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와룡면 오천리에 위치한 군자마을의 오천유적지는조선 초기부터 광산김씨(光山金氏) 예안파(禮安波)가
약 20대에 걸쳐 600여년동안 세거해온 마을로 세칭 오천 군자리라 부르는 유적지다.
이 마을 광산김씨 입향조(入鄕祖)는 농수(聾叟) 김효로(金孝盧)이며 그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던곳으로, 1974년
안동댐 건설로 수몰지역이 되자 수몰지역내 건물들을 집단이건하여 원형 그대로 보존한 "오천유적지"이다.
이 중 탁청정은 국가민속문화재 제226호, 후조당(後彫堂)은 제227호로 지정되어있다.
특히 1541년(중종 36) 김수(金綬)가 지은 탁청정의 현판은 명필 한석봉의 글씨이다.(4/10)
계암정
계암(溪巖) 김 령(金 玲)이 세운 계암정(溪巖亭) 정면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자준(子峻), 호는 계암(溪巖)이다. 예안 출신으로김효로(金孝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유(金綏)이고, 아버지는 현감 김부륜(金富倫)이며,어머니는 평산 신씨로 부호군(副護軍)
신수민(申壽民)의 딸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7세의 나이로 유성룡(柳成龍)의 막하로 자진 종군했으며, 당시 명나라의
총병사 오유충(吳維忠)과 유격장 노득공(盧得功) 두 사람으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았을 정도로
학식이 숙성하였다.
그 뒤 1612년(광해군 4)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승문원에 등용된 뒤 여러 벼슬을 거쳐 주서에
이르렀으나,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치를 비관해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하였다.
양정당(둘째아들)
탁청정 김 유(金 綏)의 차남(次男)이고 예산김씨 예안파의 입향조인 농수(聾叟) 김효로(金孝虜)의 손자(孫子)이다.
자(字)는 가행(可行), 호(號)는 양정당(養正堂). 김 유의 차자(次子)이다.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가행(可行), 호는 양정당(養正堂).아버지는 생원 김유(金綏),어머니는 순천김씨(順天金氏)로
김수홍(金粹洪)의 딸이다.형은 산남(山南) 김부인(金富仁)이고, 동생은 설월당(雪月堂) 김부륜(金富倫)이다.
김부신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1558년(명종13)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관리사무소이며 접견실과 민박으로 사용되는 듯
아호고려 민박주택 같다
지애정은 지금 차집으로 운영중
일비문
지애정(芝厓亭)은 조선 후기 학자 이재 김협(1728~1801)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전각이다
본관은 순천(順天)이고 자는 길보(吉甫), 호는 충효당(忠孝堂)이다.
감찰(監察) 김자원(金自願)의 아들이며 류성룡(柳成龍)의 문인(門人)이다.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의관이다.
임진란 때 무기를 연구하여 불화살을 개발하였고,
의술에도 뛰어나 왕의 시의를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체부(體府)에 발탁되어 병기(兵器)를 연구하여
화전(火箭)을 개발하였다. 의학에도 뛰어나 선조의 시의(侍醫)를 지냈으며,
만년에는 혜민서주부(惠民署主簿)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탁청정 옆 4각연못 벚꽃이 만개를 했다
탁청정
이 정자는 탁청정(濯淸亭) 김 유(金 綏, 1491~1555) 종택에 부속된 정자로서
조선 중종 36년(1541)에 건립되었는데, 영남지방의 개인 정각으로서는 그 구도가
가장 웅장하고 우아하다는 평을 받고 있으며, 국가민속문화재 제226호이다.
탁청정이라는 현판은 석봉 한호(한석봉)의 필적이며 대청마루에는
농암, 퇴계, 금계, 청풍자 선생 등 당대 명현들의 시판이 걸려 있다.
탁청정 현판은 당대의 명필 한석봉이 썼다.
탁창정은 광산김씨 예안파의 입향조인 농수 김효로 金孝虜의 차남(次男)이다.
