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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울산

함양 지곡 개평마을

개평이라는 이름은 내와 마을이 낄 '개(介)' 자처럼 생겼다는 데서 유래했다. 개평마을 표지석이 서 있는 마을

입구에서 보면 좌우로 두 개울이 하나로 합류하고, 그 사이로 개평마을이 들어서 있다.

마을과 잇닿아 넓은 들판이 펼쳐져 '개들'이라 불리기도 한다.

예로부터 함양은 '좌안동 우함양'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많은 유학자들의 고장인데, 그 중 개평마을은

하동 정씨와 풍천 노씨, 초계 정씨 3개의 가문이 뿌리내려 마을을 이룬 곳으로서 조선 성리학 5현 중의

하나인 일두 정여창 선생의 고향으로도 유명하다.

 

이곳 개평마을은 그 동안 드라마 <토지>, <다모> 등의 배경으로 등장해 왔었는데, 최근에는

tvN <미스터 션샤인>이 이곳에서 촬영하면서 더욱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극 중 애기씨(김태리 분)의 양반집이 바로 다름 아닌 일두 고택이다.

 

개평한옥마을은 14세기에 경주김씨와 하동정씨가 먼저 터를 잡았고, 15세기에 풍천노씨가 들어와 살기

시작 했다고 한다. 현재 마을에는 대부분 풍천노씨와 하동정씨가 살고 있다. 개평 한옥마을은 530년 전통의

가양주인 지리산 솔송주가 유명하다. 하동정씨 문중에 대대로 내려온 솔잎으로 담그는 솔잎술로 1997년

후손들에 의해 복원, 개발되어 판매되고 있다. 개평 한옥마을의 골목길은 골목마다 종가와 고가가

자리 하고 있다. 1880년에 지어졌다는 하동정씨고가, 1838년에 지어진 오담고택, 또, 풍천노씨 대종가 등

골목길을 따라 걷다보면 전통 가옥들이 보인다.

솔송주는

2007년 故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만난 남북정상회담 자리에서

건배주로 상에 오르기도 했다고 한다.

솔송주는 차게 식혀 은은한 솔 향기를 느끼며반주로 곁들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다고 한다.

솔송주는 동방오현의 한 분이신 일두 정여창 선생의 13대손이신 눌재 정재범 공이 500년 전부터 조상의 은덕을

기리는 제사상에 최고의 술을 올리기 위해 가장 품질이 좋은 햅쌀과 솔잎, 송순을 재료로 빗은 술이라고 한다.

정여창 선생의 16대손 며느리,대한민국 식품 명인 27호이기도 한

박흥선 명인이 가업을 이어 계승시키면서 발전 시킨 솔송주.

 

정여창 고택으로가는 돌담길

정여창 고택

정부의 공식 지정 명칭은 문화재 지정 당시의 건물주 이름인 '함양 정병옥 가옥'이지만 하동 정씨 대종가,

정여창 고택, 일두고택, 정병옥 가옥 모두 같은 곳이다. 함양은 선비와 문인의 고장으로 이름나 있으며

대표적인 인물이 일두 정여창이다. 조선조 5현이자 동국 18현으로 성균관을 비롯한 전국 234개 향교,

9개의 서원에서 모시는 성리학의 대가다.

 

일두 고택은 정여창 선생이 태어난 곳으로 개평마을을 대표하는 고택이다.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100년이

지난 후에 후손들이 중건했다. 무오사화?갑자사화로 유배와 죽음, 부관참시까지 우환이 이어졌으니

집안을 쉽게 일으키지는 못했을 터다. 고택에는 원래 17동의 건물이 있었지만 현재는 사랑채, 안채, 문간채,

사당 등 12동의 건물만 남아 있다. 사랑채와 안채는 조선 후기에 중수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일두고택 소슬대문에는 정려각으로 있어야할 효자, 충신 정려문 5개가 대문 위에 문패처럼 떡 버티고 있었다

그만큼 이 집안이 어떠한 집안인지 들어가지 않아도 그 위세를 알만하다

일만제곱미터의 넓다란 대지위에 자리하고 있는 '일두고택'은 명당지로 소문나 있으며, 전형적인 경상도의

양반집 형태를 보여주고 있는데, 솟을대문을 비롯하여, 행랑채, 사랑채, 안채, 곳간, 별당, 사당 등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이곳 '일두고택'은 TV드라마인 '토지'에서 최참판댁의 촬영 장소로 알려진 곳이다. 솟을대문에는 다섯명의

효자와 충신을 배출했음을 알리는 5개의 '정려'를 게시한 문패가 걸려 있고, 솟을 대문을 지나 바로 정면에

보이는 사랑채에는 흥선대원군이 썼다고 하는 '충효절의' 와 김정희의 글씨라고 하는 '백세청풍'이라는 커다란

글씨가 걸려 있으나 고증은 안된 상태이다. 사랑채에서 일각문을 지나 안채로 들어가면 안채의 대청마루 뒤로

사당 건물을 볼 수 있다. 안채 뒷편으로 사당 외에 별당과, 안사랑채가 따로 있다

 

사랑채

대문이 코로나19로 인해 굳게 잠겨있어 예전에 보았던 사진으로 대신

 

정여창 선생은 동방오현(東方五賢)으로 꼽히고있습니다. 동방오현은 우리나라가 배출한

다섯 뛰어난 현인을 말하는데 성균관(成均館) 대성전(大聖殿)에 위패를 모시고 있습니다.

