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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대전

논산 관촉사와 황산벌 전적지

 

 몇년 전에 다녀왔던 관촉사다 이번에는 옆지기가 동행을 하니 초등학교 때에 교과서에 나왔던

은진 미륵이라는 석조 미륵보살 입상을 보여주기 위함이다(5/3)

천왕문은 어느곳이나 비슷하여 4천왕은 생략하고

 

논산 관촉사

충남 논산시 은진면 관촉리 반야산에 있는 절. 968년 혜명이 창건하였으며, 창건 당시 조성한 은진미륵에

 얽힌 설화가 전한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관음전과 삼성각, 사명각, 해탈문, 현충각 등이 있으며,

중요문화재로는 석조미륵보살입상(은진미륵)과 석등, 배례석 등이 있다.

 

 65 년 8월에 반공포로 석방 공덕으로 반공청년단원들이 세운 비인데 이승만 박사는 7월14일에

세상을 뜨셨는데 바로 후에 추모비를 세웠나 보다 공도 많지만 과도 많다 특히나 독재는 두고두고

문제가 되고 있으니 ...

 관촉사 명곡루

아래에서 보면 2층이고 위에서 보면 단층으로 보인다

명곡루 아래는 1914년에 축조했다는 반야교를 지나 천왕문까지 계단으로 이어진다

 관촉사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968년(광종 19) 혜명(慧明)이 창건하였으며,

창건 당시 조성한 ‘은진미륵’에 얽힌 설화가 전한다.

한 여인이 반야산에서 고사리를 꺾다가 아이 우는 소리를 듣고 가보았더니 아이는 없고 큰 바위가

 땅속으로부터 솟아나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는 바위로 불상을 조성할 것을 결정하고

혜명에게 그 일을 맡겼다.

혜명은 100여 명의 공장과 함께 970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006년(목종 9) 불상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불상이

 너무 거대하여 세우지 못하고 걱정하던 어느날, 사제총에서 동자 두 명이 삼등분된 진흙 불상을 만들며 놀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먼저 땅을 평평하게 하여 그 아랫부분을 세운 뒤 모래를 경사지게 쌓아 그 중간과 윗부분을 세운 다음 모래를

 파내었다. 혜명은 돌아와서 그와 같은 방법으로 불상을 세웠다.

그런데 그 동자들은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화현하여 가르침을 준 것이라고 한다. 불상이 세워지자 하늘에서는

 비를 내려 불상의 몸을 씻어 주었고 서기(瑞氣)가 21일 동안 서렸으며, 미간의 옥호(玉毫)에서 발한 빛이

 사방을 비추었다.

중국의 승려 지안(智眼)이 그 빛을 좇아와 예배하였는데, 그 광명의 빛이 촛불의 빛과 같다고 하여 절이름을

관촉사라 하였다.

대광명전(大光明殿)은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을 봉안한 곳으로, 화엄종의 맥을 잇는 사찰에서는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시고 화엄전이란 명칭을 쓰며, 대적광전·대광명전·비로전 등의 이름도 많다고 합니다.

대개 대광명전이나 대적광전이란 이름이 붙으면 비로자나불.석가모니불, 노사나불을 함께 모셔 삼신불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관촉사 대광명전 역시 비로자나불과 석가모니불, 노사나불의 삼존불이 봉안돼 있다.

 

 

관촉사 미륵전(彌勒殿)

미륵전에는 왼쪽에 탱화만 모셔져 있고 불상이 모셔져 있지 않다.

 그 연유는 미륵전에 들어가 보면 알 수 있는데 미륵전의 뒤쪽은 여늬 벽이 아니고 유리창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예불을 드리기 위해 무릎을 구부리면 유리창을 통해 은진미륵보살의 얼굴이 보이는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륵불이나 부처님 진신사리를 본존으로 모시는 모든 사찰의 미륵전이나 대웅전의 형태가 이와 비슷하다.

 

 

 

 

 

 명부전과 산신각

 

배례석은 1976년 1월 8일 충남유형문화재 제53호로 지정되었다. 직사각형의 대석(臺石)으로 길이 204cm,

너비 103cm, 높이 40cm이다. 바닥에는 2단의 직각 괴임을 각출(刻出)하고 그 위의 면석에는 전면에 3개,

단면에 2개의 안상(眼像)을 새겼고, 안에는 고사리무늬 같은 버섯구름 모양을 양각했다.

1단의 면석 위에 2단의 괴 임이 있으나 서남향의 면석은 마멸되어 잘 보이지 않는다.

 

석탑은 화강석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높이는 3,43m이다. 사적비는 관촉사 경내 미륵보살입상의 좌측에

 관촉사 사적비가 서 있다. 대광명전은 2층 건물로 1층은 정면 5칸, 측면 4칸, 2층은 각각 3칸, 2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미륵전은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정면에 있다.

 

석등은 보물 제232호로 미륵보살과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형태가 완전하고 조성연대가 뚜렷한 귀중한 유물이다.

