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심정 쪽에서 담은 德川書院(덕천서원) 전경
조식은 연산군 7년(1501) 三嘉縣(삼가현. 합천군 출생 안동의 이황과 함께
당시 영남유학의 쌍벽을 이루었던 대학자로 실천적인 성리학을 중시하였다.
일체의 벼슬을 마다하고 현재의 산청군 시천면인 德山(덕산)에서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다가 선조 5년(1572) 72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德川書院(덕천서원)에서는 매년 음력 3월과 9월의 첫 丁日(정일)에
제사를 지내고 매년 양력 8월18일에는 남명선생의 탄생을 기념하는 남명제가 열린다.
앞에 은행나무는 400년이 됐다고함(3/8)
산청 덕천서원(山淸 德川書院)은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원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서원이다.
1974년 2월 16일 경상남도의 유형문화재 제89호로 지정되었다.
남명 조식 선생을 모신 서원으로, 끝내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재야를 지킨 선생의 뜻을 기르고 있다.
남명 조식(1501∼1572)의 학덕을 기리기 위하여 그가 학문을 닦던 곳에 세운 서원이다.
조선 선조 9년(1576)에 지었고, 광해군 원년(1608)에 사액서원이 되어 나라의 공인과 지원을 받았다.
고종(재위 1863∼1907) 때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30년대에 다시 지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 남아있는 건물로는 사당, 신문, 강당, 동재와 서재, 외삼문 등이다.
공부하는 공간이 앞쪽에 있고 사당이 뒷쪽에 있는 전학후묘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지금은 서원의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의 기능만 남아있다.
德川書院(덕천서원) 敬義堂(경의당) 전경]
書院(서원) 삼문인 時靜門(시정문)을 들어서면
곧장 보이는 정면에는 강당인 敬義堂(경의당)이 있고
그 앞쪽으로 東齋(동재)와 西齋(서재)가 좌우에 자리하고 있다.
진덕재(서재)
수업제(동재)
進德齋(진덕재) 西齋(서재)]
명륜당 앞쪽 좌우에 있는 건물로 학생들의 기숙사.
동재에는 생원, 서재에는 진사를 수용했다하며,
후기에 당쟁이 심해지자 당색에 따라 東(동), 西(서)로
학생을 나누어 수용한 적도 있었다 한다.
지방교육기관인 鄕校(향교)와 書院(서원)에도 동.서재가 있었으며,
東齋(동재)는 양반자제가, 西齋(서재)는 평민자제가 많이 기숙했다 힌다.
경의당
덕천서원 강당겸 명륜당 敬義堂(경의당)
敬義堂(경의당)은 서원의 각종 행사와 유생들의 회합 및 토론장소로
사용되던 곳으로 '德川書院(덕천서원)' 현판이 걸려 있는 서원의 중심 건물이다.
정면 5칸, 측면 2칸 팔작지붕집으로 중앙에 대청이 있고,
그 양쪽으로 툇마루와 난간이 달려있는 2개의 작은 방이 있다
내삼문
崇德祠(숭덕사)
內三門(내삼문)을 들어서면, 사당인 崇德祠(숭덕사)가 자리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에 맞배지붕집으로
처음엔 曺植(조식)선생의 위패만 모셨으나,
그 뒤 그의 제자인 崔永慶(최영경)을 추가 배향했다.
藏板閣(장판각) 전경
藏板閣(장판각) 서원에서 찍어낸 각종 목판을 보관하는 전각이다.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은 나이가 동갑이었다.
1501년에 경상우도(경북 안동)와 경상좌도(경남 합천)를
대표하는 대학자가 두 명이나 태어난 것이다.
이황이 71세로, 조식이 72세로 세상을 떠났으니 둘은 완벽하게 동시대를 산 인물이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서신만 왕래했을 뿐 실제로 대면한 적은 없었다.
조식은 퇴계학파의 성리학논쟁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는 퇴계학파가 현실 인식은 하지 않고 형이상학적인 이론 논쟁만 일삼고 있다고 생각했다.
반면 이황은 조식이 유학 이론에 깊지 못하다고 평했다.
학문적으로는 이견이 있었지만, 두 사람은 서로 호감을 가진 라이벌이었다.
경상도의 학자들 가운데는 두 사람을 모두 존경하여
두 문하를 번갈아 출입하며 학문을 계승한 인물들이 많았다고 한다
덕천강 지류에 있는 세심정 (서원 앞)
덕천서원을 돌아보고 전에 왔을 때 꽃이 덜피어 제대로 못보았던
남명매를 보려고 산천재로 향한다
산천재의 산수유도 반은 개화를 했다
신기하게도 제멋대로 이리저리 구불어진 소나무
산천재
산천재의 삶을 읊은 그의 시 '덕산에 터를 잡고(德山卜居)'가네 기둥에 주련으로 걸려 있다
(춘산저처무방초)
봄 산 아래쪽엔 향기로운 풀 없겠냐만
(지애천왕근제거)
천제사는 곳과 가까운 천왕봉만 좋아라
(백수귀래하물식)
빈손으로 왔지만 먹을거리 걱정하랴
(은하십리끽유여)
은하 십리 같은 물 먹고도 남으리
경의(敬義)
경은 마음이 밝은 것을 말하고 의는 외적으로 과단성 있는 것을
말하는데 이두가지는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의 주된 명제였다
조식 남명문집 목판(曺植 南冥文集 木板)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사리에 있는, 조선시대 유학자인 남명 조식
(曺植,1501∼1572) 선생의 시문집을 널리 간행하기 위해 만든 책판이다.