일두 선생 외에 네분의 선비들을 보면 다 대표적인 유학자들입니다.

사옹(蓑翁) 김굉필(金宏弼·1454~1504),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1482~1519),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 선생입니다.

중요한 것이 김굉필-정여창이 김종직(金宗直·1431~1492)선생의 제자라는 점입니다.

 

사랑채의 현판들

충효절의는 흥선대원군 글씨라하고 청풍백세는김정희 글씨라 하는데

고증으로 증명된 것은 아니라 한다 문헌세가는 일두선생시호라고 한다

 

안채의 모습

사랑채가 남성의 공간이라면 안채는 여성의 공간이다. 남녀가 유별했던 조선시대에는 남녀의 공간이 확실히

분리되어 있었다. 안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일각문과 중문을 통과해야 한다. 넓고 밝은 안채는 금잔디가

깔려 있어 조선시대 폐쇄적인 여성의 공간이란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사당과사당과 창고 중문채

중문채

문간방을 겸하면서 좌우의 벽이 막힌 통로형식 으로 만들어 졌으며 안채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이곳을 통하여 속세로 출입을 한다는 의미로 만들었다 즉 안사람들의 거칠은 바깥

세상의 물정에 물들지 않고 순박한 생활을 할수 있다는 의미다 중문늬 문지방의 가운데를

낮게 만들어 치마입은 부녀자들으이 다니기 쉽게 만들었으며 문간방에는 안채에 딸린 문간

방에는 안채에 딸린 하인들이 거주하였다

솟을대문이 있는집 안내문도 없어 누구집인가 했는데 솔송주 문화관 안채 건물인듯

 

견현사제

'현명한 사람을 보면 그 사람처럼 되기를 생각하고, 현명하지 못한 사람을 보면 자기 자신을 돌아본다.'

 

거주하는 집인데 너무 조용하고 잘 가꾸어진 집이다

민박으로 사용하고 있는 듯

백화등이 아닐까?

동산에는 소나무 100여그루가 우람하게 자라고 있다

성류도 꽃을 피우고

 

 

풍천노씨 대종가 전에는 문이 잠겨 있었는데 지금은 사랑채를 개방하는 모양이다

개평 마을에 있는 풍천노씨 종가댁 전면의건물이 대문채이고 뒤에 조금 보이는건물이 사랑채이다

 

사랑채

 

 

안채

개평마을 회관

디딜방아 체험장

제주도식 대문

대문채. 양쪽에 문간방이 있는 평대문을 하고 있다. 솟을대문은 아니지만 구한말 도시형 한옥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함양 개평리 노참판댁 고가. 마을에서 가장 오래전에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앞쪽에 사랑채, 뒷쪽에 안채가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함양 개평리 노참판댁 고가, 경남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
조선 말기 우리나라 바둑계의 일인자였던 사초 노근영(1875~1944년)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선생의 호가 사초여서

사람들은 노사초라고 즐겨 불렀으며 성품은 온화하면서도 검소하였고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아낌없이 재산을

내주었다고 한다. 선생은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일본 등지로 다니면서 가다니 8단과 혼다슈고 초단에거 백을 들고

만방으로 이기는 등 프로기사가 없던 시절에 조선 바둑계의 국수로 불려졌다.

 

특히 며느리의 산후조리를 위해 보약을 지으러 갔다가 바둑친구를 만나 약을 손에 든 채로 서울로 바둑 유랑을 가는

등 많은 일화를 남긴 바둑계의 전설적인인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이곳은 선생의 증조부 감모재 노광두(1771~1859년)공이 만년에 낙향하여 기거한 곳으로공은 벼슬이 호조참판에

이르렀으나 매우 청렴하였다.

 

특히 이 지방에 심한 가뭄으로 흉년이 들자 임금께 조세를 감면해 주도록 상소하여 탕감을 받게 된 인근의 주민들이

그 고마움으로 재물을 갖다 주었으나 받지 않아 사랑채를 지어 주었는데 이와 같은 일은 전국적으로 찾아볼 수 없는

드문 경우이다.

안채

밖에서 어슬렁 거리는데 주인장께서 나오시기에 구경해도 되냐니까 기꺼이 승락을 하신다

서울에서 살다가 집을 비워 놓을 수가 없어서 정년퇴직 하고 부부가 같이 내려와 화초를 가꾸며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태산목

북아메리카 원산의 상록 큰키나무로 남부지방에서 심으며, 높이 20m에 이른다. 원산지에서 최대 35m까지 자라기도 한다.

