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산 구경하고 한산도에 들어가기 위해서 통영 연안여객 부두에왔다
통영항은 1963년 9월에 개항하여 주로 수산물의 수출입을 담당하고 있는 국제무역항이다.
한려수도의 비경을 간직한 한국의 나폴리로 불리기도 한다.
통영항은 부산, 여수, 사천, 마천, 진해, 거제 등과 그 밖에 인근 도서지방을 연결하는 해상교통의 중심지로서
일반 여객선, 쾌속선 등이 정기 및 부정기적으로 운항되고 있다.
또한, 한려해상국립공원의 동쪽 중심지로서 관광객이 몰리므로 관광항만으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저앞이 서피랑 마을인데 서피랑은 서쪽에 있는 높은 비랑이라는 뜻이다
윤이상과 함께 학교가는길 서피랑 문학동네 99계단과 음악정원 보이소 반갑습니데이 인사거리
뚝지먼당 98계단 피아노 계단등 서피랑의 숨은 보물들이 있다
서피랑은 작가 박경리씨가 태어난 곳으로 김약국의 딸들의 배경이기도 하다
동피랑마을
통영시의 대표적인 어시장인 중앙시장 뒤쪽에 위치한 이 마을의 이름은 '동피랑'으로, '동쪽 벼랑' (비탈의 지역 사투리 '비랑'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동피랑 마을 위에서 강구항을 볼 수 있으며 구불구불한 오르막 골목길에 있는 담벼락마다 벽화가
그려져있다. 통영시 정량동,태평동 일대의 산비탈 마을로 재개발 계획이 수차례 변경 수정 되어 왔다.
벽화로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여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마을 보존 여론이 형성되어 동포루 복원에 필요한 마을 꼭대기
집 3채만 헐고 철거방침을 철회하였다. 이후 철거 대상이었던 마을은 벽화로 인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통영의
새로운 명소로 변모하게 되었다.서민들의 오랜 삶터로 저소득층 주민들이 살고 있으며 언덕마을에서 바라보는 해안도시
특유의 아름다운 정경을 가지고 있다.
2014년 7월 유네스코 한국위원회로부터 지속가능발전의 모범적사례로 인정받아
'유네스코 지속가능발전교육 공식프로젝트' 인증을 획득 하였으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통영시와
지속가능발전협의회가 동피랑 벽화마을조성 초기 당시 진행되었던 '동피랑 사생대회' 를 개최했다.
한산도로 향하는 여객선은 통영항을 뒤로 하고 서서히 미끄러져간다
방금전에 다녀왔던 미륵산 케블카도 담으며
흰색등대
바다에서 항구 쪽을 바라볼 때, 등대의 왼쪽이 위험하니 오른쪽으로 가라는 의미
빨간등대
바다에서 항구 쪽을 바라볼 때, 등대의 오른쪽이 위험하니 왼쪽으로 가라는 의미
노란색등대
소형선박이 다니는 간이 통로를 표시한다
예술의전당
이순신공원
통영시 정량동에 있는 망일봉 기슭 바닷가에 이순신 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이순신 공원은 통영지역의 이충무공 유적지와 한산대첩에 대한 역사교육을 위해 학습 및 다양한 문화체험시설을 갖추고 있다.
이순신 공원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면 멀리 중앙에 한산도와 거북등대, 한산대첩비가 있으며, 오른쪽으로는 미륵산이 있다.
목동 김천손은 미륵산에서 일본 수군의 동향을 보고 이를 신속히 조선 수군에 알려주어 조선 수군이 작전을 수립하고 전투에서
승리하는 데 기여했다.
방화도
화도
한산도
거북선등대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지
한산도의 이충무공 유적지는 통영시 한산면 두억리 제승당 일원의 525,123㎡(159,128평)에 조성된 지상건물, 각종 비석,
동산문화재 광장, 조경물 등과 풍치림야를 통칭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좌수사로 있던 이충무공은 좌수영 함대를
이끌고 그해(1592) 5월 4일 1차 출동하여 옥포, 합포, 적진포해전에서 대승하고 5월 29일의 2차 출동에서 적의 주력함대를 궤멸시킨다.
