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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광주.제주

담양의 정자와 광주 5.18민주묘지

담양에는 유명한 정자들이 많다

소쇄원.명옥헌.환벽당.서하당.부용당.면앙정.의향정.송강정.독수정.광풍각.풍암정. 취가정등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그중에 오늘은 환벽당.취가정.면앙정.식영정.서하당. 부용당.송강정을 소개하려 한다

소쇄원.가사문학관.명옥헌은 전에 소개를 했기에 이번에는 생락을 한다

무등산 아래 광주호 상류 언덕에 자리 잡은 환벽당은 조선 중기의 문신, 사촌(沙村) 김윤제(金允悌 1501~1572)가

1540년에 지은 별서정원이다.

김윤제는 환벽당 인근에 있는 충효마을에서 태어나 1528년 진사(進士)가 되고, 1532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다. 나주목사(羅州牧使) 등 13개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였다. 조선 중기 엄혹했던 시절, 피비린내

나는 사화와 당쟁에 실망한 나머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와 환벽당을 짓고 후진들을 양성하며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삶을 살았다.

정자 정면에서 우암 송시열이 쓴 현판이 '푸르름에 둘러 싸인 집'이라는 정자의 내력을 설하고 있다.

대청마루 천장에는 석천 임억령, 하서 김인후, 송강 정철, 옥봉 백광훈, 조자이 등 조선의 내로라하는

시인묵객들의 시가 걸려있다.

 

장인 임억령에게 '그림자도 쉬어 간다는 식영정(息影亭)'을 지어준 서하당 김성원과 송강 정철은 김윤제가

양성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스승과 제자 사이를 넘어서 김윤제는 송강을 외손녀 사위로 삼았다.

송강의 가사 '성산별곡(星山別曲)'에는 이곳 환벽당의 풍경을 노래하는 부분이 있다.

환벽당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김덕령과 김덕보 형제는 그의 종손으로 역시 김윤제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특히, 정철은 16세 때부터 27세에 관계에 나갈 때까지 환벽당에 머물면서 학문을 닦았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환벽당 아래에 있는 조대(釣臺)와 용소(龍沼)는 김윤제가 어린 정철을 처음 만난 사연이 전하는 곳이다.

 

조부의 묘가 있는 고향 담양에 내려와 살고 있던 당시 14살의 정철이 순천에 사는 형을 만나려고 길을 가던

도중에 환벽당 앞을 지나게 되었다. 때마침 김윤제가 환벽당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꿈에 창계천의

용소에서 용 한 마리가 노는 것을 보았다. 꿈을 깨고서 용소로 내려가 보니 용모가 비범한 소년이 멱을

감고 있었다. 김윤제는 소년을 데려다가 여러 가지 문답을 하는 사이에 그의 영특함을 알게 되었다.

그는 순천에 가는 것을 만류하고 슬하에 두어 학문을 닦게 하였다.

정철은 이런 인연으로 환벽당에서 공부를 하게 되고 김윤제의 외손녀 사위가 된다.

정철은 이곳에 머물면서 기대승, 김인후 등 고명한 학자들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임억령에게서

시를 배웠으며 여러 사람을 사귀게 되고 차차 성장하면서 체득한 주변의 자연환경과 풍류를

 <성산별곡>에 담고 있는 것이다.

<성산별곡>은 서사, 본사, 결사의 3단으로 구성되었으며 서사에서는 식영정 주인의 풍류와 선경과 같은

경치를, 본사에서는 식영정 주위의 사계절 가경을, 결사에서는 혼탁하고 무상한 세상을 떠나 술과 거문고로

무아경에 빠진 신선의 풍모인 서하당 주인인 김성원의 멋과 풍류를 노래하고 있지만, 사실은 정철 자신의

풍류를 읊은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체험에서 우러난 전원생활의 흥취와 송강 정철의 개성이 잘 드러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환벽당, 취가정, 식영정, 소쇄원을 양쪽에 두고 흐르는 광주천을 옛날에는 자미탄(紫薇灘)이라 불렀는데

개울 양쪽으로 아름다운 배롱나무가 늘어서 있어 얻은 이름일 것이며 이 자미탄 여울가에 있는 환벽당은

비스듬한 비탈에 자연석 축대를 쌓고 지은 정자로 무등산을 내려다보는 눈맛이 가히 일품입니다.

취가정은 광주의 상징길인 충장로로 이름지게 한 장본인인 충장공 김덕령 장군을 위한 정자이다.

호남의 의혼(義魂)을 말할 때 반드시 거명되는 김덕령 장군은 바로 이곳 무등산 자락 석저마을이란

곳에서 태어났으며, 국난에 빠진 민족을 구하기 위해 의병장이 된 장군이었다.

 

취가정의 역사는 이쪽 시가문화권 건물 중에서 제일 나중에 만들어진 정자이다.

김덕령(金德齡: 1568~1596) 장군은 의병장이 되어 29세의 나이에 세상을 하직하였으니 그 분이 어디

정자를 만들만한 시간적, 정신적 여유라도 어디 있었겠는가? 그러함에도 취가정을 김덕령 장군의

유적으로 여기는 데는 그럴만한 연유가 있다.

