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이라서 옆지기에게 드라이브 가자니까 시장 봐온 것 손질 해야 된다고 못간다고 혼자 갔다 오란다
주섬주섬 혼자 출발 하려하니 무슨 생각인지 다시 따라가겠다고 한다
사람들이 많으면 접촉도 그렇고 식당에 들어가기도 불안해서 간단히 김밥 두줄 사가지고 나섰는데
예상외로 사람들이 없다 바로 우리 세상이다 거리두기는 철저히 지키며 밀양댐 주위를 돌아봤다
고례리의 본동마을인 고례마을과 주위 수몰된 마을은 1592년 이후 내려온 인동 장씨 문중의 세거지다.
낙주정
조선 숙종 때 이 마을에 들어와 살았던 낙주(洛洲) 장선흥(張善興)과 그 후손인
농산(聾山) 장영석(張永錫)을 추모하기 위해 1918년 인동 장씨 가문에서 건립한 재실이다
문이 잠겨 들어 갈 수는 없고 밖에서만 바라본다
시계방항으로 임경대.낙주정.사산정사.증연서실등의 현판이 걸려있다
낙주 장선흥과 그후손들의 신주를 모시는 사당인 듯
밀양댐과 저뒤 봉우리가 백마산 같다
밀양댐 오토캠핑장
임경대와 낙주정
고사천 (구곡천)
경남 밀양시 단장면 고례리 앞을 흐르는 하천은 고사천이라고도 불리지만 옛날부터 구곡천(九曲川)으로도 불렸다.
정확히 말하면 지금은 밀양호에 수몰된 고례리 사희동마을에서 단장면 사연리에 이르는 구간의 하천을 일컫는다.
구곡천이란 '아홉 굽이를 돌아 흐른다'고 해서 생긴 이름인데 조선 초기 학자인 채지당(採芝堂)
박구원(朴龜元)이 당시 사희동 마을에 살면서 지은 고사구곡가(姑射九曲歌)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박구원은 하천 유역의 9개 명소를 구곡(九曲)으로 꼽았는데 사연, 정각산(正覺山), 범도리, 승학동(乘鶴洞), 단애(丹崖),
증소(甑沼), 도장연(道藏淵), 농암대(籠岩臺), 선소(船沼)를 가리킨다.
직장에 다닐때는 아이들과 표충사에서 민박하며 이곳 고사천에 와서 투망으로 많은 물고기도 잡고
즐거운 한때를 보냈는데 댐공사를 시작한 뒤로는 한번도 못왔다 벌써 25년이 넘은 것 같다
고례리
2001년 밀양댐이 완공되기 이전까지 고례 평리 덕달 사희동 죽촌 등 5개 행정마을을 아울렀던 고례리는 비록 오지였지만
밀양에서 손꼽히는 아름다운 마을로 통했다. 백마산과 향로봉(726.8m) 뇌암산 등으로 둘러싸인 마을을 구곡천
(九曲川)이라고도 불리는 고사천(姑射川)이 관통하며 수많은 기암절벽과 깊은 소, 바위들을 만들어냈다.
밀주구지(密州舊誌)에 '산명수려(山明水麗)하고 계류와 전답이 아름다우며 기암절벽이 마치 옥(玉)기둥을
세워 놓은 듯 깨끗한, 인세(人世)의 진경(眞境)'이라고 기록했을 정도다.
인동장씨가 임진왜란 때부터 400여년을 살아온 집성촌이다
망향비 내용
상전벽해라더니 일찍이 점필재 선생이 무릉도원에 비견했던 이곳 고사천 상류일대가
오늘날 경남 도민의 생명원으로 거듭나매 이는 마땅히 경축할 일이로되 한편으로 대대손손
사꾸어온 삶의 터전을 상실한 채 외지로 떠나야 했던 덕달.사희동.죽촌.고점.주민들에게는
애고지정을 금할 수가 없기에 가뭇없이 사라진 옛 보금자리를 회억하는 당신들의 허탈한 심기에
행여한가닥의 위안이라도 될까하여 삼가 이자리에 돌을 세웁니다
2003년 5월 31일 밀양시장
농암대(籠巖臺)
밀양댐 수몰지역인 고례천(古禮川) 상류부근, 즉 사희동(四熙洞) 상류 부근 1km구간의 계곡을 농암대(籠巖臺)라고 한다.
계곡 양편에 화강석 바위덩이가 농(籠)과 같이 겹쳐 쌓여진 까닭에 붙여진 이름이며. 행정구역으로는 밀양시 단장면
고례리이다.
