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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광주.제주

만석보와 송참봉 조선동네

송참봉 조선동네 네비를 찍고 가는데 만석보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전에 동학혁명기념관은 두번이나 갔는데 여기는 가보지를 않아서

우선 만석보로 차를 이동시킨다(9/22)

한반도의 곡창, 동학의 고을이라는 전라도 정읍, 동진강과 정읍천의 합수 지점에
만석보(萬石洑)터라고 있다. 여기가 바로 갑오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이 된 만석보(萬石洑)터다.

우리나라 최고의 곡창 지대로서 논으로 이루어진 지평선을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 중의 하나인 배들평야에 자리하던 만석보는 한국사의 일대 변혁을 가져왔던
동학농민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배들평야

전북 남부를 북서류하는 동진강은 정읍시와 김제시, 부안군을 관통한다.

길이 44km, 유역면적 1,021㎢. 정읍시 산외면 호남정맥의 묵방산(538m)에서 발원하여 산외·칠보·태인면과

신태인읍을 적시며 북서류하면서 황해로 흘러든다. 정읍천, 고부천, 원평천은 동진강의 주요 지류를 이룬다.

조선후기 수전농법이 보편화되면서 농민들은 수확량을 증대시키기 위해 물이 흐르는 곳에 물막이 둑인

보(洑)를 쌓고 이를 이용하여 농사를 지었다. 고부군수 조병갑은 정읍천과 태인천이 합류하는 동진강 상류에

이미 제 역할을 하는 예동보(禮洞洑)가 있었음에도 농민들을 강제동원해 1892년 5월 그 아래, 곧 정읍천과

태인천이 합류하는 이평면 하송리 지점에 새로운 보를 막았다.

만석보는 홍수가 지면 냇물이 범람하여 상류는 오히려 큰 피해를 입게 되었는데도 조병갑은 보세(洑稅)라 하여

보의 윗논은 1마지기에 2말, 아랫논은 1말씩 징수하여 농민들의 원성을 샀다. 1894년 1월 고부봉기 당시

전봉준이 열거한 조병갑의 주요한 학정 8조항 가운데 두 개가 만석보와 관련이 있었다.

① 주민들을 동원하여 만석보를 건설하며 수세를 받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이후 강제로 징수한 일,

⑥ 보를 쌓을 때 수백 년 묵은 나무를 강제로 베어온 일 등이 그것이다.

전봉준, 김도삼, 정익서 등 고부 군민들은 1893년 11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고부관아에 수세감면을

진정하였으나 강제로 쫓겨나고 말았다.

 

급기야 1894년 1월 10일 전봉준의 지휘 아래 1천여명의 고부 농민들은 관아를 습격하고, 만석보를 부셔버렸다.

이것이 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이 된 고부농민봉기이다. 만석보는 고부농민봉기를 유발한 고부군수 조병갑

학정의 상징물이다.

1898년에 군수 안수길이 만석보를 완전 철폐했다.

〈만석보유지비(萬石洑遺址碑)〉는 1973년 정읍군과 〈동학혁명기념사업회〉에서 세운 비이며 비문은 문학박사

김상기가 지었다. 만석보유지 바로 옆에는 1987년에 세운 〈만석보정화기념비〉가 있으며, 그 건너편에는

1999년에 세운 양성우 시인의 〈만석보시비〉 있다. 또 만석보 위쪽에 있던 원래의 보, 곧 예동보가 있던 자리에도

2000년 5월 정읍시와 이평면이 힘을 합쳐 〈만석보유지(萬石洑遺址)〉비를 세웠다.

조병갑(趙秉甲, 1844년 ~ 1911년) 

탐관오리의 대명사 조병갑의 아버지는 조두순(趙斗淳, 1796년 ~ 1870년)

고종 30년 전라북도 고부군수였으며 백성들을 탄압하고 착취하여 동학농민운동을 유발시켰다.