그러한 연유를 살펴보면 김덕령 장군은 용맹하기 그지없어 광주와 담양 땅에 온갖 전설을 남겨 두었다.

우리나라 어느 지역과 마찬가지로 비운의 주인공인 애기장수설화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다 힘은

장사이며, 거구이고, 겨드랑이에는 용의 비닐이 있으며, 애마와 활을 쏘아 누가 먼저 당도하였는가에

의해 말의 목을 베었다는 등등의 전설 말이다.

김덕령 장군은 1567년(명종 22년)에 태어났다. 그 장소는 창평현 내남면의 석저촌이란 곳이다.

기백과 담력이 빼어난 장군은 환벽당의 주인인 사촌 김윤제에게서 공부를 시작하였다.

장군이 25세가 되던 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나니 장군은 그의 형 덕홍과 함께 담양에서

창의(倡義)하여 전주까지 진격하였다.

하지만 전란 중에 장군의 어머니의 병세가 악화되어 형이 장군에게 노모를 봉양하라 하여 집으로

귀가하였고 잠시 후 노모가 돌아가셨다. 그의 형인 덕홍도 금산전투에서 세상을 떠났다.

장군은 상중(喪中)임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을 다시 모아 왜적의 호남지방 진출을 막아냈으며

그의 명성은 왜적들에게 가장 무서운 존재로 각인되었다.

하지만 이를 시기하는 무리들이 있었으니 충청병사 이시언과 경상우병사 김응서 였다.

그들은 이몽학이 난을 일으키자 장군이 그와 내통하여 모반을 획책하였다고 하여 옥(獄)으로 내몰았다.

장군은 옥에서 억울하게 곤형(棍刑: 몽둥이로 맞는 형벌)에 처해져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 해가 장군의

나이 29세였던 1596년이었다.

이렇게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돌아가신 장군을 신원(伸寃)시킨 것은 현종 2년인 1661년에 되었고,

신원된 다음 병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이러한 장군의 아픔을 고스란히 대변한 시가 있으니 김덕령 장군이 석주 권필(石州 權 : 1569~1612)란

학자의 꿈에 등장하여 읆었다는 취시가(醉詩歌)이다. 그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술취해서 부른 노래
듣는 이 아무도 없구나
꽃과 달에 취하면 무엇하리
공훈을 세운들 무엇하리
공훈을 세우는 것도 뜬구름이요

꽃과 달에 취하는 것도 뜬구름이라
취해서 노래핻 내 마음 누가 알까
다만 긴 칼 부여잡고
임금께 보은할 수 있기만을 원하노라.


이 노래를 들은 석주 권필은 다음과 같이 화답했다고 한다.

장군께서 예전에 칼을 잡으셨으나
장한 뜻이 중도에 꺾이니
이 또한 운명이로고
지하에 계신 영령의 한없는 원한이여
분명 이 노래는 취시가로구나.

 

결국 장군의 억울함은 후손들에게 억겁처럼 쌓여 있었고, 그의 쌓인 한을 달래기 위해 난실 김만식

(蘭室 金晩植)을 비롯한 후손들이 뜻을 모아 고종 27년인 1890년에 취가정이라 하여 이 정자를

짓게 된 것이다.

장군이 젊은 충절의 기개를 갈고 닦았던 무등산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언덕 위에 자리한 취가정에서

우리는 호남의 절의와 충에 대한 정신을 다시금 다듬어 보아야 한다. 무등산이 올려다 보이는 취가정의

담백한 정취를, 그리고 비록 장군은 가고 없지만 그의 이름은 아직도 충장로를 광주의 중심으로 여기는

모든이들의 가슴 속에 그리고 호남을 의향이라고 여기는 이 땅 모든 국민들의 가슴에 꽉 차 있을 것이라

믿는다.

아쉽게도 충장공(忠壯公)의 이러한 사연을 지켜주던 정자 앞의 커다란 노송(老松)은 이제 벌거벗은

몸으로 우리를 맞아주지만, 우리의 정신이 바르게 살아있는 한 그 소나무도 또 더 자랄 수 있고 그것도

생기있는 젊음으로 커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나사모 산우회에서

김덕령 장군의 한과 기개가 들어있는 시

춘산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불붙는다.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 있거니와
이 몸에 내 없는 불 일어나니 끌 물 없어 하노라.

노래 부르는 일일랑 영웅의 할 일이 아니로다.
차라리 칼춤 추며 옥장에서 놀리라.
훗날 병기를 씻고 고향에 돌아가는 날이면
강호에 묻혀 낚시대 드리울 뿐 그밖의 무엇을 구하랴.

송순

자는 수초·성지, 호는 기촌·면앙정. 아버지 태(泰)와 어머니 순창조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명문 양반가 출신으로 21세에 박상에게서 배웠으며, 26세 때는 송세림에게서 배웠다. 1519년(성종 14)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가 되었다. 이후 사간원 정언, 홍문관 직제학, 사간원 대사간을

거쳐 전주부윤, 나주목사 등을 지냈고 77세(선조 2)에 한성부윤, 의정부 우참찬 겸 춘추관사를 끝으로

벼슬을 사양하고 향리로 물러났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4대사화가 일어나는 등 혼란한 때였으나, 50여 년의 벼슬살이 동안 그는 단 한번 1년

정도의 귀양살이만 할 정도로 관운이 좋았다. 이것은 그가 인품이 뛰어났으며 성격이 너그럽고 의리가

있었으며 사람을 가리지 않고 고루 사귀는 등의 이유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성격으로 인해 "

온 세상의 선비가 모두 송순의 문하로 모여들었다"(성수침), "하늘이 낸 완인"(이황)이라고 표현될 정도로

당대의 대표적 인사들과 친교를 유지했다.

