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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울산

산청 동의보감촌과 내원사

구형왕릉과 덕양전을 보고 여기로 왔는데 여기도 코로나 19의 영향인지 관광객이 숫자를 셀 정도로 없다

주차장에 차량 숫자만 봐도 금방 알 수가 있다. 언제나 끝나게 될지 우선 나부터도 주위에 사람들을 꺼리게된다

언제까지 이런 불신의 세계에 살아야될지?

산청 동의 보감촌

왕산과 필봉산 기슭에 자리잡은 동의보감촌은 전국에서 처음으로 한방을 테마로 한 건강체험 관광지로서,

엑스포주제관, 한의학박물관 한방기체험장, 한방테마공원, 동의본가, 한방자연휴양림, 본디올한의원,

숙박시설, 약초판매장 등 한방과 관련된 다양한 시설을 갖추어 명실상부한 한방휴양 관광지의 메카로

자리잡은 대한민국 힐링여행 1번지이다.

관광객은 없지만 인공분수대는 쉴새없이 흘러내리고

글자 그대로 저문을 통과하면 늙지 않을까?

산청의 농산물을 판매하는 매장

약초 만매장인데 나오면서 들려 약초를 몇가지 사야겠다


주제관

입장료는  성인 2,000원으로 싸다고 볼거리가 없는 것이 아니다.

300여종의 1,000점 곤충 전시관, 아이스맨( 외찌) 미이라 모형관, 영상관, 간단하게 자신의 체질을

 체크할 수 있는 한의학 힐링 파크, 세계전통의학 파크 등이 있다. 

코로나19  때문에 장기휴관중이다

동의보감 한의원촌 한방체험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여름에는 어린이들의 천국 워터파크



12지신상과 분수대

십이지

10간과 12지를 조합한 말. 10간은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이며, 12지는 자(쥐)·축(소)·인(호랑이)·묘(토끼)·

진(용)·사(뱀)·오(말)·미(양)·신(원숭이)·유(닭)·술(개)·해(돼지)이다. 결혼이나 이사 등의 날을 잡는 일로부터

운세에 이르기까지 민간신앙의 한 축으로 사용되며, 예전에는 농사짓는 적당한 시기를 선정하는 농사력도

간지에 의존했다. 새해가 밝으면 간지에 근거한 그 해의 이름과 상징을 즐겨 찾아보는 것과 같이 한국 민중들의

 일상적 세계관 속에서 끊임없이 전승되어 왔다. 오랫동안 속신의 대상이기도 했으며,

오늘날에도 간지 개념을 활용한 궁합이나 사주 등을 흥미로 살펴보기도 한다.






의학박물관도 당분간 휴관이다

류의태는 소설과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여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이 되었습니다만
허준을 부각하고 흥미를 더하고자 내세운 가공인물 이다
맨처음 류의태를 허준의 스승으로 발표한 학자는 경희대학교 한방병원장을 지낸 노정우 박사라 한다
만약 류의태가 실존인물 이었으면 진주류씨이며 위에서 언급한 벽은 류번의 후손이어야
하지만 진주류씨 족보에는 허준의 스승으로 언급된 류의태라는 인물은 없다고한다






봄 여름 가을의 꽃동산 구절초 필때면 참 좋을 것 같다

위로 올라갈 때 저 승강기를 타고 오른다

우리 어린시절의 자화상 즐길거리가 없어 말타기 구슬치기 고무줄 놀이 공기돌 놀이 자치기 못치기였다

지금은 지상낙원이다  오락과 놀이 기구가 넘처나는 세상이 됐으니 ...


뒤에 산이 필봉이다



왔으니 또 인증을 남기고



   한국적인 멋이 담긴 정원과 신의정

  가로등이 약단지를든 의녀들을 형상화

<동의보감>으로 유명한 조선 중기의 명의. 본관은 양천, 자는 청원, 호는 귀암이며 서자로 태어나 중인이나

서얼의 업으로 되어 있던 의학의 길을 택하여, 이미 20대에 뛰어난 의술로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30세에 어의로 선임되었고, 동양 최대의 의서라는 〈동의보감〉의 찬집에 노력하여 1610년(광해군 2)에 이를 펴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이 의주까지 피신하는 사태가 벌어졌을 때, 허준은 선조의 건강을 돌보았다.