본 관 양주(楊州).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趙秉式)과 사촌간이다.

 

1892년(고종 29) 4월 전라북도 고부군수(古阜郡守)가 되었고 이듬해 만석보(萬石洑:貯水池)를 증축할 때

군민에게 임금도 주지 않고, 수세(水稅)를 징수 착복하였으며, 무고한 사람에게 죄목을 씌워 재산을

착취하는 한편, 태인군수(泰仁郡守)를 지낸 부친의 비각을 세운다고 금품(1000냥)을 강제 징수하는 등

온갖 폭정을 자행하였다.

 

격노한 군민들은 군수의 불법에 항의했으나, 자신의 모친상 때 부조금 2000냥을 안 거둬 주었다는 이유로

전승록(전봉준의 아버지)에게 곤장형을 가하여 때려죽이는 등 오히려 학정을 가중함으로써 이듬해

동학농민운동을 유발한 직접 원인이 되었다. 전봉준(全琫準)의 습격을 받았으나 목숨을 부지하여 전주로

달아나 관찰사 김문현(金文鉉)에게 보고하였다.

 

하지만 그의 행위가 밝혀져 파면되어 유배되었다. 이후 유배에서 해배되어 대한제국의 판사가 되었고

동학 교주 최시형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다.

만석보/ 양성우 

"들리는가, 친구여.

갑오년 흰 눈 쌓인 고부들판에

성난 아비들의 두런거리는 소리,

만석보 허무는 소리가

들리는가, 그대 지금도.

그 새벽 동진강머리 짙은 안개 속에

푸른 죽창 불끈 쥐고 횃불 흔들며

아비들은 몰려갔다.

굽은 논둑길로."

 

1

그때 그 아비들은 말하지 못했다.

어둠을 어둠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아픔을 아픔이라고 말하지 못했다.

본 것을 보았다고 말하지 못하고

들은 것도 들었다고

말하지 못했다.

날 저문 남의 땅, 황토언덕 위에

눈물뿐인 오목가슴 주먹으로 치며

달을 보고 울었다. 그때 그 아비들,

가을걷이 끝난 허허벌판에

반벙어리 다 죽은 허수아비로

굶주려도 굶주림을 말하지 못하고

억울해도 억울하다고

말하지 못했다.

 

2

열이면 열, 백이면 백

주눅들고

천이면 천, 만이면 만

주눅들어서

죽은 땅이 꺼지도록

한숨만 쉬고,

빌어먹을 이놈의 세상

밤도망이라도 칠까?

열이면 열, 백이면 백

한숨만 쉬었다.

 

3

제 똥 싸서 제 거름 주고

제가 거둔 곡식은 제 것이 아니었다.

차라리 오뉴월이면

송장메뚜기라도 잡아먹지.

오동지섣달 길고 긴 밤,

그 허기진 배

오죽했으리.

모진 목숨이 원수였고

조병갑이 원수였다.

 

4

이방 포졸 떴다 하면

닭 잡고 개 잡아라.

쑥죽 먹는 신세라도

사또조상 송덕비 세워주고,

사또에미 죽었으니

조의금 천 냥을 어서 내라.

못살겠네, 못살겠네,

보리쌀 한톨이 없어도

억새풀 묵은밭

천수답 다랭이 물세를 내고,

죽자사자 낸 물세를

또 내고 또 내라고 하고,

못 내면 끌려가서

죽도록 얻어맞고.

 

5

아아, 전창혁이 곤장 맞아

죽던 날 밤엔

만석보 긴 둑에 무릎 꿇고 앉아

하늘에 빌었다. 고부 장내리 사람들.

차라리 마을마다

통문이나 돌릴까?

이 야윈 가슴팍에 비수를

꽂을까?

아비들은 주먹으로 허공을 가르고,

아아, 전창혁이 곤장 맞아

죽던 날 밤엔

피눈물만 있었다. 그 산비탈.

