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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울산

산청 구형왕릉과 덕양정


전날 내리던 비도 그치고 집에 있는 것도 지겹고 산청에나 가자고 제안을 하니

옆지기도 오케이다 몇년전에 와본 곳이지만 옆지기는 처음이라서 안내를한다(3/8)

먼저 왕산의 역사부터 읽어 보고


전에 왔을 때도 이렇게 안개가 끼고 어두웠는데 오늘도 역시나다



가락국의 마지막왕 구형왕의 석총, 산청 전 구형왕릉(山淸 傳 仇衡王陵)..

사적 제214호(1971년2월9일)로 지정된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에 있는 가락국(駕洛國)

제10대 구형왕의 돌무덤[石塚]이다.

구형왕은 신라 김유신(金庾信)의 증조부로 구해(仇亥) 또는 양왕(讓王)이라고도 한다.

521년 가야의 마지막 왕이 되어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영토를 넘겨줄 때까지 11년간 왕으로 있었다..

이 무덤을 둘러싸고 석탑이라는 설과 왕릉이라는 2가지 설이 있었다. 이것을 탑으로

 보는 이유는 이와 비슷한 것이 안동과 의성지방에 분포하고 있는데 근거를 두고 있다. 왕릉이라는 근거는

『동국여지승람』, 『산음현 산천조』에 ‘현의 40리 산중에 돌로 쌓은 구룡이 있는데 4면에 모두 층급이 있고

 세속에는 왕릉이라 전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무덤에 왕명을 붙인 기록은 조선시대 문인인 홍의영의

『왕산심릉기』에 처음 보이는데 무덤의 서쪽에 왕산사라는 절이 있어 절에 전해오는 『왕산사기』에

구형왕릉이라 기록되었다고 하였다.

일반무덤과는 달리 경사진 언덕의 중간에 총 높이 7.15m의 기단식 석단을 이루고 있다. 앞에서 보면 7단이고

뒷면은 비탈진 경사를 그대로 이용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평지의 피라미드식 층단을 만든 것과는 차이가 있다.

 무덤의 정상은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돌무덤의 중앙에는 ‘가락국양왕릉’이라고 쓰인 비석이 있고 그 앞에

석물들이 있는데 이것은 최근에 세운 시설물이다.
조선 정조 17년(1793)에는 왕산사에서 전해오던 나무상자에서 발견된 구형왕과 왕비의 초상화, 옷, 활 등을

 보존하기 위해 ‘덕양전’이라는 전각을 짓고, 오늘날까지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구형왕릉이라고 전해지고 있는 이 돌무덤은, 가락편년기(駕洛編年記)에 신라 법흥왕 19년(532년) 구형왕이

 방장산(方丈山)의 태왕궁(太王宮)에서 돌아가시자 시호(諡號)를 양왕(讓王)이라 하였다고 하여, 가락국

제10대 양왕의 능으로도 전하며, 양왕은 신라왕의 싸움에서 패하여 전사하였다고도 전한다. 이 무덤은 형식이

 일반 분묘들과 달리 각 층이 단을 이루고 있는 방형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내리는 경사면에 잡석으로

축조하였다. 전면은 7단을 이루고 있으나 후면은 갈수록 경사가 커져서 각 층의 등급이 높이에 따라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석렬은 전면에서도 직선이 아닌 곡선을 이루고 있으며, 모퉁이가 뚜렷하지 않고, 정상은 봉분과

같이 타원의 반구형을 이루고 있다. 전면 중앙에서의 높이는 7.15m이고 무엇을 위한 시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제4단의 동쪽에 폭 40㎝, 높이 40㎝, 깊이 68㎝의 감실이 설치되어 있다.