 이때의 공로로 허준은 뒷날 공신의 반열에 올랐다. 이후 정1품까지 승급했다.

허준은 1539년 지금의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에서 아버지 허론(許碖)과 어머니 김(金)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양천허씨의 시조인 허선문(許宣文)의 20세손이다. 할아버지 곤(琨)은 무관으로 경상우수사를 지냈고 아버지 론 역시 무관으로

 용천부사를 지냈다. 허준은 어릴 때 경상도 산청으로 이사하여 이곳에서 성장한 것으로 전해진다.


 허준은 이곳에서 어려서부터 의사수업을 시작했다. 그는 서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신분제 사회에서 벼슬길로 나가지 못하고

 당시 중인이나 서얼들의 업으로 되어 있던 의학의 길을 택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허준의 총명과 열성은 이미 20대에 그를 전국적으로 유명한 의사가 되게 했다. 1569년 6월 그의 나이 24세 되던 해 부제학

유희춘(柳希春)의 부인을 치료하기 위해 서울로 초치되었고 이듬해에는 유희춘의 병까지 치료하게 되어 서울 장안에서

명성이 높았다.


허준 박물관은 서울강서구 가양동에 있다


허준의 내의원생활

허준이 내의원 취재에 등과한 것은 1574년(선조 7) 그의 나이 29세 때로 상당히 늦은 나이에 궁중의사로서의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내의원에 들어간 다음해부터 어의로 선임되어 안광익(安光翼)과 더불어 임금의 병을 진찰하고 효험이 있자

임금으로부터 신망을 얻게 되었다. 1578년 9월 내의원 첨정으로 있을 때 당시에 새로 출판된

〈신간보주동인유혈침구도경 新刊補註銅人腧穴鍼灸圖經〉을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았다.


1587년에는 임금의 건강이 회복되었기 때문에 내의원 책임자와 어의들이 모두 포상을 받았는데 허준은 태의 양예수(楊禮壽)·

안덕수(安德秀) 등과 더불어 녹피(鹿皮) 1영(令)을 하사받았다.

1590년에는 허준이 왕자를 살린 공으로 당상관(정3품 통정대부 이상을 말함)의 가자(加資)를 받았다.

그러자 정원 사헌부 사간원에서 일제히 나서서 "왕자를 치료한 것은 의관으로서 의당 해야 할 일이고 비록 공이 있다 해도

 의관에게 당상의 가자를 내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므로 취소할 것"을 왕에게 여러 번 간청했으나 선조가 신하들의

거듭된 요구를 물리쳤다.


1592년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백성들이 살상되고 왕은 의주까지 피신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때 허준은 선조의 건강을 돌보았다. 이때의 공로로 허준은 뒷날 공신의 대열에 끼게 된다.

 1595년 왕이 별전편방에 나와 의관인 허준 등으로부터 침치료를 받는데 약방 도제조 김응남, 제조 홍진, 부제조 오억령

등이 입시했다. 1596년 동궁인 광해군의 병을 고친 공로로 허준은 가자되고 김응탁(金應鐸)·정예남(鄭禮男)은 승직(陞職)되었다.

이에 허준은 그 벼슬이 정헌대부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즉시 간원들이 나서서 의관들의 가자를 개정할 것을 청했으나

선조가 "공로가 있는 자들이다"라고 하여 듣지 않았다.



같은 해에 선조가 허준에게 완비된 우리나라 의서를 찬집하라고 일렀다.

허준이 유의 정작(鄭碏)과 태의 양예수·김응택·이명원(李明源)·정예남 등과 편국을 설치하고 책의 요점을 잡아가는 시점에

 정유재란이 일어나 의관들이 흩어져 작업은 자연히 중지되었다.

이에 선조가 허준을 다시 불러 허준 혼자 책임지고 새로운 의서를 만들라고 하면서 내장방서 500권을 내어주며 참고하도록

 조치했다.1600년 수의(내의원의 책임자) 양예수(지사:정2품)가 사망함에 따라 허준이 수의가 되었다.


