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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대전

적벽강과 청풍서원

 

 

 

  금산 추부 하늘물빛정원을 보고 적벽강을 거처 선샤인 랜드로 이동을 해야 하기에 시간이 촉박해 칠백의총도 패스하고

적벽강으로 직행을 한다

적벽강 위에는 무엇이 있나 하고 올라가 봤더니 주차장이 있는데 텐트가 몇 채 있고

 낚시를하는 사람들이 진을치고 있어 차를 돌려 적벽강으로 내려 왔다

 

금강은 전북 장수군 장수읍 수분리 뜬봉에서 발원하여 유유히 북쪽으로 흐르다가 창남에 들어서서 동남쪽에 물굽이를

 틀어 서쪽 금산군 부리면 방우리에 들어선다. 여기서부터 층암절벽으로 이루어진 산 사이를 뚫고 금강이 흘러 수통리에

이르면 그 앞의 넓은 시야로 좌측으로 기암을 이루는 절벽이 있으니 이 절벽으로 이루어진 산을 적벽이라 부르고

그 아래에 흐르는 금강을 "적벽강"이라 한다.


적벽은 바위산이 붉은 색이란 데서 유래된 것으로 30m가 넘는 장엄한 절벽에는 강물 아래로 굴이 뚫어져 있으며 이 산에는

 기화요처가 자리잡고 있어서 더욱 신기한 산으로 알려져 있다. 가을에는 불붙는 듯한 단풍이 강물에 투영되어 절경을

이루며 창파에 저녁노을 질 무렵 일엽편주에 몸을 싣고 적벽절경을 바라보며 명상에 잠겨보는 것도 일품이다.

 

적벽  이라는 지명은 후한 말의 건안13년(208년), 조조와 손권 · 유비의 연합군 사이에 ‘적벽의 싸움’이 벌어진 곳으로

중국 후베이성 가어현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곳이다. 우리나라에도 적벽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절경이 세 곳 있는데

전북 부안 바닷가의 적벽강과 전남 화순 동복호에 있는 적벽 그리고 충남 금산군 수통리의 적벽강이 그 곳이다.

  

적벽 아래 흐르는 금강은 마치 호수와 같이 잔잔히 흐르며 모래사장이 길게 깔려 있어 더욱 운치를 돋군다.

일설로는 중국 양자강 상류에 있는 천의절경 적벽강과 흡사하다하여 적벽, 적벽강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봄철에 해가 뜨면 춘화가, 여름에는 푸른 소나무 잎이 가을에는 단풍이 겨울에는 설화가 강물에 비쳐 비단에 수놓은

 푸른 물결과 함께 절정을 이루는 적벽강에 고기를 잡는 어부들이 배를 띄워 강물을 헤치는 것도 절경이라고

 

금산군 부리면 수통리에 가면 여울이 아름다운 적벽강을 만날수있다.

전북 장수에서 발원한 금강은 무주와 진안을 거쳐 충북과 충남을 거슬르고 끝으로 군산과 장항을 잇는 

금강하구언을 통해 서해로 흘러간다.

 금강은 100리길 골짜기를 흐르는 동안 이름이 세 번 바뀌어 금산 적벽을 흐르며 ‘적벽강’이라 불리고 

 부여의 부소산에 다달라서는  ‘백마강’으로 불린다고 전한다.

 

 적벽강 부근에는 강줄기가 넓어 물의 깊이가 낮고 잔잔하여 다슬기 잡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이날도 강변에 텐트를 치고 다슬기를 잡으며 가족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많이 보였다

 

 

 

수통리에 이런 야영장도 있는데 시설이 별로라고 함 다은에 가시는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들어가면서 보았던 청풍서원을 나오면서 옆지기가 들렸다가자해 잠시살펴보기로 한다

 

  금산에는 길씨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고장이다

청풍서원

이곳은 고려 말 충절공 야은 길재(忠節公 冶隱 吉再 1353~1419)의 청풍서원(淸風書院)과 불사이군(不事二君) 충절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길재의 영정과 위패가 봉안된 사당인 청풍사(淸風祠)가 있다.

 

청풍서원(淸風書院)은 1678년(숙종 4)에 창건하여 위패를 모시고 선현배향 및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금산군 지원으로 복원하였다.