 

교우로 신광한·성수침·이황·박우·정만종·송세형 등과 문하인사로 김인후·기대승·고경명·정철·임제 등이 있다.

그는 호남 출신이지만 영남 사림의 학통을 이어받은 박상·박우 형제의 영향을 받았으며, 선산부사로

재직할 때 그곳의 사람들과 교유하는 등, 학문적인 면은 사림파에 가까웠다고 한다. 또한 음률에 밝아

가야금을 잘 탔고 풍류를 아는 호기로운 재상으로 알려져 있다. 1533년(중종 28)에 김안로가 권세를 잡자

귀향하여 면앙정을 짓고 시를 읊으며 지냈는데, 이때부터 임제·김인후·고경명·임억령 등과 교유하며

면앙정가단을 형성했다.

 

작품으로 가사 〈면앙정가〉를 비롯하여 시조 22수와 한시 520여 수가 남아 있는데, 가사 〈면앙정가〉·

〈면앙정단가〉와 같은 시조작품은 면앙정 주변의 빼어난 경치와 그곳에서 유유자적하며 내면의 심정을

수양하는 내용을 노래한 것으로, 강호가도의 선구적 모습을 보여주었다. 또 그의 시조 〈오륜가〉 5수는

주세붕의 〈오륜가〉와 함께 후에 정철의 훈민가류 시조에 영향을 주었다. 담양 구산사에 배향되었으며,

문집으로 〈면앙집〉이 있다.

임금이 친히 지은글 정종대왕22년

면앙정가의 현대어 풀이

무등산 한 줄기 산이 동쪽으로 뻗어 있어, (무등산을) 멀리 떼어 버리고 나와 제월봉이 되었거늘, 끝 없는 넓은 들에 무슨 생각을 하느라고, 일곱 굽이가 한데 움치리어 우뚝우뚝 벌여 놓은 듯, 그 가운데 굽이는 구멍에 든 늙은 용이 선잠을 막 깨어 머리를 얹혀 놓은 듯하며, 넓고 편편한 바위 위에 소나무와 대나무를 헤치고 정자를 앉혀 놓았으니, 마치 구름을 탄 푸른 학이 천 리를 가려고 두 날개를 벌린 듯하다.

옥천산, 용천산에서 내리는 물이 정자 앞 넓은 들에 끊임없이 (잇달아) 퍼져 있으니, 넓거든 길지나, 푸르거든 희지나 말거나(넓으면서도 길며 푸르면서도 희다는 뜻), 쌍룡이 몸을 뒤트는 듯, 긴 비단을 가득하게 펼쳐 놓은 듯, 어디를 가려고 무슨 일이 바빠서 달려가는 듯, 따라가는 듯 밤낮으로 흐르는 듯하다.

물 따라 벌여 있는 물가의 모래밭은 눈같이 하얗게 펴졌는데, 어지러운 기러기는 무엇을 통정(通情)하려고 앉았다가 내렸다가, 모였다 흩어졌다 하며 갈대꽃을 사이에 두고 울면서 서로 따라 다니는고?

넓은 길 밖, 긴 하늘 아래 두르고 꽂은 것은 산인가, 병풍인가, 그림인가, 아닌가. 높은 듯 낮은 듯, 끊어지는 듯 잇는 듯, 숨기도 하고 보이기도 하며, 가기도 하고 머물기도 하며, 어지러운 가운데 유명한 체하여 하늘도 두려워하지 않고 우뚝 선 것이 추월산 머리 삼고, 용구산, 몽선산, 불대산, 어등산, 용진산, 금성산이 허공에 벌어져 있는데, 멀리 가까이 푸른 언덕에 머문 것(펼쳐진 모양)도 많기도 많구나.

흰 구름과 뿌연 안개와 놀, 푸른 것은 산 아지랭이다. 수많은 바위와 골짜기를 제 집을 삼아 두고. 나며 들며 아양도 떠는구나. 오르기도 하며 내리기도 하며 넓고 먼 하늘에 떠나기도 하고 넓은 들판으로 건너가기도 하여, 푸르락 붉으락, 옅으락 짙으락 석양에 지는 해와 섞이어 보슬비마저 뿌리는구나.

뚜껑 없는 가마를 재촉해 타고 소나무 아래 굽은 길로 오며 가며 하는 때에, 푸른 들에서 지저귀는 꾀꼬리는 흥에 겨워 아양을 떠는구나. 나무 사이가 가득하여(우거져) 녹음이 엉긴 때에 긴 난간에서 긴 졸음을 내어 펴니, 물 위의 서늘한 바람이야 그칠 줄 모르는구나.

된서리 걷힌 후에 산빛이 수놓은 비단 물결 같구나. 누렇게 익은 곡식은 또 어찌 넓은 들에 퍼져 있는고? 고기잡이를 하며 부는 피리도 흥을 이기지 못하여 달을 따라 부는 것인가?

