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향조 성규호 선생이 유원면 회룡에서 그곳(석문동)으로 옮긴 것은 1850년대. 그는 디귿자의 안채와 일자의
사랑채를 짓고, ‘나 또한 돌처럼 살리라’(아석헌) 뜻의 아호를 당호로 삼았다. 장남(찬영)에겐 오른쪽 담장에
잇대어 살림집(구연정)을 짓게 했고, 둘째는 왼쪽 담에 잇대어 살림집을 내도록 했다(석운재). 석운재
담 너머엔 찬영의 막내(낙안)가 1920년 초부터 경근당을 짓고 살기 시작했으니, 위로 옆으로 4대가 함께
사는 저택을 이뤘다. 고택이라 이름하지 않고 고가(경상남도 문화재자료 355호)라 한 것은 그런 까닭이었다.
장손 찬영에겐 낙문 낙교 낙안 3형제가 있었다. 둘째 낙교 에게 손이 없자 낙문의 둘째(유경)로 하여금 대를
잇도록 했다. 그리하여 증손대에 이르면, 구연정은 윤경, 아석헌은 유경, 경근당은 낙안의 아들 재경이
이어받았다.
장손 낙문은 가산을 크게 일으켜 가택을 중심으로 반경 6㎞의 드넓은 전답을 경영했다.
소출만 쌀 8000석, 보리 8000석에 이르렀다. 낙문은 구연정 앞마당에 연못을 파고 별당을 짓고, 솟을대문과
솟을중문을 올리고, 병천정사 강당을 옮겨 고방을 삼았다. 연못 옆에는 동산을 쌓아 기화묘초를 심어
한옥의 전통 구조에서 일탈했다. 일찍이 신문물에 눈이 뜬 셋째 낙안은 안채에 외창을, 뒤쪽엔 화장실을
붙였고, 사랑채에 별채를 잇대는 등 파격을 가했다. 반면 아석헌과 석운재는 전통을 그대로 지켰다.
첫 출입문 외대문이다 밖에서 본 모습
안에서본 외대문
안에서본 출입구 소슬대문 지금은 굳게 잠겨있고 뒷 동문쪽으로 들어간다
이 집은 외문 외에 내문이 따로 있다.
집의 규모가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성씨 고가는 한때 37개 동 130칸의 대규모 한옥 고대광실이었으나 한국전쟁 때 대부분 소실됐다가
2000년대 들어 성기학 회장이 대부분 복원했다.
성씨 고가는 크게 구연정, 경근당, 아석헌, 석운재 등 4개 영역으로 나뉜다.
내대문도 소슬대문이다
외문과 내문 사이에는 행랑채가 여러 채 있고 내문을 들어서자 잘 가꿔진 소나무와 꽝꽝나무들
사이로 안채가 모습을 드러낸다.
행랑채에서도 민박을 운영하는지 방마다 호수가 쓰여있다
구연정 영역이다. 안채의 위풍당당한 누마루가 특히 눈에 띈다.
누마루엔 3면에 걸쳐 계자난간을 둘렀고, 누마루 앞엔 S자 형태의 연못이 조성돼 있다.
이곳 터가 지네의 입에 해당하는 자리여서 지네가 좋아하는 지렁이를 형상화했다고 한다.
누마루에서 내려다보면 연못은 영락없는 한반도 모양이다. 그래서 '반도지'로도 불린다.
연못이 한반도 지형 같다 영하의 날씨에 꽁꽁얼었다
여기서 뒤로 돌아가면 이러한 대밭길로 일신재로 연결 되고 경근당이나온다
예전 산악회에서 갔을 때 돌아본 뒤뜰
창녕성씨 계보.
구연정은 찬영의 장남 낙문 장손 윤경에 이어지고
아석헌은 낙교가 자식이 없어 낙문의 차남 유경을 입양함으로서 유경에게 이어짐.
성기학 회장과 김정일을 촌수로 따지자면 6촌 처남남매지간임.
가문의 법도는 엄격했다. 적선을 가훈으로, 근검과 청렴을 가풍으로 삼았다. 할아버지 뜻을 따라 낙안은
‘석문동의 백성’이란 뜻의 석민, 사촌 낙성은 석운, 석민의 아들 재경은 우석을 아호로 삼았다.
구연정 일곽 곳곳에는 물을 담은 돌확을 두어, 들고 나며 몸가짐을 청결히 하도록 했다.
복숭아형은 여자가 둥근형은 남자가 들고 날며 손을 씻는 곳
민족주의자였던 우석 성재경은 '적선지가(積善之家)'로 성씨 집안의 기반을 다진 분이다.
그러나 적선지가 전통에도 이 집안의 일부 가족이 좌익 활동을 하는 바람에 오랫동안 '빨갱이 집안'으로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다. 성재경의 사촌 성유경(성낙교의 양자)은 좌익 성향의 인텔리였다. 남로당원이었던
그는 1950년 한국전쟁 와중에 두 딸 혜랑과 혜림 등 가족들을 데리고 월북했다. '김정일의 여자'로 비운의
삶을 살다 간 성혜림이 바로 이 사람이다.