1604년 임금이 호성공신(扈聖功臣)의 교서를 발급하여 의관으로서는 허준과 이연록(李延祿) 두 사람을 3등에 책훈하고

 허준은 양평군(陽平君)에 봉작되었다. 1606년에는 임금의 병을 치료한 공로로 양평군 정1품 보국숭록 대부로 승급했다.

이것은 벼슬로서는 최고의 품계인 만큼 신하들의 반대가 극심하여 수십 차례에 이르렀다.

계속되는 신하들의 반대 때문에 선조도 결국 허준의 가자를 보류했다. 1607년에는 임금의 병이 위중하고 잘 낫지 않았는데

 이것은 허준이 약을 잘못 썼기 때문이라 하여 연일 조정에서 수의 허준을 벌주는 일로 논의가 복잡했으나 선조가 벌을 주기보다

 의술을 다하게 해야 한다고 막아섰다.


1608년에 마침내 선조의 병세가 급박하다가 돌연히 사망했다.

선조의 병은 이미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사헌부나 사간원에서 가만 있을 리 없었다.

 광해군 즉위초부터 연일 계속되는 계청에 허준을 보호하던 광해군도 마침내 견디지 못하여 허준의 직책을 좌면하고

거처를 제한하는 벌을 내리도록 승인했다.

그러나 그해가 가기 전에 허준에게 내린 벌을 해제했다.


 이런 와중에서도 허준은 〈동의보감 東醫寶鑑〉의 찬집에 노력하여

 1610년(광해군 2) 마침내 완성했다. 이후 어의로 있다가 1615년 죽었다. 그의 사후 광해군은 생전에 보류되었던

 보국승록대부를 추증했다.

약초 판매장에서 계피 곤드레나물등 몇가지를 샀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내원사와 대원사가 있는데 대원사는 주차장에서 많이 걸어야 되기에

무릎이 불편한 옆지기 때문에 내원사로 향한다

30 여년 전에는 이계곡을 많이도 찾아다녔는데 지금은 계곡이 흙과 자갈들이 씻겨나가 골이 더 깊어져있다

조그만 하고 아담한 암자 같은 사찰이었는데 지금은 많이 커져서 그때의 분위기가 아니다


내원사

산청군 삼장면 대포리, 장당골과 내원골이 합류하는 위치에 절묘하게 자리한 절이 내원사다.

절이라기 보다 어느 양반집 후원같이 정갈하고 그윽한 분위기가 인상적인 곳이다.

신라 태종 무열왕 때 무염(無染)국사가 창건하여 덕산사(德山寺)라 하였으나 그 뒤 원인 모를 화재로 전소되어

 그대로 방치되다가 1959년 원경(圓鏡)스님에 의해 다시 주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당시 절 이름도 내원사로 고쳤다.

장당골쪽의 계곡을 따라 숲속 계단을 올라가면 장당골 계곡 맞은 편에 있는 소담한 절을 마주하게 된다.


내원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 절에 들어가기 위해 건너야 하는 반야교이다.'반야'란 지혜를 의미한다.

 세속의 모든 번뇌를 잊어버리는 지혜를 반야교에서 얻어, 절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는 맑은 물소리와 더불어 천상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하며, 반야교의 가운데 서면 계곡의 찬 기운을 느낄 수 있으며, 흐린 날에는

 계곡에서 피어오르는 신비로운 물안개도 감상할 수 있다.


마당도 많이 넓어졌고 부속건물들도 여러채 생겼다

   무심(無心)

다른 사람이 잘하고 못하는 것은

  내 마음으로 분별하여 참견하지 말고

좋은 일을 격던지 좋지 않은 일을 당하 던지

마음을 항상 평안히 하고 무심하라

때로는 숙맥같이 병신같이 소경같이 귀먹은 사람같이

어린아이 같이 지내면 절로 망상이 사라지나니

비록 몸뚱이는 살아 있으나

내 마음을 찾으려면 이미 죽은 송장으로 여겨야 하며

세상일이 좋으나 싫으나 한갓 꿈으로 알라

경허스님


산청 내원사 삼층석탑(山淸 內院寺 三層石塔)

 경상남도 산청군 내원사에 있는, 남북국 시대 신라삼층석탑이다.