이 돌무덤을 중심으로 같은 잡석으로 높이 1m 내외의 담을 쌓고 전면 중앙에는 '가락국양왕릉(駕洛國讓王陵)'

이라고 새긴 비석이 서 있으며, 그 앞에 상석과 장명등이 있고, 좌우에는 문인석·무인석·석수가 각각 1쌍씩 있는데,

 이 석물들은 최근의 시설물들로 돌무덤과는 시대적인 차이가 있다. 이 돌무덤을 둘러싸고 종래에는 석탑이라는

 설과 왕릉이라는 두 설이 제기되어 왔다. 먼저 이것을 석탑이라고 보는 것은 이와 같은 형태의 요구가 안동과

 의성지방에 분포되어 있다는데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것을 왕릉이라고 하는 근거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산음헌 산천조에 '왕산(王山)'이 있고 그 각주(脚注)에 "현의 40리 산중에

 돌로 쌓은 구룡이 있는데 4면에 모두 층급이 있고 세속에는 왕릉이라 전한다."라는 기록에 있다.

이 무덤을 구형왕릉이라고 명칭을 붙인 것은 홍의영(洪儀泳)(1750∼1815)의 ≪왕산심릉기(王山尋陵記)≫에

 처음 보이는데, 근처에 있는 왕산사에 전해오고 있는 ≪산사기권≫에 구형왕릉이라고 적혀 있었다고 하였다.

다른 자료인 ≪산청현유지≫에는 정조 22년(1798년)에 처음으로 왕릉이 나타났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홍의영의

 ≪왕산심릉기≫에 이 "왕릉이 처음 나타났다"고 한 것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보여진다. 전하기로는 약 200년 전에

 마을 사람들이 산에 올라 기우제를 지내고 내려오다가 왕산사에서 비를 피하던중 왕산사 법당 들보 위에 있는

 내력을 알 수 없는 큰 목궤를 민경원이란 사람이 내려보았더니, 그 속에서 구형왕과 왕비의 영정과 옷, 활, 칼 등의

 유물과 함께 명승 탄영(坦渶)의 왕산사기(王山寺記)가 나와서 이를 가지고 왕릉을 다시 찾게 되었고, 그 유물들을

 보존하기 위하여 조선 정조 17년(1793년)에 덕양전을 짓고, 이후 봄 가을로 추모제를 지낸다.

대한민국 구석구석에서

그시대에도 이런 무인석과 문인석이 있었는지 후대에 세웠는지?


구형왕은 나라를 빼앗긴 죄인이므로 흙 속에 묻힐 수 없다 해서 시신 위에 바로 돌을 쌓으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신하들이 왕의 유언을 받들어 돌로 무덤을 쌓고 내력을 종이에
적어 왕산사 서까래에 숨겨두었다고 한다



구형왕릉은 조선 정조 22년 산청군 좌수 민경원이 이 능에 기우제를 지내고 돌아가는 길에 능에서

 1km 남짓 떨어진 절에 들러 잠시 쉬고 있다가 시렁에 얹혀있는 궤에 먼지가 수북이 쌓인 것을 보고

중에게 그 까닭을 물으니, 스님은 ‘예부터 누구든지 이 궤에 손을 대기만 하면 큰 화를 입는다’라는

 이야기가 전해오므로 그대로 모시고 있다고 했다. 이 말을 듣고 민좌수는 더욱 호기심이 들어

 스님의 만류를 뿌리치고 궤를 열어보니 기우제를 지낸 큰 석묘가 바로 구형왕의 능이라는 기록과 영정,

 갑옷, 칼 등이 들어 있었다’라고 전해 내려온다.  

