사막길,

 바닷길 사막 모래를 체험하고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의 비전을 감상하는 공간으로 구성됐다 신라가 찬란한 문화의

꽃피울 수 있었던건실크로드'를 통한 교역활동이 큰 영향을 주었다









나무는 제손으로 가지를 꺽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은 제 마음으로

가까운 이들을 베아버린다.톨스토이








인생은 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채워지는 것이다 우리는 하루 하루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무엇을 채워 가는 것이다.존 러스킨



해초의 서역 기행 여정도(723~727)


이어지는 실크로드의 주요 길목이었던 사막의 협곡협곡벽에 남겨진 희미한 실크로드의 흔적이 보인다
사막의 협곡을 따라 걷다 보면 새롭게 만나는 또다른 전시관경주가 새롭게 시작하는 문화로드 新 실크로드를

만날 수 있는 두번째 메인 전시실을 만날 수 있다

장보고관을 들어가려고 하니 나이가 많아 보이고 혼자라서 인지 입장권 발매원이 어린이들의 무대라고 해서 통과


문화센타 공연장과 편의시설


경주탑에서 한컷 경주탑은 높이가 82m이다

첨성대 영상관도 올라가려니 너무 멀고 덥다 그냥 패스 82m 경주타워에 오른다








구름위에 카페

82m 높이에 위치한 ‘구름 위에 카페’는 경주 보문단지의 풍경을 한 눈에 담을 수 있는 곳으로 여행 중 쉬어가며 커피 한잔을

 즐길 수 있는 최고의 장소이다. 전망대 뒤편으로는 경주엑스포 공원 내 아사달 조각공원, 시간의 정원, 솔거미술관, 연못(아평지)과

 블루원 워터파크까지 볼 수 있어 눈이 시원해지는 시각적 경험을 할 수 있다.

경주타워와 ‘구름위에 카페’는 주말 1,000명 이상, 평일에도 600~700명 이상이 찾고 있다. 지난 4월 문을 연 ‘구름 위에 카페’는

 품질 좋은 원두를 사용한 커피를 저렴한 가격에 판매해 호평을 듣고 있다. 또한 머핀, 프레즐, 기타 음료 등도 일반 카페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한다


전망 좋고 시원한 구름 위에 카페에서 갈증도 달랠겸 커피 라떼 한 잔시켜 놓고 잠시 휴식을 취한다

아평지(연못) 솔거미술관

아평지와 솔거미술관 시간의정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줌인해본 시간의 정원

선덕여왕의 소품과의상

9층목탑 동국제강 연수원으로 사용한다는 말도 있는데 확실히는 모르겠다


보문호와 각종리조트들

워터파크

보문호

보문호 주변의 호텔들




석굴암 본존불상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때의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751년에 창건하기 시작한 통일 신라 시대의 사찰이다.

설화에 따르면, 경주 모량리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품팔이를 하다 죽은 대성이 대상(大相) 김문량의 아들로

환생하여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굴암을,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는 불국사를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김대성의 생전에 완성하지 못하였고, 결국 신라 왕실의 적극적인 지원하에 혜공왕 때인 774년에 완공되었다.

 1962년에 국보 제24호로 지정되었고,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불국사의 부속암자로, 국보 제24호이다. 창건 당시에는 석불사라고 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751년 재상 김대성이 전세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불사를, 현세의 부모를 위해서는 불국사를 짓기 시작하여, 774년 신라 왕실에서 완성했다고 한다.
석굴의 구조는 전방후원식으로, 장방형의 전실과 원형 주실 그리고 그 사이를 이어주는 비도로 되어 있다. 주실의 가운데 높은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는 본존불의 두광은 사람이 전실의 중간쯤 와야 광배의 중앙에 부처의 머리가 놓이고 상의 크기나 몸체의 비례감이 알맞게 보이도록 고안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 3차에 걸쳐 보수되면서 많이 손상되었다. 1962~64년에 대대적으로 수리되어 석굴의 구조 및 불상들의 위치가 어느 정도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주실의 평면은 원형이고 좌우의 지름은 6.8m, 앞뒤의 지름은 약간 좁아서 6.58m이고, 천장높이는 약 8m이다.

중앙에서 약간 뒤에 높이 약 1.6m, 지름 약 3.7m의 석련대좌가 있고, 그 위에 본존불상이 안치되어 있다.

굴의 주위에는 10개의 요석(굴의 벽을 이루는 돌)이 놓여 있다.

