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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울산

삼랑진 만어사와 여여정사

토요일 뱀사골에 가서 숙소 문제로 늦게 돌아와 피곤하다고 안 나간다 하더만 사촌 제수가

나가자니까 또 가잔다 가까운 곳은 갈만한데가 없어 삼랑진쪽으로 가본다(3/15)


옛날 옛적 동해 용왕의 아들이 자신의 수명이 다한 것을 깨닫고 낙동강 건너에 있는 무척산이란 곳의 신승(神僧)을

찾아가 새로 살 곳을 마련해줄 것을 부탁했다. 신승은 용왕의 아들에게 가다가 멈추는 곳이 바로 그곳이라고 말해주었다.

 용왕의 아들이 길을 떠나자 수많은 고기떼가 그의 뒤를 따랐는데, 그가 멈춘 곳이 만어사이다.

만어사에 이르자 용왕의 아들은 큰 미륵돌로 변했고, 그를 따르던 수많은 고기들 또한 크고 작은 돌로 변했다는 전설이 있다.

밀양 시내를 흘러내린 밀양강이 낙동강과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낙동강 포구 삼랑진1)의 만어산(萬魚山, 670m)

만어사(萬魚寺)에 가면 이 믿을 수 없는 전설이 사실이 되고야 만다.

크고 작은 돌이 쏟아져내린 듯 또는 쏟아부은 듯 널브러져 있는 곳을(대개 골짜기이기 쉽다) 흔히 ‘너덜지대’라고

하는데, 만어사가 안겨 있는 만어산 곳곳이 그렇다.


이런 너덜지대가 가장 크고 장관을 이루는 곳이 만어산의 턱밑에 자리잡은 만어사 주변이다.

그 규모도 장관이지만 너덜지대를 이루는 돌 하나하나의 생김새가 예사롭지 않다. 전설처럼 물고기가 입질하는 모양이다.

폭이 약 100m, 길이가 약 500m 규모로 골짜기를 가득 메운 입질하는 물고기 모양의 크고 작은 검은 돌들은 신기하게도

 두드리면 쇠종 소리가 난다. 그러나 모든 돌에서 그런 소리가 나는 것은 아니고, 서너 개 중 한두어 개 어림으로

 쇳소리가 나는데, 그 이유 또한 불분명하여 더 신비롭다.

밀양강이 낙동강과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낙동강 포구 삼랑진의 만어산(, 670m)

만어사()에 가면 이 믿을 수 없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만어사(萬魚寺)는 46년 가락국의 시조인 김수로왕(首露王) 5년에 창건했다고 전하는 전설 속의 사찰로서

고려 명종 때인 1180년에 중창되었다 한다


대웅전 불단에는 석가모니불과 죄우협시로 약사여래와 아미타부처님이 봉안되어 있다


밀양 만어사 삼층석탑(密陽 萬魚寺 三層石塔)

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읍 만어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삼층석탑이다. 대한민국의 보물 제466호로 지정되어 있다.

탑의 형식은 신라형 3층석탑으로 4매석으로 된 단층 지대석 위에 세워져 있다. 각 옥개석의 낙수면은 경사가 급한

 편이나 전각의 반전으로 첨단에서는 평탄해졌고, 이 탑의 조성연대는 고려 명종 10년(1180년)이다.


지금의 절이 자리한 위치와는 떨어져 있으나 석탑의 뒤편에 건물터로 보이는 널찍한 대지가 있어 이곳이 본래의

 법당터로 여겨진다. 따라서 이 석탑도 지금의 위치가 원래 세워져 있었던 자리로 추정된다.

1단의 기단(基壇) 위에 올려진 3층 석탑으로, 탑신(塔身)은 몸돌과 지붕돌이 모두 한 돌로 구성되어 있다.


몸돌 모서리에는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고,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3단이다.

탑의 머리장식에는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얹혀 있으나 후에 보충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탑의 바닥돌이 드러나 있고 지붕돌이 약간 파손된 상태이지만,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어 정돈된 모습을

보이는 뛰어난 작품이다. 일부에서 퇴화된 자취가 엿보이지만 각 부의 구조와 수법으로 보아 고려 중기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추정된다.







