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촌동생의 제의로 밀양 삼랑진 민물게 매운탕 먹으러 네비양 안내대로 갔는데 영업을 하지 않는다
할 수 없이 밀양 할매 메기매운탄 집을 찾아 간다
생각보다 맛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평점은 줄만하다(5/17)
어딘가 했는데 밀양시내와 청도 언양으로 갈라지는 삼거리 기회 송림공원 반대쪽이다
여름이면 많은 피서객이 물려드는 기회송림공원 야영장도 있고 영화 밀양의 촬영장소 이기도 하다
섬초롱
식사후 여기 위양못으로 왔는데 이팝나무 꽃도 지고 없는데 이렇게 많은 차량들이 줄지어 서있다
코로나 19로 인해서 갈 곳이 별로 없다지만 정말 대단한 인파가 몰려들었다
역시 주말은 괴로워
위양못의 오래된 왕버들나무
아래에 작년에 이팝나무가 만개 했을 때 찍은 사진을 올려 놨지만 저 완재정 주위의 이팝나무가
피었을 때는 정말 장관이었는데 조금 늦게 왔더니 벌써 지고 없다
위양지
양양지는 '위양지(位良地)'란 이름으로 더 알려져 있다.
위양지는 '선량한 백성들을 위해 축조했다고 붙여진 이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이 이름은 근래에 바뀐 이름으로
본래 이름은 양양지다. 신라 때 축조됐다는 양양지는 논에 물을 대던 수리 저수지였지만 인근에 거대한 가산저수지가
들어서 본래의 기능을 잃었다. 그러나 논에 물을 대는 대신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으로 많은 관광객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밀양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팝나무가 피고 있고 아름드리 왕버드나무와 소나무들로 울창한 숲을 두르고 있어 사시사철
아름다운 운치를 즐길 수 있다. 양양지의 풍경을 완성하는 건 정자인데, 연못에 떠 있는 섬 하나에 1900년에 지어진
안동 권씨 문중 소유의 정자 '완재정'이 있다.
이 정자 주변으로 핀 이팝나무와 찔레꽃 등이 양양지를 더 아름답게 만들고 있다.
5개의 섬을 품고 있는 '천년연못' 위양못은 밀양8경에 속해 있으며,
봄날 이팝나무에 쌀밥같은 꽃이 허드러지게 필 무렵에는 그 아름다움이 극에 달해 매우 환상적이다
'백성을 위한다'는 축조 정신이 깃든 이 연못은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는 생명수와 같은 저수지였다
지금은 축조 당시인 신라시대보다 규모가 작아 졌다고 하지만
농업적 역할뿐 아니라 일상에 지친 사람들의 휴식처 겸 경승지로도 훌륭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특히 5개 섬 가운데 중앙섬에 서 있는 완재정과 어우러진 주변의 봄날 풍광은 가히 환상적이다
이 정자는 임진왜란 당시 경남 산청 전투 중 포로로 잡혀 일본으로 끌려갔던 안동 권씨 가문의 권삼변(1577-1645)공이
1604년 조국의 사신을 따라 환국한 후 인근 마을에 정착, 이 못의 풍광에 매료돼 처음 건립했다고 한다.
이후 가문 후손들이 1900년에 재건립한 것으로 전해온다.
이팝나무라는 이름이 붙은 데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24절기 중 입하 무렵에 꽃이
피기 때문에 입하나무라 부르던 것이 이팝나무가 되었다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흰 꽃이
만개할 때 마치 쌀밥을 그릇에 수북하게 담아놓은 것 같은 모양이어서 이밥(쌀밥)나무라는
이름이 이팝나무가 되었다는 설이다.
이팝나무 / 양광모
어머니,
밥은 잘 드시는지요
그곳의 식사 물리시거든
잠시라도 한 번만 다녀가 주세요
흰쌀밥 한솥 가득 지어놓았는데
식기 전에 먹어라,
말해주시던 목소리 들리질 않아
올해도 이팝나무 아래 허기가 집니다
아무래도 저 꽃이 당신인 것만 같아
올해도 이팝나무 아래 그리움이 핍니다
이팝나무 꽃은 못 보았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반영으로 만족을 할 수 밖에 없다
저여인은 잠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작년에 왔을 때 찍은 이팝나무 사진
이팝나무는 과거 농부들이 꽃의 개화 정도를 보고 일 년 농사의 풍작을 점쳤던
신목이라고 하니 어쩌면 위양못에 이팝나무가 심어진 것은 필연일지도 ....
