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지내 마을은 500여년 전 고경명 장군의 후손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다.
아시아 최초의 슬로시티 마을이다
월봉천, 운암천, 유천의 물길이 마을 아래에 모인다 하여 삼지천(三支川) 이라고 불리는 마을
우리의 전통가옥과 돌과 흙으로 쌓아올린 돌담길이 마을 전체를 굽이굽이 감싸고 있어서
마을을 걷다보면 옛 선조들이 살았던 옛 정취를 물씬 느낄 수 있다
3.6km에 달하는 돌담길은 대한민국 등록문화재로도 등재가 되어 있다.
창평슬로시티로 지정된 마을로 쌀엿과 한과가 널리 알려진 마을이기도 합니다.
이집은 쌀엿을 만들어 파는 집입니다
창평쌀엿은 조선시대 궁녀들에 의해 알려지게 됐다. 바삭하며 이에 붙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이 마을은 명절마다 전통쌀엿과 한과를 찾기 위해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창평쌀엿을
만드는 가장 큰 비법은 바로 오랜 기다림과 인내, 그리고 정성.
쌀엿이 완성되기까지, 끝없는 기다림과 고단한 과정의 연속이다. 식혜에서 조청,
그리고 갱엿을 만드는 작업은 꼬박 하루를 쏟아 부어도 모자라다.
그 가운데 ‘바람 넣는 작업’은 쌀엿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과정이다.
갱엿을 늘려 화롯불 위로 두 명이 잡아당기며 바람(수증기)을 넣는 작업이다.
무려 80번~100번 정도의 늘림이 필요하다. 수증기가 들어간 엿가락은 결이
예쁘게 만들어지며 바삭한 창평쌀엿이 완성된다.
창평면은 담양군에 속하지만 창평 사람의 자부심은 남다르다.
창평이라는 지명은 고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또한 조선 영조 때 《여지도서》는 1999가구 7292명이,
정조 때 <호구총수>는 2041가구, 7601명이 사는 고을이었다고 기록한다. 1914년 조선총독부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담양군에 편입되기까지는 담양 일대를 양분하는 군이었다.
전라남도의 ‘3성 3평’도 창평의 특징을 잘 표현한다. 3성은 보성·장성·곡성을, 3평은 창평·함평·남평을 말한다.
이 고장들은 유독 기질이 강했다.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에 의병이 일어났고, 일제강점기에도 일본 사람이
발붙이기 쉽지 않았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김천일이 창평 태생이고, 고경명의 후손은 지금도 창평에 산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사무실로 쓰인 고광표의 창평상회가 일본 자본에 맞서 창평을 지켰다.
창평군이 창평면이 된 것도 그 기세를 누르려는 의도였다. 그러니 마을 사람의 향토에 대한 자부심은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는다. 고집스레 지켜온 창평의 돌담과 고택이 그 면면을 드러낸다. 마을에 찾아오는
이들을 환대하는 것도 나고 자란 땅에 대한 애정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니 슬로시티 창평에서는 그 묵직한 시간과 사람에 기대 각자의 삶을 돌이켜볼 만하다.
보호수
느티나무 2그루 수고 25m둘레3.0m5.7m수령 약 338년
창평면사무소는 한옥이다. 현판에는 면사무소 대신 창평현청(昌平縣廳)이라고 적혔다.
창평현청이 있던 자리로, 면사무소를 지으며 옛 풍경을 재현했다.
보호수
느티나무 6그루 수고 13m둘레 2.2m 수령 168년
면사무소와 고령 느티나무
현청 주변으로 느티나무 고목 여러 그루가 운치 있다. 면사무소 맞은편에 물레방아 정원이 있는
붉은 벽돌 단층 건물도 흥미롭다. 슬로시티 마을 장인과 담양의 공예품을 파는 달팽이가게다.
달팽이 가게는 현재 폐업중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집 일본인의 소유가 아닌가 생각되는데 설명이 없다
면사무소 뒤뜰에 있는 것을 보면 일본인 관리가 살았겠다는 생각만
돌담이 풍기는 정감도 만만하지 않다. 삼지천마을 옛 담장은 등록문화재 265호로 지정되었다.
그 정취를 생생하게 느끼고 싶을 때는 고재선가옥 지나 약초밥상 방면으로 우회전한다.
면사무소 뒤쪽 골목으로 일제강점기에 지은 2층 개량 한옥 곁을 지나는 고샅길이다.
