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암(修道庵)
수도암은 김천시 증산면 수도리 513에 위치하며 859년(신라 헌안왕 3년) 도선국사가 창건했다.
수도암은 쌍계사의 산내암자로서 청암사와 함께 창건되었다. 1951년 쌍계사가 소실되면서 백련암과
함께 청암사의 산내암자로 소속되었다. 김천지역에서 가장 고지대인 수도산 1080m에 자리잡고 있으며,
가야산 정상이 연꽃위에서 합장한 부처님의 손처럼 보인다하여 유명해진 사찰이다.
수도암의 원래 지명은 보광사(普光寺)로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은 해인사와 함께 보광사를 화엄종
10대사찰로 꼽을 정도로 화음사찰로서의 명성을 얻기도 했다고 한다.
창건주인 도선국사는 전국을 답사하면서 신라의 국운을 융성하게 할 명당을 찾을 때 이곳에 절터를
잡고 너무 좋아했으며, 절을 다 지은 후에 “앞으로 이곳에서 무수한 인물이 배출될 것이다”라고
예언했는데 예언이 적중했음인지 수도암에서 많은 불교지도자와 정관계인사들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겨울이라고는 하지만 가는 곳마다 너무 조용해 오히려 어리둥절 하다
수도암은 잘 알려진 곳인데 오늘은 신도들의 발걸음도 보이지를 않는다
보물 제307호. 불신 높이 2.51m, 대좌 높이 1.19m, 머리 높이 70cm. 1963년 1월 21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청암사 수도암 대적광전에 본존불로 모셔진 불상으로, 진리의 세계를 두루 통솔한다는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것이다.
민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가 작지만 분명하게 표현되었다. 사각형에 가까운 얼굴은 풍만하며, 가늘게 치켜뜬 긴 눈과 평평한 코, 굳게 다문 작은 입 등에서 근엄한 인상을 풍긴다.
거구이면서도 위축되고 불안정하게 표현된 모습은 시대적 특성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형식적이고 간략하게 표현되었다. 손은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데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대좌는 상·중·하 3부분으로 구성된 8각 연꽃대좌로, 상대에는 반원형에 가까운 앙련(위로 향하고 있는 연꽃잎)이 2줄로 교차되어 있고, 앞면에 3마리의 사자상과 용머리 같은 것이 새겨져 있다.
전체적인 모습이나 세부 표현을 볼 때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작품으로 추정된다. 경상북도 김천시 증산면 수도길 1438번지 청암사에 소장되어 있다.
김천 청암사 수도암 동.서 삼층석탑 : 보물 제297호
소재지 : 경상북도 김천시 증산면 수도길1438
연 대 : 통일신라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하여 동·서쪽에 서 있는 쌍탑으로, 신라 헌안왕 3년(859)에 도선국사가 세웠다는
설이 전해온다. 앞 뜰이 좁아서 탑과 법당과의 거리가 가깝다.
동탑은 단층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기둥을 얕게 새겼다.
탑신부에서는 1층 몸돌이 위가 좁고 밑이 넓은 독특한 형태를 보이고 있는데, 각 면에는 4각형의
감실(龕室:불상을 모시는 방)을 두고 그 안에 여래좌상을 도드라지게 새겼다. 2·3층의 몸돌에는 각 모서리
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얇고 넓으며, 받침은 4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탑은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렸다. 1층 몸돌에 비해 2층 몸돌이 크게 줄었으나 3층 몸돌은
2층과 비슷하다. 1층 몸돌의 각 모서리에는 기둥만 새겨져 있고, 그 사이에 여래좌상이 조각되어 있다.
지붕돌은 동탑보다 얇고 넓으며 밑받침은 5단이다.
두 탑은 통일신라 중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되며, 곳곳에서 특이한 수법을 보여주고 있는데,
동탑은 1층 몸돌의 위가 좁고 감실을 두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고 서탑은 지붕돌 밑의 간격과 지붕돌이
넓다는 것이 특징이다.
두 탑 사이에 석등 하나와 자연석에 가까운 돌기둥이 하나 서 있는데
돌기둥에는 창주도선국사(刱主道詵國師)'라는 도선국사 개창비
약광전 앞 3층석탑
저기 보이는 게 가야산 연화봉이다
수도암의 세월의 흔적들
수도암 나한전은 전국의 나한전 중에서도 으뜸 기도도량으로 통한다고 하는데
전해져 내려오는 설화 중 한가지가 수도암 나한전의 신묘함을 더해 준다
먼 옛날 한 노파가 쌀을 지고 수도암을 향하고 있는데 수도암은 깊은 산중에
위치한 터라 오르는 길이 여간 힘든게 아닌데도 한 처사가 노파를 도와
쌀을 턱하니 어깨에 짊어지고 수도암에 올랐다고 한다
법당을 향해 간단하게 합장을 마친 노파가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고
옆을 돌아보자 처사는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노파는 이를 기이하게 여기다가 이윽고 나한전으로 향했는데,
나한전에 앉아있는 열여섯 나한 중 한분이 흐뭇하게 웃고 있는게 아닌가.
