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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인 피향정과 서현사

전북 정읍시 태인면 태창리에 있는 피향정(披香亭, 보물 제289호)은 연꽃 향기와

사람의 향기가 시공을 초월해 해로 뜨고 달로 지는 아름다운 정자다.

정자 이름의 피(披)라는 글자는 ‘나눈다’는 의미와 ‘연다’, 그리고 ‘옷을 입는다’는 의미가 있다.

 

과거에는 이 정자를 중심으로 아래위로 두 개의 연지(蓮池)가 있었고

‘향국(鄕國)을 둘로 나눈다’는 뜻에서 피향정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라 한다.

그러나 조선 영조 20년경에 현감 오언부가 아래쪽에 하나를 더 파면서

두 개의 연지가 된 것이라 하니, ‘향국(鄕國)을 둘로 나눈다’는 의미는 그 후에 부여된 것일 게다.

최치원이 태산군 태수를 지낸 것은 890년(진성여왕 4)부터

서산태수로 옮겨간 893년까지의 3년 남짓이다.

그러므로 최치원이 피향정을 지었다면 890년에서 893년 사이가 될 것이다

피향이란, 향국(香國)을 둘로 나누었다는 의미로, 본래 이 누정의 상하에는

상연지제(上蓮池堤)와 하연지제(下蓮池堤)의 두 연지(蓮池)가 있어 여름에는 연꽃이 만발하여

향기가 누정의 주위에 가득차므로, 이를 뜻하여 피향정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하마석

말을 타거나 내릴 때 딛기 위해 대문 앞에 놓은 큰 돌

우물마루의 사방에는 계자난간(鷄子欄干)을 둘렀으며,

마루로 오르기 위하여 전후의 어간(御間)에서는 난간을 끊어 그 앞에 돌계단을 놓았다

 

건물 내부에는 정자 중수기를 비롯한 이 누정을 거쳐간

수많은 시인 묵객들의 시가를 기록한 편액이 걸려 있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이 문집에 남긴 피향정 시(詩)

 

泰仁蓮池上懷崔致遠(태인연지상회최치원)

  어느 날 태인의 연지 가에서 최치원을 생각하며

 

割雞當日播淸芬(할계당일파청분)   할계하던 당일에 맑은 덕행 전파했기에

枳棘棲鸞衆所云(지극서란중소운)   사람들이 가시나무에 난새가 앉았다고 하였네

千載吟魂何處覓(천재음혼하처멱)   천재에 시 읊던 그 마음을 어디에서 찾을꼬

芙蕖萬柄萬孤雲(부거만병만고운)   일만 자루 연 줄기에 일만의 고운이로다

 

그외 시인들의 시도 옮겨본다

 

前後經過廿載中   앞뒤로 지내온 스무 해 동안 
水亭疏雨又秋風   정자에는 잔비 내리고 가을바람도 불어왔지. 
離離破葉渾依舊   이리저리 흩어지는 가을 잎들은 옛날과 같은데 
不見當時萬朵紅   만발했던 붉은 꽃송이들은 어디서 찾아보나.

 

 이민서 〈피향정〉

 

此夜逢君處    이 밤 임 만날 정자에 올라 
憑欄月上天    난간에 기대어 하늘을 바라볼 때 
殘香猶可愛    나지막이 풍겨오는 사랑스러운 향기여 
秋氣在衰蓮    가을 기운에 저무는 저 연꽃에서 오는 구나

 
 고용후 〈피향정 탕경 목대흠을 차운해서 짓다〉

 

淸絶湖中地    맑디맑은 호수 안엔 땅이 솟았고 
虛明鏡裏天    명경 같은 허허로움은 하늘 속에 잠겼구나. 
秋宵一枕夢    가을 밤 베게 배고 자다 꿈꾸었더니 
霜倒半池蓮    연지의 반을 서리가 덮고 있더라.

 
 목대흠 〈피향정차판상운시지주〉 

 

詩仙己騎孤雲去   시선은 이미 외로운 구름을 타고 떠났고 
雲外靑山點點開   구름 밖에 푸른 산은 점점이 늘어섰네. 
八月芙蓉君子志   팔월의 연꽃은 군자의 뜻과 같고 
十年湖海故人來   십 년 후에 호수에는 친구가 왔네. 
西風霽景生衣快   서풍의 개인 경치 소매에 들어오고 
南斗秋光入配杯   남쪽 하늘 가을빛은 술잔에 비치네. 
獨倚披香亭畔立   홀로 언덕에 서 있는 피향정에 기대니 
上池下池綠渾苔   위아래 연못에는 뒤섞인 이끼가 푸르네.