초목이 다 떨어진 후에 강과 산이 묻혀 있거늘 조물주가 야단스러워 얼음과 눈으로 자연을 꾸며 내니, 경궁요대와 옥해은산같은 눈에 덮힌 아름다운 대자연이 눈 아래 펼쳐 있구나. 자연도 풍성하구나. 가는 곳마다 아름다운 경치로다.

인간 세상을 떠나와도 내 몸이 한가로울 겨를이 없다. 이것도 보려 하고, 저것도 들으려 하고, 바람도 쏘이려 하고, 달도 맞으려고 하니, 밤은 언제 줍고 고기는 언제 낚으며, 사립문은 누가 닫으며 떨어진 꽃은 누가 쓸 것인가? 아침나절 시간이 부족한데 (자연을 완상하느라고) 저녁이라고 싫을소냐? (자연이 아름답지 아니하랴.) 오늘도 (완상할) 시간이 부족한데 내일이라고 넉넉하랴? 이 산에 앉아 보고 저 산에 걸어 보니 번거로운 마음이면서도 아름다운 자연은 버릴 것이 전혀 없다. 쉴 사이가 없는데(이 아름다운 자연을 구경하러 올) 길이나마 전할 틈이 있으랴. 다만 하나의 푸른 명아주 지팡이가 다 못 쓰게 되어 가는구나.

술이 익었거니 벗이 없을 것인가. 노래를 부르게 하며, 악기를 타게 하며, 악기를 끌어당기게 하며, 흔들며 온갖 아름다운 소리로 취흥을 재촉하니, 근심이라 있으며 시름이라 붙었으랴. 누웠다가 앉았다가 구부렸다 젖혔다가, 시를 읊었다가 휘파람을 불었다가 하며 마음 놓고 노니, 천지도 넓고 넓으며 세월도 한가하다. 복희씨의 태평성대를 모르고 지내더니 이 때야말로 그것이로구나. 신선이 어떻던가 이 몸이야말로 그것이로구나.

江山 風月 거느리고 (속에 묻혀) 내 평생을 다 누리면 악양루 위에 이백이 살아온다 한들 넓고 끝없는 정다운 회포야말로 이보다 더할 것인가.

이 몸이 이렇게 지내는 것도 역시 임금의 은혜이시도다

 

식영정은 서하당 김성원이 그의 장인 임억령을 위해 지은 정자로,

조선 중기 학자이자 정치가인 정철이 성산에 와 있을 때 머물렀던 곳 중의 하나이다.

『서하당유고』의 기록에 따르면 명종 15년(1560)에 지었다고 한다.

김성원은 송강 정철의 처가쪽 친척이며, 송강이 성산에 와 있을 때 함께 공부하던 동문이다.

정철(1536∼1593)은 명종 16년(1561)에 27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 뒤로 많은 벼슬을 지내다가 정권다툼으로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에 내려와

이곳 식영정을 무대로 하여 많은 선비들과 친분을 나누었으며,

시문을 익히고 『성산별곡』 등의 문학작품을 지었다.

식영정 오르는 계단

식영정에 담긴 의미

 

임억령(1496-1568)이 담양부사를 그만두고 성산에 머물렀는데 김성원이 정자를 지어주면서

이름을 부탁하자, '그림자를 쉬게 함', 또는 '그림자를 끊음'이라는 의미로 [장자] 제물편에 나오는

말인 식영(息影)으로써 당호를 삼았다. 세상 영화를 일부러 버리고 산림에 묻혔던 석천,

그는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알았던 선비였다. 집 이름에 담긴 뜻은 식영정을 지으면서

집 이름을 짓게된 연유를 담은 <식영정기>를 참고하면 된다.

식영정은 성산(별뫼)의 한끝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뒤로는

곰실곰실한 소나무가 가득한 성산 봉우리가 섰고, 앞으로는 광주호가 내려다보이며

그 건너로 무등산이 언제나 듬직하게 바라다보인다.

 

-식영정에서 내려다 본 광주호-

무등산 북쪽 원효계곡에서 흘러나온 물은 창계천(창암천)으로 흐르다가

광주호에 잠시 머문다. 광주호는 영산강 유역 개발사업의 하나로 광주댐이 만들어지면서 생긴

호수인데, 신작로나 댐이 생기기 전의 창계천가에는 배롱나무가 줄지어 서서 여름 내내

꽃구름을 이루었다. 그래서 창계천의 옛 이름은 자미탄(紫薇灘)이었다.

(자미는 배롱나무의 한자 이름이다.)

 

이들이 성산의 경치 좋은 20곳을 택하여 20수씩 모두 80수의

식영정이십영(息影亭二十詠)을 지은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이 식영정이십영은 후에 정철의 《성산별곡》의 밑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이 곳을 가장 유명하게 한 것은 송강의 <성산별곡>이다.

<성산별곡>은 계절의 변화에 따라 변화하는 성산 주변의 풍경과 그 속에서 노니는

서하당 식영정 주인 김성원의 풍류를 그리고 있다. 

