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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광주.제주

장성호와 문화 예술공원

장성호의 상류 지역인 쌍웅리 일대에는 장성문화예술공원이 있다.

문화예술공원은 평지와 동산으로 이뤄져 있는데, 평지에는 이미 임권택 감독이 의자에 앉아 촬영을

지휘하는 모습의 동상이 있다. 동산에는 시(詩)·서(書)·화(畵) 조형물 수십 점이 전시 중이다.

조형물을 감상하며 쉬엄쉬엄 거닐다 보면 30~40분이 금방 지나간다.

동산 꼭대기의 전망대에 서면 장성호의 풍광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장성 문화예술공원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시인들의 보석 같은 시, 서화, 명언 등 103점의 예술작품을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다는 것도 눈여겨 볼거리지만, 시의 멋과 낭만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조각 예술의 향연이라서 더 발길을 붙잡는다

 

첫 번째 시문을 열었던 이는 가사문학의 대가 다산 정약용의 '차장성'인데,

조각 작품 위로 다산은 손에 닿을 듯 아름다운 장성을 보며 감탄하며 내려다보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다산이 18세 때 화순 현감으로 있던 아버지를 뵙고자 가던 길초에 장성에 도착하여 지은 시다,

전북 정읍에서 갈재를 넘어 장성의 따뜻하고 아름다운 자연 풍광을 읊조린 이야기다.

 

윤석중

아동문학가. 1924년 <신소년>지에 동시 <봄>으로 등단했으며 이후 전통적 정형률에서 벗어난 새로운

형태의 동시와 동요를 써서 한국의 아동문학 발전에 이바지했다. 방정환 선생의 뒤를 이어

<어린이>지 주간을 맡았으며, 일생을 동요와 글짓기에 바쳤다. 대표작은 <낮에 나온 반달>·

<퐁당 퐁당>·<도리도리 짝짝궁> 등이다.

박상의(朴尙義, 1538~1621)는 조선 중기 때의 유학자이자 풍수지리학의 대가로, 일찍이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예언했다고 한다. 전라남도 장성군에서 출생하였으며 묘소 역시 장성군에 위치해 있어서인지,

그에 관한 설화는 주로 전라도 일대와 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 일대에서 활발히 전승된다.

조금만 올라가면 서로가 팔을 굳게 잡고 있는 동상으로 손과 손의 사이에는

'나는 밥을 먹어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잠을 자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서 해왔다.

이것은 내 목숨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라는 도산 안창호의 어록이 새겨진 작품입니다

 

안창호

일제강점기 애국계몽 활동을 전개하고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독립운동가로 호는 도산. 가난한 농부의

집안에서 태어나 할아버지 밑에서 성장했으며 공부를 마친 뒤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1907년

신민회를 조직, 191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을 결성하였다. 1926년 2월 상하이로 돌아와서 만주에

흩어진 군사 활동을 통일하여 대독립당을 결성하고자 했다. 그러나 민족운동의 이념과 노선이 통일되지

못해 실패로 끝났다. 1932년 4월 윤봉길의 폭탄투척 사건으로 일본경찰에 붙잡혀 4년형을 선고받은뒤

가출옥했다. 1937년 수양동우회사건으로 다시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가 병보석으로 나왔으나,

이듬해 죽었다.

 진주성 제2차 전투가 끝난 직후인 1593년 7월 16일에 이순신(李舜臣)은 사헌부 지평 현덕승(玄德升)에게

보낸 편지에서 ‘호남은 국가의 보장이니 만약 호남이 없으면 곧 국가도 없다[湖南國家之保障 若無湖南是

無國家]’라는 말을 남겼다. 이순신의 이 말은 임진왜란 극복 과정에서 호남이 보여준 결정적 역할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호남의 역할이 가능하였던 것은 호남이 지켜졌기 때문이었고, 호남이 지켜질 수

있었던 것은 웅치 전투가 있었기 때문이다.

송재 서재필

전남 보성 출신으로 개화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인 서재필 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서대문독립공원

내에 건립되었다. 선생은 1896년 4월 7일 한국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을 발간하였고 윤치호,

이상재 등의 협력을 얻어 독립협회를 창립하여 종래 중국을 사대하던 상징인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국민의 성금을 모아 한국독립의 상징으로서 독립문을 세웠으며 종래의 모화관을 개수하여 독립관으로

고치고 독립협회의 집회장소와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또한, 토론회를 통해 시민들을 모아 나라의 독립과개혁에 대한 토론을 시키고 만민공동회를 조직하여

러시아의 부산 절영도 조차(租借) 요구를 반대하는등 국민의 독립사상과 민권사상을 크게 신장시켰다.

1919년 3.1운동 이후 임시정부가 워싱턴에구미위원회를 설치하자 그 위원장을 맡아 독립운동을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고 전 재산을 독립운동의 경비에 바치는 등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헌신하셨으나

1951년 1월 5일 미국에서 87세의 생을 마감하였다.

기삼연

위정척사론에 근거한 의병활동을 벌였다. 백마장군(白馬將軍)으로 불렸다.

본관은 행주. 자는 경로(景魯), 호는 성재(省齋). 아버지는 봉진(鳳鎭)이다.

재종숙(再從叔)인 기정진(奇正鎭)에게서 글을 배웠다. 1896년(건양 1) 2월 삼종질(三從姪)인 기우만(奇宇萬)과

같이 의병을 일으켰다가, 정부가 신기선(申箕善) 등을 보내 해산을 권유하자 이에 따랐다.