본관은 광산. 자는 유지(綏之), 호는 탁청정(濯淸亭).
아버지는 광산김씨 예안 입향조인 농수(聾叟) 김효로(金孝虜, 1454~1534)이다.
부인은 순천김씨(順天金氏)로 김수홍(金粹洪)의 딸이다.아들로 오천칠군자(烏川七君子)로 불리는
김부인(金富仁, 1512~1584), 김부신(金富信, 1523~1566), 김부륜(金富倫, 1531~1598)을 두었다.
탁청정(濯淸亭) 김 유(金 綏)는 일찍이 종고모부인 김만균(金萬鈞)에게양육되는 과정에서 청렴하면서도
강직한 인품을 형성하였다.이 때문에 김유는 거지와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성의를 다해 대했지만
옳지 못한 사람을 보면 고개를 숙이고 말을 하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올곧았다.
1525년(중종 20)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성품이 호방하고 의협심이 강해 무예에 흥미를 보여
무과에까지 응시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하였다.
1525년(중종 20)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더 이상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주로 안동군 예안면 오천동에
거주하며 집안을 돌보았다.
이후 과거를 포기하고 집 근처에 탁청정을 짓고예안 고을을 지나는 나그네를 정중하게 대접하였다고 한다.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를 기쁘게 해 드리는 일에도 정성을 다하였다.
긴병꽃풀
애기똥풀
읍청정
읍청정(挹淸亭)은 후조당 김부필의 아우인 김부의(金富儀, 1525~1582)가 지은 건물이다.
운암 김 연(金 緣)의 차남(次男)이며광산김씨 예안파의 입향조인 농수(聾叟) 김효로(金孝虜)의 손자(孫子)이며
후조당 김부필의 동생이다. 자(字)는 신중(愼仲), 호(號)는 읍청정(揖淸亭 ). 김연의 차자(次子)이다.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신중(愼仲) 호는 읍청정(挹淸亭).아버지는 대사헌 김연(金緣),어머니는 창녕조씨
(昌寧曺氏)로 조치당(曺致唐)의 딸이다.형이 김부필(金富弼)이다.
어려서부터 시서를 배웠으며일찍 퇴계 선생의 문에서 경학과 도학을 닦아동문인 학봉 김성일이 '제일류'로
인정할 만큼 훌륭한 인품을 이루었다.
안동부 풍산현 양곡에 장토를 공의 몫으로 분재하여거기에서 따로 살라고 분부했으나 형의 곁을 떠나기가
차마 아쉬워종택 바로 옆에 집을 짓고 학문을 강구하고 의리를 논하였다.
산남정.김부인
탁청정 김 유 金 綏의 장남(長男)이고예산김씨 예안파의 입향조인 농수(聾叟) 김효로(金孝虜)의 손자(孫子)이다.
조선중기의 무신(武臣), 학자(學者) 자(字) 백영(伯榮) 호(號)는 산남(山南)김 유의 장자(長子). 농암(聾巖) 이현보
(李賢輔)의 사위이다.
퇴계의 문인으로 일찍부터 문명(文名)이 있어1537년(중종 32) 진사시(進士試),1540년 생원시(生員試)에 연이어
합격(合格)하고1549년(명종 4)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권지훈련(權知訓練) 봉사(奉事)에 취임하였다.
선전관(宣傳官)으로 있을 때 빈강청(賓講廳)에서『춘추좌전(春秋左傳)』을 막힘없이 통해(通解)하여 그의 문명이
더욱 드러났으며,창성부사로 있을 때 병마절도사 김수문(金秀文)과 함께서해평(西海坪) 정벌에 공을 세웠다.
특천으로 선전관(宣傳官)을 역임하고 1554년 밀명을 받고북방의 오랑케를 섬멸하였다.
