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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광문화

징광문화는 1979년 고 한상훈 선생이 전통적인 의식주에 관련된
문화상품을 개발하고 생산하려는 꿈을 안고 설립한 문화단지입니다.

이 곳에서는 자연과 사람이 공존한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전통에 기본을 둔 브랜드 징광옹기, 징광잎차, 징광농산물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옹기막

징광옹기를 만들어 내는 곳으로 1981년 황토 흙으로 벽을세우고 초가로 지붕을 이은 엣날 방식으로

지은 흙집이다

여름에는 서늘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기운을 유지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어 옹기를 만들고 건조하기에

아주 효과적인 건축물이다

 


 

루피너스가 집 여기저기에 많이 있었다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징광리에 있는 ‘징광문화’는 전통 옹기와 야생 차밭으로 유명한 문화단지다.

징광문화에 들어서면 산비탈에 비스듬히 누운 가마와 넓은 마당에 옹기가 가득 들어서 있고,

연꽃이 피어 있는 연못 옆으로 정자와 몇 채의 기와집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다.

주인의 마음결과 정성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구석구석엔 고층 빌딩 숲을 뒤로하고 먼 길 달려

도달했을 때의 기대를 넘치도록 만족시키는 편안하고 안락한 기운이 감돈다.

 

이곳은 1979년 고 한상훈 선생이 전통 문물의 발굴과 보존을 위해 설립한 곳으로 그는 <뿌리깊은 나무>

<샘이 깊은 물> 등을 창간한 고 한창기 선생의 동생이다. 이들은 우리 문화에 대한 사랑이 깊었던

형제로 형은 한국의 멋을 널리 알리는 잡지를 발행했고, 아우는 야생 차와 전통 옹기 등을 제작해

우리 전통문화를 되살리는 데 앞장섰다.

징광문화를 설립한 한상훈 선생이 세상을 떠나시고 지금은 그의 아내인 차정금 대표가 뒤를 이어 징광문화를

세운 남편의 뜻을 계승, 발전시키고 있다. ‘처음에는 무척 힘들었지만 지금은 이 일을 한다는 것이 행복하고

자랑스럽다’는 차정금 대표가 서울 생활을 모두 정리하고 자녀들과 징광에 내려온 지 여러해다.

남편 그리고 아버지가 생전에 일궈놓은 업적을 온전히 보존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이 가족이

가슴에 품은 사명은 ‘전통 문물의 발굴과 보존’ 그리고 ‘자연과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다.

이렇듯 징광문화는 자연이 살아야 사람도 살 수 있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전통 옹기 제작과 야생 차

생산은 물론 무공해 상품과 농산물 생산에도 힘쓰고 있다.

 

 

 

맥이 끊어질 위기에 있는 옹기의 남부식 조형과 전통유약을 다시 되살리기 위하여 1980년 전남 보성군

벌교읍 징광리에 옹기막과 옹기가마를 만들고 어깨넓고 배부른 남부식 옹기를 재현하였습니다.

1996년 전승공예대전에서 옹기로는처음으로 국무총리상을 수상하였고2006년에는

동북 아시아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심사에서 아름다운 수공예품으로 선정되기도 하였습니다.
2003년부터는 항아리 위주의 작업에서 선이 간결하고 군더더기가 없어 조형미가

돋보이는 일상 그릇들과 다양한 소품들을 만들어 내기 시작하였습니다

징광옹기는 그릇 한점 한점을 일일이 손으로 만들고 약토와 초목재로만 만들어진 자연 유약을 발라

1230도에서 굽습니다.
그래서 고온에서 녹은 잿물의 땟깔이 아름답고 두드리면 맑은 종소리가 날만큼 단단합니다.
또한, 조형의 미를 중요하게 생각하여 선의 흐름, 형태 균형을 어우러지게 조화시켜 디자인하고 만듭니다.
이 시대의 옹기를 대표하는 징광옹기에서는 전통항이리 외에 현대생활에 맞는 아름다운 식기와 소품을

만들고 있습니다

아들 딸 들이 각자 기거하는 공간들

1998년 한상훈 선생이 돌아가시고 나서 얼마간 적적한 생활을 했던 여사의 곁으로

최근 아들과 딸이 돌아왔다

도자기를 전공한 딸은 옹기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문화재 학과를 졸업한 아들은 여사 옆에서

농사일과 문화사업을 돕기로 결심했다

직접 생산한 천연 유약만을 사용하는 징광 옹기는 질적면에서 이미 인정을 받았는데 디자이너

딸이 가세하면서 젊은 감각의 디자인으로 재탄생되었다

 

 

 

 

 

연못 주위에는 정자와 쉼터가 있어 멋진 분위기를 연출 한다

징광다원

금화산 산자락 22만평의 징광다원은 차나무들이 야생초와 어우러져 맑은 초록빛을 뿜어내며 싱싱하게

자라고 있습니다.자연을 풀과 함께 나누어 가지므로병충해가 없고 신선합니다.

