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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구

이육사 문학관과 고산정

몇 년 전에 왔을 때 공사관계로 관람을 못했었는데 이번에 보니 새로운 건물로 산뜻하게

잘 지어져 편안하게 관람할 수가 있었다

문학관의 외부모습

이육사문학관은 일제 강점기에 17번이나 옥살이를 하며 민족의 슬픔과 조국 광복의 염원을 노래한

항일 민족시인 이육사(본명 이원록, 1904-1944)와 관련해 흩어져 있던 자료와 기록을 한곳에 모아

그의 독립정신과 업적을 학문적으로 정리하기 위해 설립됐다. ‘264’는 첫수감시 수인번호로, 그의

저항의 상징이자 시세계를 암시하는 기호였다.

빈카

협죽도과 빈카속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 유럽 대륙이 원산지로 영국에서 귀화식물로 자라고 있으며,

북아메리카로도 도입되어 북아메리카 대륙의 동부에 널리 분포한다.

꽃잎의 너비가 넓은 것은 빈카메이저(빈카), 너비가 좁은 것은 빈카마이너(좁은잎빈카), 너비가 매우 좁은

것은 빈카마이너 변종으로 본다. 뿌리에서 올라온 줄기가 덩굴 형태로 포복하며 자란다.

바람개비 모양을 닮은 꽃은 이른 봄부터 가을까지 보라색으로 핀다. 음지에는 강하지만 추위에는

약해서 주로 남부지방에서 심는다.

본관은 진성(眞城). 경상북도 안동 출신. 본명은 이원록(李源綠) 또는 이원삼(李源三). 원삼은 주로

 가정에서만 불렀다고 한다. 개명은 이활(李活), 자는 태경(台卿). 아호 육사(陸史)는 대구형무소 수감번호 

‘이육사(二六四)’에서 취음한 것이다.
작품 발표 때 ‘육사’와 ‘二六四(이육사)’ 및 활(活)을 사용하였다. 아버지는 이황(李滉)의 13대 손인

 이가호(李家鎬)이며, 어머니는 허길(許吉)로, 5형제 중 둘째 아들이다.

 

어려서 할아버지에게 한학을 공부하였고, 영천 소재의 옛 백학서원(白鶴書院)인 백학학교(白鶴學校)와 

보문의숙(普文義塾)·교남학교(嶠南學校)를 다니고 1926년 북경 조선군관학교, 1930년 베이징대학

[北京大學] 사회학과에 적을 둔 적이 있다 하나, 그 연도나 사실 여부가 확인된 것이 아니다.

경력은 항일운동가로서의 활약이 두드러지는데, 1925년에 형 이원기(李源琪), 아우 이원유(李源裕)와 함께

 대구에서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다.
1927년에는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이밖에도 1929년 광주학생운동, 1930년 대구 격문사건(檄文事件) 등에 연루되어 모두 17차에 걸쳐서

 옥고를 치렀다.
중국을 자주 내왕하면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3년 가을 잠시 서울에 왔을 때 일본 관헌에게 붙잡혀, 

베이징으로 송치되어 1944년 1월 베이징 감옥에서 작고하였다.
문단 활동은 조선일보사 대구지사에 근무하면서 1930년 1월 3일자 『조선일보』에 시작품 「말」과 『별건곤(別乾坤)』에 평문 「대구사회단체개관(大邱社會團體槪觀)」 등을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뒤 1935년 『신조선(新朝鮮)』에 「춘수삼제(春愁三題)」·「황혼(黃昏)」 등을 발표하면서 그의 시작 활동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그 뒤 『신조선』·『비판(批判)』·『풍림(風林)』·『조광(朝光)』·『문장(文章)』·『인문평론(人文評論)』·『청색지(靑色紙)』·

『자오선(子午線)』 등에 30여 편의 시와 그밖에 소설·수필·문학평론·일반평문 등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생존시에는 작품집이 발간되지 않았고, 1946년 아우 이원조(李源朝)에 의하여 서울출판사에서 

『육사시집(陸史詩集)』 초판본이 간행되었다.

대표작으로는 「황혼」·「청포도(靑葡萄)」(문장, 1939.8.)·「절정(絶頂)」(문장, 1940.1.)·「광야(曠野)」

(자유신문, 1945.12.17.)·「꽃」(자유신문, 1945.12.17.) 등을 꼽을 수 있다.
그의 시작세계는 크게 「절정」에서 보인 저항적 주제와 「청포도」 등에 나타난 실향 의식(失鄕意識)과 비애, 

그리고 「광야」나 「꽃」에서 보인 초인 의지(超人意志)와 조국 광복에 대한 염원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의 생애는 부단한 옥고와 빈궁으로 엮어진 행정(行程)으로, 오직 조국의 독립과 광복만을 염원하고

 지절(志節)로써 일관된 구국투쟁은 민족사에 큰 공적으로 남을 것이다.
“한발 재겨디딜 곳조차” 없는 “내 골ㅅ방”과 같은 육사의 의식 공간은 항시 쫓기고 있는 불안한 마음의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빼앗긴 조국에 대한 망국민의 비애와 조국광복에 대한 염원을 