그 후 강릉판관(江陵判官) 낙안군수(洛安郡守)를 거쳐호조정랑(戶曹正郞) 창성부사(昌城府使) 해주판관(海州判官)
이조정랑(吏曹正郞) 경상좌도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제주목사(濟州牧使) 영해도호부사(寧海都護府使)를
역임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나 경학(經學)에 힘쓰면서 장구(章句)의 분석적 해석보다근본원리를 자유롭게 종합적으로 통찰함을
학문연구의 토대로 삼았으며,「자경편(自警編)」을 저술하여 실천을 위주로 하였다.
공(公)은 무관(武官)이면서 언제나 학문에 뜻을 굽히지 않고퇴계 문하에서 경학을 연구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하고
지략이 뛰어났다.
장판각
읍청정(挹淸亭) 김부의 金富儀 의 작품과 저술:문집인 『읍청정유고(挹淸亭遺稿)』가
오천세고(烏川世稿) 안에 포함되어 전한다.
『오천세고』는
김부의 집안의 문집으로아버지 김연(金緣)의 『운암일고(雲巖逸稿),형 김부필(金富弼)의
『후조당선생문집(後彫堂先生文集)』,김부의(金富儀)의 『읍청정유고』,아들 김해(金垓)의
『근시재선생문집(近始齋先生文集),김해의 장자 김광계(金光繼)의 『매원유고(梅園遺稿),
김광계의 손자 김순의(金純義)의 『과헌일고(果軒逸稿)』로 구성되어 있다.김태경님글에서
정향나무(산라일락)
후조당.김부필
운암 김 연(金 緣)의 장남(長男)이며,광산김씨 예안파의 입향조인 농수(聾叟) 김효로(金孝虜)의 장손(長孫)이다.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자는 언우(彦遇), 호는 후조당(後彫堂)이다.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신중(愼仲), 호는 후조당(後彫堂)이다.아버지는 대사헌 김연(金緣)이며
어머니는 창녕조씨(昌寧曺氏)로 조치당(曺致唐)의 딸이다.동생이 김부의(金富儀)이다.
약관에 이미 사마시에 합격하고 태학에 있으면서동료들 사이에 두터운 신뢰와 존경을 받았다.
1537년(중종 32)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유학하면서김인후(金麟厚)와 교유하였다.
1556년(명종 11) 41세의 나이로 이황의 문하에 나아가 제자로서의예를 올렸으며,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지만
사양하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이에 이황이 “후조주인(後彫主人)은 깨끗한 절개를 굳게 지켜,임명장이 문전에 이르러도 기뻐하지 않는구나...
"라는 시를 지어 그의 지조와 절개를 높이 평가하였다.
평소 효제를 학문의 근본으로 삼았으며,일생 ≪심경 心經≫을 애독하였다고 한다.
1571년(선조 4) 36세에 처음 퇴계 선생의 문에 이르러퇴계와의 각별한 사제관계를 유지하였으며,
퇴계 이황이 사망하자 소의(素衣)·소대(素帶)·소식(素食)하며심상(心喪) 1년을 행하였다.
아우 김부의(金富儀), 4촌형 김부인(金富仁), 4촌아우 김부신(金富信)·김부륜(金富倫),
고종 금응훈(琴應壎)·금읍협(琴應夾)과 한 동네에 살면서학문을 토론하고 덕업을 권장하여
향리에서는 ‘오천7군자(烏川七君子)’라 칭송되었다.1570년 이황이 역동서원(易東書院)을 건립할 때
적극적으로 협조하였으며,1574년에는 조목(趙穆)과 함께 도산서원 건립을 주도하였다.