이 소문이 왕의 후손인 김해 김씨 문중에 알려져 이 때부터 김씨 문중에서 이를 수호하고 있다고

 동국여지승람, 대동지지,한국지명총람 등 문헌들이 기록하고 있다

新羅太大角干純忠壯烈興武王金庾信射臺碑

(신라태대각간순충장열흥무왕김유신사대비)란 글씨가 있는 비석으로 오른쪽에 있는 공터는

구형왕의 증손자인 김유신이 화랑으로 활동하던 청년시절 구형왕릉에 들어와 능을 지키는

시릉살이를 하며 무예를 연마하고 활을 쏘던 곳을 기념하여 세워 놓은 것


가락국에대한 기록이 새겨진 가락국기비



덕양전 외삼문

전하기로는 약 200년 전에 마을 사람들이 산에 올라 기우제를 지내고 내려오다가 왕산사에서 비를

피하던중 왕산사 법당 들보 위에 있는 내력을 알 수 없는 큰 목궤를 민경원이란 사람이 내려보았더니,

그 속에서 구형왕과 왕비의 영정과 옷, 활, 칼 등의 유물과 함께 명승 탄영(坦渶)의 왕산사기(王山寺記)가

나와서 이를 가지고 왕릉을 다시 찾게 되었고, 그 유물들을 보존하기 위하여 조선 정조 17년(1793년)에

덕양전을 짓고, 이후 봄 가을로 추모제를 지낸다.


가락국 제10대 구형왕(仇衡王 521년 ~ 532년 재위)은 가락국시조김수로대왕(駕洛國始祖金首露大王)의

 9세손으로 가락국(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이다.
 가락국 9대 겸지왕(鉗知王491년~521년)의 아들로서 서기 521년에 가락국 제10대왕으로 등극했다.
 휘는 구형(仇衡)이며 존호는 양(讓)으로 계화왕후(桂化王后)사이 세종, 무력, 무득, 세 아들을 두고,

증손으로 흥무대왕(興武大王) 김유신(金庾信)과 5대 외손으로 신라 30대 문무대왕(휘 : 법민)이 있다.
 즉위 11년만인 서기 532년 신라 법흥왕 19년에 나라를 양위한 후 계화왕후와 함께 가락지품천 방장산속

왕산으로 들어와 수정궁을 짓고 수년간 은거하다 석릉에 영면했다

가락국역사관 문이굳게 다쳐있고 안내에는 종무소로 문의하라는데

너무 조용해서 정적을 깨트리기도 싫어 그냥 패스

덕양전은 화계리에서 특리-매촌리로 넘어가는 길목에 비교적 규모가 크게 자리잡고 있는 전각으로

 개.보수가 끊임없이 이루어진 듯하다. 양왕과 왕비인 계화왕후의 위패를 모시고 봄(음3.16),가을(음 9.16)에

 제향하고 있다. 가락국 시조 대왕인 김수로왕과 허황후의 위패를 모신 숭선전이 사액되자(조선 고종 1878),

왕산 산자락, 구형왕릉의 위에서 양왕과 왕후를 모셔오던 수정궁(사)도 덕양전이라 이름을 고쳤고 후일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고 한다.(1928)


가락국양왕덕양전은 구형왕의 증손자인 흥무대왕 김유신 대장군이 왕릉 옆 터에 단을 쌓아 왕의 침궁이었던

수정궁을 옮겨짓고 제향을 받들게 되니, 그 수정궁이 지금 덕양전의 모태가 됐다.
 이후 오랜 세월 전란으로 제향이 중단 됐으나, 1798년 산청 좌수 민경원에 의해 다시 왕릉이 발견돼

양왕(구형왕)의 수정궁에 신위를 봉안하고 제례를 봉향했다.
 하지만 이 수정궁은 1878년 무인년(고종15년) 가락국시조대왕 숭선전(崇善殿)이 사액됨을 계기로

전호를 덕양전(德讓殿)으로 개칭했다. 지난 1928년 현재의 장소로 이거했고, 2014년 가락국역사관

2017년 인덕문을 건립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덕양전 춘향대제는 매년 봄(음 3월 16일), 가을(음 9월 16일)에 봉향되며, 매월 초하룻날과 보름날에

삭망 분향례(朔望 焚香禮)를 올린다.

