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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대전

덕주사와 미륵불

민박집에서 자고 아침 일찍 덕주사로 왔다

덕주사는 벌써 세 번째다(10/2)

신라의 마지막 공주인 덕주공주(德周公主)가 마의태자(麻衣太子) 일행과 이곳에 들렀을 때 이 절을 세워

절 이름을 덕주사라 하고, 골짜기 이름을 덕주골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때 지은 사찰은 보물 제406호인

덕주사마애불 앞에 세워졌었는데, 6 ·25전쟁 때 훼손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원래의 사지에서 1.7km쯤

떨어진 곳에 1970년에 중창된 것이다.


절 입구에 남근석이 있는데, 이곳이 남아선호 신앙이 깃든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서쪽 언덕 산 밑에는

네 기의 부도와 장대석이 있다. 6.25 때 불탄 뒤로, 1963년에 지암화상이 5칸 인법당을 중창하였으며,

1985년 성주화상이 현재의 법당을 다시 중창하고 충주댐으로 수몰된 한수면 역리에서 고려시대에

조성된 약사불을 이곳으로 옮겨왔다. 상덕주사는 이곳에서 동편계곡으로 1.5km 올라간 산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원래의 덕주사는 보물 제406호인 덕주사마애불(德周寺磨崖佛) 앞에 있었는데, 1951년 군의 작전상

이유로 소각하였다. 창건 당시의 절을 상덕주사, 지금의 절을 하덕주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상덕주사는 지금의 덕주사에서 1.7㎞ 지점에 있었는데, 1951년 무렵 까지만 해도 고색창연한

기도사찰이었으나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다.

상덕주사는 1622년(광해군 15)에 중수되었음이 옛 극락전 자리에서 발견된 명문기와를 통하여 확인되었다.

지금의 덕주사에서는 1206년(희종 2)에 조성된 금구(禁口)가 발견되어 고려시대 덕주사의 정황을

짐작할 수 있다. 1963년에 중창되었고, 1970년과 1985년에 각각 중건하였다.

덕주사에는 어느 때 것인지 확실하지 않은 우탑(牛塔) 1기와 조선시대의 부도(浮屠) 4기가 있으며,

우탑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대불정주 범자비
이 비석은 1988년 2월에 월광사지 입구의 논둑에서 발견된것으로 이곳으로 옮겨와 비각을 세웠다.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며 비문의 첫줄에만 한자로 "대불정주"라고 음각하고 다음 줄부터는
범자(산스크리트어를 표기했던 문자)로 새겼는데 모두 11행이다.

글자수는 모두 105자로 추정되며 글자의 크기는 일정하지 않다. 비석에는 고통받는 중생을 제도한다는

내용의 능엄주가 새겨져 있다. 화강석이며 높이가 161cm, 너비가 163cm인 네모난 형태를 하고 있다.

남한에서 범자비는 이 비석이 유일하다.

덕주사 석조약사여래입상

정면, 측면 모두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인 약사전은 석조약사여래좌상의 보호각으로 근래에 건립되었다.

건물의 전면은 개방되어 있으며 내부에 봉안된 약사여래좌상은

1985년 성주스님이 한수면 역리 마을 정금사지(淨金寺址)에 있는 불상으로 충주댐 건설로

그 지역이 수몰 예정되자 이곳으로 옮겨 봉안하였던 것이다.

불상은 나발로 된 머리 꼭대기에는 낮고 작으며 둥그스름한 육계가 있으며,

상호는 밑으로 길게 표현되어 장방형에 가깝다.

두 눈썹은 코에 가깝고,

입이 작으며 콧날과 입술부분은 다소 손상되어 있다.

두 눈은 가늘고 길며, 이마에는 지름 2cm 정도의 백호공(白毫孔)이 있다.

 【洪波堂大禪師印定之塔】

 

①홍파당부도(洪波堂浮屠)

8각형의 대석 위에 석종형 부도의 탑신(76㎝)을 올리고 옥개석은 4각형의 전각(轉角)을

치켜 올리고, 상륜부는 보주형으로 약식하였다. 전체 높이는 155㎝이다.

탑신의 비명에 홍파당 대선사 인정의 탑(洪波堂大禪師印定之塔)이라고 음각하였다.

