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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대전

제천 박달재

의림지를 돌아보고 여기 박달재로 왔다

박달재는 제천시 봉양읍과 백운면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제천에서 충주로 가는 길목에 자리 잡은

교통의 요지여서 대외 항쟁사 등 역사의 중요할 길목마다 주목을 받았던 곳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천혜의 자연환경과 풍부한 주변의 역사성 때문에 교통로가 아닌 관광 자원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박달재는 흔히 천등산 박달재라고도 부른다. 하지만 박달재는 정확히 말해서 구학산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시랑산 자락에 위치한다. 천등산 박달재라고 하는 가사는 충주의 산척면에 있는 천등산 자락을 넘어가는

다릿재와 혼동하여 생긴 것으로, 제천에서 충주 쪽으로 가려면 박달재와 다릿재를 차례로 넘어가야 했기

때문에 이 같은 혼란이 빚어진 것으로 보인다. 

한편, 1944년 제천시 백운면 평동리의 마을 장정 13명이 징용으로 끌려가던 날, 동네 부인들이 정성껏 만든

 도토리묵을 남편의 허리춤에 달아 주며 고갯마루 서낭당에서 이별했다는 사연이 노랫말로 만들어졌다는 

말도 있다.

1948년에 발표된 「울고 넘는 박달재」는 반야월[진방남]이 노랫말을 짓고 김교성이 곡을 붙인 것인데, 

박재홍이 불러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2005년 한국방송공사의 가요 프로그램인 ‘가요무대’가 방송 20돌을

 맞아 가장 많이 불린 노래를 선정했을 때도 1위로 선정되었다. 그러저러한 인연과 사연으로 

「울고 넘는 박달재」는 제천 지역을 상징하는 노래가 되었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출처]  향토문화전자대전

박달과 금봉이의 사연이 담긴 조각상

 

김려장군 대첩비

어려운 국제정세서 뛰어난 활약
김취려 장군이 활약하던 13세기 초엽의 국제 정세는 금(요)나라를 압박하던 몽고족이 북쪽에서 새로이 흥기해

거대한 세력을 형성하는 과정이었다. 몽고족이 그 세력을 동서남북으로 뻗쳐 금나라의 황하이북 땅을 차지하자

금에 속했던 거란 유족들은 느슨해진 금의 간섭에서 벗어나 대요국(大遼國)을 세워 고려를 침입해 왔다.

이러한 시기 뛰어난 전술로 거란을 크게 물리친 영웅이 바로 김취려 장군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고종 3년(1216)에 거란왕자 금산(金山), 금시(金始)가 대요목국왕(大遼牧國王)이라 칭하고

몽고에게 쫓겨 국경을 넘어오자 김취려 장군은 후군병마사로 상장군 노원순, 오응부 등과 함께 1만3천의

군사로 15만 거란병을 물리치는 대승을 거뒀다. 또 고종 4년에는 거란병이 개성을 위협하고 철원, 원주 등을

짓밟았는데 그는 서울을 지켜 적의 침공을 물리쳤다.

박달재 전투, 역사의 한 페이지 장식
김취려 장군이 활약한 가장 유명한 전투는 제천(堤川) 박달재 전투로 거란족은 이 전투에서 막대한 타격을 입고

물러났다. ‘울고 넘는 박달재’라는 노래로 유명한 박달재 고개에 가면 김취려 장군의 승리를 기리는 기념비와

그의 동상을 볼 수 있다. 이후에도 그는 몽고군과 연합해 거란족 잔당을 소탕하고 국내의 반란까지 평정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워 병부판사가 됐고, 고종 15년에는 고려시대 최고 관직인 시중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평생을 전장에서 활약하다 고종 21년(1234)에 사망하니 고종은 3일간 정사를 중단하고 친히 빈소에 나와

조의를 표했고, 위열공(威烈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김취려의 풍모는 신장이 6척5촌(185cm)이고 수염이 배 아래까지 내려와 조복을 입을 때는 수염을 시종들에게

나누어 들게 하고 했다고 전하며, 거란족은 관우 장군을 닮은 김취려장군의 외모만 봐도 벌벌 떨었다고 한다.

또 그의 사람됨이 절검 정직해 충의로 자신을 돌보고 군기를 엄하게 하니 사졸들이 함부로 그를 대하지 못했다.

인간적인 면에서도 다른 사람의 모범이 돼 먹을 것이 생겨도 사졸들과 나눠먹고, 적을 공격할 때는

그의 전략전술이 뛰어나 큰 공을 세워도 그 공을 스스로 자랑하지 않아 사졸들은 그의 높은 덕망을 칭송했다.

