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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 박수량 백비와 백양사

장성 황룡면 아곡리 홍길동 테마 마을은 옆지기 태어나기 전 장인어른의 고향이다

태어나기 전 육이오 사변으로 피난을 나와 들어가지 않은 벽촌이다

지금은 홍길동 테마마을로 자리잡아 천지 개벽을 한 곳인데 시설을 돌아보려 했으나

코로나 19로 모두 폐쇄하고 야영장만 운영하는 것 같아서 그냥 지나쳤다

또한 김인후의 필암서원도 겉에서만 보고 나왔는데 아쉽다 옆지기의 실망감이 큰 것 같다

친척집만 들렸다가 마을 뒤에 박수량선생의 백비만 보고 백양사로 발길를 돌렸다(7/31)

blog.daum.net/kts450/7397786

자세한 것은 위에 주소를 클릭하면 필암서원을 볼 수가 있습니다

 

조선 중기에 문신으로 활동했던 박수량(1491~1554)의 묘소 앞에 세운 비석이다.

이 비석에는 아무런 글도 쓰여 있지 않아 백비(白碑)라 불리고 있는데, 청백리로 이름 높았던 그의 공적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글을 남기지 않았다고 전한다. 비석의 주인공인 박수량은 자(字)는 군수(君遂),

호는 아곡(我谷), 시호는 정혜(貞惠)이다. 벼슬은 예조참판, 형조판서, 호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조정에 출사한 시기가 38년이나 되고 재상에 이르는 직위에까지 올랐지만, 조그만 저택도 없을 정도로

청렴했다고 한다. 박수량이 생전에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초야(草野)의 출신으로 외람되게

판서(判書)의 반열에 올랐으니, 영광이 분수에 넘쳤다. 내가 죽거든 절대 시호를 청하거나 묘비를 세우지

말라.”고 하였는데, 그가 죽은 후 장례 치를 비용도 없을 정도로 곤궁해 대사헌 윤춘년(尹春年)이

명종에게 아뢰어 겨우 장사를 치를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비석은 박수량의 청빈한 삶과 청백리 정신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는 왜 "내가 죽거든 절대 시호(諡號)를 청하거나, 묘비를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을까!

이에 대해 한국학 호남진흥원 이종범 원장은 "을사사화로 착한 선비가 쓰러지고 휘어지는

오욕의 세월, 정경 벼슬이 무슨 영광이며, 청백리가 무에 대수였겠는가? 혹여 벼슬과 명예에

기대지 말고, 나의 본 마음을 기억하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라고 한다

박수량은 40여년 동안 관리 생활을 하면서 두번에 걸쳐 청백리에 녹선되었는데, 죽은 후 그의 청백 정신을

기리기 위해 비문을 세기지 않고 호패형 비(碑)만 세웠는데, 이 비(碑)를 백비(白碑)라 부른다.

박수량은 1514년(중종 9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ㆍ우참찬(右參贊)등 직책이

경상(卿相)의 지위에 이르렀으며, 1546년(명종 원년)과 1551년(명종 6년) 2번에 걸쳐 청백리에 올랐다.

일찍이 자식들이 셋집을 마다하고 서울에 집을 지으려 하자 크게 꾸짖기를「나는 본래 시골 출신으로

외람되게 성은(聖恩)을 입어 판서의 반열에까지 올랐으니 분수에 넘는 영광이다. 그런데 너희들이 어찌

서울에 집을 지을 수 있겠는가.」면서 자주 타일렀다. 또 죽음에 이르러서는 「죽은 후에 절대로 시호(諡號)를

청하거나, 비석을 세우지 말라」고 유언 하였다.

1554년(명종 9년) 그의 부음을 아뢰자 명종은 이틀 동안 정무를 철폐하고 예관(禮官)을 보내어

유제(諭祭)하였는데, “박수량의 집이 곤궁하여 상사(喪事)를 치를 수도 없고 시골로 내려가는 것 역시

어렵다 하니, 일로(一路)에 관인(官人)들로써 호송케 하고 상수(喪需. 장사 비용)를 제급하고 증직(贈職)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국가의 특별한 부의로 장례를 치렀다.

38여년의 관리 생활을 하면서 직책이 경상(卿相)의 지위에 까지 이르렀으나, 좋은 집한 채 마련하지 못할

정도로 청렴 결백하게 공직을 수행하다 한 섬도 못 된 곡식만 남기고 떠나갔다. 겉은 깨끗해도 속이

더러운 자들이 식은땀을 흐르고도 남을 청빈이었다.

 

이후 후손은 그의 뜻을 받들어 비석에 아무 것도 새기지 않고 그냥 비(碑)만 세웠다.

이 호패형 무서백비(無書白碑)는 청백리 박수량의 청빈한 삶의 정신을 당대는 물론 후대에까지 귀감이

되게 하는 상징적인 유물로서 그 의미가 크다 할 것이다

홍길동 테마마을 멀리서 한장 담고 떠난다

백양사 숙박촌 호텔에서 하루밤 묵고 아침에 나와 백양사를 한바퀴 돌아보았다

쌍계루에서 바라본 백양사

청류암 쪽에서 흘러 내리는 계곡

대가람 백양사

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 본사이다. 632년(백제 무왕 33) 여환이 창건하여 백암산백양사라고 했으며,

1034년(덕종 3) 중연이 중창하면서 정토사라고 개명했다.