못 안에 있어서 물을 가까이 하고 있는 완재정(宛在亭)은 《시경》〈겸가(蒹葭)〉의 “갈대가 창창하니,
흰 이슬이 서리가 되었네. 이른바 저 사람이 저 물가 한쪽에 있네.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 따르려 하나,
길이 막히고 또 길며, 물결을 따라 내려가 따르려 하나, 완연히 물 가운데 있네(蒹葭蒼蒼, 白露爲霜.
所謂伊人, 在水一方. 遡洄從之, 道阻且長. 遡游從之, 宛在水中央)” 라고 한 마지막 구절의 ‘완재(宛在)’를
취하였다고 한다.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 1842~1910)의 『향산별집(響山別集)』 3권에〈완재정기(宛在亭記)〉가 있다.
심재 조긍섭의 『암서집(巖棲集』2권에 있는「宛在亭旣望夜舟泛用杜韻 (완재정에서 열엿새 밤에 배 띄우고
두보 시의 운으로 짓다)」은 다음과 같다.
맑게 갠 호수에서 목란 배에 술 싣고 / 晴湖載酒木蘭船
짧은 노 휘저으며 물 아래 비친 하늘 치니 / 短棹衝將水底天
달을 부수는 잔잔한 물결은 놀라서 그치지 않고 / 破月微波驚不定
바람을 두른 가는 풀은 은연중 서로 끄네 / 縈風細草暗相牽
까마귀 다리와 악어 굴은 빛깔이 뒤엉키고 / 烏橋鼉窟參差色
한녀와 상비가 자리에 뒤섞였는데 / 漢女湘妃錯落筵
문득 한가한 사람과 길이 이 가운데 즐기니 / 便與閒人長占弄
이 놀이가 통천을 잇는 것과 어떠한가 / 茲遊何似續通泉
완재정(宛在亭)은 학산(鶴山) 권삼변(權三變)이 양야지(陽也池)의 작은 섬 다섯의 경치가 중국의
양양(襄陽)과 같다 하여 집을 짓고자 완재정(宛在亭)이라는 시를 남겼더니 300년 후에 8세손
우중(友中) 만석(萬錫)과 9세손 중영(重英) 중우(重禹) 병석(秉錫) 중기(重琦) 등이
공의 유지(遺志)를 추모하여 고종 경자년(1900)에 창건한 집이다.
위양못을 둘러보고 집으로 오는중 사촌이 영남루를 한번도 안 가봤다 하여
잠시 영남루에 들렸다
사명대사 동상
밀양 아리랑 노래비
영남루에서 바라본 밀양강
영남루 마당에 있는 석화(石花)
밀양박씨의 시조
신라 54대 경명왕 아들(장남) 밀성대군(박언침)
밀양(密陽) 박씨의 시조는
신라의 시조 왕 박혁거세(朴赫居世 BC 69-AD 4)의 30세 손이며
신라 54대 경명왕(재위 917-924) 승영(昇英)의 여덟 왕자 중
첫 번째 왕자인 밀성대군(密城大君) 박 언침(朴彦忱)으로
후손들이 그를 중시조로 하여 본관을 밀성으로 밀성 박씨를 이루었으며,
후에 밀성의 지명이 밀양으로 개칭됨에 따라
본관을 밀양(또는 밀성)으로 밀양(또는 밀성) 박 씨 세계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영남루(嶺南樓)는1931년 전국 16경의 하나로 선정되었고
신라 경덕왕(742~765)때 이자리에 세워졌던 영남사가 폐사되고 흔적만 남게 되자
1365년(공민왕14) 밀양군수 김주(金湊)가 신축해 절 이름을 따서 영남루라 하였고
수차례의 증개축을 하여 오다가 정면 5칸, 측면 4칸인 현재 건물은
1844년(헌종10) 새로 개창하여 본루는 조선 후반기 건축미로 대표할만한 루각이고
릉파각(凌波閣)과 침류각(沈流閣)인 양익루가 있으며
부속건물로 사주문, 일주문, 천진궁 등이 있었다.
영남루는 몇번에 걸처 포스팅을 올렸기에 오늘은 이것으로 대신하기로 한다
Don't Cry For Me Argentina
(영화 '애비타' OST) / Mado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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