1902년(광무 6) 다시 의병을 일으키려다가 체포되어 평리원에 갇혔으나, 원장 이용태(李容泰)의 도움으로 탈출했다.

1907년(융희 1) 영광 수록산(隨錄山)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김용구(金容球)·김엽중(金燁中)·김준(金準) 등과

합류하여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의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수백 명의 의병을 이끌고 고창 문수사

(文殊寺)의 적진을 야습하여 크게 무찔렀다. 이어 영광·고창·부안·정읍 등지에서 이기고, 최상진(崔相鎭) 등

관리들의 내응으로 광주까지 영역을 넓혔다.

그뒤 군량을 마련하기 위해 법성포를 습격하기도 하는 등 유격전을 전개했다. 이해 12월 설을 쇠려고 담양의

추월산성(秋月山城)에 들어갔다가 적의 습격을 받아 부상을 입었다. 순창의 복흥산(福興山)에 숨어 재기를

꾀했으나 체포되어 광주에서 총살당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김인후

해동18현의 한 사람.

하서 김인후는 신라 경순왕 김부(金傳)의 둘째 왕자 학성부원군(鶴城府院君) 김덕지(金德摯)의

후예이다. 그의 5대조인 조선 개국원종공신 흥려군(興麗君) 김온(金穩)이 서울에서 살았으나,

태종의 왕권강화 일환으로 외척 세력을 제거할 때 처가인 여흥 민씨 민무구 형제 옥사에

연루되어 1413년 피화를 입자, 배위 정부인 여흥 민씨가 아들 3형제를 데리고 전라도 장성현

대맥동으로 낙담하여 자리를 잡게 되면서부터 자손들이 장성고을 사람이 되었다.

 

본관은 울산. 자는 후지, 호는 하서·담재. 아버지는 참봉 영이며, 어머니는 옥천조씨이다.

10세 때 김안국(金安國)에게서 〈소학〉을 배웠다. 1531년(중종 26) 성균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했다.

성균관에서 이황과 함께 학문을 닦았으며, 노수신(盧守愼)·기대승(奇大升)·정지운·이항(李恒) 등과 사귀었다.

제자로는 정철(鄭澈)·변성온·기효간·조희문·오건(吳健) 등이 있다. 1540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에 올랐다. 이듬해에 호당에 들어가 사가독서하고 홍문관저작이 되었으며, 1543년

홍문관박사 겸 세자시강원설서, 홍문관부수찬에 이르렀다.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장성으로 돌아가 주자학 연구에 전념했다.

그뒤 성균관전적·공조정랑·홍문관교리·성균관직강 등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남농 허건

선생은 조선시대 말 남화의 대가인 소치(小痴) 허련(許鍊 : 1808 ~ 1893)의 친손자이자 역시 유명 화가인

미산(米山) 허형(許瀅 1862 ~ 1938)의 넷째 아들로 전남 진도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평생을 목포에서

보내면서 한국 화단의 중심에 서서 많은 미술 활동을 하였으며, 수많은 제자를 길러 후진 양성에 진력하였다.

1981년에는 평생 수집한 수석 · 자기 · 목물과 운림산방 3대의 작품들을 목포시에 기증하여 향토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1987년에는 진도 운림산방을 사재로 복원하여 진도군에 기부 체납함으로써

우리 예술계에서 문화유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등 본보기가 되었다. 선생은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

문화훈장 등 수많은 상을 받았으며, 1983년에는 대한민국 예술원 원로회원으로 추대되었다.

풀 세잔 

현대 회화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19세기 후반 프랑스의 후기인상파 화가로, 주요 작품은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

부유한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나 부모의 뜻에 따라 법학 공부를 하다가 미술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미술공부를

시작했다. 에밀 졸라의 도움으로 인상파 화가들과 교류하면서 그의 개성적인 화풍을 다듬어, 후기인상파 중

가장 뛰어난 인물로 꼽힌다. 그의 작품과 미술개념은 20세기의 많은 미술가들과 미술운동들, 특히 입체파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박인환

박인환(朴寅煥, 1926년8월15일 ~ 1956년3월20일)은 한국1950년대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시인이다

1926년 강원도인제에서 출생하였고 경성제일고보를 거쳐 평양의전을 중퇴하였다.

1946년 〈거리〉를 발표하여 등단하였다. 광복 후 서울에서 서점을 경영하였고, 1947년부터 경향신문기자로

미국을 시찰하였다. 1949년 동인그룹 '후반기'를 발족하여 활동하였다. 1949년 5인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간하여 본격적인 모더니즘의 기수로 주목받았다.

1955년 《박인환 시선집》을 간행하였고 1956년 소설가 이상의 기일때 4일 동안 폭음한 것이 급성 알콜성

심장마비로 이어져 자택에서 사망하였다(향년 29세). 묘소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있다.

1976년에 시집 《목마와 숙녀》가 간행되었다.

한용운

법명인 만해(萬海)로 더 많이 불리던 한용운은 1879년 음력 7월 12일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난다.

한용운은 어린 나이에 한학을 접하게 되는데, 기억력이 매우 좋고 남달리 암송을 잘해 인근에서는

그의 집을 ‘신동 집’이라고 부르곤 한다.

