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충청.대전

명재고택

 

5/3일 아침을 해결하고 공주에서 출발 명재고택으로 왔다

노성향교와 명재고택 사이에는 전형정인 한국정원의 연못이 자리하고 있다

 

 

 안채와 곳간채, 사랑채에서 찾은 선조들의 지혜
전면이 개방된 사랑채의 왼쪽으로 난 중문으로 들어서면, 안채가 나온다.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좌우가 대칭을 이루는 ‘ㄷ’자형 구조인데, 안채 앞에 사랑채가 있어 전체적으로는 ‘ㅁ’자형을 이룬다.

 사랑채에서 안채로 넘어오는 길에는 벽이 있는데, 이곳에 과학적인 원리가 숨어 있다. 문간에 벽을

 설치하여 방문객이 안채의 내부를 볼 수 없도록 차단한 것이다. 단 벽 아래에는 공간이 나 있어,

안채의 마루에서는 그 공간으로 신발을 보고 방문객을 미리 짐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여자들의

 공간인 안채를 남자들이 함부로 들여다볼 수 없게 한 지혜인 것이다

우물과 향나무.
초창기 고택의 경계는 초입의 연못 옆에 솟을대문과 행랑채가 있었고 담장도 그곳에서부터 있었다고 한다.

솟을대문은 1850년경에, 사랑채 앞 현재 공터인 곳에 있었던 행랑채와 부속채는 1900대 초반에 헐렸다고 한다.
현재의 우물 위치가 집안인 셈이다.
지금도 이집에서는 장을 담을 때 이 우물물을 이용한다고 한다.
예부터 향나무는 청정(淸淨)을 뜻한다.
향나무의 뿌리가 물을 정화한다고 믿었기에 우물이나 샘 가에 많이 심었다.

 

 사랑채

지금 사랑채에는 작은 세미나가 열리고 있는중이다

 

명재 윤증

1642년(인조 20) 아버지 선거와 유계(兪棨)가 금산(錦山)에 우거하면서 도의(道義)를 강론할 때

 함께 공부하며 성리학에 전심하기로 마음먹었다. 1647년 권시(權諰)의 딸과 혼인하고,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후 김집(金集)의 문하에서 주자(朱子)에 관해 배웠고, 1657년(효종 8)

 김집의 권유로 당시 회천(懷川)에 살고 있던 송시열(宋時烈)에게서 『주자대전』을 배웠다.

효종 말년 학업과 행실이 뛰어난 것으로 조정에 천거되었고, 1663년(현종 4) 공경(公卿)과

 삼사(三司)가 함께 그를 천거하여 이듬해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제수되고 이어서 공조랑·

사헌부지평에 계속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682년(숙종 8) 호조참의, 1684년 대사헌, 1695년 우참찬, 1701년 좌찬성, 1709년 우의정,

 1711년 판돈녕부사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나가지 않았다. 1699년 아버지가 죽자

 거상(居喪)을 주자의 『가례』에 의거하여 극진히 하였다. 학질을 앓다가 1714년 정월

세상을 떠났다

 

 

 명재고택 사랑채에 걸린글귀들.

맨 왼쪽 당호는 이은시사(離隱時舍). "세속을 떠나 은거하는집"
왼쪽 누마루 출입문위엔 도원인가(桃源人家).  "무릉도원"
우측 마루위엔 허한고와(虛閑高臥) .하늘을 가리고 한가히 눞다.


尹拯(1629년 ~ 1714년)은 조선의 학자. 서인 소론의 영수다. 자(字)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유봉(酉峰),시호는 문성(文成)이며, 윤선거의 아들이자 성혼의

외증손이 된다.

안채로 향하는 대문 윗부분을 보면 검게  불에 탄 흔적이 있는데.. 이는 동학군이 쳐들어와  지주들의 집을 불을

지르는 과정에서 마을 주민들의 간곡한 부탁을 들어 명재 고택은 화재를 면했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또한 6.25 동란때는 고택이 북한군의 아지트로 사용되었는데  미군이 이를 알고  비행 폭격을 하려 했지만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몸소 행하던 후손들의 나눔을 받은 주민들의 만류로 자칫 없어질 운명을 넘겼다고 함.