후조당 사랑채
설월당
탁청정 김 유 金 綏의 삼남(三男)이고예산김씨 예안파의 입향조인 농수(聾叟) 김효로(金孝虜)의 손자(孫子)이다.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돈서(惇敍). 호는 설월당(雪月堂).아버지는 생원 김유(金綏)이며,어머니는
순천김씨(順天金氏)로 김수홍(金粹洪)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1555년(명종 10) 사마시에 합격,1572년(선조 5) 유일(遺逸: 학식과 인품을 갖추었으나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인재를 천거하는 등용책)로 천거되어집경전참봉(集慶殿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85년에 전라도 동복현감(同福縣監)으로 부임하여 향교를 중수하고봉급을 털어 서적 8백여 책을 구입하는 등
지방교육 진흥에 많은 공헌을 하였고,또 학령(學令) 수십조를 만들어 학생들의 교육에도 힘썼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산을 털어 향병(鄕兵)을 도왔고,봉화현감이 도망가자 가현감(假縣監)이 되어
선무에 힘썼다.그리고 관찰사 김수(金晬)에게 적을 막는 3책(三策)을 올렸는데, 충심이 지극한 내용이었다.
김성일(金誠一)·이발(李潑)과 도의를 강마하였으며,만년에 관직에서 물러난 뒤 향리에 설월당이라는 정자를 짓고
후진을 양성하는데 전념하였다.
설월당
후조당 별당
후조당은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에 있다. 광산김씨 예안파 종택에 딸린 별청 건물로 중요민속자료
제227호로 지정돼 있다. 후조당은 조선 선조 때 김부필(1516∼1577) 선생이 창건하였다고 하는데 별당, 정침,
사당, 재사, 창고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 정침에 부속된 건물이며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앞면 4칸, 옆면 2칸의 일자형에 오른쪽으로 2칸 마루와 방을 달아 기억자형을 이룬
큰 규모의 별당이다. 정침 왼쪽 담장 안에 있으며 정침으로 통하는 협문과 정문을 갖추었고 왼쪽에는
사당으로 통하는 산문이 있다. 후조당이라는 현판은 스승인 퇴계 이황의 글씨이다.
또 이곳은 막돌을 사각의 모양으로 잘 다듬어 바닥을 잘 다진 후 그 위에 건물을 지어 안정감을 주고
있으며 튓마루의 난간은 아름다운 곡선이 살아있는 예술작품처럼 만들어 고택의 운치를 더해 주고 있다
정원에는 회양목을 일자형태로 심어 놓아 정겨우며 방문을 열면 옛모습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고택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또 방에는 냉장고와 텔레비젼이 설치되어있고 벽면 가득 액자가
걸려있어 기품이 넘쳐 보인다. 툇마루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 보면 오천리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 보여
전망 또한 훌륭하다. 후조당 뒤편으로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자리잡고 있어 사시사철 은은하게 불어오는
솔향기에 머리 속은 맑아지고 정갈해 진다. 아름다운 기와지붕으로 곡선과 주변의 산세가 조화롭게
어울려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건물이다
후조당(後彫堂) 김부필(金富弼,1516~1577)의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언우(彦遇). 호는 후조당(後彫堂).
안동 예안 출신으로 아버지는 대사헌 김연(金緣)이며, 어머니는 창녕조씨(昌寧曺氏)로 조치당(曺致唐)의 딸이다.
1537년(중종 32)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유학하면서 김인후(金麟厚)와 교유하였다.
1556년(명종 11) 41세의 나이로 이황의 문하에 나아가 제자로서의 예를 올렸으며,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지만
사양하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아우 김부의(金富儀), 4촌형 김부인(金富仁), 4촌아우 김부신(金富信)· 김부륜(金富倫),고종 금응훈(琴應壎)·
금읍협(琴應夾)과 한 동네에 살면서 학문을 토론하고 덕업을 권장하여 향리에서는 ‘오천칠군자(烏川七君子)’라
칭송되었다.
1574년에는 조목(趙穆)과 함께 도산서원 건립을 주도하였다.1822년(순조 22)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광산 김씨 재사 및 사당(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7호)
재사는 사당에 모신 조상을 위한 제사를 모실 때 여러 가지 일들을 준비하는 곳이다.
