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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광주.제주

승주 송광사

승보종찰 조계산 송광사

청량각

청량각은 송광사가 자리잡은 조계산의 계곡물이 동구에서 굽이치는 지점의 깊숙한 계곡에 홍교(虹橋)를

쌓아올려 그 다리 위에 조성된 건물이다. 이 건물은 1921년에 중건하였고, 1972년 승주군의 보조에

의하여 중수하였다. 청량각에서 500m 오르면 일주문이 있고, 일주문 앞에는 송광사의 역대 고승

및 공덕주의 비석들이 있다. 다포(多包)로 형성된 일주문은 조선 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이 문의 현액이

보통 옆으로 한 줄로 쓰이는 데 대하여 종서로 씌어 있어 특이하다.

 

주차장과 일주문 사이에는 이런 편백나무 숲이 자리하고 있다

구산선문

한반도에 선(禪)이 수용되기 시작한 것은 신라 헌덕왕(809~826) 이후이다. 도의와 홍척이 당에 가서

마조 도일 문하인 서당 지장의 선법(禪法)을 전해 받고, 각각 821년과 826년에 귀국한 이후부터

신라에서 선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 후 당에서 조사선을 전해 받은 유학승들이 계속 귀국하면서

9산선문(九山禪門)을 형성했다. 9산선문은 신라 말과 고려 초에 형성된 선종의 아홉 파(派)를 말한다.

구산수련스님

효봉스님의 법맥을 잇고 조계총림을 개원해 초대 방장으로 추대된 구산수련(九山秀蓮, 1909~1983)스님.

참선수행에 몰두하는 한편 늘 자상한 미소와 친절한 가르침으로 스님들은 물론 재가불자들의 신행생활에

도움을 준 선지식이다

1909년 12월17일(음력) 전북 남원군 남원읍 내척리 509번지에서 태어났다.

부친 소재형(蘇在衡)선생과 모친 최성녀(崔姓女)여사의 4남 2녀 가운데 3남으로 태어났다.

속명은 소봉호(蘇鎬). 본관은 진양이다.

어려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한학을 공부하다, 1923년 부친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후 가사를 책임졌다.

이 무렵부터 남원 용성보통학교 정문 앞에서 명치(明治)이발관을 운영했다.

부처님 10대 제자로 이발사 출신인 지계제일(持戒第一) 우바리존자라는 별명을 얻은 것도 이 때문이다

20대 후반에 병고가 찾아온 후 생사문제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해결책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이때 한 지인(知人)의 권유로 지리산 영원사에 들어가 100일 기도를 했다. 그 뒤로 불법(佛法)에 귀의해

송광사 삼일암에서 효봉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이때가 1937년이었다. 효봉스님에게 사미계를 받은

이듬해인 1938년 통도사에서 해담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다.

1969년 5월30일 송광사에 조계총림이 개원되자 초대 방장으로 추대됐으며, 같은 해 불일회(佛日會)를

창립해 총재 겸 총회장을 맡는 등 한국불교 중흥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후 구산스님은 1976년 동국대 이사를 지냈으며, 한국불교의 세계화에 눈을 돌려 미국 LA 고려사(1979년),

스위스 불승사(1982년)와 미국 카멜 대각사를 창건했다.

1973년에는 조계총림 불일국제선원의 문을 열어 한국불교를 세계에 알리는데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성보박물관

송광사 하마비(下馬碑)

 

하마비(下馬碑)- 사람들에게서 말에서 내리라는 신성구역을 알리는 표시이다.

조선 태종 13년91413) 왕명으로 종묘와 궁궐 문앞에 대소인개하마(大小人皆下馬)라고 새긴 경계석을

세우고 이 곳을 지나 안으로들어가는 사람들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리게 하였는데

이것이 하마비의 연원이다.

 

송광사의 하마빈튼 조선 고종의 왕실기도처인 관음전이 송광사에 있기 때문에 고종 24년(1887년)에

세워진 것이며 전국적으로 왕실기도처 역할을 하는 사찰 입구에는 하마비가 세워져 있다.