1979년 12월 29일 경상남도의 유형문화재 제164호 남명선생 문집책판으로 지정되었다가,
2018년 12월 20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조선시대 유학자인 남명 조식(曺植,1501∼1572) 선생의 시문집을 널리 간행하기 위해 만든 책판이다.
조식은 평생 학문에 힘썼으나 과거에는 나아가지 않았다.
1567년 임금이 불러도 나아가지 않고, 다만 왕을 만나 난을 다스리는 방도와 학문을 마칠 것임을 밝히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일상생활에서도 철저한 절제로 일관하여 의(義)가 아닌 것과는 절대 타협하지 않았다.
같은 시대에 살았던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학풍을 만든 인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으로 참여하는 등
국가에 위기가 닥치면 몸소 앞장서서 싸움에 참여하였다. 그가 죽은 후 차례로 대사헌,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여러 서원에 그의 위패가 모셔졌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선조 37년(1604)에 선생의 제자인 정인홍에 의해 해인사에서 간행되었으나, 불에 타버려 광해군 14년(1622)에
관찰사 유영순의 도움으로 다시 간행하였다. 그후 『산해사오연원록』,『연보』,『언행록』등이 추가로 간행되었다.
또한 고종 31년(1894)에 이들 문집을 다시 보완하고 수정하여 새로이 간행하였으며, 광무 1년(1897)에 선생의
『연보』를 수정, 보완하여 『남명선생편년』을 간행하였다.
이것은 남명 조식 선생의 사상과 생애를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이다.
무엇보다 산천재 앞의 한 그루 고매(古梅)가 눈길 을 끈다. 이름하여 '남명매(南冥梅)'이다.
원줄기의 상당부분이 썩어 키높이 만큼이나 길게 외과수술을 받고 약품처리로 검게
땜질이 되어 있다. 1561년 남명선생이 이곳 산청으로 터전을 옮겨 온 후에 심었다니
수령이 450년이다. 몇년전에 왔을 때는 조금 피기 시작 했었는데 이번에는 만개를 했다
남명선생이 산천재를 지으면서 심으신 매화나무.
수령이 450살이 훌쩍 넘었다.
산청의 원정매, 정당매와 함께 산청의 3매라 불린다.
여전히 해마다 봄이면 꽃을 피운다.
이 곳을 찾는 수 많은 사람들을 맞이하는 남명매는 마치 허리에 뒤짐지고
천왕봉과 덕천강을 올려보고 내려보는 남명 선생같다.
고목이 돼서 약품처리 해놨는데 얼마나 더 살아 있을지?
남명매를 대신 하려는 듯 입구쪽에 두그루의 매화가 서있는데 꽤나 오래 된듯
덕천강
파크골프장인데 규모가 작기도 하지만 코로나 19 때문인지 몇사람 뿐이다
남명선생이 이곳 산천제에서 돌아가시자 선조대왕께서 내리신 제문을새겨 세운 비석
남명기념관(南冥記念館) ]
남명기념관은 2001년 선생의 탄생 500주년을 계기로 추진되어 2004년 8월 문을 열었다.
기념관 내부는 남명 선생과 관련된 유물 전시실과 영상정보실, 교육관, 세미나실 등으로
구성돼 있으며, 외부 공간 서편에는 우암 송시열이 쓴 신도비(神道碑), 선생의 석상(石像)이
있고 우측 후면에는 문중에서 제사를 지내는 가묘(家廟)인 여재실(如在室) 등이 있다.
남명선생의 묘소는 기념관 뒤쪽에 보이는 동산에 자리 잡고 있다.
남명 선생 시비(詩碑),
題德山溪亭柱 (제덕산계정주) | 曹植(조식)
請看千石鐘 (청간천석종) 천 섬 들어가는 쿤 종을 보소서!
非大扣無聲 (비대구무성)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 없다오.
爭似頭流山 (쟁사두류산) 어떻게 해야만 두류산처럼,
天鳴猶不鳴 (천명유불명)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까?
남명기념관 서편이다.
왼쪽부터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지은 남명선생신도비(南冥先生神道碑), 남명선생신도비문
국역비(國譯碑), 남명조식선생상, 단성소(丹城疎)라고도 불리는 을묘사직소비(乙卯辭職疏碑)와
무진봉사비(戊辰封事碑)가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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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 송시열의 남명선생신도비(南冥先生神道碑) 맨좌측비
신도(神道)라는 말은 죽은 이(死者)의 묘로(墓路), 즉 ‘신령의 길’이라는 뜻이다.