한편 경남도 문화재자료 제50호 가락국양왕덕양전은 산청 제일의 명승지로 전국 700만 가락후손들의

성지이며 지금은 관광지로서도 많은 각광을 받고 있다.
 또한 1천여년의 가락국 역사와 전통문화를 보존하고 있는 사적지로서, 국가사적 `제214호 구형왕릉(仇衡王陵)`과

`경남도 지정문화제기념물 제164호 왕산사지(가락국시조김수로대왕 태왕궁 駕洛國始祖金首露大王 太王宮)`등

고적이 보관돼있다.
 수백년 동안 왕과 왕후의 제향을 받들고 있는 덕양전은 지금까지 105명의 참봉들이 도임했고, 현재 김태훈

現 동양당원장이 덕양전 참봉으로 종직을 수임하고 있다.
 김태훈 원장은 대한한약협회 명예회장, 가락중앙종친회부회장,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재단이사, 산청문화원장 등을

 역임해 역사와 전통문화 계승발전과 지역문화 저변확대에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서재

동재

1,500년 가락국 구형왕의 역사와 가락국 전통문화가 전승되고 있는 덕양전에서는 1일 오전 11시 춘향대제가 봉향된다.
 제례에는 전국 700만 가락 후손들과 정, 제계 유명 인사 등 1,500여명이 참제하는 대규모 제향으로, 제관 80여명이

 선임돼 제향을 받들게 된다.
 이번 가락기원 1977년 3월 춘향대제는 초헌관 김영욱 가락중앙청년회장, 아헌관 김경수 前 대구고검장,

종헌관 송병권 前 진주시부시장이 선임 됐고, 집례 김성문(후손), 대축 허종철(후손)이 수임한다.
 백성들을 위해 인의(仁義)와 덕업(德業)로서 생을 마감한 가락국 10대 구형왕의 음덕을 기리고 추모하는 행렬은

 해가 갈수록 늘어나 가락국 왕과 왕비의 신위전으로 그 규모와 품격을 더해가고 있다.
 덕양전 제례는 가야시대의 특색 있는 역사를 바탕으로 한 지역의 우수 선현 제례 행사로 해마다 성대하고

 영화로운 제전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어, 명실 공히 경남의 가야 2000년 역사와 전통문화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대표적 가야 유적지로서로서도 가치를 더하고 있다.

가락국 제10대 왕인 양왕과 왕비, 두 분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김유신의 증조부인 구형왕은 532(신라 법흥왕 19)년 나라를 신라에 넘겨주고 이곳 왕산

수정궁으로 옮긴 후, 5년 후에 돌아가셨다.

그 뒤 제사를 올리다 임진왜란으로 중단되었으나 1798년부터 다시 향례를 올렸다.

광무 2년(1898) 덕양전으로 이름을 바꿨으며, 1930년 지금 있는 자리로 옮긴 후

 1991년 고쳐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덕양전 대제 찬란한 가야의 문화가 숨 쉬는 김해 그 곳에 2000년 전 가락국이 있었습니다.

서기 42년에 가락국을 건국한 김해 金씨의 시조 김수로왕 태조 대왕께서는 허황옥

 인도 아유타국공주를 맞이하고 왕비를 책봉하셨습니다.

두 분 사이에 10왕자를 두셨고 첫째 왕자는 2대왕이 되었고 2.3번째 왕자는

 어머니 허씨 성을 따르게 하였답니다.

 

매년 1년에 두 번씩 음력 3월 15일과 9월 15일에는 김해 숭선전에서 9대 왕 까지

 대제를 모시고. 그 다음 날은 산청 덕양전에서 10대왕 구형(양)왕 또 그 다음날은

경주에서 가락국 13대 흥무왕 김유신 장군의 대제를 모시는 날입니다.

영정각

                                        가락국의 왕실 세계

                                            1세 : 김수로왕

                                            2세 : 도왕

                                            3세 : 성왕

                                            4세 : 덕왕

                                            5세 : 명왕

                                            6세 : 신왕

                                            7세 : 혜왕

                                            8세 : 장왕

                                            9세 : 숙왕

                                           10세 : 양왕

수정궁은 위패를 모신곳이다

대제 때 직급별 직업별로 마련한 장소


안향각


연못의 거북섬


새로낸 출입문

하마비

   단양우씨 정길 효행비



우리동네는 10일 현재 목련이 피었다 운전하며 폰으로 찍었씀


오늘 끝번 9 약국에가서 줄서서 마스크 2장 샀습니다

   살다보니 이런일도 있네요 ㅎㅎ


Try To Remember / Nana Mouskou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