 

 

안채마당.
지금도 종손이 살고 있기에 출입을 삼가해달는 안내문이 있어 안채에는 들어가보지 못했다.

충청지방의 특색적인 평면을 따르면서도 독창성을 가지고 있는데 'ㅡ'자형의 대문에서

 안채가 쉽게 보이지 않도록 두 번째 칸에 내외벽을 배치하여 외부사람이 내부사람의 독립성을 고려한 것과

안채 마당으로 들어서면 'Π' 자의 공간이 되고, 여섯 칸의 대청과 퇴가 마루로 연결되어 좌우 공간 또한

 독립성을 갖추었다. 안채의 넓은 대청은 제사를 위한 제청 및 초례청과 가족모임의 장소가 되기도 한다.

 

 

 

조선 숙종 때의 학자인 윤증(1629∼1714)이 지었다고 전하는 집이다. 후대에 수리가 있었던 듯 하며

그 세부기법은 19세기 중엽의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다. 노성산성이 있는 이 산의 산자락에 노성향교와

 나란히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높은 기단 위에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의 사랑채가 있고, 왼쪽 1칸 뒤로 '一' 자형의 중문간채가

 자리잡고 있다. 중문간채는 안채가 바로 보이지 않도록 1칸 돌아 들어가게 중문을 내었다. 중문을

들어서면 'ㄷ'자 모양의 안채가 있어서, 중문간채와 함께 튼 'ㅁ'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집 앞에는 넓은 바깥마당이 있고 그 앞에 인공연못을 파고 가운데에 원형의 섬을 만들어 정원을 꾸몄다.

 또한 안채 뒷쪽에는 완만한 경사지를 이용하여 독특한 뒤뜰을 가꾸어, 우리나라 살림집의 아름다운

공간구조를 보이고 있다.

모든 건축부재의 마감이 치밀하면서 구조가 간결하고 보존상태도 양호한 조선의 양반주택으로 중요하다.

지정 당시 명칭은 '윤증선생고택(尹拯先生故宅)'이었으나, 조선 숙종 때의 이름난 유학자 명재 윤증

(1629-1711)이 지었다고 전하는 가옥인 점을 반영하여 그의 호를 따라 ‘논산 명재 고택’으로 지정명칭을

 변경(2007.1.29)하였다.백과사전에서

 

 

안채의 뒷뜰.뒷쪽에 사당이 보인다.우측은 안채 대청 뒷부분이다.

가지런히 놓여있는 항아리의 모습에 정겹고 반가운 마음이다.

안채도 들어갈 수 없을 뿐더러 뒷뜰에도 들어갈 수 없게 막아놔서 예전에 사진으로 대신한다

또한, 안채 옆으로 곳간채가 있는데, 두 건물을 나란히 두지 않고, 북쪽으로 갈수록 좁아지도록 두었다.

 여름에는 남쪽에서 불어온 바람이 북쪽의 좁은 통로를 빠져나가기 때문에 그 속도가 빨라져 주변이

 서늘해지고, 겨울에는 반대로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남쪽의 넓은 통로를 빠져나가 매서운 북풍을

피할 수 있도록 했다. 덕분에 곳간채의 북쪽 끝 창고는 여름철에도 서늘해서, 이곳에 차갑게 보관해야

할 것을 둘 수 있었다. 사랑채는 큰사랑방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대청이 있고, 좌측에는 누마루가 있다.

 

 또 그 뒤로 작은사랑방과 안사랑방, 대문간이 이어진다. 명재고택의 객실은 안채의 건넌방을 비롯한

사랑채의 사랑방 3곳이다. 누마루를 포함한 사랑채를 통째로 예약해 독채로 사용할 수도 있다. 더불어

마당 한쪽에는 초가 별채가 있고, 음향장비와 빔프로젝터가 설치된 초연당(超然堂)도 있어 단체 모임이나

 공연을 할 수 있다. 현대식으로 개조한 욕실 겸 화장실도 깨끗하다.