이 신령의 길(대개 무덤의 남동쪽이나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죽은 이의 사적(事蹟)을 적어
세운 비석이 신도비(神道碑)이다. 신도비는 무덤 앞에 하나를 세우는 것이 보통인데 남명선생의
신도비는 여느 인물과는 달리 5개나 존재한다.
1609년 남명이 영의정에 추증되자 선생의 수제자 내암 정인홍(來庵 鄭仁弘)이 비문을 지어
신도비를 세웠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정인홍이 역적으로 몰려 처형되자
그의 신도비도 즉각 철거되었다.
문중(門中)에서는 다시 명사(名士)의 글을 공모하여 새로 신도비를 세우고자 하였으나
겸재 하홍도(謙齋 河弘度)와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은 거절하였으며, 용주 조경(龍洲 趙絅)은
오랫동안 시간을 끌었다.
그러다 비슷한 시기에 미수 허목(眉叟 許穆)과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의 글이 접수되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남인(南人)과 서인(西人)으로 대립 관계에 있었으므로 입장이 난처해진 자손들은
허목의 비를 이곳 덕산에 세우고 송시열의 비는 남명의 고향이자 외가인 합천 삼가의 용암서원(龍巖書院)
묘정비(廟庭碑_ 묘당이나 서원의 뜰에 세운 비석)로 세웠다.
그 후 기축옥사(己丑獄事)가 일어나자 남명과 정인홍은 집권세력인 서인(西人)에 의해 악의적으로
왜곡되고 폄하되었다. 기축옥사는 정여립(鄭汝立) 등의 동인(東人)들이 모반을 하였다는 혐의로
박해를 받게 된 사건인데, 당시에 최영경(崔永慶)을 비롯한 남명 조식의 문인들도 큰 피해를 입었다.
이를 계기로 남명학파 중심의 북인(北人)과 대립관계에 있던 퇴계학파 계열의 남인(南人)이 정권을
잡게 되었는데, 허목은 퇴계학파 계열의 남인이었던 것이다.
결국 남명학파는 몰락하였으며 , 경상우도(慶尙右道_ 진주, 함안, 거창, 합천, 함양 등)와
호남은 반역향(反逆鄕_ 역적의 땅)으로 분류되어 300년 동안 멸시와 차별을 받았다.
세월이 흘러 1926년에 남명 조식의 후손인 덕산 조씨(德山 曺氏) 문중 사람들은 허목이 지은 비문에
남명선생을 비하하는 내용이 있다며 치워버리고 대신 송시열이 쓴 비를 세우게 되었다. 그러자 조상의
신도비를 훼손한 일과 허목의 글을 없앤 것은 잘못이라 주장하며 진주 향교(晉州 鄕校)가 들고 일어났다.
5년간의 치열한 법정 다툼 끝에 결국 조씨 문중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허목의 신도비는 다시 설 수가
없게 되었다.
겸재 하홍도(謙齋 河弘度)_ 하동 옥종 안계마을 출신으로 남명의 학맥을 이음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_ 대표적인 척화론자(斥和論者)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모시고
청나라 심양(瀋陽)에 인질로 끌려갔으나 끝까지 청에 굴복하지 않음으로써 절개와 지조의 상징이 된
인물임, 청나라로 끌려갈 때의 심경을 읊은 시조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로 유명함
[ 을묘사직소비(乙卯辭職疏碑), 일명 단성소(丹城疎)의 국역비(國譯碑) ]
단성소(丹城疏)는 1555년(명종 10) 남명선생이 단성현감(丹城縣監)을 사직하는 이유와 당시의
국정 문란을 질타하는 내용을 담은 상소문인 을미사직소(乙卯辭職疎)를 말한다.
이 단성소에는 남명선생의 기개와 선비정신이 잘 드러나 있으며, 당시 정치제도나 군신관계로 볼 때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극언들이 포함돼 있다. 왕의 말이 법이었던 조선시대에 절대 권력자인 왕을 ‘
고아(孤兒)’라고 하고, 왕의 어머니인 문정왕후(文定王后)를 궁중의 일개 ‘과부(寡婦)’라고 하여 대비와 왕의
정곡을 찔렀으며 조정과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국역한 단성소의 내용 중간중간을 옮겨 본다.
‘새로 단성현감(丹城縣監)에 제수된 신 조식은 황공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주상 전하께 상소를 올립니다.
신이 나아가기 어렵게 여기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 신의 나이 60에 가까웠으나 학문이 거칠어
문장은 병과(兵科)의 반열에도 끼지 못하고 행실은 쇄소(灑掃_ 물을 뿌리고 비질을 하는 것)의 일도 맡기에
부족합니다.
전하의 국사가 이미 잘못되고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하여 하늘의 뜻이 이미 떠나고 인심도 떠났습니다.
비유하자면 마치 100년 된 큰 나무에 벌레가 속을 갉아먹어 진액이 다 말랐는데 회오리바람과 사나운 비가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것과 같이 된 지가 오래입니다.