가람배치 및 당우

『사적기』에 의하면 고려 명종 때 이미 80여 동의 건물을 가진 대사찰이었고, 1951년 공비들에 의하여 소실되기

전만 하여도 건물 총수가 80여 동을 유지하고 있었다. 현재는 약 50여 동의 대사찰로 그 사격(寺格)을 유지하고

있다. 중요한 건물은 대개가 서향하여 있다.

 

6·25전쟁 전만 하여도 가람배치가 법계도(法界圖)의 도표처럼 배치되어 비를 맞지 않고 경내를 다닐 수 있었으며,

대방(大房)만도 6방이 남과 북으로 나뉘어 있었다. 6방은 남쪽의 법성료(法性寮)·해청당(海淸堂)·행해당(行解堂)과

서쪽의 문수전(文殊殿)·임경당·도성당(道成堂)을 이른다. 동구(洞口)에서부터 현존하는 건물을 중심으로 배치된

가람의 모습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순천 송광사 조계문, 첫번째 출입문

전남 순천시 송광면에 있는 송광사의 첫번째 출입문인 조계문이다. 일주문은 경내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것이 일반적인데, 송광사는 강당 앞 개울 건너에 위치하고 있다. 2개의 기둥이 지붕을 받치고 있는 전형적인

일주문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맞배지붕으로 화려한 다포계 공포가 지붕을 떠 받치고 있다.

청색 바탕에 화려한 금색으로 쓴 현판이 인상적이다. 현재의 건물은 19세기 초에 새로 지은 것인데,

사찰 일주문 중에서는 오래된 편이다.

 

이 일주문은 신라말에 처음 세운 것을 1310년, 1464년, 1676년, 1802년에 고쳐 지었으며 현재의 조계문은

양식상 1802년에 새로 지은 것으로 보인다. 계단 좌우에 세운 돌짐승은 그 형태가 모호하여 사자같기도 하고

원숭이 같기도 하다. 일주문을 들어서는 것은 세속의 번뇌와 흐트러진 마음을 모아 진리의 세계로 들어선

것이니 가능한 행동과 마음가짐을 경건히 해야 한다

임경당과 우화각

우화각
세속의 때를 씻으라는 듯 조계의 청계수가 흐르고 계수를 건너는 곳에 무지개다리 있습니다.

다리 위에는 우화각이라는 일종의 문루가 4간 길이로 서 있습니다.

이 곳에는 옛부터 송광사를 거쳐간 시인 묵객들의 한시가 빽빽하게 걸려 있습니다.

건립 연대는 기록에 의하면 1707년에서 1711년에 걸쳐 건립한 것으로 영조 50년(서기 1774)에 중수되었습니다.

이 다리는 일명 능허교(凌虛橋)라고도 합니다.

척주각(滌珠閣)·세월각(洗月閣)·

일주문 뒤쪽에 4방 1칸씩의 몹시 작은 건물이 두 채 있는데, 현판에 척주각·세월각이라 하였다.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건물이다. 죽은 이의 위패를 모시는 곳으로, 재식시(齋式時)

영가(靈駕)의 관욕처(灌浴處)가 된다고 한다.

즉, 망령도 남녀를 갈라서 척주각은 남자 영가를 위한 관욕소이고, 세월각은 여자 영가의

관욕소가 된다. 영가가 절에 들어오기 전에 이 관욕소에서 목욕을 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조선시대에 조성된 4구의 사천왕상으로, 2004년 복장(腹藏) 조사에서 각종 전적류와 인본다라니 등의

복장유물이 발견되었으며,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이 들고 있는 비파의 뒷면에 쓰여진 명문과 복장유물

등의 분석을 통해 1628년(인조 6)경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2006년 4월 28일 보물 제1467호로 지정되어, 송광사 천왕문(天王門)에 봉안되어 있다

불상의 전체 앉은 높이는 403㎝이다. 우리나라의 사천왕상은 불·보살상의 존상과 달리 주로 대형의 소조(塑造)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독특한 제작기법을 보이고 있으며, 화려한 채색까지 가하고 있어 복합적인 조각 분야로서

