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암남공원 복수초를 보러 갔는데 신통치를 않아 아쉬움을 안고 왔서
오늘은 통도사 매화를 보러 다녀왔다
작년 보다 날씨도 따뜻했고 또한 9 일이나 늦게 갔는데도 아직 필려고 자리만 잡고 있었다
통도사는 두번이나 포스팅을 했기에 생략을 하고 서운암과 극락암을 잠시 둘러보고 내려 왔다(1/29)
그제 하루종일 내린비로 계곡물이 많이 흐르고 있다
불교에서는 음력을 사용해서인지 새해 인사말도 걸려있고 등도 많이 달아 분위기를
업시키고 있다 대웅전과 여타 불전에는 많은 신도들이 기도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작년보다 10여일을 늦게 왔는데 아직 필 기미가 없다
남쪽 가지에 겨우 세송이가 피어 있어 거리는 조금 멀지만 줌으로 몇 장 찍어보았다
손대면 툭터질 것 같은 꽃 봉오리
매화 앞에서 이해인
보이지 않게
더욱 깊은
땅 속 어둠
뿌리에서
줄기와 가지
꽃잎에 이르기까지
먼 길을 걸어 온
어여쁜 봄이
마침내 여기 앉아 있네
뼛속 깊이 춥다고 신음하며
죽어가는 이가
마지막으로 보고 싶어하던
희디흰 봄햇살도
꽃잎 속에 잡혀 있네
해마다
첫사랑의 애틋함으로
제일 먼저 매화 끝에
피어나는 나의 봄
눈 속에 묻어두었던
이별의 슬픔도
문득 새가 되어 날아오네
꽃나무 앞에 서면
갈 곳 없는 바람도
따스하여라
"살아갈수록 겨울은 길고
봄이 짧더라도 열심히 살 거란다
그래, 알고 있어
편하게만 살순 없지
매화도 내게 그렇게 말했단다."
눈이 맑은 소꿉동무에게
오늘은 향기 나는 편지를 쓸까
매화는 기어이
보드라운 꽃술처럼 숨겨두려던
눈물 한 방울 내 가슴에 떨어뜨리네
섬진강 매화꽃을 보셨는지요 김용택
매화꽃 꽃 이파리들이
하얀 눈송이처럼 푸른 강물에 날리는
섬진강을 보셨는지요
푸른 강물 하얀 모래밭
날선 푸른 댓잎이 사운대는
섬진강가에서 서럽게 서보셨는지요
해 저문 섬진강에 서서
지는 꽃 피는 꽃을 다 보셨는지요
산에 피어 산이 환하고
강물에 져서 강물이 서러운
섬진강 매화꽃을 보셨는지요
사랑도 그렇게 와서
그렇게 지는지
출렁이는 섬진강가에 서서 당신도
매화꽃 꽃잎처럼 물 깊이
울어는 보았는지요
푸른 댓잎에 베인
당신의 사랑을 가져가는
흐르는 섬진강 물에
서럽게 울어는 보았는지요
작년 1월20일에 갔을 때는 이정도가 피어 있었는데 금년에는 날도 따뜻했고 9일이나 늦게 갔었는데
필생각을 안하고 있다
오향매는 가지치기를 하여 앙상한 모습만 남았다
영축산에는 높은 고지대라서 비가 눈으로 변해서 내린듯
이 바위만 보면 40년도 더 된 그때의 추억이 새록새록 생각이난다
통도사는 작년에 두번에 걸처 포스팅을 했기에 매화를 몇 컷 찍고 대충 돌아보고 서운암으로 향한다
서운암은 봄꽃 축제가 열리는데 특히 금낭화가 장관을 이룬다
서운암된장독
서운암은 '들꽃축제'로도 잘 알려져 있지만 '장독대'로도 유명한 곳이다
들꽃 축제는 대략 4월 중하순에 열린다
서운암 장독대
전병태
열두 폭 치마 입은 한 아름 넉넉한 품
옛 맛을 끌어안고 다독이는 장독들은
뚝배기 끓는 된장국
기다리는 어머니.
사는 게 버겁거나 눈물이 날 때마다
향 촛불 밝혀놓고 무시로 오라신다
염주를 굴리는 소리
파도치는 삼천배.