 

사랑채에는 미닫이와 여닫이를 접목한문이 있는데, 4쪽 미닫이문을 열고 다시 열면

 여닫이문처럼 열리는 독특하고 과학적인 양식이다. 또한,

 사랑채 누마루에 앉아 연못과 그 너머의 마을과 앞산을 내다볼 수 있다.

대한민국구석구석에서

 

 안쪽에 작은사랑방의 띠살문이 보인다.
사랑채 뒷부분은 쪽마루를 설치해 작은사랑방을 통하거나 우측의 협문을 통해 안채와 연결되도록 했다.
담 아래 굴뚝은 누마루방 아래에 있는 아궁이와 연결된 것이다.

 

 


종손은 11대 종부인 어머니, 양창호(92)선생에게서 장 만드는 법을 모두 익혔다.

하지만 딱 한 가지 어머니의 ‘감’을 못 따라가는 것이 있다.

소금 고르는 법이다.

양씨는 가장 맛난 상태의 소금을 골라내는 기술은 최고봉이다.

 19살에 시집와서 70년 넘게 한 가문의 종부의 역할을 한 어머니의 맛에 대한 감각을 따라갈 수가 없다.

소금은 한 움큼 쥐었을 때 손에 붙지 않고 바삭바삭한 것이 좋다.

 잘 붙는 것은 쓴맛이 있고 그것으로 장을 담그면 장도 쓰다.

좋은 소금으로 절인 배추는 그것만 먹어도 맛난 법이다.

 

 

이 댁의 장은 다른 집과 다른 점이 있다. ‘씨간장’, ‘씨된장’이다.

이집 간장과 된장은 ‘전독간장’, ‘전독된장’이라고 부른다.

‘전’은 ‘前’나 ‘傳’을 쓴다.

 조상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다는 뜻이다.

 

메주와 간장을 분리하는 기간도 다른 집과 다르다.

보통 장을 담그면 30~40일 지나 메주와 간장을 분리하는데 이 댁은 약 4개월 넘어 분리한다.

윤씨는 “메주 속에 있는 좋은 것들과 맛이 충분히 우러나게 되요”라고 말한다.

장을 담그는 때도 그해 기후와 온도 등을 판단해서 황균국(메주의 발효를 돕는 균)이 가장 활발한 때를 잡는다.

이 댁에서는 보통 정월 말일에 담근다.

예부터 그날이 되면 향긋하고 구수한 메주냄새가 온 마을을 진동해서 마을 사람들이 모이곤 했다.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사당이다

  집 뒤에 있는 소나무 숲

마가목도 꽃을 피웠다

 

독도 중요하다. 북쪽으로 갈수록 그 항아리 모양은 위와 아래가 같은 원통이다.

빛을 더 많이 받기 위해서다.

아래쪽 지방일수록 가운데가 넓고 주둥이가 좁다.

윤씨는 온도가 점점 올라가서 전라도에서 많이 사용했던 독을 사용한다고 말한다.

독의 겉에는 한지를 버선모양으로 잘라 거꾸로 붙였다.

조상들의 지혜가 숨어있다.


명재 고택 사람들은 한국전쟁 때 딱 하루 집을 비운 것 빼고는 늘 이 장을 지켜왔다.

나들이 다녀오면 깨끗하게 몸을 씻지 않고는 장독대 안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윤씨는 “그때는 미신인가 했는데 잡균이 들어가는 것을 막는 선조들의 지혜였죠”라고 말한다.

장맛은 그렇게 집안사람들의 노력과 정성으로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옛날에는 시집갈 때 사위집에서 장독대를 시찰하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집의 장독대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으면 가정교육이 잘 된 집의 규수라고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장독대는 여인들의 삶과 애환을 담은 장소이기도 하다.

남편이나 자식이 무슨 일이든 시작하거나 멀리 출타 중일 경우, 어머니나 부인은 방금 지하에서 퍼 올린

맑은 정안수를 장독 위에 올려놓고 무사안녕과 소원성취를 빌곤 했다.

