勿染亭(물염정) 은 물염공 송정순(1521~1584)이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 담양으로 내려가던 중 물염적벽을 지나다 경치에 반해 띳집을 짓고
눌러 앉은 데서 연유하였다 하며, 勿染(물염)이란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다'라는
뜻으로 청렴결백하고 효심이 뛰어난 송정순의 호로 그의 성품을 잘 말해주고 있다 합니다
물염정 정자의 기둥중 하나는 다른 기둥과 다르게 울퉁불퉁 세워져 있는데 50여년전 정자를
보수 할 때 마을사람들이 아끼던 마을 앞 배롱나무를 베어와 정자 기둥으로 세운 것이라 한다.
물염정 정자 내부에는 조선 중.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들이
남긴 시문등 20여개가 넘는 詩文(시문)등의 편액이 걸려있다.
勿染亭(물염정)을 건립한 宋庭筍(송정순)은 본관 洪州(홍주) 자 中立(중립) 호 勿染(물염) 담양 출신.
할아버지 宋麒孫(송기손) 아버지 宋駒(송구) 어머니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안축(安軸)의 딸이다.
명종 13년(1558)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조정랑. 구례현감 등을 지냈으며, 성품이 忠厚(충후)하고
효성이 뛰어나 재직 중에 청렴결백하고 덕으로써 정사를 살펴 이름이 높았다.
柳希春(유희춘)과 함께 경사를 강론하였고 宋徵(송징) 등의 문인을 배출하였다.
同福(동복) 滄浪(창랑)에 정자를 세워 거기서 여생을 마친 뒤 담양의 龜山書院(구산서원)에 제향되었다.
난고 김병연 시비 동산 전경
조선 후기의 방랑시인인 김삿갓(김병연 1807~1863)은
전라남도 화순에서 생을 마치기 전에 물염정에 자주 올라 시를 읊었다 하는데
그런 연유로 정자 근처에 김삿갓의 동상과 7폭의 詩碑(시비) 등이 조성되어 있다.
김병연은 화순적벽 가운데서도 물염적벽을 자주 찾아 시를 읊었다고 전한다.
물염적벽이 바라다보이는 언덕에 ‘세상 어느 것에도 물들지 않겠다’는 뜻을 담은 정자, 물염정이 있다.
지난 2004년 풍광이 수려하고 유서 깊은 정자로 뽑힌 8개 가운데 당당히 제1경으로 선정된 곳이기도 하다.
조선 중엽에 물염 송정순이 세웠고, 1966년에 중수해 지금에 이른다. 물염정 내부에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남긴 시 28수가 걸려 있다. 중수 당시 마을의 배롱나무를 다듬지 않고 자연스럽게 세운 기둥도 볼 만하다
위와 아래는 같은 곳에서 바라본 풍경인데 현재는 대나무와 잡목들이 자라서
그 때와는 많이 달라보인다
물염적벽은 나무가 많이 자라서 선명하지를 않다
물염적벽
물염적벽
적벽은 장동응회암과 적벽은회암의 백악기 퇴적층이 층리를 이루고 이를 조화롭게 덥고
있는 식생들로 인해 그풍경이 중국 양자강 상류의 적벽과 비슷하다 하여 이름 붙야졌다
퇴적암층은 세립사암 실트스톤 이암 또는 응회질 사암이 시루떡처럼 얇게 교대로 쌓여
형성되었으며 이곳에서는 정단층에 의해 지층의 어긋난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1982년 10월15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 56호로 지정되었다
작년에 왔을 때의 모습
물염정
광주시 관광협회가 지정한 전남 8대정자 중 하나로
광주 호가정, 담양 식영정, 나주 귀래정(영모정) , 곡성 함허정, 영암 회사정,
장흥 청영정(부춘정), 완도 세연정이 있는데 그 중 물염정이 으뜸이라 하네요
창랑적벽
창랑적벽
창랑적벽
4곳의 적벽중에 화순적벽이 으뜸인데 지금 공사중이고 또한 개인적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다고 한다
들어가지를 못하게 하니 어쩔 수 없이 되돌아 나오지만 마음이 편치는 않다
다음에 다시갈 기회가 있기를 바라며 빌려온 사진으로 대신해 본다
화순적벽(노루목적벽)과 앞에는 보산적벽 전에 물이 없을 때는 얼마나 좋았을까?
1807년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회암리에서
안동 김씨 김안근과 어머니 함평이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출생
이름 炳然(병연). 자 性深(성심). 호 蘭皐(난고).