청풍사(淸風祠)는 길재가 시묘살이를 했던 이곳에 1671년(현종 12)에 불이사(不二祠)를 지었으나 후에 훼철되었고,

  1761년(영조 37)에 백세청풍비(百世淸風碑)를 세웠다. 1928년에 청풍비각(淸風碑閣), 청풍사(淸風祠), 청풍서원

(淸風書院)을 중수하였으며, 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가 있고, 충남 지정 문화재 자료 제16호이다.

 

길재 선생의 자는 재보(再父), 호는 야은(冶隱) 혹은 금오산인(金烏山人)이며 이색, 정몽주, 권근 등에게 학문을

배웠고 이방원과 두터운 친분이 있었다. 이방원이 태종이 되어 태상박사(太常博士)로 불렀으나 길재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하며 거절하였다.

야은 길재(冶隱 吉再), 목은 이색(牧隱 李穡),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를 고려 삼은(高麗 3隱)이라 하였으며,

 이 동네 이름이 원래 부리(富利)였는데 불이(不二)라고 고쳐 불렀다.

백세청풍비는 청풍명월의 의미가 올곧은 선비정신을 뜻한다고 하는 사기열전 중 백이·숙제의 고사에서

발췌하여 고고한 선비들이 즐비하게 태어난 충청도를‘청풍명월의 고장’이라는 의미로 세운 비석이다.

 길재

경상도 선산에서 길원진의 아들로 1353년에 출생한 태어난 야은 길재선생은 1370년경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으로 상경하여

저명한 학자이던 이색 정몽주 권근 등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다. 1383년(우왕 9년) 문과에 합격하여 벼슬이 성균관학

정, 성균관박사에 이어 문하주서에 이르렀으나 조선개국이후 두문동에 들어가 은둔하였으나 학풍은 제자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 등에게 이어졌다.

지주중류는 중국 황하강에 있는 지주라고 불리는 바위는 거친 물살과 탁류에도 흔들리지 않고 의연모습에 빗대어 백이와

숙제의 무덤 앞에 세운 비문을 중국 명필인 양청천의 글씨를 한강 이정구가 탁본한 것을 1948년 청풍사 앞에 세웠다.

  청풍서원 외삼문 문이 잠겨있어 내부는 볼 수 없었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되 인걸은 간데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청풍사

 1678년 유림들과 후손들이 뜻을 모아 문절공 야은 길재 선생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서원람설금령가 서원철폐령등으로 네차례나 철폐되는 비운을 맞았다.

1928년 중수복원 되었고 많은 유림들이 선생의 높은 학행과 충효의 고절 청풍및 교화의 유덕을

추념하면서 매년 음력 9월15일 경모제를 봉행하고 있다.

청풍사에 모셔진 길재 상

청풍서원

 


본래의 예정은 논산의 선샤인랜드를 돌아보고 1박한 후 논산의 여러 곳을 구경하며 2일 12시에

공주로 가서 1박하고 세종시와 대전 몇 군데 구경하며 내려가려 했는데 산샤인랜드에 도착하니

코로나 19로 휴관 2일부터 개장한다 하여 이사진 한장 담고 3일 날 다시 오기로하고 바로 공주로 갔다

5월1일(음4.9일)밤 하늘의 달과 아래 서쪽하늘의 금성

 

아침에 일어나 집주위를 담아본다

주차장에서 바라본 별장의 모습

시설 2천평 산 5만평 넓은 임야를 가지고 있다

 

20년이상 단층으로 사용하다 작년에 2층을 올려 당구장과 드럼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풀장도 있고

 저앞에 건물은 음악방으로 사용중 나무위에는 가족의 쉼터 정자도 만들어 놨다

밖에는 냉동창고도 설치해 놓고

 족구와 베드민턴장까지

주인장은 신발 도소매상을 하다 은퇴한지 오래 돼 한달이면 일주일 이상을 여기에서 지내고 있다

이층에는 당구대도 있고 드럼실도 있어 심심찮게 혼자 지내기도 하고 부인과 가족들이 같이 보내기도 한다

 

 

 주말 토요일 점심식사 후 음악방 앞에서 노래 한곡씩 부르고 흥겨운 시간을 가졌다

 

 

 

1. Allegro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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