또한, 시집살이가 고된 며느리들은 장독대에 가서 장독을 닦으면서 땀이 눈물처럼 흐르는 모습으로 마음을 달랬다.

이처럼 장독대는 여인들에게 항상 애환을 같이하는 마음의 안식처로 자리하고 있었다.

 

나눔의 미덕이 지켜온 윤증 선생의 고택
명재고택은 조선 숙종(재위 1674∼1720) 때의 학자인 윤증(尹拯) 선생의 가옥으로, 그의 호를 따서

 명재고택이라 불린다. 그는 임금이 무려 18번이나 벼슬을 내렸으나 일체 사양했을 만큼, 성품이

 대쪽 같았다고 한다. 게다가 검소와 나눔의 미덕을 몸소 실천하고 후대에 가르쳤는데, 덕분에

은혜를 입은 사람들에 의해 동학혁명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고택이 소실될 뻔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윤증 선생의 성품을 반영하듯 고택은 다른 사대부 집안의 가옥에 비해

 겉모습이 소박한 편이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기품이 느껴질 뿐 아니라, 곳곳에 숨겨진

과학적 설계에 감탄하게 된다

명재고택의 장독대는 400 년 묵은 느티나무와 함께 장관을 이루어 사진찍기 좋은 이름난

출사지의 한 곳이 되었다.이날도 한분이 사진을 담으며 석양을 기두리고 있었다

 

 

하얀 수수꽃다리 (라일락)

 

다시한번 고택을 사진으로 담고 돈암서원으로 이동을 한다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임리에 있는 서원. 1634년 김장생을 배향하여 건립했으며, 김집, 송준길, 송시열의 위패를

 함께 모시고 있다. 1660년 사액선원이 되었다. 2019년 7월 6일, 오늘날까지 한국에서 교육과 사회적 관습 형태로

지속되어온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이며 성리학 개념이 여건에 맞게 바뀌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인정되어 다른 서원 8곳과 함께 한국의 14번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사적 383호.

 

1634년에 창건되었으며 기호학파의 거두인 김장생의 위패를 모셨다.

1660년(헌종 1년)에 사액을 받았으며, 충청지역을 대표하는 서원이다.

김장생의 아들인 김집을 비롯하여, 송시열과 송준길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가당인 응도당, 양성당,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있으며 이밖에 장판각, 정의당, 고직사,

사당인 유경사를 두고 있다. 1881년(고종 18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훼철되지 않고 남았던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돈암서원은 2019년 7월 6일,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16~17세기에 건립된 다른 8개 서원과 함께

오늘날까지 한국에서 교육과 사회적 관습 형태로 지속되어온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이며 성리학

 개념이 여건에 맞게 바뀌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한국의 서원

(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의 14번째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날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9개 서원은 소수서원(1543년 건립), 남계서원(1552년 건립), 옥산서원(1573년 건립),

도산서원(1574년 건립), 필암서원(1590년 건립), 도동서원(1605년 건립), 병산서원(1613년 건립),

무성서원(1615년 건립), 돈암서원(1634년 건립)이다.

논산 돈암서원은 배산임수 형국으로, 평지에 전학후묘식으로 배치하였으나 앞면에 위치한 강당이 중심축에

놓이지 않고 약간 서쪽으로 비켜 직각 배치되어 있다.

돈암서원의 구조는 크게 네 개의 공간으로 구분되어 있다.

외삼문인 입덕문을 들어서면 강학 공간의 넓은 마당을 두고 강당인 양성당이 배치되어 있고, 양성재 서쪽에

 장판각과 정의당이 배치되어 있다. 강당인 돈암 서원 응도당은 입덕문을 들어서서 직각으로 동향하여 배치되어 있다.

"보통 서원 앞에 자리하고 있으며,

 유생(儒生)들의 휴식처나 강독 공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광산 김씨는 연산 지역에서 세거하면서 많은 인재를 배출한 호서 명문 사족가문이다.