 

 

【龍谷堂最悅之塔】

 

②용곡당부도(龍谷堂浮屠)

8각형의 대석 위에 석종형 부도의 탑신(83㎝)을 올린 그 위에 상륜부는 보주(20㎝)를

약식하였다. 전체 높이는 125㎝이다. 탑신의 비명에 용곡당 최열의 탑(龍谷堂最悅之塔)

이라고 음각하였다.

 

 

 【浮游堂】

 

③부유당부도(浮游堂浮屠)

8각형의 다단계로 모각한 대석 윗면에 석종형 부도의 탑신(90㎝)에 사각형의 옥개석은

전각(轉角)에 처마를 치켜 올리고, 상륜부는 복발형의 보주로 약식하였다.

전체 높이는 160㎝이다. 탑신의 비명에 부유당(浮游堂)이라고 음각하였다.

 

 

 【幻寂堂】

 

④환적당부도(幻寂堂浮屠)

복련(伏蓮)을 조각한 연화좌대에 북형상의 기단(56㎝)을 올려 놓은 위에 석종형 부도의

탑신(57㎝)에 8각형의 옥개석을 올리고, 상륜부는 복발형의 보주로 약식하였다.

전체 높이는 175㎝이다. 탑신(塔身)의 비명에 환적당(幻寂堂)이라고 음각하였다.

부도는 빌려온사진임

마애불 입상이 있는 곳까지 1.7km 이란 돌길이 계속이어진다

덕주산성

덕주산성

덕주사 마애불입상

보  물: 406호

소재지: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덕주사의 위쪽, 곧 상덕주사지 동편의 거대한 암벽 남쪽에 선각으로 조각된 마애불로서,

높이 14m에 달하는 거대한 선각불상으로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조각기법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여지는데 현재 보물 제406호로 지정되어 있다.

양식을 살펴보면, 넓적한 얼굴에 양감이 있고, 이목구비는 다소 과장되기는 하였지만 조각의 각선은 뚜렷하다.

둥근 얼굴에 좁은 이마, 짧은 목, 선명한 삼도(三道)가 특징이다.

아울려 신체표현에서 보여주는 간략한 각법(刻法), 입체감 없이 평편한 신체, 형식화된 옷주름,

전체적으로 투박하고 비례가 맞지 않는 신체 등은 고려 전기 거불(巨佛)에서 주로 보이는 특징이다.

덕주사 마애불과 같이 크기가 10여미터에 달하면서 괴체감있는 석불들은

특히 충청도지역에서 후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 전기까지 유행하였다

 

상 덕주사

우공탑(극락보전 앞에 있는 탑)

이 절의 승려들이 건물이 협소하여 부속건물을 지으려고 걱정할 때 어디선가 소가 나타나서 재목을 실어 날랐다.

소가 가는 곳을 따라가 보니 현재의 마애불 밑에 서므로 그곳에다 부속건물을 지었고, 소는 재목을 모두 실어다

놓은 다음 그 자리에서 죽었으므로 죽은 자리에 우탑을 세웠다고 한다.

마애불 전설

아버지인 경순왕이 왕건에게 나라를 넘기자 경주를 떠난 마의태자 일행은 망국의 한을 안고

 신라의 국권회복을 위해 병사를 양병하고자 금강산으로 길을 가던 중 문경군 마성면에 이르게 된다.

일행은 그곳에서 야영을 하며 하룻밤을 자게 되었는데,

그 날 밤 마의태자는 관세음보살을 만나는 신기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관세음보살은 왕자에게 "이곳에서 서쪽으로 고개를 넘으면

서천(西天)에 이르는 큰 터가 있을 것이다.

 

그 곳에 불사를 하고 석불을 세우며, 북두칠성이 마주 보이는 자리에 영봉을 골라

마애불을 이루면 억조창생(億兆蒼生)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으니 포덕함을 잊지 말라"고 현몽하였다 한다.

예사롭지 않은 꿈이라 생각하고 두 남매는 계곡 물에 목욕재개 하고 서쪽 하늘을 향해 합장배례 한 뒤

다음날 서쪽으로 자리를 이동하게 된다.

일행이 서쪽으로 가며 고개를 넘게 되었는데 고개마루턱 큰 바위에

한 권의 황금빛 포경문(布經文)이 놓여 있었다고 한다.