조정에 충의로운 선비와 근면한 양신(良臣)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 형세가 극도에 달해 지탱해 나갈 수 없어
사방을 둘러보아도 손을 쓸 곳이 없음을 이미 알고 있기에 아래의 소관(小官)은 히히덕거리며 주색이나 즐기고,
위의 대관(大官)은 어물거리면서 뇌물을 챙겨 재산만 불리는데도 근본 병통을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내신(內臣)은 자기 세력을 심어서 못 속의 용처럼 세력을 독점하고, 외신(外臣)은 백성의 재물을 긁어
들여 들판의 이리처럼 날뛰니 이는 가죽이 다 해지면 털도 붙어 있을 데가 없다는 것을 모르는 처사입니다.
대비께서는 생각이 깊다고 하지만 역시 깊은 궁궐 속의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단지 선왕의
대를 잇는 외로운 아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수많은 종류의 천재(天災)와 억만 갈래의 인심을 무엇으로
감당해내며, 어떻게 수습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반드시 마음을 바로잡는 것으로 백성을 새롭게 하는 요체로 삼으시고, 몸을 닦는
것으로 사람을 임용하는 근본을 삼으셔서 왕도의 법을 세우소서. 왕도의 법이 법답지 못하게 되면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게 됩니다. 삼가 밝게 살피소서. 신 조식은 황송함을 가누지 못하고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이렇게 선생은 명종임금이 내린 단성현감 벼슬을 거절하였다. 선생의 나이 55세 때이다. 이것 만이 아니다.
38세에 종9품인 헌릉참봉(獻陵參奉) 벼슬을 거절하였다. 헌릉은 태종왕비 원경왕후의 능이다. 51세에 종부사
주부(宗簿司 主簿)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고, 53세에 정6품 벼슬을 내렸으나 눈병을 핑계로 거절하였다.
퇴계 이황이 편지를 보내 벼슬을 받을 것을 권하였으나 완곡하게 거절하는 답장을 보냈다. 59세에 종6품의 조지서
사지(造紙署 司紙)로 임명받았으나 사양하였고, 66세 때에는 종5품의 상서원 판관(尙瑞院 判官) 벼슬을 거절하였다.
명종 임금은 선생 나이 67세 때에 승하하였다. 선생은 왕의 부음에 애절한 정을 담은 시를 남겼다.
삼동(三冬)에 베옷 입고 암혈(巖穴)에 눈비 맞아
구름 낀 볕 뉘도 쬔 적이 없건마는
서산(西山)에 해지다 하니 눈물 겨워 하노라.
삼동(三冬)_ 어지러운 세상
베옷 입고 _ 벼슬을 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사는
암혈(岩穴)_ 집도 제대로 없이 고생스럽게 생활함
볕 뉘도 쬔 적이 없다_ 임금의 은택을 조금도 받은 바 없다
서산에 해지다 하니_ 명종 임금의 붕어 소식
[ 남명의 무진봉사(戊辰封事) 국역비 ]
1567년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선조(宣祖)는 즉위 초에 선생을 두 차례나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듬해 선생의 나이 68세 때에도 왕의 부름을 받았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고 대신 올린 것이 이른바
무진봉사(戊辰封事)이다. '봉사(封事)'란 왕에게 밀봉하여 올리는 의견서를 말한다.
남명이 선조에게 올린 무진봉사의 키워드는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이다. 즉, 당시의 서리(胥吏)
폐단을 극렬하게 지적한 것으로 유명하다.
선생은 역대 임금들이 나라 다스림에 실패한 사례를 지적하고서, '나라 다스림의 길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임금 자신이 학문과 인격을 닦는데 있습니다.' 라는 요지의 상소를 올려 어린 선조가 정치를
잘 해 낼 수 있는 바탕을 닦도록 간언(諫言)하였던 것이다.
무진봉사의 앞머리와 끝부분만을 간추려 본다.
"경상도 진주에 사는 백성 조식(曺植)은 진실로 두려운 마음으로 삼가 절하고 머리 조아리며
주상전하께 아룁니다.
보잘것 없는 신은 더욱 노쇠하고 병이 깊어 입으로는 먹고 싶은 생각이 없고 몸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합니다. 부르는 임금님의 명이 거듭 내려와도 곧바로 달려갈 수가 없고, 해바라기가 해를 바라보듯
임금을 향한 생각은 간절해도 길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신이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아 임금님의 은혜를
갚을 길이 없겠기에 감히 속마음을 다 쏟아 임금님께 아룁니다.