이런 이유로 논산 돈암서원은 서인-노론계를 대표하는 서원으로 1871년 서원 훼철령 때에도 훼철되지 않고

 보존되어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으며, 특히 김장생이 타계한 후 제자와 문인들이 만든 돈암서원 책판

(遯巖書院冊版)이 등 여러 자료가 남아 있다.

 

이렇듯 논산 돈암서원은 호서 지역은 물론 기호 지역 전체에서 존숭받는 서원으로, 김장생을 제향한 서원 중에서

 가장 비중 있고 영향력 있는 서원으로 인정받고 있다. 현재까지 잘 보호, 관리되고 있으며 지역사를 연구하는

 향토 자료로서도 보존적 가치가 높다. 나아가 호서 지역 사림의 동향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며,

당시 실질적인 세력권자인 김장생의 영향력을 알 수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응도당

응도당(凝道堂)은 유생들이 장수강학 하던 강당 건물이다. 1880년(고종17)에 돈암서원을 숲말에서 이곳으로 옮길 때

옛터에 그대로 둔 응도당을 1971년에 옮겨왔다. 그런데 양성당이 강학의 기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본래 위치와 다르게

사당과 직각으로 건물을 배치하였다. 응도당은 예를 실천하는 건축제도의 모델로 제시된 건축 양식에 따라 지어졌으며

 돈암서원의 건물 배치와 규모는 사계 김장생이 "의례"와 "주자대전"을 고증하여 강경 죽림서원의 법도를 따라 지었다고 한다.

앞면 5칸, 옆면 3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ㅅ자 모양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처마의 암막새 기와에 "숭정육년계유이월일서원"

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1633년(인조11)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서원의규모나 구조적 측면으로 보아

한국 서원을 대표하는 면모라고 할 수 있다.

장수강학 : 유생들이 몸과 마음을 수양하는 것을 장수라 하고 스승과 문답을 주고받으며 공부하는 것을 강학이라 한다.

옆면에는 비바람을 막아주는 풍판을 달았으며, 풍판 아래에는 눈썹지붕을 두었다.

 

예학 정신이 깃든 돈암서원 전경

사계 김장생은 율곡 이이의 학풍을 이어받은 기호학파(당시 경기도와 충청도 지역을 중심으로 한 성리학 학파)로,
무엇보다 예를 중시했다. 여러 문헌에서 의식 예절을 정리하고 후학을 양성했다.
그중 《의례문해》는 의식 예절에 대한 궁금증을 해석하고, 《가례집람》은 가정 의식 예절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책이다. 돈암서원이 이전하면서 여느 서원과 조금 다른 건축 배치를 보이지만, 예를 중시한 전통 교육은
지금까지 이어진다. 돈암서원은 현대와 조화롭게 예를 가르치는 참 교육의 산실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거경(居敬)재

 성리학의 수양 방법 중 하나로 우러르고 받드는 마음으로 삼가고 조심하는 태도를 가짐을 말하며, 유생들이

학습하던 공간이다. 거경재는 장대석 기단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정의(精義)재

정의는자세한 의의라는 뜻이다. 정의재는 학문을 하는 유생들이 모여 경전의 의의를

자세히 강론하던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장대석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돈암서원의 강당인 응도당 대신 설치한 양성당

보통 서원은 외삼문에서 강당, 사당까지 직선으로 이어지는데, 돈암서원의
강당인 양성당은중앙에서 왼쪽으로조금 치우친 곳에 있다. 이전 당시
기술로는본래 강당인 응도당(보물 1569호)을 옮길 수 없어,
 김장생이 생전에 강학하던 양성당을 강당으로 배치했다.

돈암서원의 역사를 기록한 비석으로 양성당 앞에 위치해 있다. 원정비는 1669년(현종10)에 세워졌으며

"연산돈암서원지비"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비석의 내용은 돈암서원을 세운 배경과 구조, 사계 김장생 부자의 성품과 학문적 업적에 대한 칭송으로 이루어져 있다. 

 김장생 부자는 주자학과 예학의 대가로서 벼슬을 멀리 하고 고향에 내려와 학문 연구에 매진하였다.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썼으며, 앞면에 전서체로 된 제목은 김장생의 증손인 김만기가 썼다. 