3·1운동 때의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이고, ‘신간회’ 중앙 집행 위원을 지낸 독립 운동가이자,

아스라한 형이상학적 높이를 실현하며 한국 현대 시사의 거봉으로 우뚝 솟아 있는 민족 시인 만해 한용운

(韓龍雲, 1879~1944).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한 일간지의 “20세기에 발표된 한국의 예술 작품 중에서

고전이 될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인가?”라는 설문 조사에서 단연 첫 번째로 “21세기에도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 문화사적 의미가 큰 작품”에 뽑힌다. 『님의 침묵』은 “시문학 사상 가장 넓고 높으며 깊은

인간성을 표현한 절실한 시”라는 호평 속에 한국인의 정서의 정화(精華)를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미 『님의 침묵』은 고전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정재완.날개

1936년 전라남도 장흥에서 출생했다. 호는 수아(樹芽), 석화(石話)이며, 전남대학교 철학과와 전남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유치환의 추천으로 1958년 《현대문학》에 「날개」, 「그리움」, 「어머니」를,

1960년 같은 지면에 「세월」, 「하늘빛」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서정시>, <시단>, <원탁시> 동인이며,

한국문인협회, 한국시인협회, 국제펜클럽, 청마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전남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학과

교수, 명예교수로 재직했으며, 2004년 별세했다. 첫 시집인 「하늘빛』(1962)에서는 순 한글시를 시도했고,

「빗발같이 햇빛같이』(1975)에서는 봉산탈춤을 차용해 시 정신을 표현했다. 정재완의 시 세계는 전반적으로

자연의 이치 속에 존재하는 생명의 정신을 긍정하며 이를 바탕으로 순수한 감성을 표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부분의 작품이 언어를 절제하면서도 서정을 담아내는 주지주의적 서정시의 경향을 띤다.

기대승.우거

1527년 12월 11일(음력 11월 18일)~1572년 12월 5일(음력 11월 1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이다. 전라도 광주목 광산면 소고룡리 출신으로, 본관은 행주이며,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峰)·존재(存齋),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퇴계 이황과의 사단칠정(四端七情)

및 이기(理氣) 논쟁을 통해 조선 성리학 수준의 제고에 기여했다.

광주광역시 월봉서원(月峰書院)에 제향되었다.

조선 유학의 전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주자학자이며, 지치주의적 이념으로 왕도정치를 펼치려 했다.

그의 주자학설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사단칠정론은 이황·정지운·이항 등과의 논쟁을 통하여

체계가 이루어졌다. 그는 조광조의 지치주의 사상을 이어받아, 전제주의 정치를 배격하고 민의에

따르고 민리를 쫓는 유교주의적 민본정치·왕도정치를 이상으로 삼았다.
1558년 이황과의 만남은 사상 형성의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그뒤 이황과 13년 동안 학문과 처세에 관한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 가운데 1559년에서 1566년까지 8년 동안에 이루어진 사칠논변은 조선유학사상

깊은 영향을 끼친 논쟁이다

박목월

본명은 박영종(朴泳鍾). 경상북도 월성(지금의 경주) 출신. 1935년 대구의 계성중학교(啓聖中學校)를

졸업하고, 도일(渡日)해서 영화인들과 어울리다가 귀국하였다. 1946년 무렵부터 교직에 종사하여

대구 계성중학교, 이화여자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연세대학교·홍익대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62년부터 한양대학교 교수로 재임하였다.

 

1947년 한국문필가협회 발족과 더불어 상임위원으로 문학운동에 가담, 문총(文總) 상임위원·

청년문학가협회 중앙위원·한국문인협회 사무국장·문총구국대(文總救國隊) 총무·공군종군문인단

창공구락부(蒼空俱樂部) 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58년 한국시인협회 간사를 역임하였고 1960년부터 한국시인협회 회장직을 맡아 1973년 이후까지

계속하였다. 한때 출판사 산아방(山雅房)·창조사(創造社) 등을 경영하기도 하였다.

박홍원(朴烘元.1933.9.1∼2000.1.5).바람

시인. 전남 신안군 도초면(都草面) 발매리 출생. 호 경산(鯨山). 목포사범을 거쳐 1956년 조선대학교 문리대

국문과 졸업. 1962년 [현대문학]에 <고행(苦行)> <수난이후(受難以後)> <종언(終焉)을 보며> 등으로

추천을 끝냈다.

   조선대학교부속고등학교 교사 등을 거쳐 조선대학 문리대 교수 역임. [원탁시(圓卓詩)] 동인.

전남도문화상(1973), 전남신안군민의상 교육․문화 특별상(1998.전남신안군), 국민훈장 동백장(1999) 수상.

 

영랑김윤식

영랑(永郎) 김윤식(金允植)은 1930년대 시단에서 순수 서정의 세계를 정점의 수준에서 개척한 시인이다.

그는 고향 전남 강진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였고 서울에서 휘문의숙을 다녔다. 그때 그는 박종화 ・ 홍사용 ・

정지용 ・ 이태준 등과 선후배 관계를 맺게 된다.

 

그는 1919년 3 ・ 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으로 내려가 학생운동을 모의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대구 형무소에서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영랑은 한때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 상해로 가려고도 했으나 그의 섬세한

감각과 정열은 결국 성악 공부를 위해 일본 유학을 택하게끔 하였다. 18세에 일본 도쿄(東京)

아오야마(靑山)학원 영문과에서 수학했는데, 이때 박용철과 동창으로 처음 만나게 된다.