(中略)
전하께서 만약 신의 말을 버리지 않고 너그럽게 수용하신다면 신은 전하의 용상 아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어찌 꼭 신의 늙고 추한 모습을 본 뒤에라야 신을 썼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또 들으니, 임금을 섬기는
사람들도 형편을 살펴본 뒤에 벼슬하러 들어간다고 하는데, 전하는 어떤 임금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신이 한 말을 좋아하지 않으시면서 한갓 신을 만나려고만 하신다면 헛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전하의 사람 알아보는 눈이 밝은지 어두운지에 따라 앞날의 정치에 득실을 예측하고자 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임금님께서 굽어 살펴 주시옵소서. 삼가 상소하는 바입니다."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_ 서리(胥吏)란 고려나 조선시대 중앙과 지방의 관청에 딸린 하급 관리를 말한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상피제도(相避制度)라고 하여 자기 고장의 수령으로 임명되는 것을 피하는 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지방관이 임지(任地)의 사정에 어두울 수 밖에 없었다. 이로 인하여 그 지방의 사정에 밝은 서리(胥吏)가
행정사무를 맡게 되었는데, 이들은 지방관을 속이고 일반 백성들에 대해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군림하며
민폐를 끼쳤으며 사복을 채웠다.
남명선생이 “서리(胥吏)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분개한 것이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이다.
남명선생 영정
[ 신명사도(神明舍圖) ]
신명사도(神明舍圖)란 남명선생의 마음 수양 방법으로 마음의 작용을 마치 임금이
신하를 거느리고서 나라를 다스리는 이치에 비유하여 도식화한 것이라고 한다.
그림에서 성곽의 안쪽이 사람의 마음이고, 바깥쪽은 외부 세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신체 내외로부터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남명선생이 인간의
마음과 마음 바깥의 경계를 굳은 성곽으로 표시한 것은 신체 외부로부터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사사로운 욕심(私慾)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막아야 한다는 결연한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또 신명사도는 도덕적 차원에서의 선과 악의 다툼을 전쟁에 견주어서 그린 그림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도덕의 주체인 인간 자신을 선성(善性)의 본체로 위치시키고 밖에서
유입되는 악(惡)으로부터 그 선성을 보호하며, 나아가 인간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기미를 잘라내고 악을 극복함으로써 신성을 인간의 생명활동과 도덕실천의 광장으로
확충시키고자 하는데 있다.
선생은 신명사도의 내용을 생활화 하려고 애썼다고 하는데, 합천 삼가의 뇌룡정(雷龍亭)은
신명사도에 따라 지은 것이라고 하며, 산천재가 완성되자 이 신명사도를 자리 옆에 걸어두고
자주 보면서 마음을 수양하였다고 한다.
경의사상
남명사상의 핵심은 경(敬)과 의(義)이다.
경은 ‘받듦’과 ‘삼감’의 자세를 뜻하니 자신을 낮추는 겸손으로 내면의 의지를 굳건히 함이요,
의는 ‘옳음’이니 외부에서 들어오는 옳지 못한 처사를 잘라내어 밖으로 행동의지를 굳건히 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남명은 경과 의로서 자신을 지키고 남을 지켰다.
경의(敬義)의 실천사상은 남명의 제자들을 통해 증명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예견하고는 제자들에게 구국의 동량이 될 것을 가르쳤다.
그에 부응한 대표적인 제자들이 임란 의병장의 효시였던 홍의장군 곽재우, 정인홍, 김면 등 3대
의병장이었고더불어 조종도를 위시한 50명의 경상우도 의병장들이 거의가 남명의 제자들이었다.
또한 남명의 절개는 절대권력자였던 임금도 어쩌지 못했다.
을묘년에 명종에게 올린 단성소에 임금을 아비 없는 고아라 하였고 문정왕후를 궁중의 과부에
불과할 뿐이라는 극언으로 왕실을 능멸하고도 멀쩡하게 살아남은 이는 오직 남명이 유일하다
강우유맥(남명학파)
19세기에 강우지역에서는 많은 학자가 배출되어 학문이 크게 진작되었다.
경상도 성주 출신의 학자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의 문하에서 빼어난 학자가 많이 배출되었고,
경기도 포천 출신의 학자 성재(性齋) 허전(許傳)이 김해부사로 부임하여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으며,
전라도 장성 출신인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학통을 전수 받는 제자가 이 강우지역에서 나왔다.
한주 이진상은 19세기에 안동지역에서 퇴계 이황의 학맥을 충실히 계승한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의
문하에 출입하였다. 그는 성리학설에 있어서 스승 유치명과 의견을 달리했지만, 유치명이
‘강우대유(江右大儒)’를 꼽을 때는 반드시 이진상을 일컬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1850년대에 학문적 명성을 크게 얻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사 기정진은 전라도 장성에서 주리설(主理說)을 제창하였다.
기정진의 학통은 강우지역의 학자 조성가(趙性家)와 정재규(鄭載圭)로 전해졌다.
정재규는 1864년 경상도 합천에서 전라도 장성 기정진의 문하에 들어가 학업을 익혔다.
그는 기정진이 1879년 작고하기 전까지 15년간 기정진의 문하에 출입하였다.
19세기 강우학자
기정진은 조성가에게 그의 주리설을 전하였다. 조성가는 1878년 기정진이 81세 때
그 문하에서 ‘외필(猥筆)’을 전수받았다.
이것은 기정진이 작고하기 일년전에 조성가에게 자신의 성리설을 전수한 것이다.