주목되고 있다. 도상적으로 보면, 천왕문 입구에서 바라 볼 때 우측 안쪽으로 비파를 든 북방다문천(北方多聞天),

그 옆 입구 쪽으로 칼을 든 동방지국천(東方持國天), 좌측 안쪽으로 탑을 든 서방광목천(西方廣目天),

그 옆 입구 쪽으로 용과 여의주를 든 남방증장천(南方增長天)을 배치하였다. 이 네 천왕은 모두 의자에 앉아

양 발로 악귀를 제압하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이 사천왕상은 북방다문천의 비파 뒷면에 쓰여진 묵서명을 통해, 조선 후기 불화에 나타난 사천왕 도상의

변화가 실제 조각상에도 적용되었음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조선 전기까지는 탑을 든 천왕을

북방다문천으로 하였으나, 조선 후기에는 비파를 든 상이 북방다문천의 자리에 봉안되고, 탑은 든 천왕은

서방증장천의 자리에 봉안되는 변화를 보인다. 이를 원나라의 사천왕 도상에서 명나라의 사천왕 도상으로

전이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석한 최근의 연구 성과가 주목된다.

종고루

한붕화상

계를 내려주는 큰스님의 뜻이라 해야할까?

대웅보전

대웅보전은 송광사의 중심건물이다. 1951년의 화재로 불탄 뒤 1961년에 주지 금당(金堂)이 중창하였다.

그 당시에는 내부에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1구(軀) 봉안하였고, 건물은 전면과 측면 각 3칸이었다.

그 뒤 1988년의 중창 때, 평면 넓이 108평의 ‘아(亞)’자 형의 건물을 다시 세웠으며, 내부에는 석가모니불과

연등불·미륵불 등의 삼존불을 봉안하였다.

송광사 대웅보전에 모신 불보살님

(좌로부터 차례로 지장보살 연등불 보현보살 석가모니불 문수보살 미륵불 관세음보살순이다.)

대웅보전 열반상

대승불교의 가장 기초적인 수행 덕목으로 생사(生死)의 세계를 넘어서서 열반에 이르게 하는 6가지 육바라밀로

육바라밀은 보시(布施)ㆍ지계(持戒)ㆍ인욕(忍辱)ㆍ정진(精進)ㆍ선정(禪定)ㆍ지혜(智慧)로 이루어져 있다.

바라밀 또는 바라밀다는 산스크리트어 '파라미타(paramita)를 음역(音譯)한 것으로 완성ㆍ

피안(彼岸) 등을 의미한다.

대웅보전의 겹처마 지붕

무슨 법회가 열린 듯 불경소리가 들리기에 문을 열어보지 않았는데 조금 있으니

스님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기념사진을 찍는다

승보전
승보전은 옛 대웅전 건물을 손상없이 이건(移建)하여 원형 을 보존해 놓았습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의 영산회상(靈山會上)을 재현하여 석가모니부처님과 10대제자,

16나한(十六羅漢)그리고 1,250인의 비구제자상을 재현하였는데, 송광사가 승보종찰임을 상징하는 법당입니다.

1998년까지는 대울전으로 사용하다 대웅보전에 중심 법당을 내주고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다

승보전에 모셔놓은 석가모니부처님과 좌우에 가섭과 아난히 협시하고 계신다.

그 좌우에 4명씩 제자들이 앉아계시고 좌우 벽쪽에 8명씩 나한들이 서 계신다.

그리고 뒤쪽에는 1250명의 비구들이 앉아계시는 형태이다.

 

송광사 종무소

비사리 구시는 1724년 남원 송동면 세전골에 있던 싸리나무가 태풍으로 쓰러진 것을

가공하여 만든 것이다. 나라에서 제사를 모실 때 손님을 위해 밥을 저장했던 통인데,

약 4천 명이 한꺼번에 먹을 수 있는 쌀 일곱 가마 분량의 밥을 담을 수 있다고 한다.

 쌍향수, 능견난사와 더불어 송광사 3대 명물 가운데 하나이다.

