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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구

경주 통일전

통일전

통일전은 삼국통일의 정신을 계승하고, 다가올 남북통일을 기원하는 국민의 전당이다.

경내에는 태종무열왕,문무대왕, 김유신 장군의 영정이 모셔져 있으며, 통일의

격전을 생생히 보여주는 기록화가 긴 회랑을 따라전시되고 있다.

통일전은 호국영령의 뜻을 기리자는 뜻으로 건립된 만큼 초중등학생들의

이념 교육장 형태로이용되고 있으며 수학여행의 필수코스인 듯 하다.

특별히 볼 것은 없으나 삼국통일 당시의 전투장면 등이여러 개의 액자에 그려져

있는 것이 인상적이며, 남산 답사 도중 잠시 호국영령을 참배하고 다리쉼을 원하면

너른 잔디밭에서 쉬는 것도 좋을 듯 하다.

* 규모 - 면적 82,645m²(25,000평)
* 조경수목 - 57종 5,500본
* 건물
1) 본전(47평)
영정3점 (29대 태종무열왕, 30대 문무대왕, 태대각간 김유신장군

아래 설명문 참고

통일전(統一殿)은 불교유물의 보고라고 불리는 남산(南山) 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포석정과 삼릉이 자리한 반대편에 자리하고 있으며 주위에는 화랑교육원, 헌강왕릉 등이

 있으며 남산권역에 속하고 있다.

정문에서 바라본 통일전 광장 뜰 소나무들이 인상적이다

화랑정과 뒤 소나무 숲

연지가 꽤나 넓은데 모두가 수련으로 채워져 있다

왜가리일까?

연지와 화랑정 건너편에 통일전 흥국문이 보인다

경주에는 어디를 가나 이렇게 많은 소나무 숲을 볼 수가 있다

연지의 매력은 수련보다도 물에 비치는 반영이 압도를 한다

푸른하늘과 뭉개구름까지 아~~ 멋지다 아름답다 소리가 절로 나온다

흥국문

연지에서 맑게 피어 있는 연꽃과 한참을 쉬다 발길을 옮기면 또 넓은 광장을 만나게 된다.

 흥국문으로 가기전 그 넓은 광장엔 삼국통일 순국 무명용사비 하나만 서 있다.

태종 무열왕. 문무대왕. 흥무대왕 태대각간 김유신 사적비

서원문

통일전

태종 무열왕(김춘추).문무왕.흥무대왕(김유신)

김유신은 왕족이 아니면서 흥무대왕에 추봉되었다

회랑

회랑은 건물과 건물을 연결하는 복도의 성격을 지닌 건축물이다. 특성상 지붕은 갖추고 있으나

벽체는한쪽은 폐쇄하고 한쪽은 개방하는 형태를 취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연결이 기능을 하는 건축물의 형태는 비단 사찰에서만이 아니라 세속의

궁궐에서도 많이 볼 수 있고 실제의 기능도 거의 유사하다.

회랑 복도에는 삼국통일의 역사적인 그림들이 진열돼 있다

김유신장군 단석산 수련도

서기로 611년 삼국통일의 웅지(雄志)를 품고 단석산에 들어가 석굴속에서 심신을 닦고 하늘에 맹세하였다.

이에 한 신선이 나타나 비법을 가르쳐 주며 정의만을 위해서 사용하라 당부하였다. 후일 김유신장군은

이 기원을 달성하여 삼국통일을 이룩하고 정도를 행하여 살았다.

 

김유신장군과 천관녀도

김유신장군이 젊었을 때 천관(天官)이란 어여쁜 여인과 사랑을나누게 되었다.
이를 안 어머니 만명(萬明)부인이 학문과 무예에만 힘쓰도록 천관녀를 만나지 못하게 훈계하였다.
어느날 말이 깊은 명상에 잠긴 장군을 태우고 천관녀의 집으로 가자, 장군은 말의 목을 베어버렸다.
그후 천관녀는 김유신장군을 사모하여 일생을 마쳤으며. 장군은 후일 그 집터에 천관사를 세우고

명복을 빌었다.

 

김유신장군 출전도
김유신장군이 나라를 위해 개인의 사욕(沙浴)을 버리고 헌신한 보국정신(輔國精神)을 보여준다.
서기 664년 김유신장군은 백제의 7개의 성을 공벌한데 이어 645년 신라 매리포성을 침공해온

백제 대군을 격파한다.
그해 3월, 서라벌로 돌아오나 또 다시 백제군이 침공하자 장군은 하인에게 집에 있는 재매정(財買井)의

물을 떠오게 해 마신후 “우리집 물맛은 옛날 그대로 이구나”하며 다시 출정하였다

무열왕 남천정(이천)출전도

서기 660년6월 18일 무열왕은 김유신장군, 진주(眞珠)장군, 천존(天存)장군 등 장병을 거느리고
남천정(지금의 이천)에 이르러 백제 공격을 직접 지휘하였다. 이는 지도자와 용장(勇將), 양졸(良卒)이 한몸 한뜻이
되어 통일의 전역(戰疫)에 임한 모습이다.

황룡사 9층 탑 조성도

자장법사가 신인으로부터 영감을 받아선덕여왕에게 황룡사 9층 탑 건립을 건의하여

세우게 되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백제 사람 아비지의 기술 지도로

80미터나 되는 거대한 목탑이 완성되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황룡사지 9층 탑은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으로 가람과 함께 소실되었다고 하네요

황산벌 혈전도

서기 660년 7월 9일 김유신장군과 품일, 흠춘 장군이 거느린 신라 5만 정병(精兵)은 백제 계백장군이 거느린 5천의
결사대와 황산벌에서 싸워 네번을 패하였다. 그러나 화랑 관창(官昌)과 반굴(盤屈)의 용감한 희생이 신라 5만군의
결사의결의가 되어 이 결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통일전에서 바라본 경주 들판과 산들

수련지의 반영을 다시 담아본다


http://youtu.be/dRfTr8RC0Z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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