정사각형의 하대석(下臺石) 옆면에는 안상(眼像)을 3개씩 새겼다. 기둥 돌은 둥근 형태의 상·중·하 3개의 돌로 이루어져있다.

화사석(火舍石)은 상하 2층으로 되어 있는데, 네 기둥이 빈약한 반면 화창 느낌을 준다.

전체적으로 원과 4각·8각이 혼합되어 구성되었으며, 안정감이 약간 부족하나 전체적으로 크고 장중한 감을 주고 있다.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보물 제218호. 높이 18.2m. 거불로 예로부터 은진미륵(恩津彌勒)으로 널리 알려진 불상이다.

〈동국여지승람 東國輿地勝覽〉 권18 은진조와 1744년(영조 20)에 세워진 사적비(寺蹟碑)를 보아

광종연간(950~975)에 승려 혜명이 조성한 불상임을 알 수 있다. 이 상의 특징은 우선 크기에서

느껴지는 위압감으로 불상예배의 경외심을 돋우어주는 신앙적인 효과가 크다. 이러한 위압감은 얼굴과

손이 신체의 다른 부분에 비해 크게 표현되어 그 효과가 더욱 강조되었다. 상의 크기에 비해 불신의

표현은 소홀하여 어깨가 좁고 가슴이나 허리의 구분이 별로 없는 원통형이다.

천의(天衣)의 표현이나 옷주름도 매우 단순하다. 이마 위에 늘어진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이나 두 귀의

 가운데로 걸쳐 있는 보발(寶髮)의 표현, 허리 밑으로 늘어진 앞치마처럼 생긴 둥근 옷자락의 표현 등은

 고려초 보살상들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징들이다. 이러한 특징은 강릉 신복사지석조비로자나불상

(神福寺址石造毘盧遮那佛像)이나 연산의 개태사석조삼존불(開泰寺石造三尊佛)의 협시보살상과 같은

 고려 초기의 불상들에서도 볼 수 있는데, 관촉사 불상은 보다 도식화된 면을 보여준다.

높은 원통형의 관(아마도 금속관이었을 것이나 지금은 없어짐) 위에 다시 사각형의 이중 보개를 얹고

있는 것이라든지 연화가지를 들고 있는 수인(手印) 등은 도상면에서도 매우 특이한 요소이다. 보개는

중국의 상에서는 보이지 않는 요소로, 아마도 상을 보호한다는 의미 또는 상의 위용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로 제작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독특한 모습의 보살상은 이후 고려에서 유행하여 비슷한 상이

 여럿 조성되었는데, 그중에 부여 대조사(大鳥寺)의 석조보살입상이 대표적이다. 백호를 수리할 때

 발견된 묵기(墨記)에 "正德十六年辛巳四月十五日"이라고 적혀 있어 조성시기의 파악에 참고가 된다.

백과사전에서

 

해탈문인 석문은 양쪽에 돌기둥을 세우고 널찍한 판석을 올려놓은 것으로, 창건 때 쇄도하는 참배객을 막기

 위하여 성을 쌓고 사방에 문을 내었던 것 중 동문에 해당하는 것이다.

'해탈문'이라는 이름의 석문은 '모든 욕심을 버리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며 통과한다. 이렇게 해서 속세의 욕심을

버리고 해탈하게 된다면, 그것도 얼마나 좋을까

 

 

 범종각

 

 

 왕벚꽃을 뒤로하고 탐정호와 계백장군 유작지로 이동을 한다

 

 

역사적 배경

의자왕 초, 왕권 중심의 지배 체제를 확립한 백제는 중국과 신라에 대해 강경 노선을 취하고 있던 고구려와 연결해 신라에 압박을 가하였다.

특히 642년(의자왕 2)에 대야성(大耶城 :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을 비롯한 신라 남부의 40여 성을 함락한 사건은 신라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이에 신라는 김춘추(金春秋)를 당나라에 파견해 적극적인 외교 교섭을 벌인 결과, 당나라와 군사 동맹을 맺는 데 성공하였다.

660년에 이 나당연합군이 드디어 백제 공격을 단행하였다.

소정방(蘇定方)이 이끄는 13만 명의 당군은 산둥반도(山東半島)의 내주(萊州)를 출발해 서해를 건너 백제로 진군했고, 김유신(金庾信)과

 흠춘(欽春)·품일(品日) 등이 거느린 5만 명의 신라군은 육로로 백제를 공격하였다. 급보를 접한 의자왕은 군신을 모아 대책을 강구하였다.

이 때 좌평 의직(義直)은 당군과 먼저 결전할 것을 주장했고, 달솔(達率) 상영(常永)은 신라군을 먼저 쳐서 예봉을 꺾은 뒤에 당군을

막자고 해 의견이 갈렸다.

 

그리고 귀양 중이던 흥수(興首)가 왕의 요청에 응해, 평야에서 접전하면 불리하므로 백강(白江 : 지금의 금강 하구)을 지켜 당군이 상륙하지

 못하게 하고 탄현(炭峴)을 막아 신라군이 넘지 못하게 해 양 군이 피곤해지기를 기다렸다가 공격하자고 건의하였다.