도굴꾼에 의해 현재의 묘 발견
김취려의 후예 중 많은 인물이 나서 활약하였는데 아들 전(佺)은 문하시랑 평장사를 지냈고, 손자인

양감(良鑑)은 첨의중호(僉議中護)로 언양군(彦陽君)에 봉해지기도 하는 등 후대에까지 그의 가문은

명문으로 이름을 날렸다. 현재 그의 묘는 울주군 언양읍 송대리 화장산 자락에 있으며, 장군의 사적비는

1983년 5월에 세운 것으로, 비문에는 장군의 일대기가 상세히 적혀 있다.

 

이 묘는 1909년 도굴꾼이 도굴하다 우연히 흘린 지석(誌石)이 발견돼 세상에 알려졌으며,

지금은 언양 김씨 후손들이 묘를 관리하며 제사를 지내고 있다. 수선화님 글에서

청암스님의 속명은 김병찬(71세)으로 충남 아산출신이며 온양고등학교를 거쳐 동국대 철학과를 졸업하였고,

5년동안 월악산 영탑사에서 주지생활을 하기도 했다.

스님은 충주에 머무르며 주부들을 대상으로 간병인교육, 산사요리 등을 교육하다가 박달재에 들리게 되었는데,

박달도령과 금봉이 동상이 서 있는 뒤쪽에 서있는 김취려장군전적비를 보고 깜짝 놀랐단다.

 

대한노인회 제천분회에서 세워놓은 이 비석은 귀부도 없다.  이토록 귀한 장군의 사적과 역사적 전적지가

왜 역사 속에 숨겨져 있을까 생각한 나머지 만사를 제껴놓고 그를 만천하에 드러내는 일을 해야되겠다고

결심을 했다고 한다.

 

청암스님은 5년여 전에 이곳에 사재를 털어 박달재에서 제일 오래된 건물 대지 147평을매입하여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뜻에서 안국사를 짓고 ‘김취려 장군 역사관’을 세웠다.

지금까지 5년동안 4억원을 투입하여 정성껏 꾸며  놓았으나 ,아직까진 행정기관으로부터 전혀 지원을 받지

못해 규모가 작고 장군의 동상과 기마상 등을 세우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며 안타까운 심경을 털어

놓았다고 한다

 

이글은 수선화 님께서 청암스님을 직접만나서 대화를 했는데 그때가 2009년이니까 저렇게 관리를 하지

못한 것은 그스님이 현재 82세니까 병환중이거나 사망을해서 돌보는이 없어 방치해 놓은 것 같다

 

안국사와 유적지

관리하는 사람도 없고 여기저기 오래 방치한 흔적만 남아있다

김취려장군 전적비

조선 시대 교통의 요지였던 박달재 아래에는 박달원(朴達院)이 설치되어 수많은 나그네가 쉬어 가는

 시설로도 활용되었다. ‘박달 도령과 금봉 낭자’의 사연은 그러한 과정에서 남겨진 이야기로 보인다. 

박달재 정상에는 서낭당이 있어 나그네들의 소박한 소원을 들어 주었고, 박달재 아래에는 국가의 

곡식을 보관하는 원서창(遠西倉)이 설치되어 있기도 했다. 한편, 박달재에는 산적이 자주 출몰해서, 

상인들이 고개를 넘을 때는 며칠씩 평동마을에서 머물다가 떼를 지어 넘어갔다고 한다. 정상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도덕암은 도적들이 머물던 근거지로서, 본래 이름은 도적암이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박달재는 교통의 요지였으므로 전쟁사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곳 중 하나이기도 하다.

1217년(고종 4) 봄 3만 명의 거란군이 남하하여 여름에 제천·충주 근처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고려 장수 김취려(金就礪)가 박달재 부근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며, 거란군은 많은 포로와

병기 등을 버려두고 도망쳤다. 이후 고려는 포로들을 공전마을에 모여 살게 했다고 전한다.

1258년(고종 45) 10월에도 고려의 별초군(別抄軍)이 박달재에서 몽골군을 요격하여 격퇴하고

포로를 구출해 냈다.

 

이처럼 외세의 침략에 방패 구실을 하던 박달재는 개항기 항일 의병전과 현대의 6·25 전쟁 때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가 되기도 했다. 개항기 제천 지역에 주둔하던 제천 의병이 중부권 20개

고을을 관리하던 충주부를 공격하기 위해 넘었던 고개였으며, 충주관찰사를 베고 기세를 올리던

의병들이 제천으로 물러선 이후에도 중요한 방어선 역할을 했다. 6·25 전쟁 때는 충주에 주둔하던

미군이 이 고개를 넘어 제천 쪽으로 건너와서 작전을 수행하였다. 비극적인 전쟁 시기의 삶을

그린 오탁번의 「천둥산 박달재」 배경이 바로 이곳이다.