지금은 농암대 마주 보는 곳에 농암정을 세우고 수몰지역에 대한 사연이 적힌 비가 세워져 있는 쉼터가 있어 고개를
넘는 사람들이 잠시 쉬어 가기도한다.
천길 벼랑이 깎아 세운듯 하고 그 밑에는 수정 같이 맑은 물에 은어 떼가 뛰노는 수석이 빼어난 경승지로서,
조선시대 사림파의 거봉이신 김종직(金宗直 : 1431 ~ 1492) 선생께서 만년에 머물렀다는 곳이기도 하다.
김종직(金宗直) 선생의 시
九曲飛流激怒雷
구곡비류격노뢰
落紅無數逐波來
낙홍무수축파래
半生不識桃源路
반생불식도원로
今日應遭造物猜
금일응조조물시
아홉구비 폭포마다 성난 우뢰 부딪치고
낙화는 가이없이 물결 따라 쓸려가네
반생토록 몰랐어라 도원길이 어디멘지
오늘에야 만났거늘 조화옹이 시기하네.
김종직 (金宗直 1431∼1492(세종 13∼성종 23)
조선 전기 문신. 자는 효관·계온, 호는 점필재. 본관은 선산(善山). 고려말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의 학풍을
이은 아버지로부터 수학, 후일 사림의 조종(祖宗)으로 문장·사학(史學)에도 두루 능하였으며, 절의를 중요시하여
도학(道學)의 정맥을 이어가는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도학사상은 제자인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유호인(兪好仁) 등에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김굉필은 조광조(趙光祖)를 배출시켜 학통을 그대로 계승시켰다.
사림학자들이 훈척계열(勳戚系列)의 비리와 비도를 비판하고 나서자, 중국 고사를 인용하여 의제와 단종을
비유하면서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한 <조의제문(弔義帝文)>을 구실삼아 훈척계열인 유자광(柳子光)·
정문형(鄭文炯) 등이 1449년(연산군 4) 무오사화를 일으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귀양을 가게 되었고,
그도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다. 저서로는 《점필재집》 《청구풍아(靑丘風雅)》 《당후일기(堂後日記)》 등이
있으며, 편저로 《일선지(一善誌)》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
배내천과 배내골로 가는 도로
농암정 아래 농암대
이곳을 보려면 밀양댄을 가로질러 산길로 들어가야 되는데 현재는 출입 금지
바리케이트가 처있다 옛 사진으로 대신해본다
농암대(籠岩臺)는 조선 초기 점필재 김종직 선생이 제자들과 함께 이 곳을 자주 찾아 노닐었고
신선이 살았던 곳이라는 뜻에서 고사리(姑射里), 고사산(姑射山),
고사천(姑射川) 등의 이름도 생겨났다. 하지만 밀양댐의 건설로 사희동과 덕달 죽촌 등의 3개 마을과
김종직 선생이 주유했던 농암대를 비롯한 절경이 모두 수몰되는 아픔을 겪었다.
농암정에서는 건너편 농암대 바위벽만 보인다
저 건너에서 좌로가면 배내골 우로가면 에덴베리 양산 어곡으로 간다
우리는 배내골로 갈 것이다
1월에 향로산과 백마산에 오를때 물안대를 보았던 밀양호
금강력사
포대화상
여기는 아직 벚꽃이 건재하다
배내골은 곳곳에 많은 펜션들이 들어차 있어 여름에는 불야성에 어느 관광도시 같다
밀양 울산간 고속도로 교량공사장
배내골의 많은 펜션들 이제는 포화상태다
철구소와 주암골로가는 출렁다리
이 위가 철구소다
철구소
철구소는 밀양의 호박소, 파래소 등과 함께 영남알프스의 3대 소이다.
파래소와 철구소, 밀양의 호박소는 그 밑이 서로 연결되어 있어 선녀들이 목욕하러 내려올 때면,
이무기가 그 밑을 통해서 자리를 피해줬다는 전설이 있다.
나에게는 많은 추억이 있는 곳이다
깊은골 재약산에서 부터 주암골을 거쳐 흘러나오는 물줄기다
돌위에 카메라를 놓고 찍었더니 너무 멀게 나왔다
경남에서는 오지중에 오지였는데 이제 도로가 잘 닦여 있어서 쉽게 드나드는 시내 같은 곳이 돼버렸다
유스호스텔에서 신불산 자연휴양림으로 들어가 500m만 걸으면 이곳 파래소 폭포도 있는데
옆지기 다리아프다고 안간다해 포기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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