마을의 여느 골목에 비해 폭이 좁아 돌담의 운치가 더한다.
전통 속에서 누리는 여유
슬로시티는 1999년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그레베에서 시작되었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한가롭게 거닐기,
남의 말에 귀 기울이기, 꿈꾸기, 기다림의 여유, 마음의 고향 찾기, 글쓰기, 명상하기 등을 통해 무한 속도의
경쟁 시대에서 벗어나 자신을 돌아보고 마음의 여유를 갖자는 취지에서 생긴 마을이다.
창평초등학교
순천대 홍영기 교수의 연구(‘고정주. 근대교육의 선구자’)에 의하면 고재천(전 전남대 농대학장)과
재필(전 보사부 장관) 형제, 고재기(전 서강전문대 학장)·고재종(전 전남교육감)·
고정석(전 산업은행장)·고윤석(전 서울대 부총장)· 고광표(대창주식회사 회장),
해방후 국회의원을 지낸 김홍용·문용·성용 3형제, 우리나라에 최초로 야구를 소개한 박석윤(東京제대 졸업)
·석기(일제에 맞선 국악인) 형제 등이 창평학교 출신이라고 한다.
3형제 모두 국회의원을 지낸 김홍용·문용·성용은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였던 이회창의 외숙들이다.
이회창의 외가가 바로 창평이었기 때문이다. 동네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회창의 어머니인 김사순도
경기여고를 나와 친정 동네인 창평초등학교에서 몇 년 동안 교편을 잡았다고 한다.
창평 출신의 70대 초반 원로들은 김사순 선생에게 배운 기억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이회창도 외가 동네인 창평학교에서 2~3년간 재학한 바 있다고 알려져 있다.
아쉽게도 그 학적부가 6·25 때 불타버리는 바람에 이회창의 기록은 확인할 수 없다.
창평초등학교는 1906년 4월 규장각 직각이었던 춘강 고정주(春崗 高鼎柱)가
국제적인 개와추세와 신학문에 대한 젊은이들의 학구열을 충족시키기
위해 창흥의숙(昌興義塾)으로 설립하였다.
수남학구당(창평향교)의 재산 일부를 기부받아 학교재원으로 하고 둘째아들 광준(光俊),
사위 김성수(김성수:2대 부통령), 외척 김병로(金炳魯:초대대법원장),
친지 송진우(宋鎭禹:3대 동아일보 사장)를 불러 외가 이씨의 정자인
상월정에서 영어를 가르친 것이 그 시작이라고 한다.
민박집으로 운영하는것 같다
갑을원은 지금 수리중 예전 사진임
뜰이 아름다운 갑을원
고재선 가옥도 지금 출입금지 예전에 갔을 때 사진
고재환 가옥으로 들어가는 길과 대문
못 하나 쓰지 않고 오로지 나무를 홈을 파서 맞추어 놓은 전통한옥이다
앞 뒤 뜰과 장독대
고재환 가옥은 장손이 외지에서 외국계 회사에 다니는데 이날 방문하여
주위 풀을 배고 집안 구석구석 청소를 하느라 비지 땀을 흘리고 있었다
옆집에는 첨성대처럼 생긴돌탑이 있어 담아봤다
춘강 고정주 고택(김성수 선생 장인)
고정주(1863~1933)는 한말의 애국계몽운동가로 자는 보현(寶鉉), 호는 춘강(春崗)이며 전남 담양 창평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참봉 고제두(高濟斗)이고 모친은 전주이씨로 돈녕부 도정(都正) 이태영(李泰榮)의 딸이며,
5세 때 큰아버지인 선공감 감역(監役) 고제승(高濟升)의 양자로 들어갔다.
6세 때 양부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13세 때부터 창평읍에서 5리쯤 떨어진 월정(月亭, 현 상월정)에서 학문
연구에 정진하였다. 19세인 1881년(고종 18) 한장석(韓章錫)을 찾아가 학문을 배웠으며, 1883년에는 성대영
(成大泳)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이미 이때 그의 학문이 높은 수준에 이르러 성대영이 크게 칭찬했다고 한다. 1885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891년
문과에 합격하였다.