1992년 1월 15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113호로 지정되었다.

2중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신라시대탑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신라 무열왕 때인 657년에 처음 세워졌으나, 1950년대에 도굴꾼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1961년에 내원사에서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맨위의 지붕돌이 많이 부셔졌으며, 상륜부는 남아 있지 않다. 3층으로 된 지붕돌은 평평한 느낌이지만,

모서리를 올려 경쾌함을 더하려 하였다.

4개의 주름 지붕돌과 전체적으로 길쭉해진 모습은 통일신라의 늦은 시기인 것임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여러장의 돌을 짜 맞춘 기단은 이른 시기의 전통을 잇고 있는 것으로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변화를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비로전

대웅전 옆 층계를 오르면 비로전이다. 비로전에선 아주 특별한 유물을 만날 수 있다.

보물 제1021호로 지정된 비로자나불상이 그것이다. 한눈에 봐도 예사롭지 않은 풍모를 가진 불상이다.

근데 아무리 둘러봐도 부자연스럽다. 등은 누가 일부러 깎은 듯이 직각이고 엉덩이는 살짝 들린 데다

 무릎 부분도 깎여 나갔고 광배는 부러진 상태에다 목에는 시멘트로 깁스를 했다.


원래 이 불상은 내원사에 있었던 불상이 아니다. 1947년 석남리에 사는 이성호 형제는 나무를 하러 갔다가

험준한 벼랑에서 불상을 발견하게 된다. 형제는 이 불상을 옮기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무게를 줄여 쉽게

 가져가려고 무릎 밑과 등 부분을 깎아 버렸다. 즉 광배와 좌대를 몸통과 분리해서 뜯어왔던 것이다.

 그래서 인근 마을에서는 이 불상을 '뜯어온 불상'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가져온 불상을 약 10년 동안 그들의 집에 보관했다가 내원사 중창 때 주위의 권유로 내원사에

 양도하여 옮겼다고 한다. 그들이 갔던 벼랑은 폐사지인 석남사였다.

산청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

경상남도 산청군 삼장면, 내원사에 있는 통일신라의 불상이다.

1990년 3월 2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021호 석남암수석조비로자나불좌상(石南巖藪石造毘盧舍那佛坐像)으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8월 25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고, 2016년 1월 7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233-1호로 승격되었다.



지리산 중턱에 있던 석남암사지에 있다가 현재 내원사로 옮겨 놓은 돌로 만든 비로자나불상이다.

비바람에 의한 마멸 때문에 세부표현은 명확하지 않지만 당당하고 세련된 모습이다.

머리 위에 있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는 높고 큼직한 편이나 약간 파손되었으며, 둥근 얼굴은 부피감이 풍부하여

8세기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상체는 건장한 모습으로 자연스러운 가슴, 허리의 굴곡, 어깨나 팔의 부피감 등에서 사실미를

 잘 표현하고 있다. 전신을 감싸고 있는 옷은 얇아서 신체의 굴곡을 잘 드러내고 있으며, 옷주름 역시 촘촘하고 부드럽게

 표현하여 8세기 불상의 옷주름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손모양은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 쥐고 있는 모습으로

이 불상이 비로자나불임을 알려주고 있다.


불상이 앉아있는 대좌(臺座)는 상대·중대·하대로 이루어졌는데, 8각의 하대에는 아래를 향한 연꽃무늬를 새겼다.

중대는 8각의 각 모서리마다 기둥을 새겼으며, 상대에는 2겹의 연꽃무늬를 새겼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에는 연꽃무늬와 불꽃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위에서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하단까지 깨져 약 3분의 1정도가

없어져 버렸다.