 
 심능숙 〈피향정〉 판상운

천장은 연등천장[椽背天障:서까래가 드러난 천장]이 주류를 이루나

양쪽 협간(夾間) 사이에는 귀틀을 짜 우물천장을 가설하였다. 

창호는 가설되지 않아 사방이 모두 트이게 되어 있다.

막돌초석을 놓고 이 위에 짧은 돌로 만든 두리기둥을 세웠으며,

부분적으로 단주형(短柱形) 초석을 놓아 이 위에 나무로 된 두리기둥을 세웠다.

투마루 아래에는 원형의 석조 동반 기둥을 받쳤으며, 

그 상부에는 28개의 두리기둥을 세웠는데, 

이는 우주를 28숙으로 나눴던 사상을 따른 것이라고 한다.

가장 오른쪽에 약간만 보이지만 아래와 같은 홍범식의 선정비다

군수 홍후범식 애민선정비

1987년 7월 23일, 충북 괴산군 괴산면 인산리에서 양반 명문가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그 명성에 걸맞게 어려서부터 성리학을 공부하였고 여러 학문을 탐독하며 1888년 17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 1902년부터 본격적으로 내부주사, 혜민원 참서관을 역임하는 등 벼슬길에 올랐다.

 

혜민원 참서관의 관직을 지내면서 국가 정세에 큰 관심을 보였으며,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본격적으로 일제에 대한 저항과 독립정신을 싹틔우기 시작했다. 1907년 태인군수로 발령받은 뒤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며 책임을 다했다.

 

1909년 금산군수로 옮겨가 활동하던 중, 8월 29일한일병합조약이 발표되고

“힘이 없어 나라가 망하는 것을 구하지 못하니 속히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는 유서를 남긴 뒤 자결을 택했다

일제 강점기에 임꺽정을 쓴 홍명희의 부친이다

 

태인군수로 있을 1907년, 당시 태인군은 아전들의 횡포와 수탈이 심했을 뿐만 아니라 의병전쟁이 빈번히

일어나던 탓에 백성들은 생활에 어려움을 물론 목숨까지 위협을 받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그는 의병부대를 진압하려 출동한 일본군 수비대를 설득하여 백성들에게 돌아가는 피해가 없도록 힘썼다.

 

수탈과는 거리가 멀었음은 물론, 황무지 개척과 관개 수리사업을 진행하는 등 군수로서의 책임을 다했다.

이에 군민들은 ≪황성신문≫에 광고를 내 그를 '전북 제일의 군수', '태인군이 생긴 이래 이런 군수는

처음'이라고 치켜세울 정도였다.

 

또한 마을마다 세운 송덕비가 총 38개이며, 현재 남아있는 송덕비는태인면 태창리 피향정

경내의 '군수홍범식애민선정비', 정읍시 감곡면 방교리 감곡면사무소의 '홍범식휼민선정비',

정읍시 산외면 오공리의 야정 노인정의 '군수홍범식선정비'가 있다.

 

1906년 금산군수로 자리를 옮긴 뒤에도 국유화될 위기에 놓인 백성들의 개간지를 사유지로

인정해주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아래 조규순의 아들 조병갑하고는 달라도 너무 다른 길을 걸었기에 대비되는 인물이라서

여기에 옮겨본다

여러곳에 흩어져 있는 비를 한군데 모아놓았다

비석군의 맨 왼쪽에 검은색이 조병갑의 부 조규순의 영세 불망비다

이비를 세우기 위해 농민들의 피와 땀을 착취했다

조병갑 (태인현감으로 있었다)부 조규순의 불망비

趙秉甲 아버지의 碑는 이 중 제일 끝쪽인 담벼락 옆에 있었다.
비각과 덮개석은 없어지고, 碑身(비신)만 남았다.

앞면에는 한자로 「현감 趙奎淳 영세불망비」라고 쓰여 있었고,

뒷면에는 「계사년(1893년) 2월 모일 아들 秉甲이 고부군수로서

비각을 다시 세웁니다」라고 역시 한자로 刻字(각자)되어 있었다.