 비석은 연꽃무늬가 새겨진 네모난 받침대 위에 대리석으로 비의 몸을 세우고 지붕 모양의 가첨석을 머릿돌로 올린 형태이다.

본래 돈암서원은 숲말(현재 서원의 자리에서 서북쪽으로 약 1.5km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1880년(고종17)에

홍수로 물이 차서 이곳으로 옮겨왔기 때문에 비문의 내용과 현재의 건물 배치는 일치하지 않는다.

돈암서원의 양성당(養性堂)은 김장생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후진 양성에 힘쓰던 곳으로 유생을 가르치는 강당이다."

장판각과 정회당 사이에는 오래된 향나무가 한그루 있는데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수령은 약 300년쯤 되었고 수고 8.5m, 가슴높이지름 0.52m이다.

장판(藏板)이란

판을 간직하여 보관한다는 뜻으로 김장생의 문집인 "사계전서", 김장생의 부친 김계휘 당시의 사실을 기록한 "황강실기"

, 김집의 문집인 "신독재전서" 등과 "경서변의", "가례집람", "상례비요" 등이 보관되어 오고 있다. 

 장판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우물마루를 깔았다. 양성당의 오른쪽 뒤에 위치하고 있다.

정회당

정회(靜會)는 유생들이 수행하는 방법 중 하나로 고요하게 몸소 실천하며 수행한다는 뜻으로 사계선생의 부친인

황강공께서 강학하던 건물이며, 대둔산 자락의 고운사터에서 1954년에 옮겨 왔다. 정회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후면열 가운데 2칸은 마루방을 두었다. 우물마루를 깔았다.

          숭례사

예를 숭상하다"는 의미의 숭례사는 군자가 덕을 닦고 학문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사당 내부에는 주향인 사계 김장생, 신독재 김집, 동춘당 송준길, 우암 송시열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이들 네분은 모두 문묘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돈암서원은 선정서원이기도 하다. 

 매년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처마의 기와 명문에 쓰인 "숭정육년계유이월일서원"

내용으로 보아 응도당과 같은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은 1548년 7월 8일 한성에서 태어난

 조선의 유학자, 정치인, 문신이며 서인(西人)의 영수격으로 조선 오현 중의 한 사람이며,

 광산 김씨로서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 시호는 문원(文元)입니다."

"김장생은 조선시대 예학(禮學)의 선구자로 율곡 이이 에게서 성리학을배웠으며,

 그후 기호학파를 형성하는데 기여했으며 김집, 송시열 등을 길러 내었으며

 1961년 충남 논산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조선오현 : 朝鮮五賢

 

"조광조의 치(治)~정치(政治),

 이   황의 도(道)~도학(道學),

 이   이의 학(學)~학문(學文),

 

 

김장생의 예(禮)~예학(禮學),

 송시열의 의(義)~의리(義理)"

 

 

 

꽃담장은 본래 궁궐같은 공간에 연출된 독특한 전통담장이다. 숭례사를 둘러싼 꽃담장은

 이곳이 특별한 공간임을 알려준다. 

 "지부해함", "박문약례", "서일화풍" 12개 글자를 새겨놓았다.

서일화풍(瑞日和風)

좋은 날씨, 상서로운 구름, 부드러운 바람과 단비 즉,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고 웃는 얼굴로 대하라

지부해함(地負海涵)

땅이 온갖 것을 등에 지고 바다가 모든 물을 받아주듯 포용하라

박문약례(博文約禮)

지식은 넓히고, 행동은 예의에 맞게 하라.

 

 

 

 

 

 

전사청과 관리동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김장생 일가의 묘

돈암서원 한옥마을

 

 


 

'충청.대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논산 선샤인랜드  (0) 2020.06.03
논산 관촉사와 황산벌 전적지  (0) 2020.06.01
적벽강과 청풍서원  (0) 2020.05.26
금산 하늘정원  (0) 2020.05.25
대전 동춘당 역사공원  (0) 2019.0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