 

1923년 21세 때 관동대진재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한 그는 집안에 설치한 정구장에서 정구를 즐기며

정원에 모란을 가꾸고 거문고와 북을 벗 삼으면서 서정시인의 내면세계로 빠져들어 갔다.

1930년 그는 박용철 ・ 정지용과 함께 《시문학》 동인지를 발간하였고, 1935년 시문학사에서 박용철

편집으로 『영랑시집』을 간행하였다. 일제 말기 탄압이 극심해지자 순수 세계를 지키려는 영랑의 노력은

극심한 고통과 좌절로 이어졌다. 창씨개명을 요구하는 일제에게 “내 집 성은 김씨로 창씨했소.”라며

맞섰다는 그는 지조를 잃지 않았으나 비극적 절망감 속에 살았다.

 

해방 후 그는 서울로 올라와 전쟁 전까지 공보처 출판국장을 지냈는데 이것은 그의 평생 유일한

직장이었다. 6 ・ 25전쟁이 나자 미처 피난하지 못했던 영랑은 서울에 은신해 있다가 양군의 공방전에서

날아온 포탄의 파편에 맞아 작고했다.

기정진

이학 6대가의 한 사람이며, 위정척사파의 정신적 지주였다. 본관은 행주. 자는 대중, 호는 노사(蘆沙). 증참판

재우(在祐)의 아들이다.조선 후기의 주자학자

7세에 이미 맷돌을 보고 시를 지었고, 9세에 경사에 통했다. 1831년(순조 31)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강릉(康陵)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봉직하지 않았다. 이후 40세 때도 사옹원주부에 임명되었으나 6일 만에

사직했다. 그뒤에도 평안도도사·무장현감·사헌부장령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1862년(철종 13) 삼남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나자 철종은 3정의 개선책을 듣기 위해 언책(言策)을 모집했다.

이때 〈임술의책 壬戌擬策〉을 작성하여 사대부 풍속의 폐단, 조정의 공경·방백·수령·이속의 탐오함, 과거·

사관(仕官)의 폐단, 부호들의 토지겸병의 폐단 등을 지적했다. 그리고 군포의 혁파, 환곡의 면제, 민전 제한

등을 그 개선책으로 제기했으나 제출하지는 않았다.

 

1866년(고종 4)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육조소 六條疏〉라 불리는 첫번째 〈병인소 丙寅疏〉를 올려 외적을

방비하는 대책을 건의했다. 그해 7월 동부승지·호조참의, 10월에는 동지돈녕부사·호조참판·공조참판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했다. 이때 국가적 폐습을 비판하고 사대부에게 삼무사(三無私)를 권장하는 2번째

〈병인소〉를 올렸다. 1877년 장성 월송(月松:지금의 고산리)으로 거처를 옮겨 담대헌(澹對軒)에서 문인들과

지내다 죽었다.

꽃시인 김춘수

경기중학교를 거쳐 1940년 일본대학 예술과에 입학했다. 1942년 퇴학당했으며 사상이 불순하다는 혐의로

경찰서에 6개월 동안 갇혀 있다가 서울로 송치되었다.

 

1945년 충무에서 유치환·윤이상·김상옥 등과 '통영문화협회'를 만들고, 노동자를 위한 야간중학과 유치원을

운영하면서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1946~48년 통영중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조향·김수돈 등과 동인지

〈노만파 魯漫派〉를 펴냈다. 1952년 대구에서 펴낸 〈시와 시론〉에 참여해 〈시 스타일 시론〉이라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1956년 유치환·김현승·송욱 등과 시동인지 〈시연구〉를 펴냈다. 해인대학교·부산대학교에서

강의하다가 1964년 경북대학교 교수로 취임, 1978년까지 재직한 뒤 이듬해 영남대학교로 옮겨 1981년

4월까지 재직했다.

 

1981년 제5공화국 출범과 함께 제11대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었다. 당시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신군부 정권에

참여하여 정계에 진출한 것에 대해 많은 구설수에 오르내렸다. 1986년 한국시인협회장, 1991년 한국방송공사

이사를 역임했다.

김소월 .산유화

본관은 공주. 본명은 정식(廷湜). 전통적인 한(恨)의 정서를 여성 화자를 통해 보여주었고, 향토적 소재와 설화적

내용을 민요적 기법으로 노래하였다.

 

아버지 성도(性燾)와 어머니 장경숙(張景淑)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외가에서 태어나 백일이 지난 뒤,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 남서동 본댁으로 돌아왔다. 2세 때 아버지가 철도를 설치하던 일본인에게 폭행당해

정신이상이 되자 할아버지가 그를 돌보았다.

 

할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우고, 숙모 계희영에게 〈심청전〉·〈장화홍련전〉등의 옛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다.

1915년 오산학교 중학부에 입학, 1916년에는 홍단실과 결혼했다. 3·1운동 직후 오산학교가 잠시 문을 닫게

되자 배재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해 졸업했다. 그가 오산학교에 다닐 때에는 조만식이 교장, 서춘·이돈화·김억이

교사로 있었는데, 김억에게 시적 재능을 인정받아 시를 쓰기 시작했다.

 

1923년 도쿄상과대학[東京商科大學]에 입학했으나, 9월 관동대지진이 일어나 학교를 그만두고 귀국했다.

고향으로 돌아가 할아버지가 경영하는 광산일을 돕다가 1924년 〈진달래 꽃〉의 무대인 영변을 잠깐 다녀왔다.

김동인·김찬영·임장화 등과 〈영대靈臺〉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나도향과 친하게 지냈다.