「秉甲」이란 글자는 누군가 심하게 긁어 놓았다.

조병갑하면 모르는이 없을 것 그의 폭정 내력은 생략한다 국민의 적이다

조병갑의 증손녀 조기숙이 이화여대 교수다(금수저?)

하연지의 함벽루

함벽루 앞 쉼터

저 앞에 숲에는 큰 교회가 있다

태인 본정통 왼쪽 선우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데 딱 한가지 한정식 뿐이다

피향정을 둘러보고 배롱나무 꽃을 보기위해 서현사지로 왔다

서현사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태서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사우. 박문효(朴文孝)를 배향하는 사당이다.

1819년(순조 19) 창건되었으며, 1868년(고종 5) 훼철되었다가 복원되었다.

박문효는 중종반정에 정국1등공신(靖國一等功臣)으로 영의정을 역임한 박원종(朴元宗)의 손자로,

1590년(선조 23) 음관(蔭官)으로서 종묘서직장(宗廟署直長)에 제수되었다.

 

임진왜란 때 왕을 모시고 의주 행재소(行在所)에 이르러 충성을 다하였다.

다음해 서울로 돌아오는 도중 개성 송악산을 지나는 중 적병의 기습을 받아 싸우다가 27세에 순절하였는데,

부인 송씨(宋氏)도 남편의 순절소식을 듣고 따라서 순절하였다.

1817년 이조참의로 증직되고, 송씨부인과 함께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태서리에 있는 서현사(西峴祠)의 터.

전라북도 기념물 제48호. 면적은 548㎡이다.

서현사는 1899년(순조 19)에 창건되었는데, 임진왜란 때 순절한 참의(參議) 박문효(朴文孝)를 향사(享祀)하여

오다가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철거되었다.

박문효(朴文孝)의 자는 백원(百源)이며, 관향(貫鄕)은 순천으로 중종반정의 공신인 박원종(朴元宗)의 손자인데,

문음(門蔭)으로 종묘서직장(宗廟署直長)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로 몽진하자, 가동을 거느리고 따랐으며, 다음해 서울로 돌아오다가

개성싸움에서 순절하였다.

부인 송씨는 어린아이와 종을 이끌고 장원이 있는 태인으로 내려왔으나, 남편의 소식을 듣고 뒤따라 순절했다.

후에 호남 유림의 상소에 의해 1817년(순조 17) 이조참의로 증직되고, 송씨부인과 함께 아울러 정려가 내려졌으며,

이어 1819년 서현사에 향사되었다.

 

묘정에는 1914년에 세워진 ‘贈吏曺參議行宗廟署直長朴公西峴遺墟碑(증이조참의행종묘서직장박공서현유허비)’가

서 있다. 서현사는 1984년 국비보조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 8작지붕으로 복설되었다.

≪참고문헌≫ 全北文化財大觀 ≪참고문헌≫ 井邑地方文化財地表調査報告書 종 목 : 시도기념물 48호

명 칭 : 서현사지 (西峴祠址)

분 류 : 사지 수 량 : 548㎡ 지정일 : 1981.04.01 소재지 : 전북 정읍시 태인면 태서리 909 이곳은

박문효(1568∼1593)의 사당이 있던 장소이다.

박문효는 중종반정의 공신인 박원종의 후손으로서, 종묘서직장이라는 관직에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로 피신하자 임금을 따랐으며, 다음해 서울로 돌아오다 개성 싸움에서 26세의

젊은 나이로 순절하였다.

후에 호남 유림들의 상소에 의해 순조 17년(1817)에 이조참의로 증직되었다. 조선 순조

19년(1819)에 처음 지어졌으나 고종 5년(1868) 철거되었다.

현재 서현사터에는 부인 송씨를 위해 세운 정려와 유허비가 남아있다.

사당은 위패를 모시는 곳이라 볼 것은 없지만 문이 잠겨 있다

증 이조참의 행종묘서직장 박공 사현사 유허비

뒤로는 대나무 숲이 

배롱나무

수령 190년 수고 6~7m. 둘레 0.3~0.6m. 보호수로 지정돼 있다

부근 정읍 북면 학동 부락에는 박문효 집안들이 많이 살고 있다고 한다

여기를 찾게 된 것은 블친님께서 배롱나무 꽃을 올렸기에 피향정을 둘러보고

들리게 되었다(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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