 

성산별곡(星山別曲) - 정철(鄭澈)

 

 

 

      **원 문**                                                   **현대어 풀이**

                 [1]

엇던 디날 손이 성산의 머믈며셔                   어떤 지나가는 나그네가 성산에 머물면서

서하당 식영정 주인아 내 말 듯소.                 서하당 식영정의 주인아 내 말을 들어보소 

인생 세간(世間)의 됴흔 일 하건마난               인간 세상에 좋은 일이 많건마는

엇디한 강산(江山)을 가디록 나이 녀겨             어찌 한 강산을 갈수록 낫게 여겨

적막 산중의 들고 아니 나시난고                   적막한 산중에 들어가고 아니 나오시는가.

송근(松根)을 다시 쓸고 죽상(竹床)의 자리 보아    솔뿌리를 다시 쓸고 대나무 침대에 자리를 보아

져근덧 올라 안자 엇던고 다시 보니                잠시 올라앉아 어떤가 하고 다시 보니

천변(天邊)의 떳난 구름 서석(瑞石)을 집을 사마    하늘가에 떠 있는 구름이 서석을 집을 삼아

나는 듯 드는 양이 주인과 엇더한고                나가는 둣하다가 들어가는 모습이 주인과 어떠한가.

창계(滄溪) 흰 믈결이 정자 알픠 둘러시니          시내의 흰 물결이 정자 앞에 둘러 있으니

천손운금(天孫雲錦)을 뉘라셔 버혀 내여            하늘의 은하수를 누가 베어내어

닛는 듯 펴티는 듯 헌사토 헌사할샤                잇는 듯 펼쳐 놓은 듯 야단스럽기도 야단스럽구나.

산중의 책력(冊曆) 업서 사시(四時)를 모르더니     산 속에 달력이 없어서 사계절을 모르더니 

눈 아래 헤틴 경(景)이 쳘쳘이 절노 나니           눈 아래 헤친 경치가 철을 따라 절로 생겨나니

듯거니 보거니 일마나 선간(仙間)이라              듣고 보는 것이 모두 신선이 사는 세상이로다.

                [2]

매창(梅窓) 아젹 벼테 향기예 잠을 깨니            매창 아침볕의 향기에 잠을 깨니

선옹(仙翁)의 해욜 일이 곳 업도 아니하다          산늙은이의 할 일이 아주 없지도 아니하다

울 밋 양지 편의 외씨를 삐허두고                  울타리 밑 양지 편에 오이씨를 뿌려 두고

매거니 도도거니 빗김의 달화 내니                 김을 매고 북을 돋우면서 비 온 김에 가꾸어 내니

청문고사(靑門故事)를 이제도 잇다 할다            청문의 옛이야기가 이제도 있다 하리라.

망혜(芒鞋)를 뵈야 신고 죽장(竹杖)을 흣더디니     짚신을 죄어 신고 대나무 지팡이르 흩어 짚으니

도화 픤 시내 길히 방초주(芳草洲)의 니어셰라.     도화 핀 시냇길이 방초주에 이어졌구나.

닷봇근 명경名鏡 중中 절로 그린 석병풍(石屛風)    잘 닦은 거울 속에 저절로 그린 돌병풍

그림애를 버들 사마 서하(西河)로 함끠 가니        그림자를 벗 삼아 서하로 함께 가니

도원(桃園)은 어드매오 무릉(武陵)이 여긔로다      무릉도원이 어디인가, 여기가 바로 그곳이로다.

                [3]

남풍이 건듯 부러 녹음(綠陰)을 혜텨 내니          남풍이 문득 불어 녹음을 헤쳐 내니

절(節) 아는 괴꼿리난 어드러셔 오돗던고           철을 아는 꾀꼬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희황(羲皇) 벼개 우희 픗잠을 얼픗 깨니            희황 베개 위에 선잠을 얼핏 깨니

공중 저즌 난간(欄干) 믈 우희 떠 잇고야           공중의 젖은 난간이 물 위에 떠 있구나.

마의(麻衣)를 니믜 차고 갈건(葛巾)을 기우 쓰고    삼베옷을 여며 입고 갈건을 비껴쓰고

구브락 비기락 보난 거시 고기로다.                허리를 구부리거나 기대면서 보는 것이 고기로다.

하루밤 비 끠운의 홍백련(紅白蓮)이 섯거 픠니      하룻밤 비 온 뒤에 붉은 연꽃과 흰 연꽃이 섞어 피니

바람끠 업시셔 만산(萬山)이 향긔로다              바람기가 없어서 모든 산이 향기롭다.

염계(염溪)를 마조보와 태극(太極)을 뭇잡는 듯     염계를 마주하여 태극성을 묻는 듯

태을진인이 옥자(玉字)를 헤혓는 듯                태을진인이 옥 글짜를 얻은 듯

노자암 건너보며 자미탄 겨테 두고                 노자암을 건너보며 자미탄을 곁에 두고

장송長松을 차일(遮日)사마 석경石逕의 안자하니    큰 소나무를 차일삼아 돌길에 앉으니 

인간(人間) 유월(六月)이 여긔는 삼추(三秋)로다    인간 세상의 유월이 여기는 가을이구나.