1350년(충정왕 2) 각진국사가 3창하고, 1574년(선조 7) 환양이 현재의 백양사라고 개칭했는데 이것은

환양의 〈법화경〉 독성소리에 백학봉에 있는 흰 양떼가 자주 몰려온 것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한다.

1786년(정조 10) 환성이, 1864년(고종 1)에는 도암이 중건했다. 근세 이후에는 송만암(宋曼庵)에 의해 교세와

사운이 융성했다. 일제강점기에는 31본산 중의 하나였으며 현재는 26개의 말사를 관장하고 있다.

현존 당우로는 대웅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3호)·극락보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2호)·사천왕문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4호)·명부전·칠성각·진영각·보선각·설선당·선실·요사채·범종각 등이 있다.

 

이밖에 백양사 재흥에 힘쓴 태능의 소요대사부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6호)와 고려 때 각진국사가 심은

것으로 전해지는 절 주위의 비자나무는 천연기념물 제153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이 절에서는 전통적인

재식이 집전되는데 관조부·전경부·정근부·송주부·범음부가 각각 행해진다.

사천왕상

사천왕문에서 바라본 경내

보리수 나무

범종각

요사채

진영각

명부전과 극락보전

템플스테이

명부전

문화재청은 백양사 극락보전 내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불상 1구와 대좌 1점, 중수발원문 2점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 고시했다.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지난 2008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제289호)에 지정된 이후 10여년 만에

보물로 승격됐다.

이 좌상은 1607년 조선의 대표 조각승 현진이 제작했다. 대좌 내부에 남아 있는 묵서명(먹 글씨)에

따르면 선대 왕의 명복과 성불을 기원하는 의미로 조성했으며, 현존하는 현진의 작품 가운데 가장

오래된 불상이다.

백학봉

장성 백양사 백학봉은 장성군 백암산 아래에 위치한 백양사와 백학봉 일대의 암벽 및 식생 경관이 아름다워

2008년에 명승 제38호로 지정되었다. 예로부터 대한 8경의 하나로 꼽혀왔을 만큼 이름난 곳이다.

 

전라북도와 전라남도의 도계를 이루고 있는 백암산은 내장산국립공원에 포함되어 있는 산으로서, 이 산에서

뻗은 능선이 백학봉까지 이어진다. 장성호 상류의 장성군 북하면에서 국립공원 지역으로 진입하면 백양사

입구에 다다른다. 대한불교조계종의 제18교구 본사이자 고불총림으로써 원오국사(圓悟國師, 1215∼1286)와

각진국사(覺眞國師, 1270∼1355) 등 고승들이 주석을 맡아온 유래가 깊은 사찰이다.

 

백양사가 위치한 백암산은 내장산과 함께 단풍으로 특히 유명하다. 천연기념물 제153호인 백양사 비자나무

숲을 비롯하여 백양사 고불매와 함께 1,500여 종의 다양하고 풍요로운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백학봉의

아름다운 자태는 백양사 대웅전과 쌍계루에서 조망할 수 있다.

내장산 국립공원 안에 있는 절로, 백제 무왕(632년)때 창건했다고 전한다. 거대한 바위를 배경으로 좌우에

맑고 찬 계곡물이 흘러내려 경치가 매우 수려하다. 가을단풍을 비롯하여 일년내내 변화있는 아름다운 경치를

보여준다. 대웅전, 극락보전, 사천왕문은 지방문화재로 소요대사부도는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갈참나무와 단풍나무가 도열하듯 서 있는 숲길을 지나 백양사 입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쌍계루가 눈에 띈다.

앞에는 계곡을 막아 만든 연못, 뒤로는 기암절벽이 병풍처럼 서 있어 연못물에 어른거리는 쌍계루의 모습이

한폭의 그림 같다. 쌍계루를 지나면 대웅전과 극락보전, 부도탑이 나온다.

백양사는 창건 당시 백암사였다가 고려 때 정토사로 바뀌었다. 조선선조 때 환양조사가 불경을 읽을 때마다

흰양이 설법을 들었다해서 백양사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선도량으로 유명했던 곳으로 불교계를 이끌었던

고승들도 많이 배출되었다. 일제 때 2대 교정(종정)을 지낸 환응, 조계종 초대 종정 만암, 태고종 초대 종정 묵담

등 근래에 와서 서옹당 종정 등 고승만도 5명이나 된다.

 

등산로 쪽으로 올라가면 암자가 많다. 약사암과 운문암,천진암 등은 경관도 뛰어나다. 절 입구에서 20분

거리인 약사암은 전망대 격으로 첩첩산중에 둘러싸인 백양사의 모습이 한눈에 조망된다. 절경내와

맞은 편에는 난대성의 늘푸른나무인 비자나무 5,000그루가 군락을 이뤄, 천연기념물 제15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주차장에서 절로 오르는 0.5km 구간에 우거진 수백년된 아름드리 갈참나무 거목들,

3,000여 그루의 고로 쇠나무와 비자림은 산림욕 하기에 더없이 좋다.

* 문화재 백양사 대웅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3호),백양사 사천왕문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4호),

극락보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2호),소요대사부도 (보물 제1346호),비자나무 (천연기념물 153호)

약간의 물안개가 피어 오르고 있다

백학봉에는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는데 조금 있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 같다

 

작은 폭포에서 여유를 부리며 사진놀이도 하면서 백양사 아침 산책을 마친다
http://youtu.be/ax3xzvvol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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