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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구

안동 농암종택

이육사 문학관과 고산정을 둘러보고 여기 농암종택으로 왔다

오면서 굽이굽이 돌아 흐르는 물줄기 낙동강 깍아지른 절벽과 강이 어우러진

풍경이 그림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농암 이현보 선생의 종택, 농암종택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에 있는 농암 이현보의 종택이다. 이현보는 1504년(연산군 10년)에 사간원정언으로

있다가 임금의 노여움을 사 안동으로 유배된 인물이다.

농암종택이 있던 곳은 분천마을, 하지만 1976년 안동댐 건설로 분천마을이 수몰되었다.

이후 안동의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이전되어 있던 종택과 사당, 긍구당(肯構堂)을 영천이씨 문중의

종손 이성원 씨가 한곳으로 옮겨 놓았다. 2007년에 분강서원(汾江書院)이 재이건되었으며,

지금은 분강촌(汾江村)이라고도 불리며, 일반인들에게 개방된다.

농암선생 고택이라는 현판이 보이고

농암의 초상화. 경상도 관찰사 재직 시절 동화사 스님 옥준상인이 그렸다. 안동시청 제공

농암종택은 낙동강 상류 청량산 자락,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에 자리하고 있다. '가송리'는 그 이름처럼

‘佳松-아름다운 소나무가 있는 마을’로 산촌과 강촌의 전경을 한꺼번에 만끽할 수 있는 서정적이고 목가적인

마을이다. 이웃에 도산서원, 국학진흥원, 오천유적지, 퇴계종택, 도산온천, 이육사생가 등의 유적이 있다.

신비의 명산 청량산과 더불어 가송리의 협곡을 끼고 흐르는 낙동강은 낙동강 700리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마을 앞에는 강과 단애, 그리고 은빛 모래사장의 강변이 매우 조화롭게 어울려 있어,

이른바 '도산9곡'의 비경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다. 이런 연유가 아니더라도 가송리는 '공민왕유적',

'고산정', '월명담', '벽력암', '학소대' 등의 명소를 감싸안고 있어 그 자체의 아름다움만으로 찾는 사람의

감탄을 자아내고 있다.

사랑채

농암은 경상도 관찰사와 안동 영주 등 8개 고을의 수령으로 일하는 동안 청백리로 명성을 얻었다.

아는 사람이 많은 경상도 관찰사로 봉직할 때는 친·인척과 지인들이 공관에 출입하는 것을 엄격히

차단하는가 하면, 영천(현 영주)군수로 재직 시에는 쓸데없는 지출을 줄이는 방법으로 거두지 못한

세금을 충당하면서 납세자가 사정이 어려워 연체한 세금 문서를 모두 불태워 가난한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줬다. 한 충주 백성은 농암이 안동부사로 전근 가자 "(충주) 백성들이 기운을 차릴 때까지

(농암을 충주에) 그대로 머물러 있게 해달라"고 조정에 상소하기도 했다.

으뜸은 농암이 목민관으로 일할 때의 치적이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신분을 가리지 않은 경로였다.

농암은 안동부사로 재직하던 1519년(중종 14년), 관내 80세 이상 노인 수백 명을 초청해 성대한 경로잔치를

열었다. 양반은 물론 서민과 천민까지 망라한 잔치였다.

'풍년 들고 계절도 청명한 구월에/관청에서 노인들 모아 잔치를 열었네/허연 수염을 지닌 이들 부축하는 곳

/주변에 붉은 잎과 노란 꽃이 현란하여라/지위에 따라 자리가 정해지고 두루 술을 권하니/청사 안팎에서

악기 소리 그치지 않는구나/술동이 앞에서 때때옷 입은 일 이상하게 여기지 말게나/내 부모님도 이 자리에

계신다네'. 농암은 그 자리에서 자신의 부모에게 하듯 때때옷을 입고 재롱을 부리며 노인들을 위로했다고함

분강서원

경서재(서재)

극복재(동재)

사당

선조가 칭송한 농암의 그다음 적선은 효도였다. 농암은 46세 되던 1512년, 도산서원에서 1㎞가량 아래에 위치한

고향집 근처 영지산 기슭의 귀먹바위(농암) 위에 애일당(愛日堂)을 지어 부모님을 모셨다.

'애일'은 '얼마 남지 않은 날을 아껴 어버이께 효도하겠다'는 뜻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인

애일당은 1975년 안동댐 건설 때문에 도산면 분천리로 옮겨졌다가 2005년 다시 도산서원 위쪽인 도산면

가송리의 현재 장소에 농암종택과 함께 나란히 이건됐다.정인식님 글에서

67세이던 1533년,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된 농암은 휴가를 얻어 아버지와 숙부, 외숙 외 고을 노인 6명을 초청해

애일당에서 또 경로잔치를 열었다. 이른바 '애일당구로회'다. 이를 계기로 1547년 농암이 참여한 '속구로회'가

이어졌고, 20세기 초까지 참석자 수를 9명으로 제한하지 않은 채 '기로회' '백발회' 등 다양한 이름으로

경로잔치가 계속됐다. 1602년에 열린 경로잔치의 기록에는 '오천에서 한 평민이 왔는데 나이가 101세라

한다'는 글귀도 있다. 농암이 뿌린 효의 씨앗이 수백 년을 내려오면서 지역사회의 경로문화로 정착된 셈이다.

