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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구

첨성대와 분황사 황룡사터

대릉원 주차장도 만차고 첨성대 쪽으로 진출을 하니 도로변에 빈 곳이 있어 주차를 하고

들어가니 넓은 광장에는 연날리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문호사는 전에도 한번 돌아봤기에 안에 모습은 생략을 한다

관광지 답게 첨성대 주변은 관광객이 있는 편이다

벌써 몇 번째 오는데 잠시 들려보고 황룡사지로 갈 것이다

사적지는 아직 발굴을 안한 것인지 발굴후의 모습인지 확실치는 않으나

현재는 꽃을 재배하고 있는 중이다

여기는 봄 여름 가을 꽃단지로 운영된 곳이다

계절별로 많은 꽃들이 피고 있어 꽃을 찾아 오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억새는 일부는 씨방을 날려 보내고 일부는 아직도 씨방이 붙어 있다

서양 억새(팜파그라스)

대릉원일원 황남리 고분군

경주시내 황남동 일대에 분포되어 있는 신라초기의 무덤들로 일부는 대릉원 구역안에 있다.

일제 강점기에 붙여진 일련번호 90~114, 151~155호인 원형으로 흙을 쌓아올린 30기의 무덤이다.

큰 무덤은 돌무지덧널무덤 적석목곽분이고 주변에는 봉문이 없어진 작은 무덤이 있다.

대릉원 안에는 전 미추왕릉을 비롯하여 천마총황남대총 등이 있다.

 

1973년에 발굴조사된 천마총은 지름 47m, 높이 12.7m로 금관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이 나왔다.

당시 천마도가 그려진 말안장 드리개가 출토되었기 때문에 '천마총'이라 이름하여 내부를 공개하고 있다.

 

또한 1973년부터 1975년까지 발굴조사된 황남대총은 남북길이 120m, 동서길이 80m, 높이 23m의

거대한 쌍무덤으로 남쪽 무덤에서는 금동관과 남자의 뼈 일부 및 많은 유물이 나왔다.

 

북쪽 무덤에서도 금관과 부인대라는 글씨가 있는 은팔찌 등 많은 유물이 나왔다.

남쪽 무덤의 주인은 남자, 북쪽 무덤의 주인은 여자로, 부부의 무덤을 붙여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해자터가 있는 곳은 지금 발굴작업을 하는지 공사중이다

634년(선덕여왕 3) 경주에 세운 절이다. 이 절의 석탑은 신라 석탑 중 가장 오래된 석탑이다.

솔거가 그린 분황사의 관음보살이 유명하다.

자장과 원효가 이 절에 머물렀다. 왕분사(王芬寺)라고도 한다.

고려시대 원효의 화쟁국사비가 세워지고, 조선시대에 들어와 임진왜란 때 화를 당하고 광해군 때

약사여래를 조성하였다.

 

신라에는 예로 부터 부처님과 인연을 맺었던 7곳의 가람터가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용궁 남쪽의 분황사이다.

선덕여왕이 창건한 분황사의 ''분황(芬皇)'은 '향기날 분', '황제 황'자로 향기나는 황제란 절이란 뜻이다.

 

인평으로 연호로 바꾼 그 해 창건된 분황사는 신라 최초로 여왕에 올라선 것을 내외에 알리는 상징적인 절임을

알 수 있다. 분황사 석탑에서 나온 사리장엄구에도 가위 등 여자와 관련된 유물이 있었다.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은 신화(神畵)로 알려질 만큼 유명했다.

일제강점기에 분황사 석탑을 수리하면서 2층 탑신 내부에서 발견된 사리함 속의 출토유물 가운데 상평오수

(常平五銖), 숭녕중보(崇寧重寶) 등 발행 시기를 가늠할 수 있는 중국 주화가 나왔다. 숭녕 연간으로 미루어

고려시대에 분황사 석탑을 수리했음을 알 수 있다.

 

1998년 보광전 수리공사시 해체한 종도리에서 확인된 보광전 중창과 중수 내용을 기록한 상량문(上梁文)에

의하면, 분황사가 지금처럼 사역이 축소된 시기는 임진왜란 이후로 여겨진다.