반면에 대신들은 당군이 백강에 들어오고 신라군이 탄현을 오른 뒤에 공격하는 것이 이롭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백제 조정이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을 때 신라군은 그 해 5월 26일 왕경을 출발해 6월 18일 남천정(南川停 : 지금의

 경기도 이천)에 이른 뒤, 7월 10일 백제의 도성인 사비에서 당군과 합세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김유신이 이끄는 5만 명의 신라군은 7월 9일 이미 탄현을 넘어 황산벌로 진군해 오고 있었다.

탄현을 진수하지 못한 의자왕은 장군 계백(階伯)에게 5,000명의 결사대를 조직하게 해 신라군을 저지하도록 하였다

출병에 즈음해 계백은 “처자가 적국의 노비가 되어 살아서 욕보기보다는 죽는 것이 낫다.”라고 하며 처자를 죽이고 비장한 각오로 출병하였다.

황산벌에 먼저 이른 계백은 험준한 곳을 가려 3개의 영채를 세우고 신라군을 기다렸다. 김유신도 신라군을 3도(道)로 나누어 이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죽기로 싸우는 백제의 5,000결사대는 신라군과 네 번 싸워 네 번 모두 승리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군은 기력이 다하고 사기가 떨어졌다.

 

이 때 신라의 장군 흠춘이 군사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해 아들 반굴(盤屈)로 하여금 적진에 뛰어들어 전사하게 하고, 장군 품일도 16세의

어린 아들 관창(官昌)을 백제군 속에 뛰어들어가 싸워 죽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청년 화랑들의 목숨을 아끼지 않는 용감한 행동에 감격한 신라군은 사기가 크게 올라 총공격을 가하였다.

백제의 결사대는 여기에 맞서 용감히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대패하고 말았다.

 

 이 싸움에서 계백은 전사하고, 좌평 충상(忠常)·상영 등 20여 명은 신라의 포로가 되었다.

황산벌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는, 소정방이 당군과 합세하기로 한 신라군이 기일을 어겨 도착했다고 해 신라독군(新羅督軍)인

김문영(金文穎)을 참하려 했을 때, 김유신이 “대장군이 황산벌의 싸움을 보지 못하고 다만 기일을 어긴 것으로 죄를 주려 하니,

기필코 먼저 당군과 결전한 뒤에 백제를 격파하겠다.”라고 한 말에서도 알 수 있다.

 

 

 박물관은 휴관으로 외부에서만....

 저건물은 충장사 오른쪽으로 오르면 계백장군의 묘가 있다

 

 저기 돌길을 따라 오르면 계백장군 묘지다

 묘지 주변은 소나무 숲이 빽빽히 들어차 있어 운치를 더해준다

 

 

 

 

 

 

 

 

 계백장군 동상

 멀리서 담은 황산루

예전에 찍었든 사진

씀바귀

 

 

 탑정호

논산시 부적면 충곡리 287-8

탑정저수지라고도 한다. 1941년 착공하여 1944년에 준공했다. 면적 6.36㎢, 제방길이 573m, 높이 17m,

최심 12m이며, 저수량은 3,161만t 정도이다. 논산평야의 젖줄로서 논산 농지개량조합 저수지와 인천천의

 물이 이곳으로 흘러들어 수원이 매우 풍부하며 51.97㎢의 논에 관개용수를 공급하는데 물은 2개의 수문을

 통해 논산천 양안에 놓인 저수지의 수로를 따라 성평리와 성덕리 쪽으로 흐른다. 남쪽으로 호남고속도로가

 지나고 있어 교통이 편리하며, 붕어·잉어가 많아 낚시터로도 인기가 있다. 주위에 계룡산국립공원과

대둔산도립공원이 있으며, 관촉사전망대·은진미륵불이 있어 관광·휴양객이 많이 찾아온다.

들이 넓어 편안하고 여유로움이 가득한 탑정호수변생태공원은 수생식물원, 자연학습원, 분수, 팔각정 등

 다양한 편의시설이 마련되어 있어 어린이들에게는 자연학습장으로 연인들에게는 데이트 코스,

 

가족들과는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일년내내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다고 한다.

 

 지금 탑정호에도 출렁다리를 설치하려고 준비중인 것 같다 주탑이 건설되어 있는 모습

 

 

 

탑정호 수변길을 잘 조성해 놔서 수변을 산책하면 더욱 좋은 탐방이 되겠다

충청남도에서 두 번째로 큰 저수지로서 어족자원이 풍부하다.

깨끗한 수질과 겨울철에도 잘 얼지 않고, 주변의 논산평야 등 대규모 농경지가 위치해 풍부한 먹이로 철새들의

 서식에 적당하여 겨울철새들의 월동지로 이용되고 있다.

 탑정댐 뚝길에서 바라본 탐정호

 

  탑정호 출렁다리 주탑

탑정호 출렁다리 조감도

이렇게 완공이 되면 국내 최 장 600m 출렁다리가 된다고 함 총공사비 99억원

 

  

 Ne Me Quitte Pas(If you go away) / Nana Mouskou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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