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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울산

남해 이락사와 충렬사 부산 용궁사


금산과 보리암을 둘러보고 남해읍에 들려 간단히 아침을 해결하고 이락사와 충렬사를

돌아보기로 하고 여기 아락사로 왔다 그런데 예전에 오래전에 다녔던 이락사가 아니다

주변이 광활하게 넓혀졌고 많은 건물과 기념관들로 꽉짜여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그동안 여기에 온지가 꽤나 오래됐으니 그럴법도하다

노량대교을 건너 오른쪽으로 읍내 방향으로 4km 정도 더 가면 커다란 거북선 모양의 건물과 한옥 여러 채가 나온다.

 ‘관음포 이충무공 전몰유허이락사(李落祠)’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진 이순신순국공원’이.

여기 고현면 차면리 앞바다를 관음포라 부르는데 관음보살(觀音菩薩)의 관음이다.

고려말 왜구를 물리친 큰 공을 세운 정지(1347~1391) 장군의 '관음포대첩'에도 등장하는 곳이다.




남해 이락사 앞뜰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 유언비. 유언비에는 "戰方急 愼勿言我死

(전투가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마라)"는 충무공의 유언이 새겨져 있다.




이충무공 전적비


  은목서인지 구골목인지? 꽃이피어 은은한 향기가 난다


유언비를 지나면 바로 충무공의 전사를 기리기 위해 전몰지에 세운 사당인 이락사가 나온다.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였던 노량해전은 선조 31(1598) 음력 1119, 고니시 부대를 구하기 위해

 출동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부대와 남해대교가 있는 노량해협에서 시작되어 이락사 앞바다인

관음포에서 끝났다.

충무공은 이 싸움에서 손수 북채를 쥐고 북을 두드리며 군사들의 사기를 돋우다가 일본군의 조총의

 유탄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전투가 끝난 뒤 충무공의 시신을 육지로 옮긴 곳이 관음포다.

관음포 옆에 세워진 사당이 이락사다. 충무공이 돌아가시고 234년 후인 1832(순조 32)에 충무공의

 8대손인 이항권이 통제사를 지내던 시절에 이곳에 충무공의 유허비를 세운 것이 이락사의 시초라고 한다. 

큰 별이 바다에 잠겼다''대성운해(大星隕海)



이락사 옆으로 난 길을따라 첨망대로 가본다

관음포 이충무공 전몰유허 첨망대

 이곳은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순국하신옛자리를 보면서 장군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첨망대다 장군은 선조 31년(1598)년 이앞바다에서 벌어진 임진왜란 마지막

전쟁인 노량해전을 대승리로 이끌고 도망하는 왜군을 추격하다 적의 유탄을 맞고

지금 전쟁이 한창이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최후의 말을 남기고 순국하셨다

저 앞에 보이는게 광양 제철소인 것 같다 줌인을 하니 가까이 보인다


노량 앞바다

중앙에 보이는 것은 하동화력발전소



남해대교가 있는 충렬사로 왔다

본관은 광산. 자는 대유(大柔), 호는 자암(自庵)·삼일재(三一齋). 아버지는 현감 계문이다.

1503년(연산군 9) 한성시에서 1등으로 뽑혔고, 1507년(중종 2) 생원·진사시에서 모두 장원을 차지했다.

1511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정자·전경(典經)·사경(司經)·부수찬 등을 지냈다.

1515년 사가독서한 뒤, 홍문관직제학·좌승지 등을 역임하고, 1519년 홍문관부제학이 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남곤(南袞) 등 훈구세력이 일으킨 기묘사화로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 등과 함께

투옥되어 개령에 유배되었다가 남해로 옮겨졌다. 1533년 풀려나 고향인 예산에 돌아왔지만 이듬해 죽었다.




순국 후 이순신 장군의 시신이 모셔졌던 곳에 세워진 사당으로 묘비와 가묘가 있다.

 남해 충렬사는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순국한 충무공 이순신의 충의와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사당이다. 통영의 충렬사와 함께 ‘충렬’이란 현판을 처음부터 같이 사용해 왔으며 인조 때 지어졌다.

 충무공이 전사한 후 그의 시신이 한때 이곳에 모셔졌는데 1633년(인조 11) 김여빈, 고승후 등 유림들이

 옛터에 초옥 1칸을 짓고 제사를 지냈던 것이 최초의 사당이다. 


  충무공이 순국한 지 60년이 되던 1658년(효종 9)에 어사 민정중(閔鼎重)이 통제사 정익(鄭木益)에게 명하여

좁고 초라한 옛집을 헐고 새집을 지었다. 


  그 후 1663년(현종 4)에 통영 충렬사와 함께 임금의 친필로 내려준 현판을 받게 되었다.

 이런 사실들을 기록한‘유명조선국삼도수군통제사증시충무이공묘비(有明朝鮮國三道水軍統制使贈諡忠武李公廟碑)

’가 사당 곁에 있다. 비문은 1661년(현종 2)에 송시열이 짓고, 송준길이 썼다. 1663년에 박경지,

김시성 등이 세운 것이다.






1643년 이순신 장군에게 충무라는 시호가 내려졌기 때문에 1633년 남해현령 이정건(李廷楗)이 세운 충민공비를 철거하고

1793년 5대손 이명상이 이충무공비를 다시 세웠다. 


  1726년 노량서원을 개원했으며, 1746년 사당 곁에 호충암(護忠庵)이라는 암자를 짓고 화방사의 승려 10명과 승장 1명이

 번갈아 와서 사당을 지켰다고 한다.또한 공이 죽은 후 자운이란 승려가 공을 사모하여 쌀 수백 섬을 싣고 와서 공을 위해서

 제사를 지낸 것으로도 유명한데, 자운은 원래 충무공의 밑에 있던 승병이었다. 충렬사는 노량 앞바다를 지키고 있는

 수호신의 사당이라 할 수 있다.