19세기 강우학자 들은 그 학맥의 연원이 이진상, 허전, 기정진 등 다양하였으나 학파를 초월하여
강우유맥을 이어갔다
성주 한개마을에 한주종택이 바로 이진상의 집인데 후손들이 독립운동을 하다 몰락하여
지금은 초라한 모습으로 관리가 소흘하다
담벽에 그려진 벽화
본관 남평(南平). 자 일신(日新). 호 삼우당(三憂堂). 시호 충선(忠宣).
초명 익첨(益瞻). 강성현(江城縣: 경남 산청) 출생. 1360년(공민왕 9) 문과에 급제하여
김해부사록(金海府司錄)·순유박사(諄諭博士) 등을 지내고, 1363년 좌정언(左正言)으로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계품사(啓稟使) 이공수(李公遂)를 따라 원(元)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붓대[筆管] 속에 목화씨를 감추어 가져왔고, 이를 장인 정천익(鄭天益)과 함께 고향에서
재배하는 데 성공하였다. 1375년(우왕 1) 다시 전의주부(典儀注簿)로 등용되고 1389년
좌사의대부(左司儀大夫)가 되었으며, 공양왕 때 이성계(李成桂) 일파에 의하여 추진된
전제개혁(田制改革)에 반대했다가 조준(趙浚)의 탄핵으로 밀려났다. 1440년(세종 22) 영의정이
추증되고 강성군(江城君)으로 추봉되었으며 세조 때에 사당이 세워졌다.
목화씨 도입 100년에 무명배 대중옷감으로 정착
고려말 문익점에 의한 면 종자의 유입은 우리나라 직물사에서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으며 산업 및 경제구도 변화를 초래했다.
삼국시대 이래 방직산업은 견직업과 마작업으로 양분되어
오랜 역사를 이어왔다.
그러나 견직물은 대부분 상류층에 국한되어 사용되었으며 고려
이전에 제직되었다는 계,백첩포 등도 외국에 공물을 보내기 위해
소량이 직조되었을 뿐 일반 서민들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기
때문에 일반 서민들은 추운 겨울에도 삼베나 모시와 같은
마섬유에만 의지했다.
그러한 서민생활에서 따뜻한 솜과 무명의 원료가 되는 면 종자의
도입은 의생활의 일대 혁명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조 때 헐벗음 혁명적 해결사-문익점
목화에서 실을 뽑는 기계를 '물레'라고 한다. 기계를 만든 사람의
성명 '문래'에서 따온 이름이다.
문래(文來) ...문익점의 손자이다. 그런가 하면, 목화를 재배하여
만들어낸 옷감을 '무명'이라고 한다.
옷감 짜는 베틀을 만들고 베 짜는 방법을 창안한 사람의 이름
'문영'에서 따온 이름이다.
문영(文英), 역시 문익점의 손자이다.
그리고 의성(義城)에 목화를 크게 심어 우리 민족 모두가
'백의민족'의 따뜻함을 맛볼 수 있게 해준 사람은
의성현감으로 있던 '문승로(文承魯)' 또한 문익점의 손자이다.
처음으로 목화 재배에 성공하고, 그것으로 옷감을 만드는 방법
까지도 연구해낸 정천익(鄭天益)은 문익점의 장인(丈人)이다.
국가경제에 큰 기여 그리고 산업혁명
더욱이 문익점에서 시작된 목면(木棉) 생산은 조선시대 들어와
국가 경제에 큰 기여를 하였다.
일일이 손으로 실을 만들어야 하고, 마(麻)를 가공하는 과정에서
남성 노동력이 많이 드는 '베'와 비교하면, 씨아와 물레를 사용
하는 목면(木棉)은 생산성이 매우 높고 여성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었다. (펌글)
문익점(文益漸, 1329년 2월 8일~1400년 2월)은 고려 말의 학자, 문신, 외교관으로, 초명은 익첨(益瞻),
자는 일신(日新), 호는 사은(思隱) 또는 삼우당(三憂堂), 시호는 충선(忠宣), 본관은 남평(南平)이고
강성 문씨(江城 文氏)의 시조이기도 하다. 관직은 성균관대사성에 이르렀고 작위는 강성군에 봉군되었다.
문과에 급제한 후 김해부 사록과 순유박사 등을 거쳐 1363년 사간원좌정언으로 재직 중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덕흥군을 지지하였다가 파면당하였다. 그 뒤 고향에서 목화 재배를 하다가 우왕 즉위 후
전의감주부와 좌사의대부를 거쳐 성균관대사성에 이르렀다. 그는 이성계(李成桂), 정도전, 조준 일파에 의하여
추진된 전제개혁(田制改革)에 반대했다가 조준의 탄핵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사후 조선 태종 때 참지의정부사
강성군(江城君)을 증직되고 세종 때인 1440년(세종 22) 영의정부사 부민후에 가증되었다.