옛날 동해의 용왕의 아들인 왕자가 큰 미륵돌로 바뀌었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미륵


'삼국유사'에서  ‘어산불영’ 즉 '만어산 부처의 그림자'라는 말처럼 바위의 표면에 감도는 붉은색은 마치

장삼 가사(袈裟)를 두른 듯 하다

미륵돌은 보는 각도에 따른 모습으로 앞에서 보면 돌고래, 옆에서 보면 가오리 꼬리 모양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불자들은 부처님, 사천왕상, 큰스님의 모습으로 보기도 한다

 


이 미륵바위를 신비스럽게 하는 이야기로는 해마다 0.3㎝씩 자란다거나  미륵돌에 기원하면 아들을 낳게

해 준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또한 병자호란이나 임진왜란, 갑오농민전쟁, 활빈당이 활약할 때, 한일합방, 3·1만세운동 등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돌의 오른쪽 면에서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으며, 6.25전쟁, 4·19혁명, 5·16군사정변 때에도

 땀이 흘렀다고 하는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다 .




너덜지대도 마치 물고기 같이 생겼다







만어사의 소원돌

마음속으로 소원을 빈뒤 들었을때 들리지 않으면 소원이 이루어 진다고



양수발전소 상부냄 천태호


꿈바위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천태사로 갈 수가 있다





예상했던 것보다 저수량이 적어보인다


조금 있으면 저기 벚나무들도 꽃이 필텐데 많은 인파가 몰려들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건설된 양수발전소로서 전력계통의 효율성 제고를 위하여 30만kw급 발전기 2기를 건설,

총 60만kw의 시설을 보유하고 있는 순양수식 지하발전소이다. 전력생산은 물론 환경과 조화를 이룬 발전설비로

 많은 볼거리와 휴식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상·하부 저수지 및 주변공원은 방문객들의 휴식처로 이용되고 있으며, 전력 홍보관을 운영하여 학생들의

과학 학습장으로도 각광을 받도 있다.

양수발전소 하부댐과 저수지

삼랑진 양수발전소와 변전설비

양수발전소 준공기념탑



천태호를 둘러보고 여기 여여정사로 왔다

여여정사가 있는 이곳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전에 아홉명의 도인이 득도하였다고 하여

구성지(九聖地)라고도 불리는 절골 남촌이라고 불렸다고도 한다
여여정사가 위치한 통점마을 구전에 의하면 몸이 아픈사람

들이 통점(桶岾)에 가서 목욕하고 흘러 내려오는 물을 마시면 고치기 어려운 고질병이

낫는다고 해서 몸이 아프면 통점에 가서 요양을 했다고 하는데 이 통점에는 참으로

상서로운 기운이 도는 일화가 있다.


어느 날 초저녁 무렵, 행촌부락(杏村部落) 노인들이 산불이 난 것을 목격하고 산불을 끄기

위해 통점에 올라가 보니 불이 난 곳은 없고 밝은 서기(瑞氣)만이 가득했다고 한다.





여여정사는 이러한 108동자가 있다고 한다

12지신상

보리달마는 남인도 향지국의 셋째 왕자로 태어나 성을 세테이리(刹帝利)라고 했다

달마도로 유명한 달마대사 혹은 보리달마라 불리며 불제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스승이며 선(禪)의 초조로

추앙받는 분입니다. 달마 스님은 인도에서 부처님의 가사와 발우를 전해받은 마지막 스님으로 중국으로

 건너와 선종 최초의 조사가 되었으니 초조 달마라고 부릅니다.

불교에서 달마(達磨)란 법(法) 즉, 부처님의 가르침을 뜻하고 더 깊이는 모든 이름의 생각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인도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지고 중국으로 건너온 스님들을 모두 달마 스님이라고

 불렀다는 것이 근래의 정설이 되고 있습니다.

금강역사

대체로 탑 또는 사찰의 문 양쪽을 지키는 수문신장(守門神將)의 구실을 담당하며, ‘인왕역사(仁王力士)’라고도 한다.

이 신은 여래의 온갖 비밀된 사적(事迹)을 알고 5백 야차신(夜叉神)을 거느리면서 천불(千佛)의 법을 수호한다고 한다.