청강(淸江)의 떳는 올히 백사(白沙)의 올마 안자    청강에 떠 있는 오리가 흰 모래에 옮겨 앉아

백구(白鷗)를 벗을 삼고 잠 깰 줄 모르나니         흰 갈매기를 벗 삼고 잠깰 줄을 모르나니

무심코 한가하미 주인과 엇더하니                  무심하고 한가함이 주인과 비교하여 어떤가.

                 [4]

오동(梧桐) 서리달이 사경(四更)의 도다오니        오동나무 사이로 가을달이 사경에 돋아오니 

천암만학(千巖萬壑)이 나진들 그러할가             천암만학이 낮보다도 더 아름답구나.

호주(湖洲) 수정궁을 뉘라셔 옴겨 온고             호주의 수정궁을 누가 옮겨 왔는가.

은하를 띄여 건너 광한전의 올랏는 듯              은하수를 뛰어 건너 광한전에 올라 있는 듯

짝 마즌 늘근 솔란 조대(釣臺)예 셰여두고          한 쌍의 늙은 소나무를 조대에 세워 놓고

그 아래 배를 띄워 갈 대로 더뎌 두니               그 아래에 배를 띄워 가는 대로 내버려 두니

홍료화紅蓼花 백빈주(白빈洲) 어느 사이 디나관데    홍료화 백반주를 어느 사이에 지났길래

환벽당(環碧堂) 용(龍)의 소히 뱃머리예 다하셰라.   환벽당 용의 못이 뱃머리에 닿았구나.

청강(淸江) 녹초변(綠草邊)의 쇼 머기난 아해들이   푸른 풀이 우거진 강변에서 소 먹이는 아이들이

석양의 어위 계워 단적(短笛)을 빗기 부니          석양의 흥을 못 이겨 피리를 비껴 부니

믈 아래 잠긴 용이 잠 깨야 니러날 듯               물 아래 잠긴 용이 잠을 깨어 일어날 듯

내끠예 나온 학이 제 기슬더뎌두고 半空의소소   뜰듯 연기 가운데 나온 학이 제집을 버려두고 방공에 솟아 뜰듯 

소선(蘇仙) 적벽赤壁은 추칠월(秋七月)이 됴타 호듸  소동파의 적벽부에는 가을 칠월이 좋다 하였으되

팔월 십오야(十五夜)를 모다 엇디 과하는고          팔월 보름밤을 모두 어찌 칭찬하는가.

섬운(纖雲)이 사권(四捲)하고 믈결이 채 잔 적의    잔 구름이 흩어지고 물결도 잔잔한 때에

하늘의 도단 달이 솔 우희 걸려거든                하늘에 돋은 달이 소나무 위에 걸렸으니

잡다가 빠딘 줄이 적선(謫仙)이 헌사할샤    달을 잡으려다 물에 빠졌다는 이태백의 일이 야단스럽다.

                 [5] 

공산의 싸힌 닙흘 삭풍(朔風)이 거두 부러          공산에 쌓인 낙엽을 북풍이 걷으며 불어

떼구름 거느리고 눈조차 모라오니                  떼구름을 거느리고 눈까지 몰아오니

천공(天公)이 호사로와 옥(玉)으로 고즐 지어       천공이 호사로워 옥으로 꽃을 피워

만수천림(萬樹千林)을 꾸며곰 낼셰이고             온갖 나무들을 잘도 꾸며 내었구나.

앏 여흘 가리 어러 독목교(獨木橋) 빗겻는듸        앞 여울물 가리워 얼고 외나무다리 걸려 있는데

막대 멘 늘근 즁이 어내 뎔로 갓닷 말고            막대를 멘 늙은 중이 어느 절로 간단 말인가.

산옹(山翁)의 이 부귀를 남다려 헌사마오           산늙은이의 이 부귀를 남에게 소문내지 마오.

경요굴(瓊瑤窟) 은세계銀世界를 차자리 이실셰라  경요굴 은밀한 세계를 찾을 이가 있을까 두렵도다.

                 [6] 

산중의 벗이 업서 한기(漢紀)를 싸하 두고          산중에 벗이 없어 서책을 쌓아 놓고

만고(萬古) 인물을 거사리 혜혀하니                만고의 인물들을 거슬러 세어 보니

성현(聖賢)도 만커니와 호걸(豪傑)도 하도할샤      성현도 많거니와 호걸도 많고 많다.

하늘 삼기실 제 곳 무심(無心)할가마는             하늘이 인간을 지으실 때 어찌 무심하랴마는

엇디한 시운(時運)이 일락배락 하얏는고            어찌 된 시운이 흥했다 망했다 하였는가.

모를 일도 하거니와 애달옴도 그지업다             모를 일도 많거니와 애달픔도 끝이 없다.

기산(箕山)의 늘근 고블 귀는 엇디 싯돗던고        기산의 늙은 고불(古佛) 귀는 어찌 씻었던가.

박소래 핀계하고 조장이 가장 놉다                 소리가 난다고 핑계하고 표주박을 버린

                                                              허유의 조장이 가장 높다.

인심이 낫 갓타야 보도록 새롭거늘                 인심이 얼굴 같아서 볼수룩 새롭거늘

세사(世事)는 구롬이라 머흐도 머흘시고            세상사는 구름이라 험하기도 험하구나.

엊그제 비즌 술이 어도록 니건나니                 엊그제 빚은 술이 얼마나 익었느냐?