풍우風雨에 목욕하고 설한雪寒이 이룬 불성佛聖
싱거운 사람들은 간을 치라 빌고 빈다
곰삭은 그 진한 맛을
꾹꾹 눌려 주면서.
서운암의 된장 간장은 일반에게 판매도 한다
영축산
영축산은 석가모니가 화엄경을 설법한 고대 인도의 마가다국에 있던 산 이름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자 표기는 ‘영취산(靈鷲山)’과 ‘취서산(鷲栖山)’ 두 가지로 표기되지만 이에 대한 한글 표기는
영축산·영취산·축서산·취서산 등으로 표기되어 있어 혼동을 불러 일으켰다.
이 같은 현상은 한자 ‘취 또는 축[鷲]’ 자에 대한 한글 표기의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일반 옥편에서는 ‘독수리
취’라고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축’으로 발음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동쪽 사면은 깎아지른 듯 급경사이고 서쪽 사면은 상대적으로 완만한 경동 지형을 이루는 영축산은 산정이
화강암으로 된 예리한 톱니바퀴형으로 되어 있어 멀리서 보면 하나의 성채 같다. 영축산은 가지산에서 남쪽으로
뻗은 줄기가 능동산에 이르러 두 줄기로 갈라지는데, 남서진하는 줄기는 밀양의 천황산과 제약산으로 이어지고,
동쪽으로 내려와 배내고개를 건너 남진하는 줄기는 간월산과 신불산을 지나 영축산의 첫머리에서 높이 솟구쳐
계속 남쪽으로 이어진다.
영축산에서 신불산으로 이어지는 정상은 펑퍼짐한 산으로 광활한 능선의 억새밭이 천국을 이루고 있다.
산록에는 곳에 따라 산정으로부터 기계적 풍화 작용에 의해 부서지고 떨어진 애추(자갈더미)가 형성되어 있고,
그 아래로 깊은 골짜기가 이어진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대장각으로 오르는길에 범상치 않게 자리하고 있는 소나무 한그루
16만 3000 도자 대장경.
성파 큰스님과 제자들이 평화통일을 기원하며 제작해서 장경각에 보관되기까지 30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한다.
도자판에 유약을 발라 초벌구이 한 후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인쇄하여 다시 구워내어 글자가 평면 형태라고 했지만
불빛에 비치는 면의 글자에서는 약간의 음각 느낌이 있었다.
글자의 크기는 해인사 팔만대장경과 같은 크기인데 팔만대장경은 목판의 양면에다 글자를 새겼지만
도자 대장경은 한 쪽 면만 글자를 새겨 16만여 경판이 됐다고 한다.
처음에는 이렇게 넓은 통로로 이어지는데 돌아가면 ㄷ자형 건물 끝까지 미로로 이어진다
도자대장경은 통도사 서운암 성파스님이 1991년부터 시작해 10년에 걸친 대역사 끝에 2000년 9월 완성했으며,
이를 보관할 장경각은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10년에 완공했다.
이 경판을 만들기 위해서 영축총림 통도사에 방장으로 계신 성파 큰 스님께서 제자 다섯 명과 기술자
이십 여 명이 하루에 24시간 내내 가동할 수 있는 전기 가마를 개발해가지고, 혼신을 다해서 밤낮없이
10년 동안 가마 6개를 쉬지 않고 돌려가지고 흙을 구하고, 전국에 세라믹 기술업체를 찾아서 자문을 구하고,
그래서 준비를 5년 정도 하고 무려 10년에 걸려서 완성한 도자대장경이다
보관대의 미로는 법성게도를 표현한 것이라고 하며
보관대의 미로를 걸으면 장엄함이 느껴지고 계속이어지는 미로는 끝이 날 줄을 모른다
건물의 부식을 방지하기 위해 옻칠을 한 모든 목재는 그 색감에서 품격이 느껴진다고
위 아래 ㄷ자형 건물이 모두 대장경 보관 건물이다
서운암은 통도사의 한 암자로 16만 도자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다.
16만 도자대장경은 서운암 장경각에 있고 1991년 6월 만들기 시작하여 2000년 9월에 완성되었다.
16만 도자대장경은 그 이름처럼 대장경을 흙에 새겨 도자기로 구운 것인데, 그 수가 무려 16만 484장이나 된다.
이 경판을 일렬로 세우면 마라톤을 두 번 뛰는 거리인 80km가 넘는다.