전망대

전망대에서 바라본 박달재

이러한 장승공원도 있다는데 갈길이 멀어 올라가지 않았다

박달과 금봉이의 가묘

박달이와 금봉이의 시신은 없지만 그들의 넋을 기리고 애뜻한 사랑을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가묘를 만들어 놨다는 내용

목굴암 안에는 이러한 부처상이 있다

 

성각스님이 3년6개월에 걸쳐 목각했다고 한다

전시된 작품들

금붕당과 장승과 목각공원 옹달샘은 생략했다

산짐승들이 울부짖던 험한 산길 박달재에 신작로인 이등 도로가 개설된 것은 일제 강점기인 1910년대였다. 

이후 자동차가 다니기 시작했으나 폭이 5m에 불과하고 경사가 급하여 몇 번씩이나 목탄차가 쉬어 가야

 했으며, 겨울이 닥치면 도로가 끊기기 일쑤였고 사고도 자주 일어났다. 이에 따라 1936년에 도로 개선 

사업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져 ‘비행기재’라고도 일컬어지던 박달재의 사정이 다소 개선되었다.

이곳에 폭 11m의 포장도로가 완성된 것은 1975년 초였다. 이후 점차 자동차가 보급되고 교통량이 

증가하면서 터널이 필요하게 되어, 국비를 지원받아 1996년 1.96㎞ 공사가 마무리되고, 2003년 말에는 

다릿재 구간이 완공됨으로써 제천-충주 간 교통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다. 이에 따라 박달재는 제천-충주

 간을 오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관광을 목적으로 하는 이들이 많이 찾는 관광지가 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박달재 옛길

겨울 천년의 사랑/장을봉

박달과 금봉이의 손가락을 걸며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는 모습과 흰 눈 형상

가락지 형상을 조형화 하여 순수한 사랑의 영원함을 표현한 작품

가을 굳은 약속/장을봉

박달과 금봉이 만나 사랑을 나누는 모습과 단풍잎 형상 가락지 형상을 조형화 하여

박달재에 깃든 애뜻한 사랑의 전설을 표현함

울고 넘는 박달재 속에 담긴 사연
대중에게 널리 사랑받는 가요 중 하나인 「울고 넘는 박달재」는 박달재에 남겨진 ‘박달 도령과 금봉 낭자’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 또는 징용으로 끌려가던 남편과 이별하던 여인들의 이야기에서 유래한 것이라 

하는데, 노래 속에 전해지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영남의 선비인 박달이 한양으로 과거 보러 가는 길에 이등령이라 일컬어지던 이 고개를 넘게 되었다. 

그때 마을의 처녀를 보고 연모하게 되었으니, 두 사람은 영원한 사랑을 기약하게 되었다. 

금봉은 고갯마루 서낭당에서 서울 쪽을 바라보며 도령의 과거 급제와 상봉을 애타게 기다렸지만, 

서울로 간 박달은 과거에 낙방하여 금봉을 찾지 못하였다. 얼마 후 박달이 금봉을 찾아왔을 때 금봉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슬픔을 이기지 못한 박달은 금봉의 환영을 좇아 결국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고 만다. 이후 사람들은 두 사람의 사랑을 기억하며 ‘박달재’라고 고개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금봉이의 박달이 과거에 합격 하게 해달라는 기원이 아닐까

높은 박달재에는 벌써 단풍이 들기시작

각종 기념품과 목각제품 판매소

박달재가 관광지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였다.

1996년 종합 관광 휴양지로 개발되기 시작하면서 박달재에는 도로 포장이 시작되던 무렵 사라졌던

수십 세대의 화전민 대신 상인들이 자리를 잡았다. 서낭당이 복원되고, 노래비와 박달 도령과 금봉 낭자의

동상 등 여러 시설이 세워졌다. 「울고 넘는 박달재」는 박달재 정상에서 언제나 울려 퍼진다.

아울러 박달과 금봉은 제천시의 마스코트로 채택되었다.

제천시에서는 해마다 ‘박달 가요제’도 개최하고 있다.

위에 장승과 옹달샘까지 다돌아 볼 수는 없고 대충볼 것은 다본 것 같다

이정도에서 만족을하고 박달대 여행은 마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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