그가 바로 쌀을 절까지 옮겨다 준 처사임을 안 노파는 수도암 나한전의
신령스러움을 알게 되고 죽는 날까지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청암사(靑巖寺)
인현왕후가 3년 동안 은거한 청암사는 경상북도 김천시 증산면 평촌리 688에 위치하며 신라 헌안왕
3년(859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
불영산 청암사는 수도산에서 발원하여 심산유곡을 이룬 수도계곡에 인접하여 예부터 경치가
수려하기로 유명하다.
사천왕문으로부터 계곡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가다 보면 계곡 좌우로 푸른 이끼로 뒤덮인 웅장한
바위벽을 볼 수 있다. ‘푸른 이끼가 바위를 덮어 푸른 바위가 되었다’라는 뜻으로 푸를청(靑)에
바위암(巖)자를 써서 청암사라 했다고 한다.
인현왕후는 청암사에 몸을 의탁하고 있을 당시에 지금의 극락전 자리에 축각(祝閣)을 짓고 복위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훗날 복위되어 환궁 후에 “큰 스님 기도의 영험으로 내가 복권되었다”라는 내용의 감사
편지를 보내오고 청암사 주변 불령산을 국가보호림으로 지정함과 동시에 사찰에 전답을 내렸다고 한다.
청암사는 왠지 비밀스러운 느낌으로 그득하다. 일주문을 지나 절집으로 오르는 길부터가 그렇다.
들머리는 작은 폭포가 흘러내리는 협곡이다.
그 옆의 돌계단을 딛고 올라서서 물길을 건너면 절집 마당을 들어서게 된다.
청암사는 기사환국 때 궁궐에서 쫓겨나 서인으로 강등된 인현왕후가 숨어들었던 곳이다.
장희빈의 간계로 궁궐에서 쫓겨났다가 5년 뒤 갑술옥사 때 다시 왕후로 복귀했던 숙종의 계비,
그 인현왕후 말이다. 청암사는 지금도 제법 깊은 산중인데, 인현왕후가 몸을 숨기던 시절이야
오죽했을까. 첩첩산중의 절집에서 폐위돼 비탄에 빠진 왕후의 기도는 얼마나 간절했을까
고봉당 부도와 탑비: 姜고봉당泰秀화상: 고봉태수(高峰泰秀 1901~1967): 1975년 대강백.
탑비 1988무진년立 덕민당(德旻堂) 풍수(豊水) 撰, 황악사문(黃岳沙門) 현산(顯山) 書.
근세 선교를 겸한 강백으로 25세에 백용성스님을 은사로 득도하여 금강산 유점사,마하연 등에서
수행. 해인사, 통도사,은혜사 강사 역임.
대운대사 비; 대운당(大雲堂)병택조사: 고종 9년(1905) 당시 주지. 대운당 탑비의 높이 138cm , 귀부 높이 65cm.
회당 비: 회암정혜(晦庵定慧 1685~1741)조사 회당대사 탑비(晦堂大師 塔碑 전체의 높이는 173cm.
조현명撰, 서명균書 김상복刻.
현존하는 당우로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20호로 지정된 대웅전을 비롯하여 육화료(六和寮)·진영각(眞影閣)·
정법루·중현당·범종각·일주문·사천왕문·비각(碑閣)·객사 등이 있고, 계곡 건너 100m 지점에는 극락전(極樂殿)과
문화재자료 제288호 보광전(普光殿)·요사채 등이 있는 극락암(極樂庵)이 있다.
이중 육화료는 청암사승가대학의 중심 대방채로 이용되고, 극락전 안에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15호
아미타불회도가 있다. 그외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16호 신중도와 진영각에 모셨던 22위의 조사진영은
현재 직지사성보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또 대웅전 앞에 있는 높이 약 6m의 석탑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2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층 석탑에 여래상이 양각되어 있으나 탑신이 4층이어서 균형이 맞지 않는다.
이 절 입구의 부도군에는 벽암대사의 사리탑을 비롯하여 태감(泰鑑)·지성(智性) 등의 공덕비가 있다.
또 일주문 안에는 사적비를 비롯하여 회당비각(晦堂碑閣)과 대운당(大雲堂)의 비각이 있다.
이 절의 부속 암자로는 유명한 수도도량인 수도암(修道庵)과 1905년에 비구니 유안(有安)이 창건한
백련암(白蓮庵)이 있다.
오른쪽 건물 유마정사
오른쪽건물이 중현당(율학 승가 대학원)
진영각
범종각
물고기는 밤낮으로 눈을 감지 않으므로, 수행자로 하여금 자지않고 도를 닦으라는 뜻으로
목어를 만들었으며, 또한 이것을 두드려 수행자의 잠을 쫓고 정신 차리도록 꾸짖는다.