잡거니 밀거니 슬카장 거후로니                    술잔을 잡거니 권하거니 실컷 기울이니

마음의 매친 시름 져그나 하리나다                 마음에 맺힌 시름이 조금이나마 덜어지는구나.  

거믄고 시옭 언저 풍입송(風入松) 이야고야         거문고 줄을 얹어 풍입송을 타자꾸나.

손인동 주인인동 다 니저 바려셔라.                손님인지 주인인지 다 잊어버렸도다.

장공(長空)의 떳난 학이 이 골의 진선(眞仙)이라    높고 먼 공중에 떠 있는 학이 이 골의 진선이라.

요대(瑤帶) 월하(月下)의 행혀 아니 만나신가       이전에 달 아래서 혹시 만나지 아니하였는가?

손이셔 주인다려 닐오대 그대 긘가 하노라.    손님이 주인에게 이르기를 그대가 곧 진선인가 하노라.

 

 

아름다운 경치와 좋은 주인을 찾아 , 이곳에는 수많은 문인과 학자들이 드나들었다.

송순, 김윤제, 김인후, 기대승, 양산후, 양산보, 백광훈, 송익필, 김덕령.....그중에서도 

임억령, 김성원, 정철, 고경명은 식영정 사선(四仙)이라 불릴 정도였다. 그들은 식영정에서

보이고 들리는 풍경들을 시제로 하여 수많은 시를 남겼다.

서하당과부용당

 

식영정 바로 옆에는 김성원이 자신의 호를 따서 서하당이라고 이름 붙인 또 다른 정자를 지었는데,

없어졌다가 최근 복원되었다. 《서하당유고》 행장에 따르면, 김성원이 36세 되던 해인 1560년(명종 15)에

식영정과 서하당을 지었음을 알 수 있다.

 

부용당

서하당

장서각

상사화와 하얀 무궁화

송강정 오르는길

송강 정철이 대사헌을 지내다 정쟁으로 물러나와 죽록정을 중수하여 송강정이라 일컬었다.

(선조18년- 1585년)송강은 여기에서 사미인곡 등을 지었다. 1955년 후손들에 의하여 중수되었으며,

사미인곡 시비가 세워져 있다. 송강 정철은 선조17년(1584)에 대사헌(大司憲)이 되었으나 동인들이

합세하여 서인을 공박함이 치열해지자 마침내 양사(兩司)로부터 논척(論斥)을 받아 다음해 조정을

물러나자 이곳 창평으로 돌아와 4년 동안을 평범한 인간으로서 또한 시인으로서 조용한 은거생활을 했다.

 

여기서 그는 사미인곡을 썼던 것이다.『송강별집(松江別集)』권7 기옹소록에

「前後思美人曲 在此鄕(昌平) 時所作不記某年 似是丁亥戊子年間耳」라는 기록을 보면 양사미인곡

(兩思美人曲) 제작은 창평으로 돌아온 해로부터 2∼3년 뒤가 된다.『사미인곡』은 제명(題名) 그대로

연군지정(戀君之精)을 읊은 노래이다. 그 수법은 한 여인이 남편을 이별하고 사모하는 정을 기탁해서

읊은 것인데 송강 자신의 충정을 표현한 노래라 하겠다.

 

심각한 실의에 빠져 있었던 때이라 송강은 이때 세상을 비관했고 음주와 영탄으로 이곳에서 세월을

보냈던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골기와 팔작지붕 건물이다. 중재실(中齋室)이 있는 구조이며

정면엔 송강정(松江亭) 측면엔 '죽록정(竹綠亭)'이란 현판을 가지고 있다.

사미인곡



이 몸이 태어날 때에 임을 따라 태어나니,
한평생 함께 살아갈 인연이며 이 또한 하늘이 어찌 모를 일이던가?
나는 오직 젊어 있고, 임은 오직 나를 사랑하시니,
이 마음과 이 사랑을 비교할 곳이 다시 없다.

 

 



평생에 원하되 임과 함께 살아가려 하였더니,
늙어서야 무슨 일로 외따로 두고 그리워하는고?
엊그제에는 임을 모시고 광한전에 올라 있었더니,
그 동안에 어찌하여 속세에 내려 왔느냐?
내려올 때에 빗은 머리가 헝클어진 지 3년일세.
연지와 분이 있네마는 누구를 위하여 곱게 단장할꼬?
마음에 맺힌 근심이 겹겹으로 쌓여 있어서
짓는 것이 한숨이요, 흐르는 것이 눈물이라.
인생은 한정이 있는데 근심은 한이 없다.

 

 



무심한 세월은 물 흐르듯 하는구나.
더웠다 서늘해졌다 하는 계절의 바뀜이 때를 알아 지나갔다가는 이내 다시 돌아오니,
듣거니 보거니 하는 가운데 느낄 일이 많기도 하구나.

 

 

 



봄바람이 문득 불어 쌓인 눈을 헤쳐 내니,
창밖에 심은 매화가 두세 가지 피었구나.
가뜩이나 쌀쌀하고 담담한데, 그윽히 풍겨 오는 향기는 무슨 일인고?
황혼에 달이 따라와 베갯머리에 비치니,
느껴 우는 듯 반가워하는 듯하니, 임이신가 아니신가
저 매화를 꺾어 내어 임 계신 곳에 보내고 싶다.
그러면 임이 너를 보고 어떻다 생각하실꼬?