 

6

밤은 밤으로만 남아 있었고

칼은 칼로만 남아 있었다.

겉늙은 전라도 굽이굽이에

굶주림은 굶주림으로만

남아 있었고

증오는 증오로만 남아 있었다.

먼지 낀 마루 위에 아이들은 앓고

신음소리 가득히 그릇에 넘쳤나니,

오라, 장돌뱅이.

어둠 타고 오라.

나무껍질 풀뿌리로 살아남아서

장성 갈재 훌쩍 넘어

서둘러 오라.

맞아죽은 아비 무덤 두 손으로 치며

전봉준은 소리 죽여 가슴으로 울고,

분노는 분노로만 남아 있었고

솔바람소리는 솔바람소리로만

남아 있었다.

 

7

구태여 손짓하며 말하지 않아도

누구누구 그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아는 사람은 알았다.

그 손님들을.

찬바람 서릿길 깊은 밤이면

썩은새 감나무집 작은 봉창에

상투머리 그림자드

몇몇이던가를.

구태여 손짓하며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은 알았다, 아이들까지도.

김도삼이, 정익서, 그리고 앉은뱅이,

두루마기 펄럭이며

왔다가 가고,

그 밤이면 개들이 짖지 않았다.

개들도 죽은 듯이

짖지 않았다.

 

8

장날이 되어야 얼굴이나 볼까?

평생을 서러움에 찌든 사람들.

찰밥 한 줌 못 짓는

무지렁이 대보름,

진눈깨비 내리는 대목장터에

큰바람이 불었다. 쇠전머리에.

났네, 났어. 난리가 났어.

에이 참, 잘 되었지.

때가 차고 부스럼딱지 개버짐 피었으니,

가자 가자 용천배기,

손뼉치며 가자.

김제 태인 알렸느냐?

최경선이를 불렀느냐?

지푸라기 날리는 저녁장터에

으스름 보름달 서럽게 밟고

낫 갈아 아비들은 침대를 찍었다.

 

9

드디어 때가 찼으니,

증오를 증오로 갚기 위하여

온몸에 불타는 피, 아우성치며

아비들은 몰려갔다. 안개 낀 새벽.

해묵은 피고름 비로소 터지고

증오를 오히려 증오로 갚기 위하여

아비들은 몰려갔다.

살얼음 거친 들판

꽝꽝 울리며,

나무껍질 풀뿌리로 살아남아서

그 겨울 노령남북 모여든 아비,

아비들은 몰려갔다. 곰배팔이도.

눈비바람 칼날같이 몰아칠지라도

그 누가 무단히 죽어간다더냐?

동트는 고부읍내 천둥번개로

두둥둥 북치고 꽹과리치고

온몸에 불타는 피, 아우성치며

아비들은 몰려갔다.

꽹과리치고.

 

10

보아라. 말발굽소리 크게 울리며

흰말 타고 달려오는

전봉준을 보아라.

남은 처자 불쌍하여 눈 못 감고 죽은

만 사람의 붉은 피

두 손에 움켜쥐고

어이어이 말잔등 찬바람 뚫고

한걸음에 여기 왔다.

이노옴, 조병갑아.

 

11

자네, 손화중이 동문으로 가고

자네, 김개남이 남문으로 가게.

한 번 지른 함성으로 삼문이 부서지고

또 한 번 지른 함성으로

동헌 지붕이 불에 탔다.

창고문을 열어라.

감옥문을 부숴라.

조병갑이를 놓치지 마라.

갈기갈기 찢으리라.

죽창이 없으면 괭이로 찍고

몽둥이가 없으면 발로 밟으리라.

자네, 김개남이 앞뜰로 가고

자네, 손화중이 뒤뜰로 가게.