농암은 또 진퇴가 분명한 사람이었다. 벼슬에 나아가서는 목숨을 걸고 임금에게 직언했고, 물러날 때는

미련없이 관복을 벗고 표표히 떠난 진정한 선비였다. 벼슬살이 초기 그의 별명은 '소주도병(燒酒陶甁)'이었다.

'겉모습은 검고 투박하지만 속은 소주처럼 맑고 곧다'는 뜻인데, 이 별명은 사관 시절 그가 연산군에게 했던

직언에서 유래했다. 농암은 대간(臺諫:대관과 간관)들보다 임금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말을 듣고 기록할 수 있게

하고, 이조와 병조의 인사 담당 관리들이 직무를 보는 정청(政廳)에 사관도 참여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진언했다.

사관의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려는 취지였다.

하지만 연산군은 "신진관료가 주제넘은 건의를 한다"며 농암을 장형에 처했다.

농암은 76세 때 벼슬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43세 되던 해 지은 명농당 벽에 귀거래도를 그려 붙여놓고 귀거래를

꿈꿔왔으나, 임금의 은퇴 불허로 속앓이를 하다가 33년만에 꿈을 이룬 것이다. 농암이 한양을 떠나던 날 많은

조정 신료가 한강에 나와 그를 배웅했다.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자 사람들이 다투어 말렸으나 소매를 뿌리치고

하직하고는 배를 타고 자유로이 떠났다. 배 안에는 오직 화분 몇 개와 바둑판 하나뿐이었다."

중종실록 37년(1542년) 7월 3일의 기사에 적힌 그날의 모습이다. 선비들은 그런 그를 두고 "만족할 줄 아는

뜻이 있다"고 평했다. 농암의 귀거래 의지는 현재 애일당 앞에 세워져 있는 '농암 각자(刻字)'에서 잘 드러난다.

세상일에 귀를 닫고 오로지 자연과 더불어 살겠다는 뜻이 담긴 이 각자 역시 수백 년 세월의 때가 묻어 자연의

한 물상으로 변해 있었다

농암은 88세 되던 해 "장례는 기한을 넘기지 말고 상사는 간략하고 검소하게 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편히

눈을 감는다. 실록은 이를 이렇게 기록했다. "지중추부사 이현보가 졸하였다.

이현보는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으며 담박하고 욕심이 없어 시골에 있을 때는 일찍이 사사로운

일로 관에 청탁하는 일이 없었으며 오직 유유자적하며 살았다. 근래에 지조가 완전하였던 사람으로

이현보를 으뜸으로 친다." 치우침 없는 객관적인 비평을 최고 가치로 삼는 사관이 한 인간의 삶을 정리하면서

이처럼 허물을 지적하지 않은 것은 드물다.

농암선생정대구장(聾巖先生亭臺舊庄)

학소대

농암종택에서 나오며 바라본 강가의 기암절벽

여기는 청량산 쪽 학소대다

곳곳이 다 비경이다

청량사 입구의 폭포 인공폭포는 아니고 저 위에서 계곡의 흐르는 물길을 돌려놨다고 한다

예전에 청량산 다닐 때 못보던 폭포다

 4월10일 안동에는 지금도 벚꽃이 반은 남아 있다 

도선장

월천조목(1524~1606, 본관 횡성)

 참판대춘 아버지와 안동권씨 어머니 사이에서  월천리에서 출생.

일찍이 학문에 능 하여 생원시(명종)에 합격 성균관에서 공부 하였으나 대과를 포기.

고향으로 돌아 와 1539년  월천서당을 건립(중종34)하여 후진양성에 힘 씀.

 45차례의 벼슬을 뿌리 치며 40년동안 벼슬길은 고작  4년으로   퇴계스승과

 도산서당을 출입하며  편지를 주고 받으며   경전연구와 수양에 매진.

역동서원 건립과 상덕사건립에 주도적으로 힘 썼으며 1592년 임진왜란시

두 아들과 함께 곽재우 장군을 도와 국란극복에 앞장 선 "처사선비"다.

스승 퇴계선생이 가장 아끼던 제자로 월천서당" 현판을 직접 써 주었으며

퇴계선생이  돌아가자 문집 등 극진히 모셔들어 현재 도산서원 상덕사에

308명(도산제현급문록)의 제자 중 유일하게 퇴계선생님  좌측에 위패가 배향되었다

구전에 의하면

한 번은  퇴계선생이 제자 월천댁을 방문해 보니 땟거리가 없음을 알고

인편으로 쌀 서 되를 보내 주었다고도 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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