 

 



꽃잎이 지고 새 잎 나니 녹음이 우거져 나무 그늘이 깔렸는데
비단 포장은 쓸쓸히 걸렸고, 수 놓은 장막만이 드리워져 텅 비어 있다.
연꽃 무늬가 있는 방장을 걷어 놓고, 공작을 수 놓은 병풍을 둘러 두니,
가뜩이나 근심 걱정이 많은데, 날은 어찌 길던고?
원앙새 무늬가 든 비단을 베어 놓고 오색실을 풀어 내어
금으로 만든 자로 재어서 임의 옷을 만들어 내니,
솜씨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격식도 갖추었구나.
산호수로 만든 지게 위에 백옥으로 만든 함에 담아 앉혀 두고,
임에게 보내려고 임 계신 곳을 바라보니,
산인지 구름인지 험하기고 험하구나.
천 리 만 리나 되는 머나먼 길을 누가 찾아갈꼬?
가거든 열어 두고 나를 보신 듯이 반가워하실까?

 

 



하룻밤 사이의 서리 내릴 무렵에 기러기 울며 날아갈 때,
높다란 누각에 혼자 올라서 수정알로 만든 발을 걷으니,
동산에 달이 떠오르고 북극성이 보이므로,
임이신가 하여 반가워하니 눈물이 절로 난다.
저 맑은 달빛을 일으켜 내어 임이 계신 궁궐에 부쳐 보내고 싶다.
누각 위에 걸어 두고 온 세상을 비추어,
깊은 산골짜기에도 대낮같이 환하게 만드소서.

 

 



천지가 겨울의 추위에 얼어 생기가 막혀, 흰 눈이 일색으로 덮여 있을 때에,
사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날짐승의 날아감도 끊어져 있다.
소상강 남쪽 둔덕도 추위가 이와 같거늘,
하물며 북쪽 임 계신 곳이야 더욱 말해 무엇하랴?
따뜻한 봄기운을 부치어 내어 임 계신 곳에 쐬게 하고 싶다.
초가집 처마에 비친 따뜻한 햇볕을 임 계신 궁궐에 올리고 싶다.
붉은 치마를 여미어 입고 푸른 소매를 반쯤 걷어 올려
해는 저물었는데 밋밋하고 길게 자란 대나무에 기대어서 이것저것 생각함이 많기도 많구나.
짧은 겨울 해가 이내 넘어가고 긴 밤을 꼿꼿이 앉아,
청사초롱을 걸어둔 옆에 자개로 수 놓은 공후라는 악기를 놓아 두고,
꿈에서나 임을 보려고 턱을 바치고 기대어 있으니,
원앙새를 수 놓은 이불이 차기도 차구나. 이 밤은 언제나 샐꼬?

 

 



하루도 열두 때, 한 달도 서른 날,
잠시라도 임 생각을 말아 가지고 이 시름을 잊으려 하여도
마음속에 맺혀 있어 뼛속까지 사무쳤으니,
편작과 같은 명의가 열 명이 오더라도 이 병을 어떻게 하랴.
아, 내 병이야 이 임의 탓이로다.
차라리 사라져 범나비가 되리라.
꽃나무 가지마다 간 데 족족 앉고 다니다가
향기가 묻은 날개로 임의 옷에 옮으리라.
임께서야 나인 줄 모르셔도 나는 임을 따르려 하노라.

- 송강가사(松江歌辭) 성주본(星州本)


사미인곡

1588년(선조 21) 고향인 창평에서 지었다. 정철이 50세 되던 해인 1585년 동인이 합세해 서인을 맹렬히

공격하는 바람에, 사간원과 사헌부 양사로부터 탄핵을 받고 부득이 조정에서 물러나 고양(高陽)을 거쳐

창평(昌平)으로 내려가 한가하게 지내면서 마음속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때가 있었는데, 이 작품은

그때 지은 것이다. 2음보 1구로 126구이며, 음수율에서는 3~4조가 주조를 이룬다.

 

구성은 서사(序詞)·춘원(春怨)·하원(夏怨)·추원(秋怨)·동원(冬怨)·결사(結詞)의 6단락으로 되어 있는데,

춘원부터 동원까지가 본사(本詞)가 된다. 전체 구성은 계절의 변화를 축으로 하는 사시가(四時歌)

형태인데, 4계절의 변화에 따라 님 생각의 간절함과 짙은 외로움을 토로했다. 선조 임금을 사모하는

간절한 연군의 정을 님을 생이별하고 연모하는 여인의 마음으로 나타내 자신의 충정을 토로했다.

여성적인 정조나 어투로 분위기를 잘 살리고 있으며, 사용된 시어나 정경의 묘사가 탁월하다.

애절하면서도 속되지 않은 간결한 문체로 국문시가의 가능성을 입증한 노래이다

 

분향하고 묵념을 하고 묘역을 돌아본다

이많은 사람들을 누가 죽였을까?

추모관

아무말도 하고 싶지 않다

 

 


http://youtu.be/CD_hAujgt0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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