정면 4칸, 측면 1칸의 'ㅡ'자형 건물로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앞뒤로 구성돼 있다. 동쪽으로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창고가 있어서 전체적으로는 'ㄷ'자형의 모습을 하고 있다.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광산 김씨 중 오천리에 가장 처음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은 김효로(1445∼1534)와 증손자 김해(1555∼ 1592)를
모시고 있는 사당과 후조당에 부속된 재사(제사지내는 집)이다. 안동댐 건설로 인하여 1975년 오천리
낙동강변에 있었던 것을 현 위치로 옮겼다. 김효로가 죽은 지 2년 뒤인 조선 중종 31년(1536)에 후손들이
뜻을 모아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오다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영남의병대장으로 활약하다
순절한 김해를 같이 모시고 있다.
군자마을
예안에 정착한 김효로(金孝盧)는 그 후 가세가 융성하여 아들 운암 김연(金緣, 1487~1544)은 1519년 문과에
급제하여 강원도관찰사에 오르고,둘째 아들 탁청정(濯淸亭) 김유(金綏, 1481~1552)는 생원시에 올랐다.
김연의 아들 후조당(後彫堂) 김부필(金富弼, 1516~1577)은학행이 높아 뒤에 문순(文純)을 시호로 받았으며
김부필의 동생 읍청정(揖淸亭) 김부의(金富儀, 1525~1582)는 진사로 성리학에 밝았고,김유의 아들 김부인
(金富仁, 1512~1584), 김부신(金富信), 김부륜(金富倫, 1531~1598)삼형제가 모두 문명과 덕망을 떨쳐
오천리의 군자로 일컬어졌다.
김부의의 아들 근시재(近始齋) 김해(金垓, 1555~1641)는 예문관검열을 지냈으며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용궁, 밀양, 경주 등지에서 활동하다 진중에서 죽었다.
김부륜의 아들 계암(溪巖) 김령(金坽, 1579~1641)은 1612년 문과에 올라 사간원사간을 지냈다.
그래서 세간에서는 오천세거지를 군자가 많은 마을이라 하여 "군자리"라 불렀다.
의병대장 근시재 선생 순국기념비
이삿짐 갈피에 담겨와 여기에 식수했는데 이렇게 자랐다고 한다
이 자리에 선 사람들아 고개를 들자 그리고 바라보라, 이 나무는 나무이면서 역사이며 정신이다.
그 아기 무렵에 이 나무는 광김 반 천년 세거의 땅인 외내에서 태어나 우리 고장에 창상(滄桑)의
변이 있자 창황한 이삿짐 갈피에 담겨 여기에 식수 되었다. 본래 이 나무의 족속인 느티나무는
우리 조상들이 경천숭조의 상징으로 삼아 오신 것. 오랜 세월 우리 할아버님과 할머님들은
이 나무와 더불어 조상을 받들고 아들딸 기르며 산천초목 천지 만물을 가꾸고 섬기는 나날을
살아오셨다.
우리는 그런 옛 분들의 핏줄이며 줄기요, 가지이며 잎새일 따름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새삼
이 나무 앞에서 옛일을 되새기며 새날을 열려는 뜻을 세워야 한다. 여기 선 이 느티나무처럼
든든하게 뿌리를 대지에 뻗고 끊임없이 하늘을 우러러 해와 달 별자리를 겨냥하는
기상과 슬기를 익히고 다져나가자,”
안동루
안동루에서 바라본 월영교 부근 풍경
안동호
월영교 분수
드라마 해상 촬영소
월영교 분수
월영교 부근에는 벚꽃 구경이 한창이다(4/10)
해는 서산으로 분수대도 멈추고 야경 조명이 멋진 모습을 봐야 하는데 주차할 곳이 없다
여기저기 벚꽃이 만개를 했는데 부산보다7~9일 정도 늦게 피는 것 같다
오늘까지 월영교를 4번째 오지만 야경을 한번도 보지를 못했다
다음에는 부근에 숙소를 정하고 이런 야경을 한번 봐야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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