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경북.대구

무흘구곡 2

 

사인암으로 착각하기 쉬운 바위 절벽

사인암 아내판 앞부분 글:

한강 정구 선생이 무흘구곡 중 제 5곡으로 

띠끌 한 점 없는 푸른 삼봉과 깎아지른 듯한 절벽 아래로

대가천의 맑은 물이 흐르는 이곳은 

옛날 사인(舍人) 벼슬을 지낸 중이 이곳의 아름다운

수석을 사랑하여 바위집을 짓고 살았기에

사인암(舍人岩)이라고 하고, 혹은 속세를 버리고 이곳에

온 사람은 누구나 심신을 이곳과 영원한 이연을 맺고자 한다해서

사신암(舍身岩)이라고도 한다 하며, 한강 선생도 이곳에서

자신의 마음을 비우면서 아래와 같은 시를 읊었다

   경북 김천시 증산면 평촌리 장평(壯坪, 일명 장뜰)과 성주군 금수면 무학 2리(일명 챙기; 가천초등학교

무학분교가 있는 마을)의 인물에 의하여 태어난 구전 민요 한 곡이 있다. 증산면 장뜰 마을에서 대가천을

끼고 성주 쪽으로 20 리를 내려가면 챙기 마을에 닿는데, 조선시대에는 두 마을 모두가 성주목 증산면에

속하였다.

 

   이 지방에 전하는 전설이 한 가지 있다. 일제시대 장뜰 마을 총각이 챙기마을로 장가를 갔는데, 초례를

치르고 채 삼일이 아니 되어 일본군에 강제 징발되어 끌려갔다. 어디로 무슨 목적으로 징병되는 지도

모르고 끌려갔다. 장뜰 새신랑은 8․15 해방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영영 다시, 행방도 생사도

알 수 없었다.

 

   색시는 하마나 하마나 신랑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삶을 외롭고 힘들게 보내다 노래를 지어 부르기

시작하였다. 먼 훗날 색시는 자살을 했는지……, 생사여부도 모르게 되고 부모들도 챙기 땅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이 노래는 성주 서부지역에 뿌리를 내리며 연연히 불렸다.

이 민요의 기능 보유자가 부르는 가사를 채록하면 다음과 같다.

 

                  장뜰 땅땅 범나비가

                  챙기 땅땅 꽃을 두고

                  원수년의 대동아 전쟁에

                  우리 님을 데려가디

                  한 번 가신 우리 님은

                  다시 올 줄 왜 모르노

                 - 장뜰 챙기가, 기능 보유자 이효분(84세, 경북 성주군 금수면 어은2리 속칭 상후리실 거주)

 

  대동아 전쟁을 배경으로 한 서정민요였다. 점차 민중에 파고들면서 뒷날 부녀자들이 홀치기할 때와

삼을 삼을 때 애창하는 노동요로도 겸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 효분(택호; 한개댁) 할머니에 의하면 이 마을 아녀자들이 어려서부터 노동을 하면서 평생 불러오고

있다고 한다. 이제 노래를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고인이 되었고 이효분 할머니를 비롯한 몇 명의

노인들만이 이 민요를 전수하고 있다.

 

  김천에서 성주군 가천면을 향하여 가다가 염속산 살치재를 넘어내려 가서 만나는 삼거리에서 좌회전,

성주군 금수면 후평리 상후리실 마을에 들면 이 민요를 들을 수 있다. 이 마을의 아녀자 몇 명은 지금도

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우리 민족의 뼈아픈 역사와 식민지시대를 힘겹게 거쳐 온 부녀자들의 생애를

전하고 있다. 현 행정구역상 장뜰은 경북 김천시 증산면 평촌리(장평;壯坪)이며 챙기마을은 성주군

금수면 무학 2리이다.

수도계곡
무흘구곡의 제6곡인 옥류동을 지나 수도산 방향으로 차량으로 10분을 운행하면 수도암과 청암사로

갈라지는 이정표가 나타나고 수도암 쪽으로 좌회전하여 장뜰마을을 100m 쯤 지나면 여섯 그루의

소나무가 계곡을 감싼다. 무흘구곡 제7곡으로 달빛이 연못에 꽉 찬다는 의미의 만월담(滿月潭)이다.