 

12

앉은뱅이 이빨 물고 치는 북소리,

고부산천 회오리치며 크게 울렸나니,

여우 같은 조병갑이 옷 바꿔 입고

어디론가 흔적 없이 뺑소니치고,

분바른 계집ㄷㄹ 후들후들 떨며

목숨을 빌었다.

맨땅에 엎드려.

 

13

이제 와서 그 흙탕물

어찌 두고 보랴.

원한 쌓인 만석보 삽으로 찍으며

여러 사람이 한 사람처럼

소리소리쳤다.

만석보를 허물어라.

만석보를 허물어라.

터진 봇둑 밀치며 핏물이 흐르고.

여러 사람이 한 사람처럼

얼싸안고 울었다.

 

14

차라리 노래보다

몸부림으로

그 한나절 용천배기

어깨춤 추고,

어절씨구 곰배팔이

곰배춤 추며,

어절씨구 어절씨구

곰배춤 추며.

 

15

허허, 이게 참으로 몇 해 만인가?

한쪽에선 가마솥에 흰밥을 찌고

한쪽에선 만석보 허물고 온 이야기,

조병갑이 허겁지겁 도망친 이야기로

모두들 오랜만에 신명이 났다.

허허, 이게 참으로

몇 해 만인가?

한쪽에선 가마솥에

흰밥을 찌고.

 

16

이윽고 산마루에 큰 달이 뜨니,

해묵은 어둔 밤을 비로소

끝내기 위하여 아비들은

빼앗은 관청마당 높은 담장 밑에

날선 죽창 세워 두고

모닥불 쬐며,

아이들이 부르는

청승맞은 노래를 들었다.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 되면 못 가리."

 

오석이고 그늘이져 글을 볼 수 없는데 내용은 윗글과 같다

부근에 동학혁명기념관과 백정기 열사 기념관이 있으니

뜻있는 분은 아래 글을 보고 한번 가보시라 권하고 싶습니다

blog.daum.net/kts450/7397021

blog.daum.net/kts450/7397030

 

앞마을 예동부락에는 이런 조형물도 있다

두승산(444m)은 그리 높지 않은 산인데 평야지대에 우뚝 솟아 있으니 마치 거대한 높은 산으로 보인다

두승산은 호남 삼신산의 하나로 도교가 뿌리를 내린 장소이며, 많은 미륵불이 조성되어 전해 내려오는 곳이다.

도교사상은 조선중기에 남궁두와 권극중 등에게 영향을 주었고, 조선 말에는 강일순이라는 걸출한 인물을

탄생시켰다. 미륵사상은 두승산 일대의 여러 곳에 미륵불을 출현시켰다. 남복리의 미륵암에 있는 고려시대의

불상을 필두로 하여 여러 곳에 불상이 조성되었는데 대부분은 조선조에 목이 날아가거나 팔이 부러지고

삼등분 되어 땅에 묻히거나 이름 없는 야산 언덕과 골짜기에 버려지기도 하였다.

 

 

송참봉 조선동네 입구

동네로 들어가는 대문

송참봉 조선동네는 행정구역상 이평면 청량리지만 거의 영원면과 부안군 경계에 붙어 있다.

마을로 들어가는 진입로도 영원면 소재지에서 부안 백산 방향으로 2km 정도에 위치해 있는데,

산골오지에서도 보기 힘든 나지막한 초가집이 25채나 된다.

 

이곳은 송참봉으로 불리는 송기준씨가 개인이 사재를 털어 재현한 마을이다.

원래 월송동이란 큰 마을이 있었는데 50여 년 전에 완전히 멸실되어 논밭으로 이어오다가 현재의

모습을 재현하였다.

 

1995년부터 전통마을 재현을 결심하고 계획을 세워 2005년 8월 사업에 착수, 2008년 12월 5일에

완공하였다. 당시 지은이들은 목수가 아니었다.