대좌 중앙의 구멍에 있었던 사리호(舍利壺) 표면에 기록된 글에는 신라 혜공왕 2년(766)에 비로자나불상을 조성하여

석남암사에 모신다는 내용이 있다. 이 불상은 비로자나불상의 가장 빠른 조성 예로 조각사 편년 및 사상사 연구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국보 승격사유

이 비로자나불상은 불상의 중대석에서 발견된 납석사리호의 명문을 통해 766년(혜공왕 2)에 법승(法勝)과 법연(法緣)

 두 승려가 받들어 돌아가신 두온애랑(豆溫哀郞)의 원을 위해 석조비로자나불상을 조성하여 무구정광대다라니와 함께

 석남암수 관음암에 봉안하였다는 기록을 가진 중요한 불상이다. 이 불상은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기년명(紀年銘)의

 지권인(智拳印) 비로자나불상으로서 중요하며, 편년자료가 부족한 고대조각사 연구에도 절대적인 자료로 평가된다.


 더불어 지권인을 한 여래형(如來形)의 비로자나불 형식이 766년에 정립되었다는 사실은 새로운 불교 사상과 새로운

불교사의 흐름을 반영한 것으로서 주목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비로자나불상은 동아시아를 통틀어 명문이 밝혀진 최초의 지권인 비로자나불상으로서 도상적․양식적으로

불교미술사 연구에 매우 귀중하고 획기적인 자료이다. 뿐만 아니라 이 불상을 통해 8세기 중엽경에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 불상에도 납입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

우리나라 불상 복장의 시원적 형태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이미 불상의 중대석에서 발견된 납석사리호가 국보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국보 제233호로 지정되어 있는 만큼,

이를 봉안했던 석불은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여러 가지 의미를 생각해 볼 때, 현재의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 지정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판단된다

대웅전의 앞쪽으로 2기의 석등이 세워져 있는데 한국식 석등이 아닌 일본식 석등의 전형인 카스가(春日)석등이리고 힌다 

잠시 일본식 석등의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옥개석(屋蓋石)이 한국전통 석등에 비하여 볼록하게 조각되어 있고,

둘째 옥개석의 끝부분이 달팽이를 엎어 놓은것 처럼 말려 올라간듯 조각 하는데 이를 궐수(蕨手, 와라비테)라 한다.

 그리고 세번째는 간주석(기둥)에서 차이를 알 수 있는데 한국식 석등에서 찾아보기 힘든 기둥의 중간에 가락지 모양의

테를 조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김재학님 글에서

내원사에는 여늬 사찰에서 보기 어려운 보살이 모셔진 전각이 있다.

 대웅전의 좌측에 자리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전각이 그것이다.

전각의 처마 아래에는 좌측에서 부터 칠성각(七星閣), 천왕각(天王閣), 산신각(山神閣)의 현판이 달려 있다.

 전각의 내부로 들어서면 칠성각 현판쪽은 칠성탱을 천왕각의 현판 뒤로는 천왕보살을 중심으로 관음보살상을

 좌측, 우측에는 원경스님의 진영을 봉안하고 있다. 산신각 현판 안쪽에는 독성상과 독성탱 그리고 산신탱을

봉안 하였다. 여늬 사찰에서 찾아보기 힘든 천왕보살은 그 형상 또한 특이하다.

천왕보살은 우리나라 여인이 중국의 왕비로 가게된 여인이 탈출하여 지리산에 은거하며 득도 하였는데

 어느 노보살이 그 여인의 모습을 한 천왕보살상을 만들어 보관하여 오다가 내원사에 기증 하였다고 전한다.

이는 아마도 지리산 성모천왕과 연관된 설화가 아닐까 생각된다.김재학님 글에서

이튿날부터 대중 스님들이 총동원되어 개울에 통나무로 다리를 놓고, 봉우리 밑까지 길을 낸 다음 모두 쉬고 있는데

 돌연히 고양이 울음소리가 세 번 들려왔다. 이상히 여긴 사람들은 무슨 징조인지 궁금하게 생각했다.

그 후 풍수설로 해명하기를 앞에 있는 봉우리는 고양이 혈이고, 절 뒤에 있는 봉우리는 쥐의 혈인데 여기 길을 내고

다리를 놓으니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게 된 것이다. 이런 일이 있고 나자 그렇게 많이 찾아오던 사람들이 점차

 줄어들어 스님들이 조용히 수도에 정진할 수 있게 되었지만, 원인을 알 수 없는 불로 절은 전부 불타 버리고 말았다.

