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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광주.제주

화순 운주사

화순 운주사지(和順雲住寺址)

사적 제312호로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영구산 기슭에 있던 절터이다.

신라 때 고승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였으며 2백 년 뒤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다시 세웠다고 한다.

여기에 사각 석실 미륵불·9층 석탑·원형 연화탑 등 석탑 15기, 큰 와석불(臥石佛)을 포함한 석불 100여 좌 등

대유물군(大遺物群)이 마치 노천 박물관처럼 자리잡고 있다. 속칭 운주사(雲舟寺)라고도 한다.

 

도선국사가 하룻밤 사이에 천불천탑을 세웠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운주사는 나지막한 야산 분지에

있는 고려시대의 절터이다.

 

절을 처음 지은 연대는 정확히 알지 못하나, 고려 중기에서 말기까지 매우 번창했던 사찰로 보이며,

15세기 후반에 다시 크게 지어졌다가 정유재란으로 폐찰되었다. 운주사(雲住寺)는 ‘구름이 머무는 곳’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배를 움직인다’는 뜻의 운주사(運舟寺)로 불리기도 한다.

 

현재 돌부처 70구와 석탑 18기만이 남아 있으나, 조선 초기까지는 천 여 구의 불상과 탑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산과 들에 흩어져 있는 70여 구의 돌부처들은, 수 십 cm에서 10m 이상의 거대한 돌부처까지

그 크기가 매우 다양하다. 평면적이면서 토속적인 생김새에 어색하고 균형이 잡히지 않은 신체 구조는

고려시대 지방적인 특색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석탑 또한 그 모양이나 무늬의 표현방식이 매우 독특하여, 3층·5층·7층 등 층수도 다양하다.

둥근 공모양의 원형탑이나 호떡 모양의 돌을 올려놓은 듯한 원판형탑 등 특이한 모양의 탑도 있다.

또한 탑의 표면에 ‘X’, ‘◇’, ‘川’과 같은 기하학 무늬들이 새겨 있어 특이하다.

 

운주사에는 누운 부처(와불)가 있어 유명하다. 도선이 천불천탑을 하룻밤에 세울 때 맨 마지막으로

와불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는데, 공사에 싫증난 동자승이 닭이 울었다고 거짓말을 하여 불상을 세우지

못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운주사는 특이한 돌부처와 석탑이 모두 한 절 안에 있다는 점에서 천불천탑에 대한 독특한 신앙을

보여주는 좋은 예로서 우리나라 미술사와 불교사 연구에 중요한 곳이다.

일주문 왼쪽에 있는 석불상들

와선중

석재군 나

운주사 안 여기저기에 있던 석불의 불신 및 불두와 석탑의 면석 옥개석 상륜부등

분실될 우려가 있는 석재를 모아 놓은 곳이다

석불군 나

이 석불군은 운주사 동쪽 산등상에 있는데 석불군 (가)와는 10여m 정도 떨어져 있다. 

석불군이 있는 암벽은 높이 5m, 너비 25m로 석불군 가보다 규모가 작으며 암결은 수평을 이루고 있다.

 중앙에 높이 4.75m의 대형 입상이 주존불이 있으며 주존불 좌우에입상 7구의 협시불이 배열되어 

총 8구의 석불로 되어 있다

화순 운주사(和順 雲住寺)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송광사 말사이다.

신라 말 도선국사가 풍수지리에 근거해 비보(裨補) 사찰로 세웠다고 전해지고 있다.

비보 사찰이라 함은 '돕고 보호한다'는 의미로, 강한 곳은 부드럽게 하고 허한 곳은 실하게 함으로써 자연의

흐름에 역행하지 않으면서도 호국과 중생들의 이익을 도모한 도선스님의 지혜가 담긴 사찰을 의미한다.

 

1984~89년 발굴조사 과정에서 금동불입상을 비롯하여 순청자, 상감청자, 분청사기의 파편, 기와편 등

출토된 유물로 볼 때 늦어도 11세기 초인 고려 초기에는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에 고려 혜명(惠明)스님이 1,000여 명과 함께 천불천탑을 조성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혜명스님은 970년(광종 21)에 관촉사 대불을 조성한 혜명(慧明)스님과 동일인으로 보고 있어

운주사가 고려 초에 건립되었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1984년에 '홍치 8년'(弘治八年)이라고 새겨진 기와편이 발견되었고, 연산군 1년(1495)에 4번째 중수가

있었던 기록이 있어 조선 초기까지는 존속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정유재란 때 왜적에 의해 폐사되고 말았다.

 

1800년경에 설담자우(雪潭自優)스님이 무너진 불상과 불탑을 세우고 약사전 등을 중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사찰 주변에는 91구의 석불(완형 50구)과 21기의 석탑이 있다. 운주사의 대표적 유물은

석조불감(보물 제797호)· 9층 석탑(보물 제796호)· 원형다층석탑(보물 제798호)· 와불이다.