원나라에 갔다가 목화의 씨 몇 개를 고려로 들여와 장인 정천익과 함께 이를 재배하였다. 처음에는 재배기술을
몰라 한 그루만을 겨우 살릴 수 있었으나 3년간의 노력 끝에 드디어 성공하여 전국에 목화씨를 퍼지게 하였다.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그가 최초로 한국에 면포를 만드는 목화를 들여왔다고 전해지나, 최근 백제 시대
면직물이 발견되어 삼국시대에도 목화 재배가 이미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설이 대두되고 있다. 그의 목화
반입과 재배 기록은 후일 남명 조식이 쓴 《목면화기 木棉花記》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이곡의 문인이다
생애
문익점은 1329년 2월 경상남도 산청의 강성현(江城縣)에서 문숙선(文淑宣)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남평(南平)이다. 문익점의 생년은 다소 불확실하여 1328년생 설과 1331년생 설, 1332년생 설 등이 전한다.
그의 첫 이름은 익첨(益瞻)이었다가 뒤에 익점으로 개명하였다. 자는 일신(日新), 호는 삼우당(三憂堂)이다.
아버지 문숙선은 과거 시험에는 합격하였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어려서 아버지에게 글을 배우고 12살 때부터 당대의 학자 이곡(李穀)의 제자가 되어 그 아들 이색(李穡)
등과 함께 공부하였다.
1360년(공민왕 9) 문익점은 문과에 급제하여 김해부 사록(金海府司錄)·순유박사(諄諭博士) 등을 지냈다.
1363년 사간원좌정언(司諫院左正言)이 되었다.
원나라 사행길과 목화 반입
1363년에 좌정언으로 재직 중 계품사(啓稟使)인 문하좌시중(左侍中) 이공수(李公遂)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선발되어, 이공수를 따라 원나라에 갔다. 때마침 원나라에 벼슬하고 있던 고려 사람 최유(崔濡)가 원나라에
와 있던 충선왕의 셋째아들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옹립하고 공민왕을 몰아내려 하고 있었다. 이때 연경에
도착한 그는 원나라에서 공민왕을 폐하고 충선왕의 서자인 덕흥군(德興君)을 고려왕으로 책봉하여 고려로
진군하게 하자 이를 지지했는데, 원나라가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봉하자 덕흥군의 추종자 최유는 원나라의 군사
1만명을 얻어 요동(遼東)까지 진군하여왔으나 1364년 1월 최영(崔瑩) 등에게 패하였다. 원나라에 갔던 문익점은
덕흥군을 지지하였다는 혐의로 귀국과 동시에 파직되었다.
그러나 억울하게 연루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반란의 주모자였던 최유가 마음대로 문익점의 이름을 반란군의
명단에 올려놓았던 것이다.라는 견해도 있다.
목화 밀반입
귀양지 운남에서 문익점은 사람들이 목화를 심어 옷을 해 입는 것을 보았다. 고려에서는 귀족들이나
왕족들만이 솜옷과 솜이불을 해 입었으므로 그는 이를 고려로 반입할 뜻을 품게 된다.
목화씨를 고려에 가져가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원나라는 법으로 목화를 나라 밖으로 가져가는 것을 엄금하고
있었다.
귀국할 때 수입 금지품이던 목화씨를 몰래 가지고 귀국, 사행길을 마친 뒤 관직을 사퇴하고 1364년 고향인
진주(晉州)로 내려가 장인인 정천익(鄭天翼)과 함께 반을 나눠서 목화를 재배한다. 원나라에서 귀국할 때
그는 자신의 시종인 김룡(金龍)과 함께 밭을 지키던 노파의 제지를 무릅쓰고 몰래 원나라의 어느 목화밭에
들어가 목화 몇 송이를 따서 그 종자를 붓대 속에 넣어가지고 와서 장인 정천익(鄭天益)에게 나누어주고
함께 시험재배를 하였다.
목화 재배 성공과 시중 보급
3년 만에 목화의 재배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처음에는 목화에서 씨를 제거하고 실을 뽑을 줄 몰라서 고민하던 중
때마침 정천익의 집에 머무르던 호승(胡僧)에게 물어 씨를 빼는 씨아와 실을 뽑는 물레 만드는 법을 배워 실을
뽑아냈다. 정천익이 호승인 홍원(弘願) 등에게 씨를 빼는 씨아(取子車)와 실을 뽑는 기계(繅絲車)를 만드는 방법을
배워왔고, 문익점은 장인 정천익에게서 이를 배워 다시 시중에 보급시켰다. 이후 이를 근거로 옷과 이불을 만들게 되었다.
그가 심은 것은 실패하고 장인 정천익이 심은 씨앗 가운데 하나에서 꽃이 피어 100여개의 씨앗을 얻어서 다시 재배하여
성공하였다. 그 뒤 문익점은 해마다 재배량을 늘려서 1367년에는 향리 사람들에게 씨앗을 무료로 나누어주며 심어
기르도록 권장하고 목화 재배를 교육하였다.
목화가 널리 전해짐으로써 일반 백성들의 의복 재료가 종래의 삼베에서 무명으로 바뀌게 되었다. 귀족 권문세족과
왕족들만이 입고 덮던 솜이불과 솜옷이 시중으로도 확산된 것이다. 후일 조식은 문익점의 그 공을 기려 훗날
“백성에게 옷을 입힌 것이 농사를 시작한 옛 중국의 후직씨와 같다(衣被生民 后稷同).”며 그 공적을 높이 평가했다.