16만 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는 장경각은 세계 최대 옻칠 건물로서, 약 3톤 분량의 옻이 칠해져 있다.
장경각은 항상 서늘하게 유지되며, 도자대장경 보존에 탁월함을 보여준다.
또한 도자대장경은 도자기이기 때문에 산화, 풍화에 강해, 몇 천 년이 지나도 훼손되지 않는다는 장점을 가진다.
서운암 장경각과 16만 도자대장경은 기술과 열정이 만든 현대판 대장경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문화재적 가치 또한 훌륭함을 알 수 있다
주위에는 크고작은 암자들이 20여곳이 있는데 예전에 산행을할 때는 통도사에서 바로 극락암과 백운암으로
오르고 해서 자주 찾은 극락암인데 어느 해인가 통도사에서 길을 막고 우회도로를 닦아서 많이 돌아가야되고
통행료 받는 것이 마땅 찮아 20여 년도 더 찾지 않은 극락암을 올라가 본다
극락암으로 오르는 소나무숲은 동도사 입구나 다름 없이 무성하게 자라 지금은 아름드리로 변해 있다
저 앞에 보이는게 여여문
불교 경전인 금강경 여여부동 如如不動에서 온 말이라고 하는데,
같을 여(如) 차별 없이 평등한 그대로의 사물 모습
그러면 여여문 如予門은 삶과 죽음을 초월한 세계로,
고요하고 평온한 세상으로 가는 문이라는 뜻 ...
양산 통도사 극락암 칠성탱 경상남도 유형문화재436호(수세전 오른쪽 탱화)
화면의 중앙에 청색의 천공을 배경으로 하여 구름 속에 솟아오른 연화좌 위에 치성광여래가 앉아 있고,
좌우에 월광ㆍ일광보살이 시립하고 있으며, 본존의 두광 좌우에 太上老君과 開德眞君이
좌우대칭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다.
9폭이 1조를 이룬 이 작품의 주조색은 주색ㆍ녹색ㆍ군청ㆍ황색ㆍ백색이며, 보관의 장식과 홀,
무릎 아래로 흘러내리는 장식, 성수의 머리 묶는 끈 장식 등에 금박을 사용하여 화려함을 더하고 있다.
이 칠성탱은 주존으로 치성광여래탱 1위와 자미대제 삼태육성탱 1위, 칠원성군탱 7위를 포함하여
모두 9위의 완품이 갖추어진 수작에 속하는 칠성탱 작품이다.
조성화기를 보면 증명, 송주, 금어 등의 연화질 명렬은 없으며, 다만 왕실의 무사안녕과
수명장수를 축원하고 있다. 예부터 어전에서 이루어진 작품에는 감히 작가의 낙관은 할 수 없듯이
이러한 연유로 연화질의 명렬을 남기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원광제
삼소굴
백운암으로 오르는 길의 소나무 숲
홍교
보림(寶林)물어보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으나 새로 신축한 숙소가 아닐까?
경봉스님
속성은 김씨, 본관은 광산. 경봉은 당호(堂號)이다. 어려서는 전라북도 익산의 친척집에서 한학을 공부했으며, 이후 충청남도
논산 배양학교(培養學校)에서 한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 덕유산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했으나,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출가를 결심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2년 후 건봉사(乾鳳寺)에서 박연호(朴蓮湖)를 은사로 사미계(沙彌戒)를 받았으며, 건봉사 불교전문강원에서 3년 만에 대교과와
수의과(隧意科)를 모두 마치고 건봉사의 원로인 능허(凌虛)의 전법제자(傳法弟子)가 되었다. 경봉이란 당호도 이때 받았다.
그뒤 내금강에 있는 마하연사(摩訶衍寺)에서 참선하는 한편, 나한(羅漢)과 대화하는 등 영험을 보였으며, 방광(放光)의
이적을 남기기도 했다.
38세 때 대강백이 된 이후에 유점사와 건봉사 불교전문강원의 조실로 있으면서 태고종 종정을 지낸 정두석(鄭斗石) 등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1939년에는 건봉사 주지가 되었으며, 31본산 주지회의에서 조선총독을 크게 꾸짖은 일화를 남겼다.
8·15해방 후 월남해 계룡산 신도안에 은거하던 중 1953년에는 동학사에 우리나라 최초의 비구니 전문강원을 세웠다.
1953년 8월 25일 문화훈장 국민장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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