무념문(無念門)

스님들의 수행공간

성적문(惺寂門)

성적(惺寂 : 슬기롭고 고요함)은 불가에서 산란한 마음을 집중하는 정신적 통일상태(성:惺)와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는 지혜(적:寂)을 말한다고 한다.

11월이 다가는데 아직도 가우라와 국화는 남아있네

관음전
현 건물은 사중기록에 있는 광무 7년(서기 1903)에 건립되었습니다.
관음전의 뒤쪽 언덕에는 제1세 조사 보조국사의 부도탑이 있습니다.

높이 265cm의 이 탑은 고려 부도탑에서도 완전히 말기적 특징을 보이고 있고 4각 기단 등은 대체로

딱딱한 감을 주고 있습니다. 사중 기록에는 희종 6년(서기1210)의 건립이라 했습니다.

<불일보조국사감로지탑>이라 하여 근세의 명필 오세창(吳昌)의 글씨로 탑명이 새겨져 있습니다.

송광사 관음전은 본래 성수전(聖壽殿)이라 하여 1903년 고종황제의 성수망육(51세)을 맞아 임금이

이름을 지어서 편액을 내린 황실기도처로 건축되었으나, 1957년 옛 관음전을 해체하면서 관세음보살님을

옮겨모시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관세음보살 좌우에 그려진 태양과 달이 고종황제와 명성왕후를 상징하고 있고 내부 벽화에 문신(文臣)들이

허리를 굽히고 불단을 행해 서 있다. 또 한 내외벽엔느 화조도, 산수화 등이 그려져 일반 사찰의 벽화와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 송광사 관음전의 특징이다.

금강계단(金剛戒壇)

금강보계(金剛寶戒)로 일컫는 불사리(佛舍利)를 설해 놓고 수계의식(授戒儀式) 등을

 행하는 곳을 말한다.

진여문(眞如門) 

선을 수선하는 설법전과 수선사로 들어가는 문.

설법전(說法殿) 

1968년에 만들어진 건물로 법회등을 위한 대강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설법전과 같이 있는

            수선사는 송광사의 선방으로 일체 외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다.

보조국사감로탑(順天松廣寺普照國師甘露塔) 

이 부도(浮屠)는 송광사 관음전(觀音殿) 뒤쪽 구릉에 자리잡고

 있으며, 팔각원당형의 기본 구도를 따랐는데, 탑의 전체높이는

 286㎝이다. 이 부도 옆에 있는 비의 내용에 따르면, 이 탑은 고려

  시대인 1210년(희종 6)에 세워진 것을 알 수 있다. 높은 지대석

 위에 기단부를 형성하고 복련이 장식된 하대석 위에 높은 대

을 놓고 그 위에 구형(球形)의 탑신석(塔身石)을 안치하였다.

옥개석(屋蓋石)은 아랫면에 높은 받침이 있으며 추녀는 경사가

급한 반면 낙수면은 평평하다. 상륜부(相輪部)는 보륜(寶輪) 위

 에 큼직한 보주(寶珠)를 장식하였는데 보주 하단에는 앙련을 돌

 려 화사하다. 전남유형문화재 제 256호로 지정되어 있다.

지장전(地臧殿)

 원래 명부전(冥府殿)으로 사용되던 건물로 지장보살을 모신 전각이다.

지장보살(地藏普薩)은 지옥에 떨어진 중생들을 모두 구제하기 전에는 성불도 하지 않겠다는

커다란 원을 세운 보살로 삭발한 모습이다. 좌우에 두 보살과 함께 시왕(十王)을 모셨다.

지장전에는 지장보살과 도명존자와 무독귀왕 그리고 시왕이 모셔져 있다.

시왕은 인간이 살아있을 다시 지은 죄의 경중을 가리는 열 분을 가리키며 사람이 죽으면 그 날부터

사십구일까지는 7일마다 , 그 뒤에는 100일, 1년(소상), 2년(대상)때에 차례로 각 왕에게 가서 생전에

 선악업의 심판을 받는다고 한다.박진태님 글에서

이곳은 수행장소와 요사채인 듯

날씨는 싸늘하지만 물빛이 너무 맑아 다시 담으며 간단히 송광사 세번째 답사를 마무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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