 

임진왜란 때 약사여래도 화를 당했다. 1608년(광해군 원년) 보광전(普光殿) 등의 전각을 중창하고, 5,360근의

청동으로 약사여래를 주조·봉안하였다. 1680년(숙종 6)에는 허물어져 가던 보광전을 중수하였으며, 상량문은

이때 작성하였던 것이다.

분황사는 창건 이후 최소 3차례 이상 가람배치 변천과정을 거쳐 지금은 3차 중건 금당인 보광전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다. 창건 가람은 석탑을 남쪽 중앙에 배치하고 그 북쪽에 남향의 삼금당을 ‘ 품(品)’자형으로

배치한 소위 ‘일탑삼금당식’ 가람배치였다. 분황사 탑은 현재 한국에서 창건 연대가 알려진 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탑이다. 탑의 사방에는 물개 또는 사자로 추정되는 동물석상이 세워져 있다.

경주 월성의 동쪽, 용궁의 남쪽에 있는 황룡사지는 ‘칠처가람지허(七處伽藍之墟)’의 하나이고 황룡사는, 규모나

사격(寺格)이 신라에서 가장 크고 높은 절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이 절터는 과거불인 가섭불(迦葉佛)의

연회좌석이 있는 곳으로 가섭불 시대부터 있었던 가람터라 하였는데 이는 신라 땅이 부처가 사는 땅이라는

신라인들의 불교관을 보여주고 있다.

 

황룡사는 늪지를 메우고 중문·목탑·금당·강당을 남북으로 길게 배치한 1탑식 배치였다. 그러나 장육존상과

목탑 등이 조성된 후 금당 좌우에 작은 금당이 배치되는 1탑 3금당식으로 바뀌고, 탑의 좌우에 종루와

경루(經樓)가 대칭을 이루어 배치되었다. 또 사방은 복도와 같은 회랑으로 둘러싸여, 독특한 가람배치를

보이고 있다.『삼국유사』에 의하면 종루에는 거대한 종이 있었는데, 몽고가 침입했을 때에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황룡사는 진흥왕이 7세에 왕위에 올라 나이 21세 되던 553년(진흥왕 14)에 월성(月城)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짓게 하였으나 그곳에서 황룡(黃龍)이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고 사찰로 고쳐 짓게 하여 절 이름을 황룡사라

하였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한다.

 

이와 같이 553년에 짓기 시작하여 569년에 주위에 돌담장을 두르고 경역(境域)을 마련하여 일단 사찰의

건물배치가 완료되었다. 그 뒤 574년에 5m가 넘는 주존불(主尊佛)을 비롯해서 금동삼존불(金銅三尊佛)을

만들고, 이 삼존불을 모시기 위한 금당(金堂)을 10년 후인 584년(진평왕 6)에 세웠다.

선덕여왕은 당(唐)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온 고승 자장(慈藏)의 권유로 구층탑을 짓게 되었다.

이때 백제의 기술자인 아비지(阿非知)를 초청하여 645년(선덕여왕 14)에 탑신부 약 65m, 상륜부 15m,

전체 80m에 달하는 구층목탑(九層木塔)을 완성시켰다.

 

이와 같이 553년에 처음으로 짓기 시작한 황룡사는 645년 목탑이 완성될 때까지 4대왕 93년간에 걸쳐

국가적으로 조성된 대사찰이었으며, 역대 임금이 이 절에 와서 고승의 설법과 강의를 받은 신라 최고의

국가사찰로 유지되어 왔다. 뿐만 아니라 황룡사에는 신라삼보(新羅三寶) 가운데 둘이 있었는데, 금당에

모셨던 삼존불 중 주존불인 장륙존상(丈六尊像)과 80m 높이의 구층목탑이 그것이다.

신라에 있었다는 3가지 보물 중 천사옥대(天賜玉帶)를 제외한 2가지 보물이 황룡사 9층목탑과 장육존상이었다는

것에서도 황룡사가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또 황룡사 금당에는 솔거가 그린 벽화가 있었고 강당은

자장이 보살계본을 원효가 금강삼매경론을 강설한 곳이다. 그리고 역대 왕들은 국가에 큰 일이 있을 때 강당에

친히 와서 고승이 모여서 마련하는 백고좌강회에 참석하여 불보살의 도움을 빌었다. 즉 황룡사는 신라에서 가장

주요하고 규모가 큰 가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승려들을 총괄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중심 가람이었다.