이어 7월 4일 제3차 출동에서 세계해전사에 찬연히 빛나는한산대승첩(7월 8일)을 이룩하게 되는 것이다.한산대첩으로 조선수군은
제해권을 완전 장악하여 왜군의 소위 [수륙병진작전]은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이어 8월 24일의 제4차 출동에서는 부산포에
집결해 있는 일본함대 100여 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둔다.
이에 선조는 1593년 8월에 이충무공에게 당시 편제에도 없던 삼도수군통제사를 제수하고 경상, 전라, 충청 삼도의 수군을 통괄
지휘케 하는데 이 무렵 이충무공은 한산도에 진영을 옮기고 장기전에 대비한다. 한산도 두억개에 터를 고르고 진영을
설치하기를 정유년(1597) 2월 26일 파직되어 서울로 압송되기까지 3년 7개월 동안하였는데 운주당을 비롯한 각종 공해,
창고와 부대시설이 어느 정도의 규모로 어떻게 건립되었는지는 문헌상 명확한 기록이 없어 확인할 수는 없다.
현재 난중일기오 시조 및 한시 등이 전하는데 그중에서도 이 한산도에서 어느날 밤, 달을 보며 읊었던 "한산섬 달밝은
밤에"는 유명하다.
[한산섬 달밝은 밤에]
한산(閑山)섬 달밝은 밤에
수루(戍樓)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一聲胡茄)는 남의 애를 끓나니.
꽃댕강
잎은 마주나기하며 달걀형이고 둔두 또는 예두이며 길이 2.5 ~ 4cm로 가장자리는 뭉툭한 톱니가 있다
꽃은 6 ~ 11월에 피고 연한 분홍색 또는 흰색이며 종모양으로 길이 2cm이다.
꽃부리는 길이 12 ~ 17mm이고, 원뿔모양꽃차례로 꽃받침조각조각은 2 ~ 5장이고 길이는 10mm로 붉은
갈색이고 수술은 4개이고 암술은 1개이다.
한산도가(閑山島歌)
이순신
寒山島月明夜(한산도월명야)
上戍樓撫大刀(상수루무대도)
深愁時何處(심수시하처)
一聲羌笛更添愁(일성강적경첨수)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긴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적에
어디서 일성호가(一聲胡笳)는 남의 애를 끊나니
水 國 秋 光 暮(수국추광모) 바다에는 가을이 깊어가고 있는 데
驚 寒 雁 陣 高(경한안진고) 추위에 놀란 기러기 진중을 높이 나네
憂 心 轉 輾 夜(우심전전야) 근심으로 뒤척이며 잠 못 이루는 밤
殘 月 照 弓 刀(잔월조궁도) 새벽달은 말없이 활과 칼을 비추누나
우물
1593년 당시 충무공 이순신장군께서 한산도 통제영내 운주당 현 제승당을 창건하고 1340일
동안 머물면서 군사들과 함께 사용했던 우물로써 바다에 가깝지만 짠멋이 전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제승당
제승당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삼도 수군을 지휘하던 곳으로 지금의 해군작전사령부와 같은 기능을 하던 곳이다.
제승당은 1592년 이순신이 창건하고 전라좌수영을 설치한 곳이며, 1593년에는 삼도 수군 통제영을 설치했던 곳이다.
이순신은 이곳을 본거지로 삼아 당포해전에서 승리했으며 그 후에도 해상권 장악과 동시에 일본군의 해상 보급로를
차단함으로써 적에게 큰 타격을 가했다.
이곳은 이순신 장군이 1593년 7월 15일부터 1597년 2월 26일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갈 때까지, 그리고 1597년 7월 16일
원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 함대가 칠천량해전에서 패할 때까지 근 3년 8개월 동안 이곳을 삼도 수군의 중심 진영으로
삼아 해상세력을 장악하고 나라의 어려움을 극복한 역사의 현장이다. 이곳에서 일본군을 물리치기 위한 작전을 수립했고,
총통과 같은 신식 무기를 제작하여 보급하는 등 군무를 관장했다.
이순신이 ‘삼도 수군통제사’의 직위를 받고 한산도에 본영을 설치했을 때 그는 지금의 제승당 자리에 운주당(運籌堂)을 세웠다.