일행은 그곳에서 북두칠성이 마주 보이며, 최고봉이 한 눈에 들어오는 장소를 찾아 석불입상을 세우고

북두칠성의 별빛이 한껏 비추는 최고봉 아래에 마애불을 조각하며

8년이라는 세월을 보내게 되었으니 그곳이 바로 덕주사다

 

공주는 그대로의 삶, 불사에 전념하며 구도의 길을 걸음에 만족하였으나

왕권을 계승하지 못하여 비련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마의태자는 그러하지 못하였다.

태자는 동생인 덕주공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되찾겠다는 초지(初志)를 굽히지 않고

금강산을 향해 떠난다.

마지막 혈육인 오빠와 헤어져 혈혈단신이 된 공주는 출가하여 절에 몸담고

아버지인 경순왕의 애틋한 부정을 그리워하고 오빠인 태자의 건승을 서원하며 일평생을 살았다 한다.

덕주사에서 다시 1.5Km쯤 더 걸어 올라가면 높이가 15m쯤 되는

 커다란 바위에 암각 된 마애불이 있으니 이 마애불이 바로 덕주공주와 마의태자 오누이가

조성한 것으로 천년의 세월동안 한 결같이 그 자리에 묵묵히 서있다.

1.5km를 아침밥도 거른채 올라왔더니 배도 고프고 많이 지친다

덕주루

덕주산성

충청북도 제천시 월악산의 남쪽에 있는 이 산성은 돌로 쌓은 통일신라시대의 산성으로, 내성과 외성으로

되어있다. 신라 경순왕의 제 1공주 덕주공주가 이곳 월악산에 머물면서 지세를 이용하여 이 산에 성을

쌓고 훗날을 기약하였다. 그 후 이 성을 덕주공주가 쌓은 성이라 해서 덕주산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문경과 충주를 잇는 도로를 차단하는 전략적인 요충지이기 때문에 차단성의 기능을 지닌 이 성은

고려 고종 43년(1256) 몽고군이 충주를 공략하자 갑자기 구름, 바람, 우박이 쏟아져 적군들은 신이 돕는

땅이라 하여 달아났다고 한다. 또 조선 말기에는 명성왕후가 흥선대원군과의 권력다툼에서 패배할 것을

예상하고 은신처를 마련하려고 이곳에 성문을 축조하였다고 한다.

둘레가 32670척(9800m)에 이르렀던 성벽은 거의 무너졌으나, 조선시대에 쌓은 남문·동문·북문의 3개

성문이 남아 있다. 남문은 동창으로부터 문경으로 통하는 도로에 무지개모양으로 만든 홍예문으로

되어있고, 좌우를 막은 석벽은 내외 겹축으로 길이가 100간이다. 덕주골 입구에 있는 동문은 남문과

비슷하며, 새터말 민가 가운데 있는 북문은 내외에 홍예가 있으며 홍예 마룻돌에는 태극 모양이

조각되어 있다.

 

덕주산성은 내·외 5겹의 성벽이 있는데 축조연대가 각기 달라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1983년 3월 30일 충청북도기념물 제35호로 지정되었으며 제천시에서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월악산국립공원 남쪽에 있으며 성의 유구는 윗 덕주사를 에워싼 내성, 그 바깥의 하성과 조선시대에

쌓은 남문, 동문, 북문 등 아치형의 성문 3개소만 남아 있다.

먼저 북문 북정문(北正門)이다.

송계리 새터말 민가 가운데 있는데, 당초 계곡을 막았을 차단성의 성벽과 수구(水口)는 남아 있지 않다.

내외홍예를 갖춘 성문으로 초루(성 위에 세운 누각)와 여장(女墻:성 위에 활과 조총을 쏘는 구멍이나

사이를 띄어 쌓은 작은 성벽) 등 대부분의 석재가 유실되었으나 1997년 복원되었다.

 

홍예마루돌에는 태극모형이 조각되어 있다. 이 성은 안팎으로 5겹의 성벽이 남아 있는데 그 축조연대가

각각 달라, 성을 축조하는 방법에 관한 귀중한 자료이다.

주위에 민가와 창고등이 어지럽게 널려있어, 눈살을 찌프리게만든다.

그리고 덕주산성의 지붕형태는 서울의 숭례문이나 수원의 팔달문과같이 우진각지붕형태를 하고있는

것이 특징이다.

망폭대

송어회 한접시에 4만원 비빔밥과 매운탕 도합 6만원으로 늦은 아침을 해결했다

식당가에서 바라본 월악산 몇 년 전에 마지막으로 영봉을 올랐으니까

이제 그만 올라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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