 

광산일이 실패하자 처가가 있는 구성군으로 이사했다. 땅을 팔아 동아일보사 지국을 경영했으나 실패했다.

그뒤 생활이 어려워져 삶에 대한 의욕을 잃고 술만 마시다가, 1934년 32세 때 곽산에서 음독자살했다.

1968년 3월 한국일보사에서 남산에 그의 시비를 세웠다.

안개에 뒤덥힌 입암산과 백암산

장성호와 예술공원 임권택 시네마테크

인종. 묵죽도

‘인종 묵죽도’는 조선 제12대 왕 인종이 왕위에 오르기 1년 전, 

세자 시절 스승으로 만나 깊은 인연을 맺게 된 하서 김인후에게 내린 그림이다.

이상적인 군신관계의 표본으로 널리 알리기 위해 후대에 전라남도 장성의 필암서원에서 목판으로

제작하였다.

그러나 필암서원에 보관 중이던 묵죽도 목판을 도난당해, 목판화를 토대로 다시 제작한 목판을

국립광주박물관에서 소장 중이다.

 

인종이 손수 그려 하사한 이 그림은 거친 바위 뒤에 위태롭게 솟아있는 네 그루의 대나무를 그린 것이다.

그런데 그림 속 대나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접해 온 대나무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가파른 절벽 위에 자리 잡은 대나무의 가느다란 줄기는 위태로워 보이고,

그림 속 거친 바위는 당장이라도 대나무를 덮칠 듯 위협적으로 보인다.

 

김인후 역시도 그림 속 연약한 대나무에서 세자의 모습을 본 것 같다.

김인후는 세자의 뜻을 이해하고 그림 한 편에 답시 한 수를 적었다.

 

<뿌리 가지와 마디 잎사귀는 빈틈없이 촘촘하고,

돌을 벗 삼은 정갈한 뜻은 한 폭에 가득하네.

성인의 영혼이 조화와 짝하니,

어김없이 천지랑 한 덩어리로 뭉쳤네.>

 

그림 속 바위가 대나무를 해치는 것이 아니라, 

대나무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다는 내용의 답시를 통해 김인후는 세자에 대한 충의를 보였다.

즉 <인종 묵죽도>는 왕이 그림을 그려 스승에게 주고, 스승은 그림에 답시를 쓴 존경과 신뢰의

증표로 남은 셈이다.

 

예술공원 전망대

박재삼

김소월에게서 발원해 김영랑·서정주로 이어지는 한국 전통 서정시의 맥을 이은 시인이었다.

박재삼의 유년시절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사천 앞바다의 품팔이꾼 아버지와 생선장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중학교 진학도 못하는 절대궁핍을 경험해야 했다. 어렵게 삼천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수학했고, 1953년 〈문예〉에 시조 〈강가에서〉를 추천받은 후 1955년 〈현대문학〉에 시

〈섭리〉·〈정적〉 등이 추천되어 등단했다.

 

그의 시는 당시 서정주와 유치환이 서로 반해 추천을 다툴 만큼 출중했다. 시 작품의 탁월함은 무엇보다도

가락에서 두드러졌다. 우리말을 의미·개념에만 맞추어 쓰는 것이 아니라 운율에 맞추어 리드미컬하게

구사하는, 리듬의 중요성을 태생적으로 알아차린 시인이었다. 전통적 가락에 향토적 서정과 서민생활의

고단함을 실은 시세계를 구축했으며, '한을 가장 아름답게 성취한 시인', '슬픔의 연금술사'라는 평가를 받았다.

 

때로 그의 시들은 '퇴영적인 한에 머물러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절창 〈울음이 타는 가을강〉 등에서

드러나듯 '생활과 직결된 눈물을 재료로 한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 주었다.

 

박재삼은 모더니즘·민중주의 등과 같은 경향이 유행처럼 번지던 시대에도 어떤 계파에 몸을 두지 않고

자신의 영역을 지켰다. 그리고 그 안에서 고향 바다의 비린내가 묻어나는 서정과 비극적 사랑,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 등을 노래했다. 슬픔을 아는 시인이었으며 평생을 가난하고 고달프게 살았다.

1955년부터 〈현대문학〉 등에 근무하다 1968년 고혈압으로 쓰러져 반신마비가 된 이후 일정한 직업을

갖지 않았으며 위장병과 당뇨병 등 병치레를 하기도 했다.

신석정

1907년 전북 부안의 한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신석정은 읍내의 보통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결혼을 한다.

그는 결혼 뒤 고향의 전원 속에 파묻혀 시인 기타하라 하쿠슈(北原白秋), 작가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투르게네프와 하이네, 타고르와 노장(老莊) 등의 문학과 철학 서적을 탐독하며 시를 쓰기 시작한다.

1924년 그는 열일곱 살의 나이로 『조선일보』에 「기우는 해」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온다.

 

그러나 신석정은 글쓰기를 포기할 생각으로 써놓은 시들을 불사르는 등 한동안 심한 좌절에 빠진다.

일찍 결혼한 까닭에 가난 또한 큰 짐이 되어 그의 발길을 무겁게 한다. 1930년 그는 박한영이 주재하던

조선불교중앙강원에 들어가 불전을 공부한다. 박한영이라면 최남선과 이광수를 비롯해 서정주와 조지훈

등에게도 영향을 미친 불교계의 거목이다. 신석정은 강원에서 불교 공부를 하는 한편 30여 명의 젊은

학도들을 규합해 회람지 『원선』을 만들기도 하나 종교 자체에는 깊이 빠져들지 않는다. 그는 금강산으로

입산 수도를 떠나자는 동료들의 청을 뿌리치고 고향으로 내려간다.