이곳에서 1km 떨어진 지점에는 용이 누워 있는 바위 형상의 제8곡 와룡암(臥龍巖)이 있고, 2km를

더 올라가면 무흘구곡 마지막 제9곡으로 최고의 풍광을 자랑하는 용소폭포가 나타난다. 높이 17m로

떨어져 내리는 폭포가 웅장하면서도 포근한 느낌을 주며 소의 깊이는 명주실 타래가 다 들어갔다고

했으나 현재는 3m정도이다. 여기서 기우제를 올린 뒤에 용소가 울면 반드시 비가 내린다는데,

그 울음소리가 10리 밖에서도 들릴 만큼 우렁차다고 한다.

만월담

무흘 7곡 만월담(滿月談)달빛이 가득한 아름다운 연못이란 뜻이며

"일곱 굽이라 높은봉 여울물 감아도니

이런 풍광 일찍기 구경을 못했어라

장난꾸러기 산신령 조는 학을 깨워볼까

솔 이슬 까닭없이 학 뺨에 떨어지네"

사실 이런 풍경이라면 설악이나 지리산에는 그외 국립공원과 도립공원에 넘쳐나는데

별 아름답다는 생각이 안든다.

한강 선생께서 9곡을 만들기 위해 억지로 끼워 맞추신것 같다.

만월담이라 하지만 별로 느낌도 없고

둥근 보름날 저녁에 봐도 별로 일듯...

인현왕후길로 이어지는 츨렁다리

김천시가 인현왕후길을 조성한데는 이 길이 가지고 있는 인현왕후(1667-1702)의 비운의 애달픈 역사적

배경에서 비롯되었다.

조선 제19대 왕인 숙종(肅宗)의 계비(繼妃)로 1680년(숙종6) 인경왕후가 죽고 서인들이 집권한 후

송시열(宋時烈)의 추천으로 1689년 왕비가 되었으나 왕자를 낳지 못해 왕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는데

1688년 숙원장씨(淑媛張氏)가 왕자 윤(昀), 훗날의 경종을 낳으면서 갈등이 심해지는 가운데 남인이

집권하면서 숙원장씨는 희빈(禧嬪)이 되고 인현왕후는 남인들의 주장으로 폐위, 서인으로 강등된 후

3년간 김천시 증산면 소재 청암사에 은거하게 되었다.

1694년 남인이 밀려나고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장악하자 장씨는 희빈으로 강등되고 인현왕후가 왕비로

복위되었다. 인현왕후가 울분을 곱씹으며 하루에도 몇 번씩 내왕했을 인현왕후길을 삼백여년이

지난 지금 그때의 사연을 되새기며 걷는다면 더 큰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용추폭포

높이가 17미터이며 선녀탕으로 불리는 물구덩이 깊이가 3미터로 옛날 용이 살다가 승천했다는 전설이

전하는데 실제로 폭포 바위절벽에 흰색으로 용의 형상과 비슷한 문양이 새겨져 있기도 하다.

또 옛날 수도암에서 종을 훔쳐 도망가던 도둑이 발을 헛디뎌 종이 폭포로 떨어졌는데 이후부터 비오는

날마다 종소리가 울린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발전기를 돌려 난방과 조명을 해결하며 영하의 날씨를 견디며 야영을 한다

늦가을 인현왕후길은 단풍이 화려하게 물들고, 넓지 않은 오솔길에 나뭇잎이 푹신하게 깔려 있는데다

산길이 완만하고 순해서 편안한 가을여행을 원하는 관광객들뿐만아니라 사계절 모두 전국에서

찾는 이가 날로 증가하고 있다.

평탄한 지형과 가파르지 않은 산길로 조용히 생각하며 온가족이 함께 걷기에 더할 나위 없다.

사색도 하고 편안하면서도 고즈넉한 숲길을 담소도 나누며 걷다보면 어느새 마지막 와룡암과 시원한

용추폭포가 여행객들을 반긴다.


'경북.대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육사 문학관과 고산정  (0) 2021.04.15
안동 선성수상길과 선성현 문화재단지  (0) 2021.04.14
회연서원과 무흘구곡 1  (0) 2021.03.04
김천 방초정과 부항댐  (0) 2021.03.02
김천 직지사  (0) 2021.0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