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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구

달성 하빈 육신사와 태고정

대구 계명대학교 성서 캠퍼스에서 성주 방면이나, 왜관 방면으로 가다 보면 달성군 하빈면 묘리, 묘골이라고

불리는 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은 사육신(死六臣)의 한 분이신  취금헌 박팽년(醉琴軒朴彭年)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순천박씨의

집성촌이고, 구 한말까지는 300여 호의 집이 꽉 들어차 있었고, 해방 전까지만해도 100여 호가 있었다는데

지금은 30여 호만이 남아 있다.

 

이 마을 가운데로 곧게 올라가면 맨 끝에 높직한 솟을대문이나온다.  이 대문이 사육신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 육신사(六臣祠)의 정문이다.

충절문에서부터 육신사 기념관 까지는 양쪽에 배롱나무가 가로수로 심어져 있다

 

기념관에는 코로나로 잠정폐쇄돼 있고 비는 억수로 퍼붓는다

처음에는 여기가 도곡재인줄 알았다 그런데 개인집이 어마어마하게 크게 자리하고 있다

육신사 오르는길 돌담길인데 양쪽에는 잘 지어진 한옥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저위에 집은 여기 좌측에서 첫집이다

육신사 외삼문

홍살문과 육신사

대구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는 박팽년의 자손들이 정착해 살아온 순천박씨 집성촌이다.

이 마을 뒤쪽 산기슭에 조선 세조 때의 사육신인 박팽년(朴彭年)과 성삼문(成三問),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浮)의 위패를 봉안해 기리는 사당인 육신사(六臣祠)가 있다.

박팽년 후손에 의해 박팽년만 배향되다가, 나중에 박팽년의 현손(玄孫) 박계창이 박팽년의 기일에 여섯 어른이

사당 문 밖에서 서성거리는 꿈을 꾼 후 나머지 5위도 함께 모셔 기리게 되었다.

 어짐을 이룬다는 뜻의 성인문.​ 내삼문 이라고도 불리는 성인문 안쪽으로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숭정사가 있지만 꽁꽁 잠겨버린 문이다 사당이라면 다 같은 형태라서 그리 관심은 없다

 

태고정에는 ‘태고정’ 편액이 처마와 마루 안에 두 개가 걸려있다. 마루에 있는 것은 석봉 한호 글씨다.

처마에 걸린 것은 박팽년 후손 글씨다.

‘태고정’ 현판 옆에는 ‘일시루(一是樓)’라는 현판이 나란히 걸려 있다. ‘모든 것은 본시 하나다’ ‘옳은 것은

오직 하나 뿐이다’라는 의미로 해석된다.안평대군의 글씨라고 전해진다

이 편액에는 ‘비해당(匪懈堂)’이라는 낙관 글씨가 있는데, 이는 안평대군(1418~53)의 아호다.

그래서 안평대군이 쓴 글씨라고 전하지만, 안평대군은 이 집이 건립되기 전인 1453년 계유정난으로 사사되었다.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데, 생존 당시에 받았던 글씨인지 모르겠다.

이 육신사 경내에 보물 554호인 태고정(太古亭)이 자리하고 있다. 이 정자는 박팽년의 유복손(遺腹孫)인

박일산이 1479년에 창건한 건물이다. 창건 당시에는 99칸 종택에 딸린 별당 건물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돼 사당과 태고정 일부만 남아있던 것을 1614년에 후손들이 중건했다.

 태고정(太古亭)

 태고정은 일명 '일시루(一是樓)'라고도 불려서 정자의 정면에 '태고정'과 '일시루' 두개의 현판이 나란히

걸려 있는데 정면4칸, 측면2칸의 정교한 초익공계(初翼工系) 구조를 하고 있고, 오른쪽은 팔작기붕,

왼쪽은 맞배지붕에 부섭지붕(서까래의 윗머리를 다른 벽에 지지시켜 달아낸 지붕)으로 마감한 보기

드문 정자 건물이다. 보물 제554호로 지정되어 있다.

 ​

 이 정자는 1479년(성종10년)에 사육신 중의 한 사람인 박팽년의 손자 박일산이 건립한 것이다.

원래는 종가 안에 붙어 있던 별당 건물이었으나 임진왜란 때인 1592년(선조25년)에 불타고 일부만

남아 있었다. 이를 1614(광해군6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지었다.

 

 앞면 4칸, 옆면 2칸 규모의 일자형 건물로, 각각 2칸씩 대청마루와 방을 꾸몄다. 대청 앞면은 개방되어

있는데 대청 앞 기둥 사이에는 2층으로 된 난간을 설치하였다. 서쪽에는 온돌방과 부억을 마련해 놓았는데

단순한 아궁이가 아닌 부억을 둔 것으로 흔치 않은 것이다.

 

 태고정은 그 규모가 크기는 않으나 가구나 세부가공이 정교한 편이며, 조선 전기의 건축의 특색을

잘 보여주고 있어 건축사적인 가치가 크다.

 

뜰에 상사화는지고 배롱나무는 꽃이 피고

이비석은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죽임을 당한 6명의 신하 

성섬문.하위지.이개.유성원.박팽년.유응부 사육신을 기려 세운 비석 하단에는

여섯마리의 거북이 받치고 있고 상단에는 12마리의 용이 절의를 지킨 신하를

호위하는 형식의 비석이다 사육신중 단계 하위지는 선산이 고향이다

도곡재(陶谷齋)​

 도곡재는 1778(정조2년) 대사성인 서정공 박문현이 제택으로 건립한 건물이나 1800년대에 와서는

도곡 박종우의 재실로 사용되면서 그의 호를 따 도곡재라 이름하였다. 박종우는 인조때의 사람으로

문장, 정의, 덕행을 모두 겸비하여 동한(東閑)의 일인자라 칭송 받았으며 달성십현(達城十賢)의 한 사람이다. 

 

​ 도곡재는 원래 정면 4칸, 측면1칸의 건물로, 태백산 지역 제택의 일반적인 사랑채 형태인데 후대에

와서 툇간을 달아내고 대청을 넓혀 누처럼 꾸몄으며, 각 방의 후벽에는 개흘개가 설치되어 있으며,

네모기둥을 세우고 납도리를 돌린 팔작집의 소박한 구조의 건물이다.

비가 많이 내려 도곡재는 들어가지 않았다

전 국회의장 박준규 생가터

문민공 한석당 박선생(박중림) 유적비

한석당 박중림 박팽년 박순 3대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숭의사와 도곡재

홍살문은 능묘나 궁전, 관아 앞에 세우는 붉은 물감을 칠한 나무문으로 중간에는 태극문양이 그려져 있고,

양쪽에는 화살모양의 나무를 세워 두었다. 경의를 표하하는 뜻으로 신성구역을 나타내는 상징물이다.

기원은 정확하지 않지만 인도의 스투파[탑, 塔] 입구에 세우는 '토라나(torana)'에서 유래했다고 보고 있다.

일본의 도리이, 중국의 패방이 비슷한 경우로 전래되어 고유하게 변한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절의묘

마을의 고택들 모두가 기거를 하고 있다

순천 박씨들의 세거지 대단한 한옥들이다

박두을여사 생가터는 건물은 흔적도 없고 터만 남아 표지판만 하나 덜렁 서있다

충효당은 비가 많이 내리고 문이 닫혀있어 패스를 했다

가면서 화원 유원지 사문진 나루터와 송해공원이나 잠시 들렸다 가자


http://youtu.be/isvt802U8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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