불대 대좌

장존육상 양쪽에는 협시불 아래 금당지 평면도 참고

심초석과 64개의 초석들

심초석(중심초석)

목탑지 전경

황룡사 9층 목탑(皇龍寺九層木塔)

 신라를 중심으로 삼국을 통일하고자 하는 그 시대의 간절한 소원이 표현으로 된 것이다.

신라 선덕여왕 때인 643년, 자장 율사가 당에서 귀국하여 황룡사에 탑을 세울 뜻을 선덕여왕에게 아뢰니

선덕여왕이 군신에게 의논하였는데, 신하들이 “백제에서 공장(工匠)을 청한 연후에야 바야흐로 가능할 것입니다”

라고 하여 이에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서 백제에게 청하였다.

 

공장 아비지가 명을 받고 와서 목재와 석재를 경영하였고 이간(伊干) 김용춘이 주관하여 소장(小匠) 200명을

이끌었다. 공장은 이에 마음을 고쳐먹고 그 탑을 완성하였다.그런 만큼 이러한 소원과 포부가 이 탑에

반영되었다.[6] 규모가 장대무비하였는데 9층까지 높이는 탑지(塔誌) 기록 당시의 당척(唐尺)으로 따진다

하더라도 약 53.45m, 상륜부(上輪部)까지 합하면 약 66.70m나 되는 거대한 것이고, 조영(造營) 당시의 척수인 

동위척(東魏尺)으로 따진다면 80m 이상으로 그보다 더 높은 초대형 건축물이었다.

 

 또한 황룡사 9층탑을 만들어낸 의지와 역량을, 삼국 가운데 가장 약소국이었던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한

원동력 가운데 하나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 후, 황룡사 9층 목탑은 고려 때 몽골의 침입으로 불타버렸고 현재는 탑의 초석(礎石)만이 남아 있다.

 중앙의 심초석(心礎石)에서 1964년 12월에 도난당하였던 금동사리함(金銅舍利函)이 1972년 10월 28일

국립박물관에서 처음으로 공개된 적이 있다.이 사리함의 3면에 걸쳐 탑의 조성 기록이 새겨져 있는데

신라 경문왕(景文王) 11년(871)에 탑을 중수하면서 탑의 조성과 중수 사연을 적은 것이다.

그 내용은 대체로 삼국유사의 기록과 유사하지만 당시의 확실한 명문(銘文)에 의하여 황룡사의 위관(偉觀)을

재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밖에도 발굴조사 결과 이 절이 그 규모에서 동양최대의 사찰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특히 구층탑은

무려 80m나 되는 높이를 가진 대탑으로 동양 최고의 목조건물이 존재하였음을 분명히 밝히게 되었다.

 

출토된 유물은 무려 4만여점에 달하며, 이 중 각 시대에 걸쳐 만들어져 사용된 와전류(瓦塼類) 가운데

특히 측면에 용(龍)을 새긴 보상화문전(寶相花文塼)은 지금까지 출토된 예가 없는 통일신라시대의

우수한 작품이다. 금속류로서는 금동제불상·풍탁(風鐸)·금동제귀걸이·청동거울 등이 수습되었으며,

이 중 금동불상 1점은 여래입상(如來立像)으로서 높이 10㎝에 지나지 않으나 조각 솜씨가 우수하며

도금이 매우 찬란하고 화려하다.

 

목탑지의 심초석(心礎石) 아래에서 수습된 작은 백자 항아리는 당나라의 작품으로 밝혀져 당시의

문물교류를 알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이 밖에 높이 182㎝, 최대너비 105㎝ 되는 대형의 치미(鴟尾: 매 머리모양의 장식)는 일본이나

중국에서도 아직까지 발견된 예가 없어 동양최대의 치미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치미가 사용된 건물의

웅장함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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