성혜림 일대기는 한 편의 드라마였다. 성혜림은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방학 때면 할아버지 집인 성씨 고가를
찾아 마을 또래들과 어울렸다고 한다. 성혜림은 평양예술학교 졸업 후 월북 작가 리기영의 장남 리평과
결혼해 딸을 낳고 단란한 가정을 이뤘다. 뛰어난 미모와 발군의 연기로 북한 주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여배우로도 자리를 굳혔다.
그러나 배우로 이름을 날리던 시절 김정일의 눈에 띄었던 건 비극적인 결말의 시작이었다. 김정일은 리평과
결혼 생활을 중지시키고 1967년 성혜림과 동거에 들어간다. 두 사람 사이에 김정남이 태어났다. 김정남은
지난해 말레이시아에서 살해됐다.
이들의 동거는 당시 김일성 주석의 허락을 받지 않은 상태여서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이때부터 성혜림은
배우 활동에 큰 제약을 받았고 폐쇄된 생활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결국 성혜림은 언니 혜랑과 함께
모스크바로 떠나야 했다. 혜림 곁을 지키던 혜랑과 그의 아들 이한영은 망명했고 지병인 신경쇠약과
심장병으로 오랜 투병 끝에 성혜림은 2002년 5월 숨졌다. 아들 김정남의 피살에 이어 손자 김한솔 역시
불안한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다.
흔히 우리가 하는 말로 3대 부자 없고 3대 거지 없다고들 합니다. 우리의 근대사를 보면 일제시대와
6.25동란이라는 엄청난 난리와 세계 최고속의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왕조가 무너지고,
양반사회가 무너지고, 농경사회가 무너지면서 모든 것이 뒤죽박죽되었습니다.
일제시대와 6.25동란을 거치는 과정에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는 이유로 또는 부르주아라는
이유로 대창에 찔려 죽기도 하고 총살을 당하기도 하여 멸문지화를 당한 명문가들이 수두룩합니다.
그리고 전쟁 후에는 6.25때 빨갱이 노릇을 한 사람이 있는 집안사람들은 함께 빨갱이로 몰려
공직에 나아갈 수 없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여권 발급, 취업, 등등에서 연좌제 그물망에 걸려
임의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성유경은 일본 외국어전문학교를 다녔지만 뜻한 바 있어 학교를 중퇴하고 신간회 등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일제 말부터는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과 교유하며 고향에 첫째 부인과
세 딸이 있었지만, 뜻을 같이하던 김원주를 맞아 아들 일기와 딸 혜랑과 혜림을 두었습니다.
유경은 남로당 재정부장을 지내다 1948년 월북하였고 그 아내 김원주도 같은 해 남북정치협상
당시 여맹 대표 자격으로 방북했다가 월북하였고, 아들 성일기는 유격대원이 되어 남도부 빨치산
참모장으로 활약하다 전쟁이 끝난 뒤 창녕 당숙집에 숨어 지내다 1953년 국군 특무대에 체포
되었습니다.
그리고 막내 딸 혜림은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을 낳았으니 창녕성씨 집안은
그야말로 빨갱이 중에서도 빨갱이집안이라 할 것입니다.
이런 연유로 60~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창녕성씨 집에 발을 내딛는 자체가 빨갱이임을
자처하는 셈이니 감히 뉘라서 고향집을 찾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1855년 성규호가 이 집을 최초로 지은 이후 위와 같은 역사의 격랑을 넘으면서도
오늘에 이렇게 건재할 수 있음은 이 집안 특유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성규호는 스스로를 돌로 낮추어 아호를 아석(我石)이라 하였고 1863년 병자년 기근 때에는 곡간을
열어 이웃에 양식을 나누어 주었고, 그의 손자 낙안과 낙성, 증손 재경도 조부의 뜻을 좇아 호를 석민,
석운, 우석이라 하여 같은 길을 걸었는데, 손자 낙안과 낙성은 지양강습소(池陽講習所)를 개설
후학을 가르치고 부녀자까지 교육하다가 일제 때 철거되었는데 그 자리가 지금의 대지초등학교입니다.
구연정(龜蓮亭)
그리고 그는 1953년 우리나라 최초로 양파씨를 가져와 농가에 보급하였습니다.