그의 시에 새겨놓은 것이다.
1968년 시비가 안동에 건립되었다. 유저로 『육사시집』 외에, 유고(遺稿) 재첨가본 『광야』(1971), 그의

 시와 산문을 총정리한 『광야(曠野)에서 부르리라』(1981)·『이육사전집』(1986) 등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이육사 문학관을 나와 잠시 민들레가 많은 지역이 있다기 들려본다

여기는 아직 벚꽃이 만개하고 민들래도 많이 보이는데 도구가 마땅찮아 캐는 것은 포기를한다

줌인해본 청량산 구름다리도 선명하게 보인다

퇴계오솔길 생태탐방로 안내도

이길로 가면 농암 종택이 나온다는데 서울사람이 땅을사 집을 짓고

자기 땅이라고 길을 막아 들어갈 수 없어 멀리 돌아서 가야된다고 한다

저쪽 건너편에 청량산이 보인다

고산정 가는 강넘어 바위절벽

산괴불주머니

강가에서 바라본 고산정과 학소대 

고산정과 농암정 앞에 흐르는 낙동강

고산정에서 바라본 바위암벽

성성재 금난수가 세운 정자, 고산정
고산정은 정유재란시 안동 수성장으로 활약하여 좌승지에 증직된 바 있는 성성재 금난수

(惺惺齋 琴蘭秀 1530∼1599)선생의 정자이다.

선생의 행상(行狀)에 따르면 선생이 35세되던 1564년(명종 19)에 당시 선성현(宣城縣)의 명승지일

(名勝之一)이었던 가송협(佳松峽)에 짓고 일동정사(日東精舍)라 부르며 늘 경전을 가까이 한 채

유유자적하였다 한다. 안동팔경의 하나인 가송협의 단애(斷崖)아래에 자리잡고 있다.주위에는

외병산(外屛山)과 내병산이 병풍처럼 둘러 있고, 낙동강의 상류인 가송협의 건너에는 송림과 함께

독산이 솟아 있어 절경을 이루고 있다. 건립당시 사정과 주위의 절경에 대해서는「일동록(日洞錄)」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여기에 따르면 창건 당시부터 예안지방의 대표적인 절경으로 알려져 그의 스승인 퇴계(退溪)선생도 누차

문인들과 함께 와서 영시유상(詠詩遊賞)하였다 한다. '고산제영'(孤山題詠)에는 퇴계문도를 비롯하여

재경관인(在京官人)들까지 찾아 차운(次韻)한 시(詩)가 수백 수에 달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팔작기와집인데 3m가량의 축대를 쌓아 대지를 조성한 후, 얕은 기단위에 자연석

덤벙주초를 놓고 기둥을세웠다.

모두 원주를 사용하였는데 주두상부에는 보아지를 끼웠으나 외부에는 초각을 하지 않고 내부에만 초각을

하였다. 5량가인데 종량 위에는 키 큰 동자주를 세워 여기에 소로를 끼워 장혀와 창방을 받게 하였으며,

좌측 마루상부에는 우물반자를 설치하였고 귀에는 선자연을 걸었다.

어간의 우물마루를 중심으로 좌, 우에 온돌방을 꾸몄는데 좌측방은 통간으로 하였으나 좌측방은 뒤쪽의

1간만을 온돌방으로 꾸며 결국 마루는 ㄱ자형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전면과 양측면에는 계자난간을

둘렀는데 정자로의 출입은 난간의 양측 끝에서만 하게 하였다. 주위의 빼어난 경관과 잘 어울리게 조성한

조선시대 정자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고 건물도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매화 말발돌이

장미목 > 범의귀과 > 말발도리속

​매화말발도리는 4월에 서울 주변 산 바위지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하얀 꽃을 피우는데 샛노란 꽃밥을 달고 있고 마치 팔 벌린 사람 모양을 하고 있는 수술대가

특히 눈에 띈다. 5개의 수술은 키가 크고 5개는 작다. 빈도리(일본말발도리), 바위말발도리도

수술대 모양이 팔벌린 사람 모양을 하고 있다.

꽃 안쪽 수술과 암술 아래쪽에는 샛노란 반지모양의 꿀샘이 있고 여기서 많은 꿀이 나온다.

다른 종류의 말발도리와는 다르게 2년된 가지의 잎 겨드랑이에서 1~2개의 꽃이 핀다.

가지와 잎 앞뒷면, 꽃받침에는 3~4개로 갈라진 별모양의 털이 많다

성성재 금난수 선생에 대하여 
금난수는 35세인 1564년(명종 19)에 이미 안동 예안면(禮安面) 부포리에 있는 현재의 성성재 종택

(경북문화재자료 264) 아래쪽에 성재(惺齋)라는 정자를 짓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고산정은 그 후에 지은 정자로서, 주변 경관이 뛰어나 이황을 비롯한 선비들의 내왕이 잦았던 곳이다.

정자 앞으로 강물이 시원하게 흐르고 맞은편 산기슭에는 물맛 좋은 옹달샘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예전에는 이곳에 학이 많이 서식했다고 하나 지금은 없다. 정자 왼쪽에 조선총독부에서

세운 조학번식지(鳥鶴蕃殖地)라는 천연기념물 비가 서 있다.

색깔도 고운 개복숭아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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