목어는 원래 부엌이나 공양간 등에 걸어 놓고 길게 두 번 두드려 공양하는 시간을, 길게 한 번 두드려 대중들에게
모이는 시간임을 알리는 데 목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목적의 도구가 뒤에 가서는 물속에 사는 모든 중생을
제도하고 해탈시킨다는 의미로 바뀌어 종루, 종각과 같은 건물에 걸리게 된 것이다
종은 삼라만상을, 운판(雲板, 구름무늬를 새긴 금속판)은 날짐승을, 법고(法鼓, 북)는 땅 밑의 중생을,목어는
물속에 있는 모든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친다 사찰에서 사물을 울리는 순서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새벽 예불. 목어 - 법고 - 운판 - 범종
저녁 예불. 법고 - 운판 - 목어 - 범종
육화료(승가대학 요사채인듯)
극락전은 출입제한이다
마치 고궁 같은 느낌이 드는 곳이다
인현왕후와 깊은 연관이 있어 건물도 그렇게 지었나보다
극락전
특이한 건 청암사의 몇몇 법당 건물들이 반가 고택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웅전 양 옆의 진영각과 육화전이 그렇고, 별당 격인 극락전 건물도 그렇다.
그중 눈길을 끄는 곳이 따로 대문을 달고 뚝 떨어져 있는 극락전이다.
여기가 바로 궁궐에서 쫓겨난 인현왕후가 기거했던 곳이다.
사대부 한옥의 양식으로 극락전을 지은 건 왕후를 배려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궁중의 상궁들은 주위의 눈을 피해 폐위당한 인현왕후를 만나러 청암사를 드나들었다고 전한다.
상궁들은 왕후를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왕후를 돕기 위해 청암사에 시주를 바치기도 했다.
극락전 중창과정에서 나온 시주록 명단에 이름을 올린 궁중 상궁만 26명이다.희망찬님 글에서
보광전과 백화당
청암사와 상궁의 인연은 훗날에도 이어진다. 고종의 넷째 아들 영친왕의 생모 엄비의 총애를 받았던
영친왕의 보모상궁이었던 최송설당. 김천 출신인 그는 빈민구제 사업을 벌이기도 했고, 독립자금을
대기도 했던 여걸이었다. 그는 말년에 전 재산을 바쳐 학교를 지었다.
화재로 잿더미가 된 청암사의 중창도 한때 불교에 귀의해 정진했다는 그의 시줏돈이 큰 보탬이 됐단다.
이길로해서 수도암까지 기도명상을 하며 걸었을 것이다
청암사는 인현왕후와 인연이 깊다. 장희빈의 모략으로 폐위되어 3년간 머물렀던 곳이 청암사다.
비구니 스님들의 절, 청암사는 안온한 분위기로 품을 내준다. 인현왕후의 역사 속 삶을 돌아보며
청암사와 주변 숲길을 걷는다. 햇빛을 가리는 울창한 숲길은 소박하면서도 상큼하다.
인현왕후는 숙종의 정비이다. 장옥정은 제20대 임금이 될 경종(왕자 윤)을 낳은 뒤 희빈으로 봉해진다.
투기심이 강한 장씨는 숙종을 쥐락펴락하며 인현왕후를 몰아내기 위해 기를 쓴다.
희빈 장씨를 총애한 숙종은 결국 인현왕후를 폐위한다. 그 당시 집권 세력이었던 서인은 인현왕후
쪽이었고 가문이 몰락하여 궁녀로 입궐하였던 장옥정은 남인 세력이었다.
사사로운 감정이 개입되기도 하였지만 당시 서인과 남인의 대립 구도와 집권세력에 대한 숙종의 염증
때문이기도 하다. 서인의 몰락과 남인의 득세가 시대적 배경으로 깔린다.
인현왕후는 스물세 살인 1689년에 폐위되어 5년 뒤에 복위되었다. 청암사에 머문 기간은 폐위 후
3년 동안이다. 숙종은 쫓아낸 인현왕후를 무척이나 박대했다고 한다. 곤궁하게 사는 인현왕후에게
식량을 내려달라는 상소를 무시하였고 심지어는 상소를 올린 신하를 삭탈관직하기도 하였다.
폐비의 일을 거론하는 자는 중벌로 다스린다고 엄포를 놓았다. 숙종의 눈 밖에 난 인현왕후를 불심으로
보듬었던 곳이 청암사다.
죄 없는 인현왕후를 가엾게 여긴 부처의 뜻이었을까. 인현왕후는 1694년에 복위된다.
청암사는 어렵고 힘든 세월을 극복할 힘을 얻고 복원을 간절히 기도하였던 인현왕후의 애끓는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절이다.