이순신은 운주당에서 밤낮으로 거처하면서 여러 장수들과 작전계획을 세우고, 전쟁에 관하여 의논했으며, 한편에서 계급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이번 왜란에 관해 말하고자 하는 병사가 있으면 찾아와서 말하게 함으로써 제반 상황을 파악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운주당은 이순신이 한산도에 진을 친 이후 기거하면서 휘하 참모들과 작전계획을 협의했던 집무실이었다.
1597년 원균이 칠천량해전에서 참패할 때 도주했던 배설은 한산도로 돌아와 통제사 군영의 시설을 불태웠다.
곧이어 이곳으로 몰려온 일본군은 한산도를 손쉽게 점령할 수 있었다. 남해안의 바닷길은 통제영을 점령한 일본군이
다시 장악했고 전황은 악화되었다.
폐진되었던 제승당은 1739년(영조 15)에 통제사 조경이 중건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인 1740년 옛 운주당 자리에 현재의
건물을 복원하면서 유허비를 세우고 제승당(制勝堂)이라고 이름 지었다. 운주당이 복원되면서 ‘제승당’으로 그 명칭이 변경된 것이다.
1932년에 충무영당을 건립했으며 1959년에는 제승당 일원 이충무공 유적이 사적 제113호로 지정되었다.
1976년 10월에 중건한 제승당 건물 내부에는 충무공 이순신의 전적을 그린 5폭의 벽화가 걸려 있다. 1979년에는 한산대첩비를 건립했다.
한산대첩 기념비
한산대첩도
임진왜란때 이충무공께서 적선73척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여 학익진 전법으로 그중 12척을
나포하고 47척을 섬멸하신 대승첩 장면이다
애국충정도
나라와 백성을 걱정한 나머지 수루에 홀로앉아 천지신명에게 구국과 애민에
대해 기도드리는 장면이다
사천 해전도
1592년 5월29일 사천에서 왜선 12척을 격침하는 장면이다
특히 이 해전에서 공이창건하신 거북선을 처음으로 사용하여 대승하였다
제승당 현판
제승당에 걸려있는 현판의 제승당은 107대 통제사 조경의 친필이고 안ㅁ에 보관된 대형의
현판은 140대 통제사 김영수의 친필임
노량해전도
노량에서 왜선 300척과 싸워 많은 작선을 처부순 후 적의 유탄에 맞고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말을남기고 54세로 장렬히 순국하시는 장면이다
충무사
충무사(忠武祠)는 충무공 이순신의 영정을 모시는 사당이다. 본래 작은 사당이었던 것을 헐고 1976년 10월
지금의 사당을 건립했다. 매년 봄과 가을에는 통영 시민들이 제사를 올리며 한산대첩기념일인 8월 14일(양력)에는
해군작전사령관과 해군사관학교 생도들이 참배한다.
사당에는 국보 제76호 서간첩(書簡帖)의 일부와 충무공이 송나라 역사를 읽고 쓴 독후감이 병풍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곳의 이순신 영정은 1978년 정형모 화백이 그린 작품이며, 영정은 종이품 통제사의 관복(구군복)차림으로 그려져 있다.
공사중이라 진입금지
유허비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원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칠천량해전에서 참패한지 142년만인 1739년 제107대 수군통제사 조경이
이곳에 제승당 유허비를 세우고 운주당 옛터에 건물을 지은 후 ‘제승당’이라는 친필 현판을 걸었다.
그 후 1760년 충무공의 후손 이태상 제121대 수군통제사가 낡은 건물을 중수하면서 유허비를 손질하고 비각을 뒤로 옮겨 세웠다.
1877년 충무공의 후손 이규석 제198대 수군통제사가 제승당 유허비를 새로 다듬어 세우고 옛 비는 그 옆에 묻어 두었는데
최근에 다시 발굴하여 2기를 함께 보존하고 있다.
영감이 다된 우리친구들 이리 아프고 저리 아프고 고생들을 많이 하고 있다
음수대도 거북선 모형으로
한산도 탐방 지원센터를 뒤로하고 통영항으로 향한다
통영 중앙 전통시장에 들려 회로 늦은 점심을 먹고 남해 독일 마을로 이동한다
'경남.울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해 금산과 보리암 (0) | 2020.01.17 |
---|---|
남해 독일마을 (0) | 2020.01.14 |
통영 미륵산 (0) | 2020.01.06 |
민주공원에서 동아대 병원까지 (0) | 2019.12.15 |
양산 황산공원 (0) | 2019.1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