잎자루는 길이 2-3cm이다. 잎은 긴 타원형으로 길이 10-23cm, 폭 4-10cm이며, 두껍고 가죽질이다.

잎 가장자리는 밋밋하고, 양면에 연한 갈색 털이 많다. 꽃은 5-6월에 가지 끝에서 1개씩 피며, 지름 15-25cm이고 흰색이며

, 향기가 난다. 꽃받침잎과 꽃잎이 구분되지 않는다. 열매는 9-10월에 익는다. 정원, 유원지 및 온실에 관상용으로 식재한다

.

 

 

노랑 낮달맞이꽃.태산목.석잠풀.산수유열매

개평마을에는 또 노씨의 전설이 담긴 종암우물이 있다. 이 우물은 옥계천 좌우에 있던 다섯 개의 샘물 중 하나였다고 한다. 풍수지리로 볼 때 개평마을은 행주형 입지로 배에 구멍을 내면 배가 가라앉는다고 해 우물을 파지 못하고 자연 암반에서

솟아나오는 다섯 개의 우물만 사용했다. 그런데 어떤 연유에서인지 마을에 우물이 파여 버렸다. 청하현감을 지낸

정덕재가 이를 알고 바위에 종암이란 글자를 새겨 누구도 소나무나 우물을 건드리지 못하게 했다 한다

그 외 이 우물은 또 늦게 본 아들이 죽어 시름시름 앓는 어머니를 다시 소생시킨다는 효자 전설도 있어 먼 곳에서도 와

아들을 보기 위해 이 우물을 활용했다는 전설이 있다

일두 고택과 오른쪽에 일두고택 전나무가 보인다

오담고택

정여창 고택에서 약간 올라가면 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제407호인 오담고택이 보인다. 오담 정환필 선생이 기거한 집으로

사랑채는 1838년에, 안채는 1840년에 건설했다. 오담은 경로효친 사상을 강조한 조선 후기 학자였으며 일두의 12세

후손이다. 일두고택에 살고 있는 정명균에 따르면,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공식 명칭을 부여할 때는 당대의 건물주 이름을

적는 것이 원칙이나 선조 이름인 오담을 고집해 결국 승낙받았다고 한다.

팔작지붕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은 어칸과 전후툇간으로 구성되었으며 후툇간은 전툇간에 비해 큰 규모로 비대칭의

단면 구조를 보인다. 전면 툇마루에는 둥근 기둥을 두었고 나머지는 사각기둥을 사용했는데 약한 민흘림 이 있으며

목재는 적송이다. 사랑채 옆으로 난 대문으로 들어가면 사랑채와 안채가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자주달개비.어성초

오담고택 건물

하동 정씨고가

경남 문화재 자료 제361호인 하동 정씨고가는 큰길에서 약간 떨어져 있다. 이런 곳에 문화재가 있다니 놀라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런 정경이 바로 우리 유산의 별미다.

 

이 집으로 가는 골목은 돌담이 가지런히 좌우를 호위하는 형상이다. 대문채를 지나자 눈앞에 널찍한 공간이 펼쳐진다.

우리나라의 경우 앞마당에 아무 치장이 없는 것이 기본이며 여기서도 그 규범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다.

 

정면 여섯 칸에 측면 한 칸인 5량가로, 300년 이상 된 一자형이다. 전후 툇마루와 동쪽에 툇마루를 가진 맞배집이다.

중앙에 두 칸의 대청마루를 두었고 오른쪽에 두 칸의 안방과 부엌이, 왼쪽에 건넌방이 있다. 안방과 인접한 후면에

툇간을 두어서, 배면에서 보면 광창 판벽이 특이하다.

 

또한 건넌방 동쪽 편에 눈썹지붕을 내서 건넌방에 기거하는 며느리와 아이들의 편리를 고려한 것이 인상적이다.

건넌방 온돌은 전면에 함실각주8) 아궁이를 두고 있으며, 여름에는 넓은 안마당에 여백을 두어 충분한 햇살과 바람을

받게 만들어놓았다. 그러므로 햇살이 강렬한 여름날 오후 안채의 대청마루에 서 있으면 시원한 안마당과 남풍에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이 든다

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잔디 마당을 지나 안채가 나타난다

사랑채와 현판

매미소리가 들리는 초막이라는 뜻이겠지

 

 

 

 

 

 

안채와 대청마루

만취정:늦게 돌아온집 오랜 벼슬길에 있다 늦게 그만두고 낙향했다는 뜻일까?

우청서재:깨끗하고 맑은 서재라는 뜻이 아닐까?

드넓은 마당

안채 옆 비를 막아주는 눈섭지붕 논산 돈암서원에 이런 건물이 있었는데 여기서도 보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