절이 불타고 있을 때 이 절에 기거하던 세 분의 장사스님이 개울에서 커다란 통나무에 물을 길어 불을 끄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왼쪽에서 길어 쏟는 물은 오른편 개울에 떨어지고, 오른편에서 쏟은 물은 왼편 개울에 떨어지며,

 앞에서 쏟은 물은 뒷산 봉우리에 떨어져 결국 불길을 잡지 못하고 절이 전소되었다고 한다.


당시 이 절에는 '장군수'라는 약수가 있었고, 두부를 만들 때 사용했다는 큰 맷돌과 여름이면 김치독을 채워 두었던

 웅덩이가 개울 옆에 있었는데 그대로 남아 있다. 지리산 골짜기에 있는 소담한 절, 내원사는 계절마다 느낌이 달라

 운치를 더하지만 특히 대웅전 마당의 단풍나무가 물드는 가을에 더욱 멋이 있으며, 그 포근함으로 인해 하룻밤

 머물고 싶은 곳이다.


아래 건물은 설법당 같은데 벽에 걸려있는 목탁이 사람 머리만큼 크다

들고 치기도 어려울듯

설법당 적묵당 이런 건물이겠지


일명 장수바위로 일컫어지는 명옹대(明翁䑓)와 어울려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明庵 鄭栻(명암정식)의 글씨이며 바위의 아래에는 만화담(萬花潭)을 새겨 두었다.

내원사계곡에서 지리산의 마지막 빨치산이 붙잡혔다고 알려져 있으며, 내원사 계곡 위 국수봉, 마야계곡,

 써리봉, 중봉, 천왕봉에 이르는 산과 계곡은 깊고 험난하다. 내원사계곡과 장당골의 길이는 100리에 이른다.

 장당골과 내원사계곡이 맞닿아 합쳐지는 곳에 내원사가 있다.. 내원사에서 대밭 쪽으로 향하면 내원마을

가는 길이 나타난다. 물론 내원사입구에서 왼쪽으로 올라가는 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장당골에는 마을이 없지만 내원사계곡에는 바깥 내원과 안 내원 마을이 있다.


     장당골, 지리산 심산유곡으로는 색다른 계곡이다.

     긴 길이에 풍부한 수량으로 와폭과 너른 소가 즐비하다. 동부 지리산의 깊숙한 곳에

     위치하면서도 지리산 여타 계곡과 달리 험하지 않고 여유롭고 전원적인 모습을 보인다.

     방대한 지리산 유역의 수많은 명계곡 중에서 두번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의 명품계곡이다.

 


장당골은 써리봉을 발원 주봉으로 하여 무제치기 폭포를 거쳐 황금능선과 치밭목 능선 사이로

     흘러내린다. 써리봉과 비둘기봉,황금능선,치밭목능선에서 흘러내린 지류 들을 모아 안장당,바깥장당을

     거쳐 내원사 앞에서 내원골과 만난다,  내원골은 황금능선 국수봉 자락의 지류를 모아서 안내원과

     바깥내원을 거쳐 규모를 이루며 장당골과 합수된다.





     내원사 앞에서 장당골과 내원골의 합수된 계류는 3km 아래,대포에서 대원사계곡 물을 만나며 덕천강으로

     흘러든다. 산청 삼장면의 大浦마을, 말 그대로 큰 물가 마을인 셈이다. 두개의 큰 계곡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대포숲, 여름에는 물놀이와 야영을 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장당골(長堂)은 이름에서 보듯 계곡이 엄청길다.

     하류의 대포숲에서 상부 무제치기 폭포 유역까지 장장 20km의 길이를 자랑한다.

     수량 또한 풍부하여 수많은 소와 폭포로 비경을 연출하고 있다.

     지리산 최후까지 남겨둘 보호지역으로 꼽히고 있으며 내원사 앞에서 무제치기 폭포까지

     약 17km 구간에 대하여 출입을 통제하며 원시성을 복원하고 있다.

여름에는 대포리부터 내원사까지 이렇게 넓은 계곡에서 피서를 즐길 수 있다


입구 다리에는 산수유가 꽃을 터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