  1760년 5대손 통제사 이태상(李泰祥)이 청해루를 짓고, 1769년 6대손 이한응(李漢膺)이 비각을 중수하고 사우를

단청하는 등 후손들이 충렬사의 중건에 많은 힘을 쏟았다. 하지만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충렬사는 훼철되었다.

 이때 위패는 본당 뒷편에 묻고 제기는 향교로 이관했으며, 토지는 매각했다. 충렬사에는 비각만 남게 되었다. 


  그 후 1899년 11대손 이민승(李敏承)이 비각을 중수하고 1921년 남해사람인 박진평과 정민주가 비각을 중건하고

이듬해 보존회가 조직되어 본래의 모습을 찾았다.
  경내에는 비각·내삼문·외삼문·관리사 청해루 등이 있고 사당 뒤의 정원에는 충무공의 시신을 임시 묻었던 자리에

묘가 남아 있다. 1949년 정인보가 짓고 김충현이 쓴 충렬사 한글비의 비명은“로량바다는 리충무공 전사하신 데라 여긔에

 충렬사를 세우니라”라고 되어 있다. (출처 : 남해군청홈페이지)


진짜 충무공비는 일욕천보(日浴天補)라는 현판이 있는 비각 안에 들어있다.

 공식 명칭은 '통제사증시충무이공묘비(統制使贈諡忠武李公廟碑)'다.

 

"무술년(1598) 11월 19일에 공은 진린과 더불어 노량에서 왜적을 맞았다.

 적을 모조리 꺾어 부셔놓고 공은 뜻하지 않게 적탄(敵彈)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한편 진린(陳璘)이 적에게 포위(包圍)되어 위태로웠는데, 공의 조카 완(莞)은

본래 담력이 있는지라 곡성(哭聲)을 내지 않고 공처럼 독전(督戰)하여 간신히 진린을

 적의 포위에서 구해냈다. 이러는 사이에 행장(行長)은 간신히 도망쳤다.

공의 죽음이 알려지자 우리나라는 물론 명나라의 두 진영(陣營)에서 터져 나오는

곡성이 우레 소리처럼 바다를 뒤덮었고,

이 곡성은 남해에서 아산(牙山)에 이르는 천리 운구(運柩) 길에도 끊일 줄 몰랐다."

이 비문은 1660년 우암 송시열이 찬하고 동춘당 송준길이 글씨를 썼으며 1663년 통제사 박경지가 세웠다.

그런데 이 비각의 현판에 쓰인 일욕천보가 무슨 뜻일까? 날마다 깨끗이 하면 하늘이 도와준다?

여기저기 자료를 찾아도 그 의미를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비각 뒤로는 신주를 모셔놓은 충렬사 사당이 있다.

그리고 사당 왼쪽에는 충민공비가 있다. 충무공 이순신이 처음에는 충민공이라는 시호를 받았기 때문이다.

  사당과 이충무공 영정

  이충무공 가묘


전사청인듯

남해대교를 지나 부산으로와서 해동용궁사에 들렸다

주차를하고 입장 제일 먼저 십이지신상을 만난다




해동 용궁사의 십이지상은 중국에서 건너온 것으로, 원래는 고대 능묘의 호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벽화나 부조 형태의 십이지상은 다른 사찰에서도 흔히 볼 수 있으나 석상 형태로 봉안한 것은

해동 용궁사 한 곳뿐이라고 한다.






해가 제일 먼저 뜨는 절인 해동 용궁사는 진심으로 기도하면 누구나 한 가지 소원은 꼭 이룬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사찰이다. 지금으로부터 600여 년 전인 1376년에 고려 공민왕의 왕사였던 나옹 대사가

 창건하였으며,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30년대 초에 중창되었다.
해동 용궁사는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자연 경관으로도 유명한데, 특이하게도 산속이 아닌 바닷가에
지어져 바다와 절이 어우러진 멋진 풍광에 여행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또한 소원을 이루어 준다는

 이야기로 인해 외국인 참배객들도 줄을 잇고 있다.Daum백과 해동 용궁사

 

교통안전탑


칠층석탑인 교통안전기원탑을 뒤로하고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용문석굴을 지나 사찰은 정면으로 보이는 대웅전이 있는

 구역과 좌측의 해돋이 봉과 황금불상이 있는 두 구역으로 나뉘는어지는데 우리는 대웅전쪽을 먼저들어가본다




대웅전은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의 다포식 겹처마 팔작지붕 기와집이며, 남쪽 옆에는 석조 여래 좌상 모신 감실과

 용궁단이 배치되어 있다. 용궁단은 바닷가에 면한 사찰의 특성상 용왕을 모신 제단의 역할을 하며

 정면 한 칸, 측면 한 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용궁단의 맞은편에 현대식 요사채가 있고, 바로 옆의

약간 높은 대지에는 해수 관음 입상을 조성하였다.

용궁단 원통문 해수 여래입상도 보이고


대웅보전 좌측에는 황금색의 포대화상이

황금불상과 해돋이 바위가 있는곳과  힐튼호텔과 리조트도 담아보고


  모두들 피곤하다하여 이렇게 2박3일 여행을 마치고 광안리 횟집에서 친구들을 위하여 한판 거하고 쏘고

 친구들은 서울로 가기에 부산역까지 안내를하고 아쉽지만 해어졌다


엔머레이 희망의속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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