 

6·25전쟁 뒤 태백신문사 고문을 지냈고, 1954년 전주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1955년 전북대학교에서 시론을

가르쳤다. 1961년 김제고등학교 교사, 1963년부터 정년퇴직할 때까지 전주상업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1967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전라북도 지부장을 역임했다.

임억령

임억령(林億齡)[1496~1568]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박상(朴祥)의 형제에게 글을 배웠다. 

1516년(중종 11년)에 태학에 들어가고, 1525년(중종 20년)에 대과에 급제하였다. 

그 뒤로 시강원(侍講院)과 홍문관(弘文館),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의 관직 및 사인(舍人)에 

임명되었고, 승정원 승지(承政院承旨)에 이르렀다.

1533년에는 부모 봉양을 위해 자청하여 고향 가까운 동복(同福)에서 현감을 역임하였는데, 절의를 

크게 행하고 문풍을 크게 진작시켰고, 뒤에 주민들이 서원을 세워 향사하였다. 1545년경에는 금산(錦山)에서 

수령을 하였다. 을사사화 때 동생 임백령(林白齡)이 소윤(小尹)에 가담하여 대윤(大尹)의 선비들을 추방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1552년에 동부승지(同副承旨)와 병조 참지(兵曹參知), 강원도 관찰사를 거쳐 

1557년 담양 부사(潭陽府使)가 되었다.


호남계 문단의 중진으로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눌재(訥齋) 박상(朴祥), 

백호(白湖) 임제(林悌), 면앙정(俛仰亭) 송순(宋純), 소쇄옹(瀟灑翁) 양산보(梁山甫),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

 옥봉(玉奉) 백광훈(白光勳) 등과 깊이 교유하였다. 담양 식영정 계곡에 살면서 정철, 김성원, 고경명(高敬命)과

 더불어 식영정 4선(四仙)으로 불렸다. 안방준, 김인후와 더불어 호남3고(湖南三高)[호남의 세 높은 선비]로

 불리기도 했다. 문집에는 석천집(石川集)이 있으며 3천여 수의 한시를 남겼다. 고려 말의 송 장군을

 추모한 서사시 ‘송대 장군가’를 지었다.

박두진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측량소·경성부청·금융조합 등을 전전하다가 1939년경 등단했다.

1948년 한국청년문학가협회 시분과위원장과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중앙위원을 역임했고, 1949년에 결성된

한국문학가협회에 가담해 민족주의 계열의 문학건설에 힘썼다. 1955년 연세대학교 전임강사가 된 뒤, 1959년

조교수로 취임했다가 이듬해 사임했다. 이후 대한감리회 신학대학교, 한양대학교 등에 출강했으며, 1970년

이화여자대학교 부교수를 거쳐 같은 해 다시 연세대학교 교수로 취임해 1981년 정년 퇴임했다.

그 뒤 단국대학교 초빙교수로 있다가 1986년 추계예술학교로 옮겼다.

 

1939~40년 정지용의 추천을 받아〈문장〉에 시〈향현 香峴〉·〈묘지송〉·〈낙엽송〉·〈의 蟻〉 등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고경명

임진왜란 때 6,0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금산에서 왜적과 싸우다 전사했다.
1591년 동래부사가 되었으나 세자 책봉문제로 서인이 실각하자 파직되어 고향에 돌아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천일·박광옥과 의병을 일으킬 것을 약속하고, 6,000여 명의 의병을 담양에

모아 진용을 편성했다. 7월 10일 곽영의 관군과 합세, 금산에서 왜적과 싸우기로 하고 800여 명의

정예부대로 선제공격을 했다. 그러나 겁을 낸 관군은 싸울 것을 포기하고 앞을 다투어 도망갔다.

이에 사기가 떨어진 의병군마저 붕괴되었으나, 그는 물밀듯이 밀려오는 왜적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순절했다.담양 창평 삼지천 마을에 그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시·글씨·그림에 능했으며, 저서로는 시문집인 〈제봉집〉, 무등산 기행물인 〈서석록 瑞石錄〉, 각처에 보낸

격문을 모은 〈정기록 正氣錄〉 등이 있다. 뒤에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광주 포충사(褒忠祠), 금산 성곡서원

(星谷書院)·종용사(從容祠), 순창 화산서원(花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이호우 .살구꽃마을

청도출생 한때 시조시인들의 자성을 촉구하는 평론을 발표해 한국시조시단에 경종을 울렸다.

호는 이호우. 누이동생이 시조시인 영도이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의명학당을 거쳐 밀양보통학교를

마쳤으며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신경쇠약으로 고향에 돌아왔다.

1929년 일본 도쿄예술대학[東京藝術大學]에 입학했으나 신경쇠약에다 위장병까지 겹쳐 학업을 포기하고

귀국했다. 8·15해방 후에는 잠시 대구일보사를 경영했으며, 〈대구매일신문〉 문화부장 및 논설위원을 지냈다.

1946년 〈죽순〉 동인으로 참여했고, 1968년 〈영남문학회〉를 조직했다.