1812년(6세)때 선천방어사로 재직 중이던 조부 김익순이
홍경래 반란군에게 投降(투항) 함으로써 조부 김익순은 처형되고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질 때 어머니가 아들들의 장래를 위해 영월
산중으로 들어가 자식들을 공부시키며 숨어 살았다.
1826년(20세)때 장수 黃(황)씨 와 결혼,
그해 영월 도호부 백일장에서 시험을 보는데 課題(과제)가
'논정가산 충절사탄 김익순 죄통우천'으로 나와 글을 지어서 장원을
하였는데 역적의 후손임이 탄로 나 장원이 취소되고 병연도 김익순이
자신의 조부임을 알게되었다.
조상을 모독하여 큰 죄를 지었음을 痛感(통감)하고
하늘 보기가 부끄럽다하여 삿갓을 쓰고 방랑으로 세월을 보내면서
1828년(22세)때 장남 학균을 1830년(24세) 차남 익균을 낳고 다시
출가하여 대지팡이에 삿갓을 쓰고 방랑 생활을 하면서 평안도와 함경도 등
각처를 두루 돌아다니며 부자나 권력자들의 行悖(행패)를 嘲弄(조롱)하는
諧謔(해학)과 諷刺(풍자)하는 시를 남겼다.
화순 동복 구암리 삿갓동산
삿갓동산에 있는 김삿갓상
맷돌(마석)
누가 산속의 바위돌을 둥글게 만들었나 하늘은 쉬지 않고 돌아도 땅은 그대로 있네
은은한 천둥소리가 손가는대로 나더니 사방으로 눈싸라기 날리다 잔잔히 떨어지네
농가에서 하룻밤
종일토록 계곡을 걸었으나 사람을 못 보았는데 다행히 강가에서 작은 오두막집을 찾았도다
문을 바른 종이는 여왜씨 원년의 아득한 옛날 것이고 방은 전황씨 감자년에 겨우 먼지를 쓸었던 정도이네
검게 윤이 나는 그릇은 순임금 때의 질그릇 같고 붉은색 보리밥은 한나라 창고에서 묵은 곡식 같더러
날이 밝자 주인에게 인사하고 길을 나섰지만 지난밤 일을 생각하니 입맛이 쓰디 쓰구나
전에 왔을 때 모습
야박한 풍속
해질녁 이집 저집 문을 두드리니 주인들은 손을 내두르며 나그네를 물리치는구나
두견새도 야박한 인심을 알고 있는지 수풀을 사이에 두고 돌아가는 것이 낫다고 우는구나
비를 만나 시골집에서 자다
굽은 나무 서까래 처마 밑에는 먼지만 쌓였는데 방은 어찌나 좁은지 몸을 겨우 움직이네
평생동안 긴 허리를 굽히려고 하지 않았는데 오늘 밤엔 다리하나 펴기도 어렵구나
,쥐구멍으로 들어오는 연기에 방안은 칠흑 같이 어둡고 봉창은 띠로 덥혀서 새벽 온줄도 모르겠네
그러나 의관이 이슬에 젖는 걸 면했으니 떠날 때는 가만히 주인에게 고맙다고 하리라
김삿갓(난고 김병연) 종명지
찾아오는 식객들을 후대했던 압해정씨 백인당파의 종가 사랑채에 기거하던 김삿갓이
수려한 자연경관을 즐기며 시를 쓰다가 1863년 3월29일 이곳 사랑채에서 그의 나이 57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 곳으로 현재는 2009년 화순군에서 그가 머물렀던 곳에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사당을 복원하였다 앞에 보이는 사랑채에서 기거를 했다
또한 아름다운 풍경이나 어려운 사람들의 인생사를 시로 엮으며
방방곡곡을 두루 섭렵 1841년(35세) 전라도로 내려와 광주에서
無等山(무등산) 長佛峙(장불치)를 넘어 꿈에도 못 잊어 그리워했던
동복 赤壁(적벽)을 보고 '無等山高松下在 赤壁江深沙上流' 시를 지음
김삿갓은 1841년 35세 때 광주 무등산을 넘어 화순을 처음 찾았다.
이후 1850년 두 번째로 화순을 찾아 구암마을 정치업의 사랑채에 머물며
많은 시를 남겼으며, 마지막으로 1857년 화순을 찾은 김삿갓은 1863년 57세
숨을 거둘 때까지 동복 구암리 정치업 사랑채에서 머물다 생을 마감한 후
마을 뒷산에 3년간 묻혔다가 강원도 영월로 후손이 이장해 갔다 한다.
김삿갓이 기거했던 정치업의 안채
뒤 뜰에 있는 김삿갓 조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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