우리나라 금강역사상의 특징은 중국 및 일본의 것과는 달리 무섭다기보다는 악의 없는 순진성을 읽을 수 있다는

 데 있으며, 석굴암 입구의 금강역사상이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여여정사를 창건하게 된 것은 현 여여정사 회주이신 정여 스님이 관음기도 기간 중에 꿈속에서

서시가 어린 맑은 도량을 보고는 그곳에 절을 지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면서부터다.

 같은 꿈을 거듭 꾸고는 우연히 삼랑진 땅고개에 있는 선주원이라는 양로원 위문을 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꿈속에서 본 도량을 발견하게 되어 마음에 감화를 받고 이곳에 절을 지을

결심을 하게 됐다고 한다.

 

대웅전 건립 발원을 하고 터를 닦아야겠다고 결심한 그날 밤, 잠을 자는데 꿈속에서도 신도님과

함께 장비로 터를 닦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물이 솟구쳐 오르고 그 솟구치는 물 속에 거북과

자라가 수없이 나오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실제로 현장에서 일을 하는 인부가 터를 닦는 곳에서 물줄기가 터져 나와 걱정을 하였다.

 

그래서 대웅전 건립을 잠시 중단하고 물과 거북, 자라가 쏟아져 나온 곳에 먼저 약사전과

용왕단을 건립하고 대웅전을 다음에 마무리하여 지난 2006년 4월21일 봉불식을 가졌으며

지속적으로 도량을 정비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포대(布袋, 생년 미상-917년(?))는 당나라 말기부터 오대 십국 시대까지 명주(현재의 중국 저장성 닝보시)에

실재했다는 전설적인 불승이다. 흔히 수묵화의 좋은 소재로 여겨지며 큰 포대를 멘 배불뚝이 승려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일본에서도 칠복신 중 하나로서 추앙받고 있다


본명은 계차(契此) 또는 석(釋)자를 붙여 석계차(釋契此)라고 했다.[2] 항상 포대(헐렁한 주머니)를 짊어지고 다녔기

 때문에 포대(布袋)라는 속칭이 붙었다.석명현(四明縣) 출신이라는 설도 있지만, 출신지도 속성도 불분명하다.

그림에서 묘사도니 것처럼 올챙이 배를 한 자태로, 절에 산 것도 아니고 처소를 누볐다고 한다.


또, 그 트레이드 마크인 큰 자루를 항상 짊어지고 있었으며, 비린내 나는 것도 상관없이 시주를 받고, 그 중 일부를

 포대에 넣었다고 한다. 그 모습은 특이했지만, 솔직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사람들을 충만하게 만드는

이상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계차에게는 여러 가지 전설이 있다.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나오는 전설에는 눈 속에 누워 있어도 포대의

몸 위에는 눈이 쌓이지 않았다고 한다.또 사람의 길흉을 알아맞혔다는 등의 유형의 일화도 전해진다.

수수께끼 같은 화두를 담은 문답도 남아 있다. 게(偈)와 노래를 남겼으며, 노래 속에서는 진실한 마음의 소중함이나

 한가한 심경을 구해야 한다고 설파한다.


그 마지막에 대해서도 불가사의한 일화가 전해지는데, 선인의 우화등선과 유사하다. 9세기 말 천복 연간에 봉천현에서

 사망(917)하여 악림사에서 천화했다는 설도 있다. 매장되었음에도 훗날 다른 주에서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포대의 그림을 그리는 습관이 강남지방에서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천진스럽고 티없이 맑은 동자승들


약사전 입구 좌우측에도 금감역사가 시립해 있다

약사전 입구쪽부터 대략 설명하면 입구부의 하부에는 12지신이, 상부에는 500나한이 있다.

이 한상들은 약사전 부처님 뒷편까지 연결되어 있다







불교에서는 부처님을 모든이의 병을 낫게 할 수 있다는 약불(또는 약왕)라고도 한다.

여기서 약불(약왕)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적으로 아픈이의 아픈 곳을 낫게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부처님께서는 사바세계의 모든 중생들의 고뇌(번뇌)를 치료해주시기 때문에 약불이며 약왕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곳 여여정사는 다른 절과 다르게 동굴에 약사여래를 모시고 있으며, 주불이 석가모니불이 아니 약사여래라는 것,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볼수 없는 달마상이 있다는 것이다





높은 산자락이지만 매화는 어김없이 만개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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