 

1940년 이병기의 추천을 받아 시조 〈달밤〉이 〈문장〉에 발표되어 문단에 나왔다. 이어 발표한 〈개화〉·

〈휴화산〉·〈바위〉 등은 감상적 서정세계를 넘어서 객관적 관조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 노래하고 영탄하던 종래의 시조와는 달리 평범한 제재를 평이하게 노래했으며 후기에는 인간의

욕정을 승화시켜 편안함을 추구하는 시조를 썼다. 작품집으로 1955년에 펴낸 〈이호우시조집〉 외에

누이동생 영도와 함께 1968년에 펴낸 〈비가 오고 바람이 붑니다〉가 있다.

이육사

본관은 진성(眞城). 경상북도 안동 출신. 본명은 이원록(李源綠) 또는 이원삼(李源三). 원삼은 주로 가정에서만

불렀다고 한다. 개명은 이활(李活), 자는 태경(台卿). 아호 육사(陸史)는 대구형무소 수감번호 ‘이육사(二六四)

’에서 취음한 것이다.

작품 발표 때 ‘육사’와 ‘二六四(이육사)’ 및 활(活)을 사용하였다. 아버지는 이황(李滉)의 13대 손인 이가호(

李家鎬)이며, 어머니는 허길(許吉)로, 5형제 중 둘째 아들이다.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인 저항시인 이육사는 평생 치열한 민족정신으로 독립운동에 매진했고, 잦은 옥고로

인해 몸이 쇠약해진 뒤에는 총칼 대신 날카로운 펜을 휘둘러 일제와 싸웠던 항일투사였다.

이육사의 시 〈광야〉에는 대한독립과 민족의 자유를 염원하는 시어로 가득 차 있다. 1945년 12월 17일자

자유신문에 발표된 이 시에 대하여 평론가 김용직은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한 가운데 유례가 없을 정도로

든든한 구조를 가진 작품”이라고 찬탄하고 있다.

 

이외에도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청포도〉, 〈절정〉, 〈황혼〉 등에는 암울한 식민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지식인의 고통스런 현실과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투철한 의지가 절절하게 그려져 있다.

정몽주

고려 충숙왕 때 뛰어난 외교가이자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로 평가받은 고려 말기의 충신. 초명은 몽란, 몽룡,

자는 달가, 호는 포은이며 1367년 성균관이 중영되면서 성균박사에 임명돼 <주자집주>를 유창하게 강론,

당시 유종으로 추앙받던 이색으로부터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로 평가받았다. 얼마 후 왜구가 자주 내침해

피해가 심해지고 화친을 도모하기 위해 보내진 나흥유가 투옥됐다 돌아오자, 보빙사로 일본에 보내져 국교의

이해관계를 잘 설명해 일을 무사히 마치고 고려인 포로 수백 명을 구해 돌아왔다. 그러나 고려왕조를 부정하고

새로운 왕조를 개척하는 데에 반대해 뜻을 같이하던 이성계를 찾아가 정세를 엿보고 돌아오던 중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 등의 습격을 받아 사망했다.

전남 장성군 북하면 송정공원길 11

임권택시네마테크’의 글씨는 임 감독의 친필이다. 건축설계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이종호 교수가, 전시설계는

한국예술종합학교 김홍준 교수가 했다. 장성군은 2011년 공사를 시작해 국비를 포함 36억원을 들여 기념관을

완공했다.

 

임 감독은 정규학교에서 영화를 공부하지 않았다. 조감독 생활을 거쳐 1962년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감독으로 데뷔했다. 한흥영화사가 제작한 ‘두만강아 잘 있거라’를 기억하는 팬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은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활약한 항일투사들을 그렸다. 출연진을 보면 박노식, 장혁, 황해, 황정순,

이대엽, 문정숙, 엄앵란, 허장강, 장동휘다. 1960~1970년대 한국 영화의 스타들이 총출동한 느낌이다.
   
   메인 전시장인 제2전시실로 가는 길. 좁은 복도 유리벽면에는 임권택 감독의 작품이 연도별로

분류되어 있다고한다. 데뷔 해인 1962년 그는 ‘두만강아 잘 있거라’ 외에도 ‘전쟁과 노인’을 연출했다.

1963년부터는 작품이 늘어난다. 1963년에 ‘남자는 안 팔려’ ‘망부석’ ‘신문고’ 3편을 찍었다.

1964년에는 ‘단장록’ ‘욕망의 결산’ ‘십자매 선생’ ‘단골지각생’ ‘십년세도’ ‘영화마마’ 6편.

이후 1971년까지 그는 매년 평균 6~8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임권택 시네마테크는 9시에 개방 한다고 안내문이 있는데 코로나19로

기약을 할수가 없고 벌초도 해야해서 서둘러 내려 간다

윤봉길

1932년 중국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일본의 수뇌부에 폭탄을 투척한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파평, 본명은 우의, 아호는 매이며 몰락한 양반가에서 태어나 1918년 덕산공립보통고등학교에

입학했다가 식민지 노예 교육을 거부하고 자퇴했다. 1932년 봄 임시정부를 찾아가 민족의 광복을 위해

몸과 목숨을 바치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그해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개최된 일본의

전승축하기념식에서 물통폭탄을 단상에 던져 일본의 군부와 관부 인사들을 사상시켰고 현장에서

체포된 후 사형 당했다. 이 거사는 임시정부가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로부터 지원을 받아 항일운동을

이어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광개토 대왕비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는 태왕이 붕어하신 뒤 2년째 되는 장수왕

3년(414년;甲寅年) 9월에 국내성 고도인 집안에 태왕릉과 함께 세워진 기념비이다. 높이 6.39m,

너비 1.35 ~ 2m에 달하는 동양 최대 크기의 사면석비이기도 하다.태왕비는 방주형의 안산암질 응회암에

약간의 인공을 가한 것으로 여기에 예서(隸書)를 바탕으로 한 고구려 특유의 웅혼한 필체로 44행 1,775자의

문자가 음각되어 있고 당대 고구려사를 밝혀주는 최고의 금석문으로 평가된다.