한편 문익점의 손자 문래(文萊)와 문영(文英)은 실 잣는 기구를 개량했다.이 기구를 '물레'라고 부르는데 바로
발명자 '문래'의 이름에서 비롯된 이름이라고 한다.문래가 발명한 실잣는 기구는 그의 이름을 따서 문래라
부르다가 말이 와전되어 물레가 된 것이다.
관료 생활
1374년 그는 중현대부 좌대언 우문관제학 겸 지제교(中顯大夫左代言 右文館提學 兼 知製敎)가 되었다. 그러나
그해 그는 정몽주, 정도전 등과 함께 북원의 사신을 처벌할 것을 상소했다가 친원파 권문세족의 역공격을 받고
청도군수로 좌천되었다. 우왕이 즉위한 직후 다시 중앙정계로 복귀해서 목면을 보급한 공으로 1375년(우왕 1)
전의감주부(典儀監注簿)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376년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주자가례에 따라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왜구의 침입이 있었지만 그는 홀로 어머니의 묘소를 지키며 시묘를 중단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1383년(우왕 9) 이성계의 추천으로 효자비가 세워진다.
생애 후반
신진사대부와의 갈등과 은퇴
성리학적 소양이 있던 그는 1389년(창왕 1) 좌간의대부로서 왕 앞에서 강론을 하기도 하였으며, 우문관제학
서연동지사(右文館提學 書達同知事)가 되었다.
그러나 성균관 대사성에 이르러, 그해 8월 그 무렵의 토지에 대한 전제개혁(田制改革) 문제를 둘러싸고
이성계파와 이색, 우현보 등의 의견이 갈라졌는데, 이때 문익점은 이준 등이 사전(私田)을 다시 세우도록
함은 옳지 않다고 상소할 때 병을 핑계로 이에 가담하지 않았다. 이후 문익점은 이색, 이림, 우현보 등과
더불어 사전혁파를 비롯한 이성계 일파의 전제개혁을 반대하였다.
이색 등과 함께 사전(私田) 혁파를 반대하다가 사헌부 대사헌 조준의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났다.
1390년 8월 우문관제학 서연동지사 겸 성균관 대사성으로 조정에 복직하였다. 그해 10월 시정의 폐단을
지적한 시무론 8조를 올렸으며, 11월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 진주로 물러났다.
은퇴와 최후
그는 기울어져가던 나라 일, 자신의 학문을 소신껏 펴지 못하는 안타까움, 학문이 더욱 깊어지지 못함을
걱정하면서 스스로를 삼우거사라 불렀다.
1392년 이성계, 정도전 등이 조선을 건국하였으나 고려에 대한 절의로 관직에 나가지 않고 은거하였다.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반대한 문익점은 초야에 묻혀 여생을 보냈다. 1400년에 사망하였다. 저서로는
《삼우당실기》 (三憂堂實記)가 있다.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에 안장되었다.
생전에는 그의 공적을 인정받지 못했지만 조선 시대에 들어와 문익점은 중국에서 면화를 가져와 민간에
보급하고, 직조(織造)를 가르쳐 백성들을 크게 이롭게 했다며 매우 높이 평가되고 숭배되었다. 또한 그의
치적은 성리학의 초기 인사인 이곡의 직제자의 한사람이자 이색, 정몽주의 동문이었으므로 성리학 이념의
정당화하는 근거로 활용되기도 했다.
사후
묘소는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에 있고 묘 근처에는 《문익점신도비》(文益漸神道碑,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3호)가 세워져 있다. 조선 건국 후 조선 태종 때 그의 공을 기려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동지춘추관사
겸 예문관 대제학을 추증하고 강성군(江城君)에 추봉되었으며, 두 아들을 사헌부감찰로 발탁했다.
1440년(세종 22)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에 가증되고 부민후(富民侯)에 추봉되었으며 다시
충선공(忠宣公)의 시호를 받았다.
단성의 도천서원(道川書院)과 전라남도 장흥의 월천사우(月川祠宇)에 제향되었다. 단성의 사당에는
그의 공적을 높이 평가한 정조가 1785년 직접 도천서원(道川書院)의 사액을 지어 내려보내기도 했다.
그의 고향인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의 문익점면화시배지(文益漸棉花始培地)는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08호 《산청 목면시배 유지》(山淸 木棉始培 遺址)로 지정되었고,
이곳에 삼우당선생면화시배사적비(三憂堂先生棉花始培事蹟碑)가 세워졌다. 문익점이 목화씨를 가지고 와
재배에 성공하고 이를 가공하여 의복을 짓게 된 경로를 밝힌 기록은 후대의 학자 남명 조식이 쓴
《목면화기 木棉花記》에 수록되었다.
묘소는 1983년 8월 24일 경상남도의 기념물 제66호 산청문익점묘
위키리백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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