화학비료나 농약을 사용하지 않으며 퇴비조차도 주지 않았으며 국제인증기관으로부터친환경농산물

인증을 받았습니다.해발269미터의 금화산 징광사 고사찰터 주변에 위치한 징광다원은 토질이 마사토와

암반층으로 형성되어있고낮과 밤의 기온차가 심하여 차 재배지로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 곳의 차나무의 뿌리는 땅속 5미터 이상 곧게 뻗어 내려가 바위에 뿌리를내려 바윗속의 양분과

기를 잎으로 끌어올리므로 차의 맛과 향이 매우 깊습니다. 깊은 산속의 무공해 자연 차밭인 징광다원은

세계적으로 보기드문귀한 자연차밭이다.

 

 

차도 판매를 하고 있다

차정금 대표님께서 손수 끓여주시는 차한잔 하고 그동안의 경과와 고택에 대한

말씀을 듣고 고택 안내까지 기꺼이 해주셨다

기품있는 가옥 한상훙가옥

벌교 금화산 자락의 작은 마을로 들어서면 기품있는 한상훈가옥이 나타난다

잡지 뿌리 깊은 나무의 발행인 고 한창기 선생의 아우이자 전통문화 발전을 위해 헌신했던

고 한상훈 선생의 가옥에는 돈을 낙엽처럼 태우더라도 전통문화를 알리겠다는 남도선비의

정신이 서려있다 서울 한남동에서 벌교까지 천리길을 마다않고 한옥을 옮겨온 이가 한상훈

선생 지금은 작고하시고 부인 차정금 여사께서 관리를 하고 계신다

고 한창기 선생은 남도출신 언론인으로 한글전용및 가로쓰기를 주장했고 우리문화의 우수성을

알리는 것도 앞장섰다. 그의 동생 한상훈 선생 또한 뜻을 같이해 전통문화 발전을 위해 헌신하였는데

판소리를 복원하기 위하여 박동진 선생을 지원했고 전통옹기와 차 복원사업에도 뛰어들었다

그리고 30대 중반 무렵1979년 남도의 정취와 문화를 간직한 징광지역에 전통문화 단지를 세우기로 결심을 한다

그무렵 한남대로를 확장되면서 한옥한채가 철거될 위기라는 소식을 듣고 직접 보니

세칸짜리 ㄱ자 안채와 두칸짜리 사랑채가 전부인 소박한 규모였지만선생은 청빈한 양반가의

여사롭지 않은 기품을 느꼈다 한다 그결과 정대목이라 불리는 나관 목수를 만나 한옥의 공간 이동이라는

초유의 작업을 시작했다

한옥은 못이나 접착제를 전연 쓰지 않고 오로지 나무를 조립하는 방식으로 지어진다

그러니 기왓장을 1번에서 100번까지 마룻장 역시 1번에서 몇십번까지 모두 번호를 매겨

해체를 했다 대들보부터 주추돌까지 어느 것 하나 버리지 않고 모두 징광리로 옮겨온

뒤 원형과 똑같이 조립했다

한상훈선생은 한옥의 미덕을 잘 아는 만큼 그 원형을 지켜야 한다는 고집또한 대단 했다고 한다

그시절 옆에서 지켜보던 부인이 걱정할 정도로 한옥에 빠져 살았다 하니 우리것에 대한 선생의

사랑을 새삼 느낄 수가 있다

 

사랑채의 앞면 모습

옛날에 우리 시골집도 부엌 위에 이렇게 누마루를 만들었었는데.......

사랑채의 뒷편 모습

사랑채를 돌아 뒷마당으로 들어서면 반층정도 높은 위치에 안채가 나타난다

건물뿐 아니라 대문 맷돌 조경석 석상까지도 옮겨운 한상훈선생의 깐깐한 성품을 느낄 수 있다

한옥치고는 안채가 굉장히 높다

 

오래 돼서 비가 새고 낡아서 수리를 한번 했다고 한다

현재는 여기서 생활을 하지 않고 징광문화에서 기거를 하신다고 한다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신 차정금 여사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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