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평마을을 한바퀴 돌아나오는데 북카페와 차와 빵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 있어
잠시 쉬어가기로 한다.이름하여 지인공간
지인공간’은 과천에서 출판업을 하던 김지인 대표가 지난 2018년 9월 개평마을 일두고택 근처 450여 평 부지에 한옥을
지어 개업한 북카페다. 그는 일두 종가의 외손녀로 2013년부터 외삼촌을 돕기 위해 함양을 수시로 오가면서 함양의
아름다움에 매료돼 귀촌해 운영하고 있다.
출판업을 하던 분이라서인지 북카페를 온영하고 있으며 지하에도 독서 공간이 마련돼 있다
차한잔하며 30여분 쉬었다 다시 용추폭포를 향해서 출발 승안사지를 생략하고
가려 했는데 가는 길에 이정표가 보여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보물 제294호. 높이 4.3m. 승안사는『신증동국여지승람』에 “승안사는 사암산(蛇巖山)에 있다”고 하였을 뿐
다른 기록은 없으며, 일찍이 폐사된 듯하다. 석탑은 주변에 재실을 건립하면서 원래의 자리에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一蠹 鄭汝昌(1450-1504)은 조선 성리학사상 한훤당 김굉필과 함께 포은 정몽주의 학통을 계승하여,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퇴계 이황·남명 조식 등과 같은 성리학자들의 배출을 가능케 한 인물이다.
그의 묘소는 1504년 서거 직후에 일어난 갑자사화로 인해 부관참시라는 처참한 역사적 현실을 겪었던 곳이다.
묘역 내에는 일두 정여창의 묘와 정경부인 완산이씨의 묘가 자리잡고 있으며 정여창 묘 앞에 선 신도비는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려 하자 자결을 시도하여 청사에 이름이 길이 빛나는 桐溪 鄭蘊
(1569-1641)이 지은 것이다. 동계 정온 또한 이웃 고을 출신으로 일두 정여창을 사숙하였던 인물이다.
이 비석의 頭篆은 「贈右議政文獻公一蠹鄭先生神道碑銘」이라 되어 있으며,
碑額題는 「有明朝鮮國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監春秋館事諡文獻公一蠹鄭先生神道碑銘幷序」로
되어 있다.
두전 및 비문 전체의 글씨를 쓴 사람은 이조판서를 거쳐 判敦寧府事에 이른 西谷 李正英(1616-1686)이다.
이 비석이 세워진 것은 숭정 기원후 기사(서기 1689년) 3월이며, 각자를 한 사람은 鄭元夫와 僧 三悅이라고 새겨져 있다.
이와 같이 일두 정여창은 朝鮮朝 五賢의 일인으로서 조선왕조 이후 세인의 존경을 받아왔고, 그의 실천을 중시하는
학문 자세는 길이 후세인에게 훌륭한 모범이 되고 있어 그의 묘소는 인물 면으로도 그 가치가 있다.
또한 일두 정여창과 부인 정경부인 완산이씨 묘소는 조선 전기 사대부의 무덤양식을 잘 나타내주고 있으며 묘역 내
석물들도 우수한 작품으로 그 가치가 더욱 높게 평가된다.
일두 정여창은 김굉필, 김일손과 함께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1490년(성종20년)학행으로 관직을 나갔으며 ,
그해에 과거에 급제, 연산군의 스승이었으나 무호사화(김일손의 사초 ,김종직 조 의제 문)때 함경도에 유배후
54세로 유배지에 서 사망하자 두 달에 걸쳐 함양으로 옮겨와 장사 지냈다.
갑자사화때 김굉필이 사사될 때 부관참시 되었 으며 , 중종반정이후 복권 되었다
묘 앞에 있는 신도비
새로이 내용을 풀어쓴 신도비
정수민(鄭秀民)1577(선조 10)∼1658(효종 9).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자빈(子賓), 호는 춘수당(春睡堂)·동리(東里).
일두(一蠹) 여창(汝昌)의 증손으로, 언남(彦南)의 아들
학덕과 품행이 증조부 일두와 비슷하였으므로 소일두(小一蠹)라고 불렸다.
군자감참봉
공(公)은 1577년(선조10년)에 함양군 수동면 개평에서 출생하였으며, 1658년(효종9년)에 82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1597년(선조30년) 정유재란 당시 황석산성에서 아버지 동지공(同知公)은 전사하고, 어머니 송씨는 적을 꾸짖고
암벽에서 투신 자결하는 참극을 당하였으나 부모의 체백(體魄)을 안돈(安頓)시켜 장사지내고 3년 시묘살이를
예(禮)로써 다하였다.
혼인을 늦게 하여 배위(配位)와 12살이나 차이가 났는데, 이는 겨우 30세 전후에 결혼한 것으로 여겨지며,
당시로는 아주 늦은 나이에 결혼한 것으로 주변에 챙겨줄 사람도 없었던 것 같다.
평생 동안 글만 읽으면서 살림살이가 곤궁하였음에도 나라에서 내린 참봉자리도 사양하고 선비의 지조를 잃지 않았다.
증조부인 문헌공(文獻公)을 위하여 1635년(인조13년)에 문헌공실기(文獻公實記)를 간행하였고, 1643년(인조21년)에
화개현구장도(花開縣舊莊圖)을 완성하였다.
남계서원(灆溪書院) 원임(院任)을 12년간 재임하면서 후학을 양성하여 계원(溪原), 노현(盧灦), 영모재(永慕齊),
노천(盧淺) 등 훌륭한 제자를 두었고, 전국 사찬지(私撰誌) 중에서 처음으로 함양의 역사, 지리, 풍속 등을
수록한 천령지(天嶺志) 상·하권을 남겼다.
1947년 후손들이 선생을 경모하여 건립한 춘수정
정 수민선생 사작비
동리는 정수민의호
안심마을은 물레방아의 발원지로 연암 박지원선생이 안심현감으로 재직시에 청나라를 둘러본 후 물레방아를
이곳 안심마을에 도입을 해서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물레방아떡마을(안심마을)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신안리 안심마을
옆문을 밀치고 들어 갔더니 언제까지 운용을 했는지 모르지만 현재는 방치된상태
옛날 식이 아니고 현대에 맞게 기계식으로 변모를 했다
용추폭포쪽으로 오르면 물레방아 공원이 있는데 여기는 박지원 석상도 있다
여기는 옆지기 하고도 몇번 왔던 곳인데 화림동 계곡으로 가면서 들렸다 간다
비가 많이 오고 물이 많을 때는 이러한 모습으로 변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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