송참봉의 뜻을 이해한 동네 할아버지들이 섰고 산채와 주막, 서당, 뒷간, 축사 등 1만 5000㎡에 한 채

한 채 모습을 갖췄고, 마을 이름을 1894년 동학혁명 시점에 맞춰 '송참봉 조선마을'로 지었다.

 

조선시대의 마을모습 그대로를 재현한 송참봉 조선동네는 우리 고유의 전통 멋과 맛을 동시에

체험할 수 있도록 전통놀이, 전통혼례, 전통음식 등 전통문화 체험과, 옛날 초가집에서 숙박을 하며

옛 조상들의 생활을 체험할 수 있는 온돌방 체험이 있다.

 

온돌방 체험은 아궁이에 불을 때 밥을 짓고 구들을 덥히고, 호롱불을 밝히고 잠잘 때는 요강을

방안에 둬야 한다.

 

이곳에서 옛 생활을 체험하려면 숙박비 1만원을 내야한다. 초등생은 절반이고 초등생 이하는 무료다.

다음백과에서

若無湖南 是無國家.

약무호남 시무국가.

이 글귀는 이충무공께서 하신 말씀인데........

송참봉 조선동네는 마을 주민들이 합심하여 이룬 마을 공동체다.

오래된 빈집의 구들장과 주춧돌, 기둥을 가져와 따뜻한 온돌방을 만들었으며 마을은 조선시대

옛 모습 그대로 재현하였습니다. 마을주민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이루었으며 이곳에서 온돌방

숙박과 찜질방, 전통혼례 그리도 전통음식과 우리의 전통놀이인 문화 등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옛날식 주막

6~100년전 그대로의 모습(가저온사진)

주막과 숙박 겸용인듯

전통혼례식장

100년 전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의 삶을 경험해보는 색다른 ‘송참봉 조선동네’ 

송참봉 조선동네는 25채의 초가집에 주막과 서당, 찜질방, 뒷간(화장실)으로 이루어져 있다.

70개의 온돌방에서 200명이 동시에 숙박할수 있으며 축사와 마당과 운동장, 우물, 논·밭 등을

갖추고 있어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다.  

마을 안내도

어렸을 때 보면 동네에서 힘자랑하며 저돌을 들어 올리는 들돌인 것 같다

 뒷마당에 가득 채웠던 어머니만의 공간 장독대, 송참봉 조선동네의 가지런한 장독대에서

어릴 적 어머님의 모습을 찾아본다

아산댁

 

코로나 19로 어느곳에서도 관광객들이 다녀간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입구에 보니 예약손님 외에는 출입제한 한다는 문구가 보였다

집들은 모두다 온돌방으로 구성돼 있다

감나무집

참봉집

층꽃

송참봉 조선동네 입구에는 송참봉 동네를 뜻하는 ‘송동’이란 작은 돌비석을 세워 놓았다.

이곳을 지나면 100년 전 조선시대와 2015년을 경계 짓는 입구가 나타난다.

요즘 한창 인기 있는 버라이어티 쇼인 ‘1박2일’과 ‘런닝맨’이 서로 다투어 댕겨 갔다는

안내판이 세워져서 송참봉 조선동네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마을 쉼터인 듯

민박집들

초가집에서 숙박하는 게 불편한 분들을 위해 최근에 황토펜션을 오픈했다고 한다.

 

목수국

우물터

큰집이라는 문패가 보인다

외부 모습은 옛날 화장실(뒷간) 들어가보니 현대식이다

위에는 남자용 아래는 여자용이다

부레 옥잠화.물달개비

수양버들은 늘어지고

살구나무집을 마지막으로 한바퀴 돌아보았다

에약자외에는 출입을 삼가해 달라는데 안에 들여다 볼 수도 없고 겉만

보고나왔다

커피 전문점 같은데 휴점상태다 

어디를가던 그래도 관광객이 있어야 구경하는 맛이 나는데 아무도 없는 송참봉 조선동네

적막감만 들고 아무도 없으니 멀리서 찾은 보람이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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