요석의 높이는 약 0.2m, 나비 1.8m이며, 그 위에 다시 높이 약 2.42m, 넓이 약 1.21㎡의 화강암 15면을 병렬시켜

벽으로 삼고, 각 면에 엷은 부조(浮彫)의 석상들을 조각하였다.

현샹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세우고 전생의 부모를 위하여 석불사를 세웠다

신림 표훈 두성사를 청해서 각각 거주하게 했다





월지 출토유물들

경주 왕도 풍경

황룡사 9층 목탑(皇龍寺九層木塔)

 신라를 중심으로 삼국을 통일하고자 하는 그 시대의 간절한 소원이 표현으로 된 것이다.

신라 선덕여왕 때인 643년, 자장 율사가 당에서 귀국하여 황룡사에 탑을 세울 뜻을 선덕여왕에게 아뢰니 선덕여왕이

 군신에게 의논하였는데, 신하들이 “백제에서 공장(工匠)을 청한 연후에야 바야흐로 가능할 것입니다”라고 하여 이에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서 백제에게 청하였다. 공장 아비지가 명을 받고 와서 목재와 석재를 경영하였고 이간(伊干)

김용춘이 주관하여 소장(小匠) 200명을 이끌었다. 공장은 이에 마음을 고쳐먹고 그 탑을 완성하였다.


그런 만큼 이러한 소원과 포부가 이 탑에 반영되었다.규모가 장대무비하였는데 9층까지 높이는 탑지(塔誌) 기록 당시의

당척(唐尺)으로 따진다 하더라도 약 53.45m, 상륜부(上輪部)까지 합하면 약 66.70m나 되는 거대한 것이고, 조영(造營)

 당시의 척수인 동위척(東魏尺)으로 따진다면 80m 이상으로 그보다 더 높은 초대형 건축물이었다.또한 황룡사 9층탑을

만들어낸 의지와 역량을, 삼국 가운데 가장 약소국이었던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한 원동력 가운데 하나로 보는 시각도 있다.

정문

계림지와 계림정


부들

서동과 선화공주

어리연

산사나무

잎은 어긋나며 길이 6~8cm, 나비 5~6cm의 넓은 달걀꼴 또는 삼각 모양의 달걀꼴로서 가장자리가 깃 모양으로

깊게 갈라지는데 밑 부분은 더욱 깊게 갈라진다. 가장자리에 뾰족하고 불규칙한 톱니가 있다.

표면은 짙은 녹색에 윤기가 있으며 양면의 맥 위에 털이 있다. 잎자루의 길이는 2~6cm


꽃은 5월에 가지 끝에서 산방 꽃차례로 흰색의 오판화가 달려 핀다.

꽃잎은 둥글며 꽃받침 조각과 더불어 각각 5개씩이다. 수술은 20개이며 꽃밥은 붉은색이다.


열매는 9~10월에 지름 1.5cm 정도의 둥근 이과가 달려 붉게 익는데 끝에 꽃받침이 남아 있고 흰색의 반점이 있다.


장미원에는 아직도 장미가 피어 있는데 이제 마지막 꽃도 시들시들 생기가 없다


동해 용의 일곱 아들 중 1명이 왕을 따라 서울에와 정사를 보좌했는데 그의 이름이 처용이었다.

 왕은 그의 마음을 잡아두기 위해 미녀를 아내로 맺어주고 급간(級干) 벼슬을 내렸다.


처용의 아내는 매우 아름다워 역신(疫神)이 사모했다. 역신은 사람으로 변해 처용이 없는 밤에

그의 아내를 찾아와 동침했다.


처용이 외출했다가 집으로 돌아와보니 자기 아내의 잠자리에 두 사람이 누워 있었다.

이에 〈처용가〉를 지어 부르며 춤을 추면서 그 자리를 물러나왔다.


처용이 물러나자 역신은 모습을 드러내 무릎을 꿇고 "제가 공의 아내를 사모해 오늘 밤 범했습니다.

그런데도 공은 성난 기색을 보이지 않으니 참으로 감복했습니다.


 맹세하건대 이후로는 공의 모습을 그린 화상만 보아도 그 문 안에는 들어가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때문에 사람들은 문간에 처용의 얼굴을 그려 붙여 사귀(邪鬼)를 물리치고 경복(慶福)을 맞아들였다고 한다

포석정을 연상케하는 분수대



경주 양남 주상절리군을 모티브로한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