벼슬을 하고 구국충정을 부르짖다가 우여곡절 끝에 고향 창평으로 낙향하여 인산(仁山) 터에 정자를 짓고
녹천정(綠泉亭)이라 이름 붙이고 거처하면서 애국계몽운동, 특히 신교육운동에 투신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 해 월정을 수리하여 영학숙(英學塾)을 세우고 영어를 가르쳤는데 이곳에서는 중국에서 돌아온 둘째 아들
고광준, 그의 사위인 김성수(金性洙), 그리고 송진우(宋鎭禹), 현준호(玄俊鎬), 김시중(金時中) 등이 수학하였다.
1907년에는 사돈인 김경중(김성수의 부친)과 함께 호남학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초대 회장에 선출되어
활약하기도 하였다
.
1908년 호남학회장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창흥의숙(昌興義塾)을 세우고 신교육운동에 전념하였다.
창흥의숙에서는 영학숙에서 공부했던 사람들과 김병로(金炳魯) 등 50여 명의 학생들이 한문,국사,영어,산술
등 신학문을 배웠다. 창흥의숙은 얼마 뒤 지역 유지들을 중심으로 창흥학교라는 공식교육기관으로 변화하였으며
고정주는 초대 교장에 선출되었다. 그는 항상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고금(古今)에 박식하고 시의(時宜)에
통달하여 큰 변화를 놓치지 않고, 시대의 변화에 함께 하면서 도(道)를 따르는 뜻에 맞출 것을 강조하고
만약 옛 것에 집착하여 시대의 변화를 알지 못하면 바로 구차한 선비가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창흥학교는
다시 창평보통학교로 바뀌어 호남지역의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하였다. 1910년 한국이 일본에 병합되자
고정주는 두문불출하였으며 이듬해 육휴당(六休堂)을 세워 모든 가사를 그곳에 처리하고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나라 잃은 설움을 시와 글 속에 남겼다. 그의 스승인 한장석은 유신환(兪莘煥)의 문인이었다.
창평 춘강 고정주 고택(春崗 高鼎柱 古宅,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42호)
춘강 고정주 고택은 한국의 전통적인 양반집으로 안채와 2동의 사랑채, 곡간채,
사당, 내외의 문간채 등으로 구성되어 나름대로 격식을 잘 갖춘 주택이다.
잘지어진 집이 이제 쓰러지기 일보직전이다 지붕부터 보수를 했으면 좋겠다
사랑채 우측으로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이 있다.
안채는 전라도 지방에서는 보기드문 ㄷ자형의 남향건물로 우측은 누마루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상량기록을 보면 1913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춘강 고정주(1863~1933)는 창평 지역 근대교육의 효시인 영학숙(英學塾)과
창흥의숙(昌興義塾, 현 창평초등학교)을 설립한 근대 교육 운동가로서
이 고택은 한말 민족운동의 근원지라는 점에서 현대사적 의미가 있다.
밖에서본 춘강고택은 쓰러지기 일보직전 기와도 너덜너덜 보는것도 안타깝다
자손들이 돌보지 못하면 지방 정부에서라고 이런 역사적인 고택은 보전을 했으면 좋겠다
이름하여 모듬국밥 인당 8천원 이뚝배기 하나가 모두 고기다
이래해도 돈벌이가 되는지 한그릇을 둘이 먹어도 충분한 량이다
나는 그래도 거의 비웠는데 옆지기는 반도 못먹었다
창평국밥집 우리가 갔을 때는 앉을 자리도 없고 수분씩 기다려야 자리를 마련 할 수가 있다
아마 오늘이 창평 장날인 것 같다
창평 전통시장
창평5일장
1960년대 본격적으로 형성된 창평장은 5일과 10일, 15일 등 닷새에 한 번 열리는 5일장.
장날이 되면 자리를 맡기 위해 가까이는 광주, 멀리는 보성에서부터 상인들이 모여든다.
장날이 되면 경운기 가득 직접 지은 농산물을 싣고 좌판을 펼치는 할머니들과 뻥튀기장수까지..
시골 5일장 특유의 이색적인 난전이 펼쳐진다.
창평장에서 빼놓을 수 없는 두 가지는 바로 한과와 국밥이다. 설 대목을 앞둔 전통시장은
한과를 찾으러온 주민들과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창평은 순대와 돼지고기를 가득 넣은 국밥으로 유명하다. 국밥거리가 형성될 정도로
이 지역의 명물! 값싸고 푸짐한 국밥 한 그릇은 창평 5일장을 본 마을 사람들의 허기진 배를
든든하게 채워주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엿도사고
담양에는 가는 곳마다 이렇게 메타스퀘이아 길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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