산신각과 미륵전

미륵전 석불

거북바위 교차문칠층석탑

화순 운주사 거북 바위 교차문 칠층 석탑은 옥개석의 하면에는 옥개 받침이 6단의 각형 받침으로 표현되었고

모서리에서 중심을 향해 마치 목조 건축의 추녀목과 같은 두툼한 단이 양각되었다.

 

기단부를 겸한 1층 탑신은 4매 판석으로 결구하였는데 각 면의 양쪽 귀퉁이에 우주가 모각되고 면석부분

중앙으로 보조 우주가 하나씩 얕게 표출되었다. 2층 이상의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이 각 1석씩이나 초층과

2층 탑신만은 4매 판석으로 결구하였다. 그런데 이 7층 석탑 역시 쌍교차문 칠층석탑과 같이 2층에서

7층 탑신 4면에 교차자문을 새겼다.

 

쌍교차문칠층석탑에서는 전후면에 쌍교차문(쌍 X자문)이고 좌우면에는 마름모꼴(◇)을 새긴 것에 반해

이 석탑에서는 탑신 4면에 단일 교차문을 장식한 것이다.

초층 옥개석은 하면의 층급받침이 6단인데 특이한 것은 옥개석 하면 모서리에 추녀목과 같은 두툼한(폭 9cm)

돌출부가 각출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옥개석 상면의 우동마루도 두툼하게 튀어나오게 하여 백제계 석탑의

기법을 나타내고 고려시대 건축한 것으로 보인다

화순 운주사 거북 바위 오층 석탑

상세정보 : 화순 운주사 거북 바위 오층 석탑은 운주사 계곡 좌측 산 중턱의 비탈진 곳에 위치하며 와불로

올라가는 길가의 큰 암반 가장자리에 칠층 석탑과 함께 우뚝 솟은 탑이다. 현재 상륜부까지 보존 상태가

좋으며 통일 신라의 전형적인 탑 형식이다. 거대한 암반을 파내 얇고 좁은 1매의 방형 판석을 지대석

삼아 놓고 그 위에 석탑을 건립하였다. 운주사에서 암반 위에 탑을 놓을 때 판석형 지대석을 놓은 예는

드문 경우이다.

신라석탑의 전향적인 양식을 따르고 고려시대에 축성한 것으로 보인다 높이는 5.57m

민간설화에서, 누워 일어날 수 없는 와불이 일어나면 미륵부처님이 도래하고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이야기가 있다.

천불천탑이 생긴 유래를 설명하는 도선대사의 전설이 전한다.

도선은 한반도를 배 한 척의 형상으로 보고, 영남보다 호남에 산이 적어 배가 한쪽으로 기울 것을 염려했다.

배의 균형을 맞추고자 법력을 이용해 하룻밤새에 천불천탑을 쌓았다고 전한다.

 

한편으로는 천계의 석공들을 하룻동안 일한다는 조건으로 일을 시켰는데, 도선대사가 법력으로 일봉암에

해가 뜨지 않게 묶어서 하루가 아니라 며칠을 부려먹었으나, 도선대사의 제자가 일하기 싫어 닭 우는 소리를

내자 석공들이 와불을 세우기 전에 하늘나라로 돌아갔다는 설화도 있다.

 

절 이름 중 운주사(運舟寺)란 이름은 이같이 풍수상 움직이는 배 모양을 한 땅이라는 데서 비롯되었다.

출토 유물과 기록을 보면 고려 초에 세워졌고 조선 초까지도 존속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불행히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법당을 비롯하여 천불천탑도 크게 훼손되어 폐사가 되었으나, 18세기에

자우(自優) 스님이 절을 재건하였다.

 

이후 1918년경에 신도들에게 시주받아 중건되어 현재에 이른다. 단, 천불천탑만은 복구되지 못했는데

1942년까지는 석불 213좌와 석탑 30기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에는 석불 90여좌, 석탑 21기만이 쓸쓸히

남았으며 이마저도 모두가 온전한 형태인 것은 아니다. 1980년 6월에 절 주변 일원이 사적 제312호로

지정되었으며 그 외에 9층석탑(보물 제798호), 석조불감(보물 제797호), 원형 다층석탑(보물 제798호)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천불천탑의 양식과 배치 구조에 대해선 여러가지 해석들이 나오고는 있으나, 마땅히 이렇다할 정설은 나오지

않고 있다. 이름 없는 민중들이 하나 둘 씩 축조한 형태라서 처음부터 양식과 배치 구조를 판단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주장까지 있다.

 

수 없이 세워진 천불천탑 말고도, 절 뒷산으로 올라가면 누워 있는 거대한 와불(臥佛), 즉 누워 있는 거대한

불상이 눈에 띈다. 와불이 한 쌍이라 부부와불이라고도 부른다. 이는 도선대사가 천불천탑을 하룻밤 사이에

다 세우려 하였으나 천계의 석공들이 일찍 돌아가는 바람에 미처 세우지 못했다는 전설이 전한다.

 

현존하는 이 절의 석탑과 석불은 다른 불교미술과 조각수법이 완전히 다르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모두 이름 없는 석공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능주면과 춘양면에 더 볼 것이 있지만 오늘은 날도 저물고 이것으로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이동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