양사언의 글씨

양사언

자는 응빙(應聘), 호는 봉래. 돈녕주부 희수의 아들이다. 동생 사준(士俊)·사기와 더불어 문명을 날려 당대인이

3형제를 중국의 소순·소식·소철에 비유했다.

1546년(명종 1)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1556년을 전후로 대동현감을 지냈으며 그 이후 삼등·함흥·평창·회양

등지를 다니며 역임했다. 회양에 나간 것은 금강산을 따라 스스로 택한 것으로 이때 금강산에 관한 시를 많이

남겼다. 만폭동 입구에 "봉래풍악 원화동천"(逢萊楓岳元化洞天)이라는 8자를 새기기도 했다. 1564년에

고성군의 구선봉 밑 감호(鑑湖)가에 정자 비래정(飛來亭)을 짓고 풍류를 벗삼으며 은거했다.

 

1582년(선조 15) 다시 안변군수로 나갔으나 다음해 번호(蕃胡) 변란을 당해 수사(守士)의 책임을 지고 해서에

귀양가서 1584년 68세로 죽었다. 그는 문명을 날리면서 허균·이달 등과 교유했다. 허균은 〈성수시화 性叟詩話〉

에서 금강산에 관한 그의 시를 유선지흥(游仙之興)에 젖어 있다고 평했다. 점복(占卜)에 능하여 임진왜란을

예고했다고 하는데 양사언에 관한 도술적 설화가 지금까지 전한다. 조선 전기 4대가로 일컬어질 만큼 서예를

잘해 초서와 해서에 능했다.

 

자신의 〈미인별곡〉과 허강의 〈서호별곡〉 및 한시 등을 쓴 〈봉래유묵 逢萊遺墨〉이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가사로 〈미인별곡〉이 있으며 문집으로 〈봉래집〉이 전한다.

사위질빵도 꽃을 피우고

낚시꾼들이 제법 많다 낚시꾼들의 이동수단

장성호의 모습도 담고

반영도 담아 보고

황화 코스모스

임권택

영화감독·영화제작자. 1936년 전라남도 장성에서 태어나 광주 숭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영화계에 뛰어들어,

감독 정창화의 연출부에서 영화수업을 받았다.

 

1962년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감독에 데뷔했다. 첫 작품의 흥행성공에 힘입어 〈전쟁과 노인〉(1962)·

〈왕과 상노〉(1965)·〈나는 왕이다〉(1966)·〈청사초롱〉(1967)·〈요화 장희빈〉(1968)·〈바람 같은 사나이〉(1968)·

〈십오야〉(1969)·〈비내리는 고모령〉(1969)·〈월하의 검〉(1970) 등 많은 통속영화들을 연출했다. 1970년에는

한 해에 8편의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다작·범작의 습작 시기를 거친 그는 1970년대 영화법 개정 이후에는

반공영화·새마을영화 등을 만들었다.

 

다작을 통해 쌓은 경험과 연출력이 성숙기에 접어들면서 작가로서 눈뜨기 시작한 그는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 주목할 만한 작품들을 연출했는데 〈증언〉(1973)·〈족보〉(1978)·〈깃발 없는 기수〉(1979)·〈짝코〉

(1980)·〈만다라〉(1981) 등의 작품이 여기에 속한다. 1980년대 이후의 〈안개마을〉(1982)·〈불의 딸〉(1983)·

〈길소뜸〉(1985)·〈티켓〉(1986)·〈씨받이〉(1987) 등의 작품에서 더 진전된 미학을 보여주고 있는 그는

절제된 연출 스타일과 함께 휴머니즘적 주제의식을 표현했다. 절제된 연기를 바탕으로 구사되는

장시간 촬영(longtake) 기법은 최근에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이후 〈서편제〉(1993), 〈태백산맥〉(1994), 〈춘향뎐〉(2002)을 발표했으며, 2002년 제55회 칸 국제 영화제에서

조선 후기의 화가 장승업의 생애를 그린 〈취화선〉으로 감독상을 받았다. 2005년에는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명예황금곰상을 수상했다. 2014년 제17회 인천 아시안게임의 개·폐막식 총감독으로 장진과 함께 연출을

담당했다.

예술공원의 조형물들도 살펴보고

메꽃

이렇게 장성호와 장성호 문화 예술공원을 둘러보고 성묘길에 나선다

고향에 들려 벌초하고 성묘를 마치고 정읍시 매곡동 무등마루 떡갈비 집에 들렸다

몇 년 전에 입암산 산행하고 산악회에서 저녁식사 안내를 한 곳이기에 쉬이 찾을 수가 있었다

손바닥만한 떡갈비 두개씩 그리고 갈비탕 전날 창평시장 돼지국밥집에 이어 오늘도 포식을 했다

 

본래 계획은 나주에 들려 하루를 더 보내고 여행을 마치려 했는데 날씨가 장난이 아니게 덥다

영상 33도 체감온도 35도 다음으로 마루고 집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