증손 재경은 양파 채종과 재배기술을 확보하여 새마을 운동의 모델이라 할 수 있는 경화회라는
농민회를 조직 양파를 특작물로 농가소득을 올렸으며, 1942년 춘궁기에는 면민에게 곡식을 나눠주기도
하였고, 1981년 그가 사망 시에는 그가 운영하던 협성농산 주식을 경화회 조합원들에게 대부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성기학 회장은 경화회 회관을 새로 지어 군민에게 기부하였으며, 창녕성씨 고택을
학회나 세미나 장소로 빌려주기도 하고 창녕군민을 위하여 유명 강사를 초빙하여 강좌를 여는 등으로
창녕성씨 고택이 한 문중의 집이 아닌 창녕의 문화센터 역할을 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선비님의 글에서
명한루(明寒樓)
병천정사(瓶泉精舍)
이 집들도 6.25때 미군 24사단이 사령부로 사용하다 북한군에 밀려 후퇴를 하면서 문서를
태우다 건물까지 상당부분 소실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방치되다가 1998년 성기학 회장의
노(영원무역회장)모가 창녕 옛집에 가고 싶다고 하여 왔는데 집이 너무 낡아서 복원을 하였다
그리고 이 집은 현재 성원무역에서 귀한 손님을 접대하는 장소로 이용하기도 하고 인문학
강좌를 개최하기도 하여 현재도 아주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습니다
아서헌(我書軒)
성씨 고가는 현재 큰집 日新堂(일신당), 둘째 我石軒(아석헌)
셋째 石雲堂(석운당), 넷째 慶勤堂(경근당)의 집으로, 본채와 별당으로 1만 평 남짓하다.
아석헌(我石軒)
이 아석헌은 이곳에 자리한 서른채의元宅이다.
참고로 이집을 관리하고 있는 영원무역 성기학 회장이 자기의 고조부이신
성규호(成圭鎬)선생이1885년 노모를 모시고 이곳에 와서 터를 딱고 지은집이며,
그 이후 분가한 손자들이 집을 잇대 지어면서 4개
동 30채 규모의 한옥촌이 생겼다고 한다.
이 아석헌에 이어 지은집이 1860년데 에
석운재(石雲齋) 이고
1920 년대에는 경근당(慶勤當)이며,
1930년 대에는 일신당(日新堂)을
지엇다고한다.
석민서당(石民書堂)
아천재는 석민서당과 아석헌과 같은 건물인데 지금은 민박집으로 운영하는지
손님이오면 내어주는 방인지 방마다 이름표가 붙어 있다
아천재(我泉齋)
아사헌(我史軒)전에는 청수당이라 한 것 같은데 지금은 아사헌이라 하는가 보다
성대경교수와 임국희 씨의 아버지가 살았고 성대경 교수도 여기서 낳았다고함
석운재 대문
석운재는 1863년 대원군이 서원을 철퍠하자 아석선생이 관산서원의 안채를
그대로 옮겨다 지었다고 한다
석운재의 돌탁자와 돌의자가 특이하다
석운재(石雲齋)
옥타원정사(玉陀圎精舍)
여기는 선조들의 위패를 모신 곳 같다
우석헌(愚石軒)
낙안의 아들 우석 성재경(성기상·기학 회장의 아버지)은 선친의 뜻에 따라 광복 후 경근당 앞에 지포중학교를
짓고 아이들을 가르쳤다.
성재경의 할아버지 성찬영은 1909년 전국에서 처음 양파 재배에 성공했고, 손자 성재경은 채종에 성공해 대량
보급의 길을 열었다. 성재경은 인근 경작지에 보리 대신 환금성이 높은 양파를 재배토록 해 농민들이
가난에서 벗어나도록 도왔다. 이후 창녕은 양파 시배지로 명성을 얻었다. 마을 어귀 '양파 시배지' 표석은
이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성기학 회장은 2000년대 초반 성씨 고가를 수리하면서 전국 각지에서 해체되기 직전의 고택들을 사들여
그 부재들로 최대한 옛 모습을 복원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따라서 이 집은 지어진 시기에 따라 조금씩 다른 양식이 가미돼 한옥 변천사를 잘 보여준다
경근당(敬勤堂)
성기상 푸드웰 회장과 성기학 영원무역 회장 형제의 생가이자, 이 집에서 유일하게 문화재로 지정된 곳이다.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정면 6칸의 안채는 시멘트를 사용했고 대청마루 등에 유리 창문을 달아 근대에서
현대로의 시대 변천상을 반영하고 있다.
어느분의 동상인지는 명확하게 알 수가 없다
구연정 뒤에는 대나무 숲이고 걸어서 동상 있는 곳으로 내려오면 일신당 경근당으로 이어진다
지하에 들어가니 이러한 세미나실이 두군데 자리하고 있다
지하에 역대 카메라들을 전시해 놨는데 설명이 없어 무슨 의미인지?
이항녕선생의 창녕8경의 글이 걸려있네
이렇게 창년성씨 고택을 둘러보고 나와 마을 전체를 담아본다
앞에는 양파를 제배하고 있는 모습이다
'경남.울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원동 순매원을 찾았다 (0) | 2021.03.11 |
---|---|
통도사 매화 그리고 복수초 (0) | 2021.02.17 |
창녕 우포늪과 물계서원 (0) | 2021.01.31 |
통도사 자장매 (0) | 2021.01.27 |
울산 슬도와 청경채 꽃 (0) | 2020.1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